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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돌로 세운 불국토 <17>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 전형기의 석탑들 ②

작성자도문3|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박경식 교수의 석조문화유산 답사  돌로 세운 불국토  <17>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 전형기의 석탑들 ②

통일신라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 명복 빌며 조성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전경.

 

8세기 초반의 신라 석탑

감은사지와 고선사지에서 건립된 석탑은 모두 3층 석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규모가 거대하기에 건립에 따른 시간과 경비의 문제는 불교의 발전에 따른 사찰의 증기(증가)와 맞물리며 여러 문제가 발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3층 석탑의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사찰에서 요구하는 석탑을 건립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를 통해 신라의 석탑은 점차 완성도를 높여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석탑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졌기에 신앙적인 면에서도 불상에 못지않은 중요한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를 통해 더 많은 소망을 이루고 싶었던 신라인의 마음도 녹아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은사지와 고선사지 삼층석탑 이후에 건립된 전형기의 석탑은 앞서 언급한 나원리 오층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그리고 다음에 소개할 장항리사지 오층석탑 3기에 불과하지만, 이들 석탑이 지닌 신라석탑 발달사에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의 양식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에 건립되어 있는 높이 7.3m 규모의 일반형 삼층 석탑이다. 석탑이 건립되어 있는 지역은 예로부터 황복사터라고 전하고 있어 황복사지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가 황복사에서 낙발(落髮)했다”라는 짤막한 기사만 전하고 있는데,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 중 1937년경에 수집한 기와편에 황복사(皇福寺) 및 왕복(王福)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황복사지의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구황동 삼층석탑 기단부.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8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조성되었다. 하층기단은 8매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지대석면석갑석이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면석에는 각각 2주의 탱주와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의 상면은 약간 경사지게 처리하였는데, 호각형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상층기단은 8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2기의 탱주와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상층기단 갑석의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초층탑신 받침이 마련되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각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탑신석에는 우주만 모각되었는데, 1층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낮아지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괴임대가 조출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단아한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만 남아있다.

 

2층 옥개석 속 사리장엄구
이 석탑은 1942년에 수리하였는데, 당시 2층 옥개석에서 銘文이 새겨진 금동사리함과 함께 2구의 순금불상을 비롯하여 많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금동사리함의 뚜껑 안쪽에서는 360여 자에 달하는 銘文이 확인되어 탑의 건립원인과 사리장엄의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즉, 신문왕이 692년(天授 3년)에 승하하자 다음 왕인 효소왕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석탑을 세웠다. 이후 702년(聖曆 3년)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우인 성덕왕이 즉위하여 706년(神龍 2년)에 다시 佛舍利, 金製彌陀像 1구, 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의 2층에 납입하여 神文大王神睦大后孝昭大王의 명복을 빌고 나아가 隆基大王과 同妃의 수복(壽福)을 빌며 法輪의 恒轉을 기원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왕실 안녕, 호국 발원 탑 건립 시작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석탑이 지닌 양식뿐만 아니라 사리장엄구에서 판독된 명문의 내용을 석탑이 건립되는 목적이 다양해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석탑이 지닌 양식적인 면에 있어 이보다 조금 앞서 건립된 감은사지 및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 확립된 전형기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즉, 전형기의 석탑에서는 주로 부재의 개별화가 이루어져 석탑 한기를 건립하는데 많은 양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황복사지 석탑에서는 기단부에서 조립된 석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탑신부에서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일석(一石)으로 조성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석탑에 이르러 석탑을 조성하는데 소요되는 석재의 수가 앞 시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선 석탑에서는 82매의 석재를 사용했음에 비해 이 석탑에서는 35매의 석재로 완성하고 있어 석탑의 건립(에) 사용된 석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탑 출토 금동 사리함 뚜껑의 병문.

 

그뿐만 아니라 탱주의 수가 상하층 기단 다같이 2주로 줄어 기단이 축소되면서 탑신부 역시 一石으로 조성되어 석탑의 전체적인 규모가 낮아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부재의 감소와 기단 및 탑신에서의 축소는 전형기 석탑에서 확립된 각부 양식을 모두 계승하면서 건립되고 있어 통일신라 초기에 석탑을 건립하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이룩된 신라 석탑의 양식적 완성의 진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사리장엄구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볼 때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승하한 692년에서 성덕왕이 사리장엄을 다시 봉안한 706년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先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했고, 이의 실현을 위해 사리장엄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때 석탑의 성격은 願塔임을 알 수 있다. 

 

즉, 석탑의 건립이 석가모니부처님 사리를 봉안한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납입되었음은 이 경전이 唐에서 번역된지 2년 후 신라에 도입되었고,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8세기 초반에 탑의 조성에 사상적 바탕을 마련해준 造塔經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석탑에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납임됨은 이 경전이 지닌 신비한 힘으로 인해 佛力을 통해 국가를 수호한다는 호국신앙의 의미까지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석탑 출토 금동여래좌상.

 

석탑의 성립에 다양한 목적이 내포됨은 주로 9세기에 이르러 건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석탑 통해 통일신라 초반에 이미 왕실의 안녕과 평화 또는 먼저 승하한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탑과 호국의 의미가 담긴 석탑의 건립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리 당시 수습된 사리구의 명문과 문헌 기록 및 석탑이 지닌 양식을 볼 때 8세기 초반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불교신문 3926호/2026년6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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