예천⇨영주⇨봉화(봉성면,청량산)⇨안동(농암 이현보 종택)⇨예천 5월8일-1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21.05.14|조회수823 목록 댓글 0

예천⇨영주⇨봉화(청량산.봉성,재산)⇨명호⇨청량산⇨농암 이현보 종택⇨안동 토교리 이퇴계 종택,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육사문학관. ⇨도산서원⇨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괸⇨한국국학진흥원⇨선성현문화단지⇨안동⇨예천

 

 

▲경상북도 봉화군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鳳城面)

●위치: 봉화군 봉성면 옥마로 23(봉성리 317-4)

 

봉성면은 중서남부(中西南部)에 위치하며 동북은 법전, 동남에 명호면, 서남에 상운면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봉화읍과 물야면을 경계하고 있다. 창평, 금봉 저수지가 있어 수원이 풍부하여 논농사가 잘 되고, 과수, 인삼, 대마 재배를 많이 한다.

현재 법정리는 봉성(鳳城), 봉양(鳳陽), 외삼(外三),창평(昌坪), 동양(桐陽), 금봉(金峰), 우곡(愚谷)이다.

 

●연혁

 

고구려 장수왕 고사마현으로 칭함

신라 경덕왕 옥마현으로 개칭

고려 현종 봉성현으로 칭함

고려 공양왕 봉화현으로 칭함

조선 태종 관제 개혁으로 현감을 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북면 서면을 합하여 봉성면으로 개칭

1991년 1월 1일 원둔리를 봉양리로 개칭

 

■봉화정자문화생활관

●위치 : 경북 봉화군 봉성면 부랭이길 88

 

●건립배경

봉화군은 누각과 정자가 약 103동에 이르는 대한민국 누정문화의 보고(寶庫)로 전통 누정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하고자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선조들의 누정문화가 살아 숨 쉬는 이곳에서 자연과 누정의 멋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시설현황

▶규모 : 연면적 237,816㎡

▶주요시설 : 영상실, 1전시실, 2전시실, 3전시실, 솔향촌(숙박시설) 등

▶누정전시싷

▶영상실(요산요수)

누각과 정자의 차이점, 누정이 지닌 역사적 가치 등 누정을 이해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 영상 공간입니다.

▶1전시실(누정세계)

1전시실은 누정세계로 진입하여 누정의 종류와 특징/역사/형태/구조 등 누정의 세부적인 측면을 보고 체험하는 전시 공간입니다.

▶2전시실(음풍농월)

2전시실은 누정에서 바라본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영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3전시실(누정세계)

3전시실은 봉화에만 있는 특색있고 아름다운 누정을 만나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누정오경(樓亭五景)

 

●광풍각

소재지: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소쇄원길 17

문화재: 명승 제40호

시대 : 조선

입지 : 강계연변형

광풍각은 담양 소쇄원(양산보가 조성한 별서원림)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소쇄원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공간인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아담한 팔작지붕 정자이다.

 

●한벽루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로 2048

문화재: 보물 제528호

시대 : 고려/조선

입지 : 산정형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각종 연회와 행사가 치러졌으며, 관동팔경 유랑길의 마지막 행선지 중의 하나로 많은 문인들이 시문과 기(記)를 남겼던 유서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세연정

소재지: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

문화재: 명승 제34호

시대 : 조선

입지 : 지변형

세연정은 자연적인 계류를 막아 세연지와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세운 정자로,자연감상의 장소이면서 연회장 역할을 하였다.

 

●거연정

소재지: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육십령로 2590

문화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

시대 : 조선

입지 : 강계연변형

거연정은 함양군 화림동 계곡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위치해 있다. 거연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화림동 계곡이 한눈에 들어와 절경을 이룬다.

 

●부용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문화재: 보물 제1763호

시대 : 조선

입지 : 지변형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방형(方形)의 연못인 부용지 남쪽 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용(芙蓉)이라는 정자 이름은 연꽃을 뜻하며,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솔향촌(숙박시설)

경일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장인봉,축융봉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7:00(동절기), 09:00 ~ 18:00(하절기)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연휴, 추석 연휴

※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

관람료 및 사용료

전시관: 일반 2,000원 / 어린이·청소년 1,000원

※ 관람료 면제: 장애인, 국가유공자, 만6세 이하 및 만65세 이상인 사람, 단체 인솔자, 다자녀가정

※ 관람료 경감(50% 경감): 봉화군민

세미나실: 4시간 이하 50,000원 / 8시간 이하 100,000원

문의: 054)679-6967

홈페이지 : http://www.bonghwa.go.kr/open.content/facility/culture.living/guide/

 

■봉성돼지숯불구이축제

■목재문화체험장

 

선조들의 목재문화, 우리생활 속 목재의 쓰임새, 목재의 종류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또한, 춘양목의 우수성을 알아볼 수 있는 홍보영상실과 목재도서관이 있고, 야외에는 산림욕장과 자생식물단지, 목재놀이시설, 잔디광장 등이 있으며,체험객의 편의 제공을 위하여 노천카페, 파고라, 운동시설 등 다양한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목재 및 목제품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국산 목재의 우수성을 체험해 볼 수 있다.목재를 활용하여 생활공예품, 놀이기구, 학습기구 등 다양한 목제품을 직접 만지고, 느끼고,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

 

●위치 : 봉화군 봉성면 구절로 151

●주요 시설 : 목재체험관, 자생식물단지, 산림욕장, 목재놀이터, 잔디광장, 창평산림욕장, 전망대 등

입장시간

동절기 : 09시~17시(폐장 1시간 전까지 입장)

하절기 : 09시~18시(폐장 1시간 전까지 입장)

휴장 : 1월1일, 설날·추석연휴, 매주 월요일, 공휴일 다음날

관람료 : 무료

체험료 : 체험프로그램별 별도

※ 생활형 가구만들기 및 단체 체험객은 사전 예약 (예약문의 ☎ 054-674-3363)

 

■외씨버선길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 4개군이 모여 만든 4色매력 외씨버선길입니다.이 4色길이 합쳐지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같다하여 외씨버선길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외씨버선길을 걷다보면 문득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느릿느릿 쉬어가는 길에서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속 그리운 이들에게 몇자 적어 내 마음을 실어보내는 것도 괜찮습니다.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는 그 옛날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며 그리움을 적어 보는 것 또한 좋습니다. 자연치유의 길을 걷다가 이름모를 들꽃을 만나게 되면 이름을 지어주며 친구가 되어봅시다. 이렇게 이 길이 끝날 즈음에는 외씨버선길은 여러분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1길 | 주왕산·달기약수탕길 18.5㎞

2길 | 슬로시티길 10.5㎞

3길 | 김주영객주길 16.6㎞

4길 | 장계향디미방길 18.3㎞

5길 | 오일도시인의실 11.5㎞

6길 | 조지훈문학길 13.7㎞

영양연결길 | 조지훈문학관 - 일월산자생화공원 18㎞

7길 | 치유의길 8.3㎞

8길 | 보부상길 18.5㎞

9길 | 춘양목솔향기길 19.7㎞

10길 | 약수탕길 13㎞

11길 | 마루금길 15.4㎞

12길 | 김삿갓문학길 12.4㎞

13길 | 관풍헌가는길 23.6㎞

 

●외씨버선길 에티켓

 

• 1. 외씨버선길은 우리가 함께 지킵시다.

• 2. 길을 걷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나눕시다.

• 3. 길 안내 표지판에 낙서하거나 주변에 휴지를 버리지 않습니다.

• 4. 다른 사람들을 위해 외씨버선 길 리본을 떼 가지 않습니다.

• 5. 본인이 만든 쓰레기는 꼭 챙겨와 휴지통에 버립니다.

• 6. 여성 혼자 여행할 때에는 가능한 검증된 숙소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7. 걷기 전에 외씨버선길 안내 가이드는 꼭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 8. 외씨버선길 홈페이지나 다음카페를 이용해 정보를 공유해두시면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을 하실 수 있습니다.

외씨버선길 객주(안내센터)안내

외씨버선길 봉화객주 054-672-0803

 

■봉성면 문화재

 

문화재로는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奉化鳳城里石造如來立像:경북유형문화재 132), 천성사 석조여래입상(경북유형문화재 133), 천성사 3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34), 봉화향교(奉化鄕校:경북유형문화재 253), 봉화 봉성리 석탑, 봉성리 지석묘군, 충효당(忠孝堂) 및 이장발 유허비(李長發遺墟碑), 봉화 금봉2리(金峰二里) 요지, 봉화 우곡리(愚谷里) 문인상석, 우곡리 사지(寺址) 등이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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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산13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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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에 있는 불상으로, 거대한 암벽바위를 조각하여 불상의 몸을 새겼으며 머리는 다른 돌로 만들어 올렸다. 머리를 다른 돌로 만든 예는 고려시대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 불상도 동일한 계열로 여겨진다. 광배를 나타내는 바위 자체의 테두리는 많이 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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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높이가 1.27m나 되는 우람한 모습이고 얼굴은 긴 편이다. 굵은 눈썹이 좁은 이마에 바싹 붙어 있고, 눈은 재미있게 웃고 있다. 코는 너무 길어 턱까지 내려와 입이 간신히 표현되었고 뺨이 유난히 팽창되는 등 토속미를 물씬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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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움츠린 듯한 거구의 상체는 우람하고, 가슴에 들어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은 비교적 세련된 조각기법으로 처리되었다. 양 어깨를 다 감싼 옷은 가는선으로 U자 모양의 둥근 주름을 크게 새겼고, 하체는 땅속에 묻혀 옷무늬가 판별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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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가 넘는 거구의 우람한 모습으로 토속미가 풍기지만 세련된 수법도 보이며 희귀한 손모양까지 나타내어 지방적인 조각의 중요한 예로 평가된다.

 

2.천성사 석조여래입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꿀덩이길 93 (금봉리 262-1)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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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상북도 봉화군 성화곡 절터에서 발견된 것을 천성사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으며, 두 손을 새로 만든 것 이외에는 거의 완전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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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둥글고 큼직한 머리묶음, 토실토실한 얼굴에 아담한 이목구비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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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어깨, 잘록한 허리, 통통한 다리 등에서 부드러움과 균형잡힌 부피감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신라적인 특징은 옷입는 법에서도 나타나는데,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간결한 몇 가닥의 계단식 주름으로 처리하고 있다. 옷깃은 목둘레를 따라 3줄의 선으로 한번 뒤집은 것이지만 양 어깨를 완전히 감싸고 있어 진전된 형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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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신체에 비해 크고 하체가 짧은 앞 시대의 양식을 지니면서도 도식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선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에서 진전되어 나타난 격조 높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3.천성사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꿀덩이길 93 (금봉리 262-1)

시 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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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사 입구의 길 왼쪽에 놓여 있던 것을 절 안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원래는 쌍탑이 나란히 서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봉성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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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1층으로 쌓고, 그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이 비록 1층이지만, 높게 마련해 두어 안정감을 잃지 않았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가느다란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처마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 2층은 4단으로 각이 지게 마련하고 3층은 둥글게 깎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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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규모가 줄어들고 기단부의 퇴화,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4.봉화향교​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3호

지 정 일 1990.08.07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향교길 11-10 (봉성리 26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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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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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처음 지어졌으며 조선 선조 12년(1579)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1950년에는 학교로 사용하다가 폐지했다. 이때 크게 훼손되어 1975년에 군수 권명흠이 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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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인 사주문을 들어가면 휴식공간인 누각이 있다. 그 뒤로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이 있으며, 양 옆에는 유생들의 거처인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 뒤 왼쪽에는 내삼문과 그 안에 사당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공자의 제자와 조선시대 여러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곳이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이 뒤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건물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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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만 지내고 있다. 봉화지방 향토사연구의 좋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전통 깊은 곳이다.

 

5.봉화 봉서루​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8호

지 정 일 2002.02.14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87

시 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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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는 현재 봉성면 봉성리 시장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봉성면사무소 자리에 있었던 봉화현 관아 건물의 일부였으며, 구한 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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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14년(1738)에 봉화현감 이광직이 중건하였으며, 현내의 유현들이 집회하여 교류하였던 장소라고 한다.『봉화지』의 구봉화현도에 의하면 아사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동헌문루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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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봉서루 앞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은 ‘ㄱ’자형으로 좌측 3칸은 일자형 단층건물이며 우측 2칸은 중층형이다. 현재 경로회관으로 사용하는 관계로 3칸 모두 방으로 개조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왼쪽부터 부엌·방·마루의 순으로 평면이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칸에만 쌍여닫이 문을 두었으며 양퇴칸은 창을 설치하였으나 원형은 아니다. 우측의 루부분은 하층은 벽체로 폐쇄되어 있으며 상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주변은 난간을 돌렸다. 그리고 좌측부분과 연결되는 곳은 판벽으로 막아 상부가구의 노출을 막았으며, 기둥은 상·하부 모두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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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봉서루는 건축적인 측면에서 원형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봉화현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던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봉화 청량산(淸凉山)도립공원

 

수려한 자연경관과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1982년에 경상북도립공원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습니다.

 

청량산은 ‘한 떨기 바위꽃’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밀도 높은 바위명산으로 손꼽힌다. 높이가 해발 870m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면적이 고작 48.76km2로서 북한산 국립공원의 절반 정도이고, 거기서 암봉군이 밀집한 지역만 따지면 단 5~6㎢로 줄어든다. 이 좁은 면적 안에 무수한 암봉들이 몸을 비비고 들어앉아 있어 경관의 밀도가 높다.

옛 기록을 보면 청량산엔 ‘6.6봉, 8대, 3굴’이 있다. 산 중심의 청량사에서 두루 바라뵈는 9개 봉우리와 그 바깥쪽 3개 봉우리를 합한 12개봉을 사람들은 ‘청량산 6·6봉’이라 불러왔다. 확연히 높지도 넓지도 않은 산이지만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청량산의 밀도 높은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신라 명필 김생을 비롯해 최치원, 이황, 주세붕 등이 청량산의 빼어남을 극찬했다. 퇴계 이황은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호를 짓고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퇴계는 “이 산은 실제로 내 집안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봇짐을 메고 이 산을 왕래하며 독서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주세붕의 <유청량산록> 발문에 썼다.

 

청량정사 옆에 있는 산꾼의집(054-672-8516)에선 지나는 이들에게 무료로 차 대접하기를 즐기는 이대실씨가 상주한다. 관리사무소~입석대 간 도로변에 주차장이 있으나 주말 아침은 이른 시간에 올라가야 여유 있게 주차할 수 있다. 입구에서 관리요원들이 차량 상황에 따라 통제한다.

 

●청량산 유래

 

청량산(淸凉山)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의하면, 청량산은 고대에는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며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청량산에는 지난 날 연대사(蓮臺寺)를 비롯한 20여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지금은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이 남아있다. 또한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와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글씨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金生窟),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이 있다.

청량산은 1982년 8월에 경상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에 청량사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되었다.

▲ 축융봉에서 바라본 장인봉, 선학봉, 하늘다리, 자란봉, 문명산, 향로봉, 연화봉,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금탑봉, 경일봉, 탁립봉 방향, 청량사, 응진전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 청량산을 당겨보았습니다. 선학봉과 자란봉을 이어주는 하늘다리와 청량사와 응진전이 보이네요.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 청량산 하늘다리(Sky Bridge)

청량산 하늘다리는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이다. 90m로 국내 구름다리 중 가장 길다. 해발 800m 지점에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다리로 폭은 1.2m, 지상에서 높이 70m에 이른다. 하늘다리는 2008년 완공되던 해부터 화제가 되며 등산객을 비롯해 많은 관광객을 청량산으로 끌어들여, 지금은 봉화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워낙 튼튼하게 만든 탓에 출렁거림이 덜해 공포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다리 중간에는 1m 크기의 강화 유리가 바닥에 있어 허공 위에 있는 듯한 스릴을 맛볼 수 있다.

청량산 하늘다리(Sky Bridge) 는 해발 800m 지점의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연장 90m 통과폭 1.2m 지상고 70m의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으로서 2008년 5월 봉화군에서 유교문화권 관광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주요 자재는 최첨단 신소재인 PC 강연 케이블과 복합유리섬유 바닥재를 사용하여 탐방객들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며, 통과하중이 340kg/㎡으로 최대 100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 · 시공 되었습니다. 
*현재는 산악보도교 중 국내 최장 · 최고의 규모(높이 100m, 길이 200m, 폭 1.5m)인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가 2018년 1월 11일 개통되었습니다.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청량산 하늘다리는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현수교량이다. 90m로 국내 구름다리 중 가장 길다. 해발 800m 지점에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다리로 폭은 1.2m, 지상에서 높이 70m에 이른다. 하늘다리는 2008년 완공되던 해부터 화제가 되며 등산객을 비롯해 많은 관광객을 청량산으로 끌어들여, 지금은 봉화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워낙 튼튼하게 만든 탓에 출렁거림이 덜해 공포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다리 중간에는 1m 크기의 강화 유리가 바닥에 있어 허공 위에 있는 듯한 스릴을 맛볼 수 있다.

 

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종합상가지구입니다. 화면 중앙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대형주차장이 있고 청량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청량산박물관, 낙동강과 청량교가 보입니다.

▲ 청량산종합상가지구 주차장 입구에 청량산도립공원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1728)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청량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였다. 이곳은 천연 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두루 갖추어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영토를 빼앗기 위한 각축장이 되었고 서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휘감아 돌고 천인절벽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지세는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산의 산성은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동문지가 있는 밀성대 아래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일명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과 다시 경일봉에서 선학봉을 지나 청량사가 있는 계곡 옆으로 포곡선을 그리며 형성된 일명 '청량산성(淸凉山城)'으로 구분되며, 축융봉과 경일봉을 잇는 일명 '오마대로(五馬大路)'로 불리는 '오마도산성(五馬道山城)'이 공민왕산성과 청량산성을 이어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오마도 산성은 산성의 기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방어기능 외에도 청량산성과 공민산성을 이어주는 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어 다른 지역의 산성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산성유지에서 삼국시대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수습된 바 있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구간별로 비교적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돌이나 흙으로 성벽을 구축한 석성(石城)이나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산성은 장군의 지휘소였던 장대와 건물터, 성문터 등의 유구가 남아 있고 동문지에서 밀성대를 거쳐 북치성까지의 구간은 석성으로, 북치성에서 자연지형구간을 지나 축융봉까지의 구간은 토성으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현재 보이는 이곳은 2009년에 복원된 토성구간으로 길이는 약 334m에 이르며 축육봉 바위 근처에 북문지로 추정되는 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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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진전과 청량사로 올라가는 입석 등산로입구입니다.

▲ 산꾼의 집과 청량정사(淸凉精舍)

 

청량정사는 청량산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에 자리 잡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 때 문신 송재 이우(李堣,1469~1517) 선생이 건립하였다. 선생이 조카인 이해와 이황 및 사위인 조효연, 오언의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후 퇴계(退溪) 이황 선생이 이곳 청량정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봉화 청량사(淸凉寺)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7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淸凉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청량산 연화봉(蓮花峰) 기슭에는 내청량사(內淸凉寺)가, 금탑봉(金塔峰) 아래에는 외청량사(外淸凉寺)가 있다. 두 절은 모두 663년(문무왕 3)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창건연대로 볼 때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건 등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창건 당시 승당(僧堂) 등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의 두 절은 비록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지만 상호 연관적인 관계에 있다.

내청량사는 부대하는 당우로 볼 수 있는데, 전자를 유리보전(琉璃寶殿), 후자를 응진전(應眞殿)으로 별칭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현재 여승의 수도처가 되고 있는 두 절은 극히 사세가 미약하며, 단지 유리보전만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사의 본당인 유리보전 (淸凉寺琉璃寶殿).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하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오층석탑

 

오층석탑뒤의 삼각우송(三角牛松). 이 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청량사 창건 당시 이웃의 어느 마을에 뿔이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생김생김 범상치 않던 이 송아지는 자람에 따라 그 등치가 낙타만큼이나 크고 힘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 매 끼니때마다 여물을 챙겨주는 주인(이름이 ‘남민’으로 전하고 있다.)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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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고승이 온다는 소식이 은연 중 마을에 펴지고 있었다. 그 소식과 더불어 소의 태도가 완연히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소식을 접한 며 칠 후 고승이 찾아들자 지금까지와는 딴판으로 순한 강아지가 되어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 소의 태도를 지긋이 바라보던 고승은 소의 주인에게 불사를 일으킬 것을 설명 후 소를 시주토록 권하여 승낙을 받는다. 다음 날부터 고승과 소는 혼연일치가 되어 사찰 창건 불사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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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서 이루어지는 불사라 돌을 나르고 통나무를 옮기는 등 그 고난과 역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워낙 힘이 장사인 뿔이 셋 달린 소라 그런지 무난히 불사의 완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준공을 하루 앞둔 안날저녁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강철같이 튼튼하게 일만 해오던 소가 불식간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긴 고승이 절 앞마당에 묻고는 개축불사와 함께 극락왕생을 축원 드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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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고승은 원효대사이며 뿔이 셋 달린 소는 지상보살의 화신이었다고 전한다. 이후 뿔이 셋 달린 소의 무덤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세 가지로 갈라지니 후세 사람들은 소의 넋이라 여겨 찾는 이 마다 기리 있다.

 

▶ 김생폭포(金生瀑布)

김생 굴 앞에 있으며 장마철에 여러 계곡의 물이 합류하여 폭포를 이루어 오산당(吾山堂)에서 바라보면 천길 높은 곳에 흰 물줄기가 쏱아지는 것이 장관이다. 송재 이우가 쓴 시의 한 구절인 '옥홍황음간중천'이라는 표현에서 김생폭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 김생굴(金生窟)

경일 · 금탑 양 봉우리 사이에 있으며 굴 속의 면적이 넓어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연 암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김생이 여기에서 10여년간 글씨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붓을 씻었다는 우물의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김생과 봉녀(縫女)가 글씨와 길쌈 기술을 겨루었다는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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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金鋼經)」에 나오는 '변함없이 뿌리가 깊으면서 흔들림이 없다[여여부동(如如不動)]'의 사자성어
출처: https://100mountain.tistory.com/650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

 

■청량산박물관

 

청량산을 배경으로 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지역홍보자료를 한 곳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봉화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청량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탐방문화를 제공하고자 건립하였다.

▲청량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255 청량산공원관리사무소

 

▼청량산 입구

원효대사의 구도의 길 청량사 1.3km

녀뎐길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주자가 무이산을 예찬했듯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퇴계 선생은 어려서 청량산 자락에서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청량산은 원효와 김생도 수행했다는 곳이다. 퇴계 선생이 다니시던 길은 처음에는 둑길, 나중에는 험하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숲 좋은 오솔길이다. 오솔길은 숲을 가로지르고, 강변을 옆구리에 낀 채 언덕을 넘어 지줄지줄 이어진다. 소나무, 느티나무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고, 돌자갈을 핥고 넘어가는 낙동강 여울물소리, 묵은 낙엽이 켜켜이 쌓인 오솔길을 혼자 걷노라면 저절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퇴계 선생이 경치 좋은 곳마다 남겼던 시를 읊으며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인의 경지에 빠지게 되고, 오르막이었다가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길을 계속 걷다보면 철저한 적막 속에 자신이 어느덧 퇴계 선생이 되어버리는 길이 퇴계오솔길, 즉 퇴계 선생께서 다니시던 길이다.

■농암 이현보 종택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가송리(佳松里) 612)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 영정(影幀)

농암(聾巖) 귀먹은 바위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한 후, 32세에 벼슬길에 오른 이후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으로 귀양을 갈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사헌부 지평에 복직되었고,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 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과 호조참판을 거쳐 1542년(중종 37)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안동에 돌아와 부모를 받들며, 퇴계 이황(1501~1570)의 선배로서 교류하면서 그가 남긴 어부가(漁父歌)는 고려 어부사(漁父詞)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이어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자연에 사는 선비의 즐거움을 시를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의 자연을 읊은 대표적인 작가로 국문학 역사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고, 효반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집, 농암선생고택(聾巖先生古宅) 긍구당(肯構當)조상의 뜻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 강산초대소(江山招待所) 명농당(明農堂) 농암선생고택 담장 밖 자연을 바라보며 귀거래를 꿈꾸었다.

분강서원 1699년 사림들이 농암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 유도문을 지나 기숙사인 동재 극복제와 서재 경서제 정면에는 성세정이 쓴 분강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인 홍교당, 위로 농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덕사 가 있다.

 

■농암종택 구성

●별채-긍구당, 명농당, 등의 정자로 된 별채

사당, 강당 동재 서재 안채와 바같채로 구성된 분강서원, 애일당, 강각  

●본채-사당,안채,사랑채,별채,대문채로 구성

600여년 전통의 농암종택과 유적들은 “강호문학”을 사랑하는 모든분들의 공동공간이다.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 를 추구한 농암선생의 생애와 문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깇은 사색의 강을 제공할것입니다.

1976년 안동댐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안동의 이곳 저곳으로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놓았다.  가송리에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 명소를 감시 안고있다.

 

농암종택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정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이웃에 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이 있다.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선반가(宣飯歌) 사랑채 앞에 농암의 모친이 농암을 칭찬한 소박한 어머니의 마음

 

먹기도 좋구나 승정원 선반이여

놀기도 좋구나 대명전 기슭이여

가기도 좋구나 부모 향한 길이여

 

경상도 관찰사를지낸 학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조선시대 선비 농암 이현보 선생

부친 이흠은 100세가가운 천수를 누린 뒤 온화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이로다 일엽편주를 만경파에 띄워두고 인세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을 아는가?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

안동 농암 이현보 종택의 분강서원(汾江書院)-2007년 분강서원 재건

▼ 강각과 애일당

 

애일당(愛日堂) 농암 이현보가 부모를 위해 지은 정자이다. 나이 90세를 넘긴 부모가 늙어 감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 애일당 앞에 정자 강각에는 퇴계선생, 김안국, 이유, 이언적, 주세븡,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 믾은 선비들이 함께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영남가단의 모태라 할 만하다.    

농암 이현보 신도비[ 聾巖李賢輔神道碑 ] 경북문화재자료64호

●위치

농암 이현보 신도비(聾巖 李賢輔 神道碑)는 원래 주진다리를 건너 예안면 정산리·인계리·삼계리를 지나 신남리(정자골) 383번지 농암 이현보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2006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 종택 경내로 이전하였다.

●형태

크기는 높이 1.9.m, 너비 0.84m이다. 재질은 대리석이며 이수(螭首) 없이 귀부(龜趺) 위에 대리석 비신(碑身)만을 얹은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이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다.

●금석문

비문은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지었으며, 글씨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썼다. 원문은 홍섬의 문집인 『인재집(忍齋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중추부사 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 유명조선국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 병서.

예로부터 인신은 벼슬을 이루고 명망이 선 뒤에는 몸을 거두어 한적한 곳에 물러나 있고 싶으나 대개 자유로이 하기 어려워 구차하게 용납함을 구하였다. 그 덕은 완악한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서게 되며 나이가 족하면 나라에 대로가 되고 고향 언덕과 동산에 쓸쓸히 한산하게 거닐고 노년의 절개를 보전함은 근세에 구해 보니 오직 효절(孝節) 이(李)공 한 사람뿐이다. 공의 이름은 현보요, 자(字)는 비중(棐仲)이다. 그 선조는 영천(永川) 사람이다.

휘(諱) 헌(軒)이 처음 예안(禮安)현에 이거하여 드디어 현인(縣人)이 되었다. 벼슬은 군기소윤인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소윤이 휘 파(坡)를 낳았으니 의흥현감이고, 현감이 휘 효손(孝孫)을 낳으니 통례문봉례이며 휘 흠(欽)을 낳았으니 인제현감이다. 현감이 호군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정해년(1467) 7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처음에 봉례공이 일찍 산사에 노닐다가 꿈에 신인(神人)이 고하여 말하되 적선(積善)의 집에 반드시 나머지 경사가 있다고 하였다. 잠을 깬 뒤에 권씨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상한 까닭으로 공의 어릴 때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공이 나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며 뜻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고 자못 활 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전력하지 아니하였다. 향교에 유학할 때부터 비로소 발분(發憤)하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되니 글을 짓는 데 뛰어나서 여러 무리 가운데 중하게 되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에게 수업하니 문광이 그의 기국(器局)을 중히 여겼다. 을묘년(1495) 진사에 합격하고 무오년(1498)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정자가 되고 신유년(1501) 예문관검열에 추천되었다. 처음 사필을 잡고 국사를 쓰는 데 구차하지 아니하였다. 임술년(1502) 공이 연산주(燕山主)에 계달하여 말하되 ‘사관은 인주(人主, 임금)의 언동을 기재하는 데 멀리 엎드려 있으니 청하건대 임금 앞에 가까이 있어 기주(記注)하는 데 소루하고 빠짐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폐주가 언짢게 여겼으나 허락하였다.

갑자년(1504) 성균관전적에 올라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잘못을 말하니 이때 연산주가 언관(言官)을 원수같이 보아 이로 인하여 그만 화가 나서 말하되 ‘간관들은 일이 있으면 즉시 계달하지 어찌 늦추어 하루를 넘기는고?’라고 의금부에 내리고 마침내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를 시켰다. 병인년(1506) 중종이 반정하여 공이 배소로부터 일어나 호조좌랑을 받고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곧아서 권세에 힘쓰지 않아서 때에 사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부르니, 대개 바깥은 검은 듯하나 안으로는 맑고 맵다는 말이다.

무진년(1508)에 어버이가 늙자 형조정랑에서 영천군수로 나갔다 계유년(1513)에 만기가 되어 들어와 군자첨정이 되었다. 갑술년(1514)에 나가 밀양부사가 되어 잘 다스려 백성에 끼친 사랑이 컸었다. 을해년(1515)에 파면되고 병자년(1516) 겨울에 선공부정을 제수 받고 겨울에 충주목사로 나갔다. 정축년(1515)에 조정에서 가까이서 어버이를 편하게 봉양하라고 안동으로 바꾸어 주었다. 공은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학교가 제일이라 하여 선비들을 크게 모아 공궤를 넉넉히 하니 원근에서 모여들어 향교가 다 용납지 못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복시정이 되고 사헌부집의로 옮기고 군자감부정으로 바뀌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성주목사로 나가니 임금이 공이 가는 곳에 정치가 아름답다 하여 표리(의복)를 주시고 유서로 표장하였다. 을유년(1525)에 부모님 봉양으로 사직하시고 돌아오셨다. 병술년(1526)에 시강원보덕에 제배되었고 정해년(1527)에 특별히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무자년(1528)에 좌천이 되어 대구부사가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축년(1529)에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신묘년(1531)에 외간(外艱)상을 만나 계사년(1533)에 복을 마치고 형조참의를 제배 받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제학이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겼다. 갑오년(1534) 봄에 경주부윤으로 나가서 폐해를 없애고 간소화하여 다스린 효과가 더욱 드러났다. 병신년(1536)에 부모님의 연세가 더욱 높아서 벼슬을 두고 돌아와 봉양하였다. 겨울에 예조참의로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발탁이 되어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를 제수 받았다.

공은 본도는 친구들이 있는 바이나 감사는 풍헌(風憲)을 겸하는 것이니 사사로이 뵙는 것을 허락한다면 법이 문란하여질까 하여 엄하게 막아 자제와 친구들이 감히 공관(公館)에 오지 아니하고 일도(一道)가 숙연해졌다. 정유년(1537)에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가 내간(內艱)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때 연세가 71세인데 오히려 여러 아우를 데리고 여묘(廬墓) 3년을 하다가 기해년(1539) 복을 마치고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공이 본래 물러가 쉬려는 뜻이 있었더니, 경자년(1540) 가을에 이르러 글을 올려 몸을 빌었으나 허락을 아니하시어 초정(椒井)에 목욕을 청하였다.

때에 나의 선군인 문희공(文僖公)이 정승이 되어 공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머물러 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인견(引見)하시고 속히 돌아오라 명령하시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겨울에 호조참판에 옮겼다. 임인년(1542) 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또 병으로 목욕을 청하고 배 삯을 주고 돌아오니 일시에 진신(縉臣)들이 의정 이하로부터 도성 문밖에 나와 전별하니 천막이 한강까지 뻗쳤고 수레가 꽉 차게 되니 보는 사람이 근고에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계묘년(1543)에 중종이 공의 염퇴(恬退: 벼슬을 사직함)를 가상히 여기시어 특별히 지중추부사를 주시고 황고(皇考)를 의정부좌참찬, 모부인(母夫人)을 정부인(貞夫人), 조부를 이조참판, 증조를 병조참의를 주시어 선세(先世)를 추증하였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즉위하시니 공이 노병으로 조정에 가지 못하시고, 소를 올려 청하기를 ‘대략 정치의 요령은 사람을 얻는 데 있으니 임무를 맡기는 처음에 밝음으로써 변별하여야 하며 임명 후에는 믿음으로 맡겨야 합니다. 선왕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선비를 즐겨하였으나 혹 어진 이와 간사한 무리가 서로 섞이고 임용이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이목에 미친 바입니다. 삼가 어렵기는 하지만 힘써서 하나로 화하는 것을 신정의 요령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깊이 노성 한 분이 임금께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자헌의 품계로 올려 포상하였다. 이해 가을에 인종이 승하하시어 두 임금이 계속 돌아가시니 공이 시골에 있었는데 상을 듣고 슬픔을 부르짖어 수레로 빨리 부임하려 하시니 자제들이 공의 쇠병이 심하다 하여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명종 기유년(1549)에 찬성(贊成) 김광준(金光準)이 절의(節義) 포장(襃獎)을 청하여 정헌의 품계를 주시고 이해에 나라에서 우로지전(憂老之典)이 있어 또한 숭정(崇政)의 품계를 주셨다.

갑인년(1554)에 한 간관이 계달하여 말하기를 ‘이모(李某, 이현보)는 나라의 기덕(耆德)이요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불러오면 반드시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림의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글을 내려 아름다움을 포장하시고 역마를 타고 조정으로 오게 하니 공이 포장하시는 말씀이 지나침을 황구하게 여기고 글을 올려 사양하시고, 또 소에 말하기를 ‘선과(禪科)의 복설(復設)과 사원(寺院)의 수선(修善)이 전하의 선에 향하는 마음이 간단(間斷)한 바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사의가 절실하여 시골에 머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 충성은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였다. 을묘년(1555) 5월에 병이 들어 6월 13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올라가니 상이 놀라서 슬퍼하시고 좌우에 이르러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더니 지금은 그만이다 하시고 내가 심히 슬프고 비통하구나. 부의를 더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해 8월 28일 현(縣)의 북쪽 용두산(龍頭山) 남쪽 도곡(道谷)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의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여 봉양에 급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은혜를 돌봄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한가하기를 빌어 목욕을 청하고 잇따라 소장을 올리니 조정에서도 또 지정(至情)을 알고 뜻에 순하게 좇으므로 군수로 봉양케 한 것이 여덟 고을이며 분천(汾川)에 살면서 그 위에 집을 지어 ‘애일당(愛日堂)’이라 하고 어버이를 받들어 위안하여 노시고 그 바위는 농암(聾巖)이라 하여 자기의 생각을 사물에 비하여 은근히 나타냈다.

일찍이 부제학으로 근친하여 오니 이때 참찬(參贊)공의 나이 94세이고, 숙부 균(鈞)의 나이 92세이며, 외숙 첨지 권수익(權受益)이 82세이고, 또 향인 중 나이 높은 사람 6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고 자손이 앞에 가득하고 공이 채색 옷으로 춤을 추니 영광스런 효도의 성함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였다.

어버이가 이미 돌아가셔도 상장(喪葬)의 비용은 여러 아우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문족(門族)의 곤궁한 자가 있으면 힘써 도와주어서 혼인에 때를 잃지 않게 하며, 때로 임금의 하사품이 있으면 인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득히 찼는지 깊이 경계하며 일급이라도 올리면 놀란 듯이 불안해하였다.

일시에 3자가 세 고을로 봉양하는 것을 도리어 근심하여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복용(服用)이 간소 검박하여 공경하고 삼간으로 지내고 비록 평상시에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종일 주렴 안에서 의지하며 춥고 덥더라도 폐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졸(拙)하고 성품이 고상 개결하나 남을 대접하는 데는 정성으로 하여 어리석고 천한 사람에게도 빠지지 않고 술과 음식으로 청하면 억지로 사양하지 않으니 향당 사람들이 모두 애모하여 부형과 같이 보더라도 시골에 살면서도 사적인 일을 공공에 범하지 않았다.

본 현은 백성도 적고 고을도 피폐하여 1호당 한 사람이 나오게 되니 폐단을 구제할 수가 없었다. 공이 창의(倡義)하여 8결(結)에 1명씩 나오게 하니 세금이 가볍고 부역이 고르게 되어 백성이 모두 편안하였다. 일을 헤아림에 밝게 살피고 만일 의심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자신의 과실이 있다면 남에 대하여 감추지 않으니 사람이 공의 공직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담박하고 욕심이 적어 명성과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집 주변에 작은 당(堂)을 지어 명농(明農)이라 일컫고 벽에 도잠(陶潛, 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붙이니 사람들이 공의 뜻을 알았고, 치사(致仕)할 연령이 넘어 예법을 따라 힘껏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 공의 근력 이목이 쇠퇴하지 않으므로 체직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은 몸이 물러 나와도 벼슬살이로 인순(因循: 옛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우물거림)하여 지나가면 끝내 이룰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신하의 진퇴 의리가 아님을 생각하고 경자년 이후로 물러날 것을 구하여 그치지 않고 반드시 물러나기를 기대하였다. 기어이 물러 나와서 14년을 지냈으나 애군우국(愛君憂國)은 진퇴가 다르지 아니하였고, 그 심신은 이미 한가하여 더욱 계산을 즐기며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언덕과 숲을 찾으니 농부와 소먹이가 만나도 재상인지 몰랐다.

작은 배를 타고 임강사(臨江寺)를 왕래하여 서식(栖息)하는 곳으로 삼으니 풍신(風神)이 탈속하였고 운치가 조용하였다. 술이 약간 취하면 시아(侍兒)로 하여금 어부사(漁父詞)를 부르게 하고 초연히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독립하는 생각이 있었다. 시를 지어도 뜻이 청신하여 소년의 생각이 미칠 수 없었다. 임종에 모든 아들이 호읍(號泣)하니 공의 말이 ‘내 나이 90이고 너희들이 모두 있고 국은(國恩)을 후히 받았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초상을 검약하게 하고 장사는 시기를 넘기지 말라.’고 말을 마치고 가시었다.

공은 안동권씨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으니 장자는 석량(碩樑)인데 요절하였고, 다음은 문량(文樑)인데 평릉도찰방이고, 다음은 희량(希樑)인데 봉화현감이고, 다음은 중량(仲樑)인데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가 되고 바야흐로 우뚝한 이름이 있다. 다음은 계량(季樑)인데 의흥현감이고, 다음은 숙량(叔樑)인데 진사이다. 딸은 군수 김부인(金富仁)에게 갔다. 측실에서 2남을 낳으니 윤량(閏樑)은 태의(太醫)가 되었고,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문량은 이승손(李承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원승(元承)이다. 장녀는 황준량(黃俊良), 다음은 금응세(琴應洗), 다음은 김기보(金箕報)에게 시집갔다. 희량은 황정(黃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선승(善承)·극승(克承)이며 딸은 송복숭(宋福崇)에게 시집갔다. 승지는 습독(習讀) 반사형(潘士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영승(令承)이다. 계량은 김옥견(金玉堅)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광승(光承)이고 큰딸은 양한신(楊漢臣), 차녀는 임균(任鈞)에게 시집갔다.

숙량은 이복신(李復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군수 김부인이 4남을 낳으니 호(壕)·전·탄(坦)·기(圻)이다. 승지(承旨) 공이 이미 면상(免喪)하고 퇴계 지사(知事) 이황(李滉)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신도(神道)의 비문을 지으라 부탁하니 슬프다. 공이 내 선인과 동년(同年) 사마시(司馬試)이고 공이 옥당(玉堂) 장관 때 내가 박사로 더럽히고 편달하기를 오래하였으니 의로서 감히 사양할 수 없고 하물며 퇴계가 공의 심사(心事)를 지어 자세히 하였고, 또 다하였으니 그 말이 족히 후세에 믿을 만한 까닭으로 서문은 퇴계의 글을 쓰고 이어 명(銘)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덕이 사람이 있는데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공이 효를 다하였으니 증자와 민자건을 이을 것이다. 귀한 것이 벼슬이 아닌데 벼슬이 와서 나를 얽매었네. 몸은 물러 나와도 벼슬은 높였으니 남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90을 모(耄)라 하니 성인도 반드시 두지 못하였는데 공이 능히 누렸으니 하늘이 부여한 것이 심히 후하였다. 덕과 벼슬과 나이를 달존(達尊)이라 하였는데, 이 세 가지를 겸하였으니 예전부터 있기 드물었다.

명농당(明農堂)이 있으니 내가 갈고 매는 것이 즐겁다. 바위를 농(聾)이라 불렀으니 알고 듣는 것을 단절할까 하였다. 양조(兩朝, 중종·인종)에게 상소를 올려 요순시대를 기약하였고, 충성은 효도로부터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내 어찌 임금을 잊겠는가. 임금께서 노성을 생각하여 예로 부르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창생(蒼生)을 어찌 하는고 앞길이 저물어 간다. 정성은 애일당에 있으니 효도에 게으른 자가 본받아야 하며, 명성과 이익은 더럽힐 듯하니 나아가기를 즐기는 자가 부끄러운 것이다. 나약한 자가 서게 되고 완악한 자가 청렴하게 되니 돌아가신 후에 청풍(淸風)이 남았다. 돌에 사실을 기재하여 무궁토록 밝게 빛나게 한다.’라고 하였다. 가정(嘉靖) 45년 병인(丙寅) 2월일.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 강영군 홍섬은 짓고,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은 글씨를 쓰다.”

(聾巌李賢輔神道碑 頭篆 知中樞府事 贈諡孝節李公神道碑銘 碑文 有明朝鮮國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贈諡孝節李公神道碑銘幷序 自古人臣當宦成名立之後非不欲斂身而退老於閒適率多難於自由苟且求容其德足以廉頑立懦年足以爲國大老蕭散丘園能保晚節求之近世惟孝節李公一人而已公諱賢輔字棐仲其先永川人有諱軒始移居于禮安縣遂爲縣人官至軍器少尹於公爲高祖少尹生諱坡義興縣監縣監生諱孝孫通禮門奉禮奉禮生諱欽麟蹄縣監縣監娶護軍權謙之女以成化丁亥七月二十九日生公初奉禮公嘗遊山寺夢有神人告曰積善之家必有餘慶旣寤聞權氏婦生男心異之故公少名有慶公生而穎秀骨相不凡頗好弋獵不肯專意學問自遊鄉校始發憤讀書爲詞章造語警拔見重流輩受業於文匡公洪貴達爲文匡所器重中乙卯司馬試捷戊午科初補校書館正字辛酉見薦爲藝文館檢閱始秉史筆書事不苟壬戌公啓于燕山主曰史官記人主言動而遠伏 榻下請稍近 榻前使記注無疎漏主心咈而且許之甲子陞成均館典籍選入侍講院爲司書司諫院正言論 書筵官所失是時燕山方讎視言官因此恚甚曰諫官當有聞卽啓何以淹至一日下禁府竟配安東之安奇驛丙寅 中廟反正公起自謫籍授戶曹佐郎陞敍司憲府持平直不撓權時人號爲燒酒陶甁盖以外黭然而內實淸烈也戊辰以親老由刑曹正郎出守永川郡癸酉秩滿入爲軍資僉正陞司諫院司諫甲戌出爲密陽府使善治取最遺愛在民乙亥因事罷丙子冬授繕工副正冬出牧忠州丁丑 朝廷欲使近其親便養許換安東公以化民之本莫先學校大會儒士贍養有方遠近輳集黌舍不能容入爲司僕寺正移司憲府執義遞爲軍資監副正未幾出牧星州 上以公所至有美政 賜以表裏 下書褒奬乙酉以親老辭歸丙戌還拜侍講院輔德丁亥 特陞通政爲兵曹參知尋爲同副承旨戊子因事左遷出爲大丘府使未久棄官歸己丑出守榮川郡辛卯遭外艱癸巳服闋拜刑曹參議轉入弘文館爲副提學移右副承旨甲午春出爲慶州府尹剗弊尙簡治效尤著丙申以親年益老解官歸養冬以禮曹參議徴未及就 命擢陞嘉善階觀察慶尙道公以本道親舊所在監司職兼風憲若許私謁則法由此壞峻爲之防子弟親舊無敢伺候於公館者一道肅然丁酉因事罷丁內艱公時年七十有一猶能率諸弟廬墓三年己亥服闋拜刑曹參判公雅有退休之志至庚子秋上章乞骸骨 不許請浴椒井時吾先君交僖公爲相知公欲不復來請留之 上引見公諭令遄歸以是志不果遂冬遷戶曹參判壬寅春遞拜同知樞府秋又引疾請浴買舟東歸一時搢紳自議政以下出餞都門外列幕至于漢濱車馬駢闐觀者以謂近古所未有之盛事癸卯 中廟嘉公恬退 特授知中樞府事以奬之推 恩先出追 贈皇考以議政府左參贊母夫人以貞夫人祖 考以吏曹參判曾祖以兵曹參議乙巳 仁廟嗣位公以老病不能造 闕因拜疏陳請大略以謂爲治之要在乎得人明以辨之於受任之初信以委之於旣任之後 先王非不好賢樂士而或致賢邪相混任用不終此 殿下耳目之所及也惓惓以難愼和一爲新政之要見者以爲深得老成告君之軆 上嘉之 特陞資憲階以褒之是年秋 仁廟昇遐公方在野 二聖相繼賓天聞喪呼慟欲輿疾赴臨子弟以公衰病已甚挽而力止之及今上己酉金贊成光準請褒節義 命加正憲階是年國擧優老之典又授公崇政階甲寅有一諫官啓于 上曰李某國之耆德精力不衰苟能召致必有獻替之益 上降書褒美仍 命乘馹赴闕公以褒辭太過懼不敢當上箋辭謝因獻言曰禪科之復寺院之修得非 殿下向善之心有所間斷乎辭甚切至其處畝玖以不忘 君老而彌篤乙卯五月寢疾至六月十三日卒于正寢享年八十九訃聞于朝 上震悼謂左右曰累召不來今則已矣予甚慘怛賻贈有加卜得是年八月二十八日葬于縣北龍頭山南道谷先塋之側公天性孝友急於奉養立朝事主 恩眷不衰而乞閒請浴上章相繼 朝廷亦知其至情無不順適其意故專城以養者幾八邑卜居汾川築室其上名堂以愛日以爲侍親遊玩之所又名其巖曰聾巖以寓意焉嘗以副提學來覲是時參贊公年九十四叔父鈞年九十二舅權僉知受益年八十二又聚鄉人年高者六人作九老會子孫盈前公親戲綵以娯之榮孝之盛聳動觀聽親旣沒喪葬之資不責諸弟取辦於家力周門族之窮者令不失嫁娶之期時得 君賜輒分戚隣深以滿盈爲戒一級之陞每瞿然不寧者久之一時三子以三城來養而反以爲憂不以爲榮服用簡儉敬謹自將雖當燕居必晨興盥漱正衣冠而出終日簾閣據几不以寒暑而廢勤於爲人拙於謀家性雖高介接人以誠不遺愚賤酒食邀請亦不強辭鄉曲愛慕視以父兄居鄉不肯干公以私本縣民少邑凋戶出一夫弊幾不可捄公始倡議請以八結出夫賦輕役均民賴其賜料事明審如有疑則虛懷以咨己有失則對人不諱人服公公直之量澹泊寡欲不慕聲利構小堂于宅邊扁以明農壁畫陶潛歸去來圖人亦知公志之有在年踰致仕據禮力辭 祖廷以公筋力耳目未覺衰替不可引去公自料身退而秩進處野而朝御因循悶抑如此則是終無遂志之日非臣子進退以義之道自庚子以來求退不已期於必退然後已禁家不受祿俸因而家食者十四年而愛 君憂國不以進退異其心身旣閒益以溪山自娯竹杖芒鞋穿林陟巘田夫牧竪遇 之不知其爲宰相也喜乘小艇往來臨江寺以爲栖息之地風神脫洒韻致森逸酒 微醺令侍兒歌漁父詞超然有遺世獨立之想吟成詩句立意淸新有非少年盛作之所能及也臨終諸子在傍號泣公曰吾年九十汝輩俱存厚受 國恩死無可憾喪務儉約葬無過期言訖而絶公娶安東權氏忠順衛孝誠之女生六男一女男長曰碩樑夭次文樑平陵道察訪次希樑奉化縣監次仲樑登甲午文科爲承旨方有峙名次季樑義興縣監次叔樑進士女適郡守金富仁側室生二男閏樑屬太醫次曰衍樑文樑娶李承孫之女生一男三女男曰元承女長適黃俊良次適琴應洗次適金箕報希樑娶黃珽女生二男一女男曰善承克承嫁宋福崇承旨娶習讀潘士泂女生一男曰令承季樑娶金玉堅女生一男二女男曰光承女長適楊漢臣次適任鈞叔樑娶李復新女郡守生四男曰壕坦圻承旨公旣免喪携退溪李知事滉之狀囑暹以神道之文嗚呼公與吾先人同年司馬公之長玉署吾忝博士熏灸旣久義不敢辭况退溪述公心事旣詳且盡而其言足以信後世故爲序悉用退溪之文而綴以銘銘曰 懿德在人莫先於孝公能盡孝曾閔是紹可貴匪爵爵來縻我身退秩崇人不我捨九十曰耄聖未必有公能享之天賦孔厚德爵與齒是謂達尊兼斯三者從古鮮存明農有堂樂我耕耘喚巖以聾擬斷知聞貢疏兩朝 期以華勛忠由孝推敢忘吾君 王念老成禮辟空勤如蒼生何前途告曛誠乎愛日怠孝者企聲利若浼嗜進者恥懦立頑廉沒餘淸風石于紀實式昭無窮 嘉靖四十五年丙寅二月日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江寧君洪暹撰奉憲大夫礪城君宋寅書)

현황

소유자인 이성원이 관리하고 있으며,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농암 이현보 묘소

농암선생정대구좌(聾巖先生亭臺舊庄) 농암각자(聾巖刻字)

안동댐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고산정(孤山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447[가송길 177-42]

 

고산정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정자이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다. 35세에 당시 선성현(宣城縣, 당시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었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고산정은 안동팔경의 하나인 청량산(淸凉山) 가송협의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산정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변천

고산정은 금난수가 1564년(명종 19) 건립하였다. 창건 당시부터 경상북도 예안 지역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져 이황도 여러 차례 제자들과 함께 와서 「서고산벽(書孤山壁)」·「유고산(遊孤山)」·「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의 시를 짓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형태

고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인데,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우측 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 방은 뒤쪽의 1칸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결국 마루가 ‘ㄱ’자형으로 깔리게 되었다. 전면과 양 측면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는데,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현황

고산정은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이황과 금난수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고산정에 보존된 이황의 한시 「서고산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日洞主人琴氏子 隔水呼問今在否 耕夫揮手語不聞 愴望雲山獨坐久)’.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으며, 고산정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다.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금만동이다.

●의의와 평가

고산정은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우러져 조선시대 정자의 멋스러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물의 원형도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건축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고산정 이 건물은 정유재란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바 있는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1530∼1599)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선생이 35세 되던 1564년(명종 19)에 당시 선성현(宣城縣)의 명승지일(名勝之一)이었던 가송협(佳松峽)에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 한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건립당시 사정과 주위의 절경에 대해서는 「일동록(日洞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창건 당시부터 예안지방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져 그의 스승인 퇴계(退溪)선생도 누차 문인들과 함께와서 영시유상(詠詩遊賞)하였다 한다.
′고산제영′(孤山題詠)에는 퇴계문도를 비롯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들까지 찿아 차운(次韻)한 시(詩)가 수백수에 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주두상부에는 보아지를 끼웠으나 외부에는 초각을 하지 않고 내부에만 초각을 하였다. 5량가인데 종량 위에는 키 큰 동자주를 세워 여기에 소로를 끼워 장혀와 창방을 받게 하였으며, 좌측 마루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귀에는 선자연을 걸었다. 어간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을 꾸몄는데 좌측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방은 뒤쪽의 1간만을 온돌방으로 꾸며 결국 마루는 ㄱ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정자로의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다.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한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건물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경암(景巖) 강 중앙에 큰 바위

 

예던길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

청량산  학소대(鶴巢臺)는 한속담(寒粟潭) 상류의 수직절벽 오학(먹황새)의 서식

공룡발자국 맹개마을(소목화당 온혜)

 

자왈(子曰) 공자가 말하였다.

효자지사친야(孝子之事親也)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거즉치기정(居則致其敬) 기거하실 때에는 공경을 다하고,

양즉치기락(養則致其樂) 봉양할 때에는 즐거움을 다하며 ,

병즉치기우(病則致其憂) 병에 드신 때에는 근심을 다하고 ,

상즉치기애(喪則致其哀) 돌아가신 때에는 슬픔을 다하며 ,

제즉치기엄(祭則致其嚴) 제사지낼 때에는 엄숙함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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