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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박기헌의 운강석굴 순례 <20> 운강 제5굴 ① ­ 대불동

작성자도문3|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박기헌의  운강석굴 순례 <20>  운강 제5굴 ① ­ 대불동

운강석굴 전체 통틀어 가장 압도적이고 ‘거대’

운강석굴 제5·6굴 전경. 제5·6굴이 조성된 암벽 앞에는 청대에 중수된 목조 누각이 세워져 있다.

 

구름과 맞닿은 누각 

         
운강석굴 중부에 자리한 제5굴은 제6굴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어, 두 석굴을 하나의 쌍굴(雙窟)로 보기도 한다. 이 두 석굴은 운강석굴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특히 뛰어나고 조각 내용 또한 풍부하여, 北魏 후기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제5·6굴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석굴 앞 암벽에 기대어 세워진 목조 누각이다. 이 건축물은 석굴과 목조건축이 결합한 운강석굴 특유의 장엄함을 보여준다. 그중 제5굴 누각은 4층 5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약 20m, 동서 양쪽 처마 끝의 너비 또한 약 16.7m에 이른다.

 

누각 하층 내부 서벽 옆에는 ‘重修雲岡大石佛閣’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는 淸代 順治 6년에서 8년(1649~1651년) 사이, 당시 宣大總兵이었던 동양량(養量)이 중심이 되어 모금을 진행하고 누각을 다시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서 양 벽면에는 이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護法諸天 불화가 자리하고 있다.

제5굴 본존불. 석가모니 부처님을 표현한 이 본존불은 운강석굴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청대에 大同 知縣의 王度는 이 누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도 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와 위태로운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히 맞닿아 있고, 굽어보니 인간 세상은 곳곳이 낮게 내려다보인다. 억만의 화신은 험준한 절벽을 열어 드러내고, 삼천 법계는 붉은 사다리를 이루었다(聳峰危閣與天齊, 俯瞰塵處處低. 億萬化身開, 三千法界作丹梯).” 이처럼 제5굴의 누각은 마치 구름과 맞닿아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 예로부터 ‘石窟摩雲’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운강에서 가장 큰 부처님


제5굴은 높이 약 17.4m, 너비 18.7m, 깊이 13m에 이르는 거대한 석굴이다. 석굴의 중심에는 높이 약 17미터에 달하는 본존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선정인을 맺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계신다. 좌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운강석굴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이며, 운강석굴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제20굴 露天大佛보다도 더 큰 크기를 자랑한다.

 

부처님의 거대한 규모는 세부적인 치수를 통해 더욱 실감 난다. 양다리를 교차해 앉은 결가부좌의 너비만 해도 무려 14.6m에 이르며, 손가락 중지의 길이는 약 2m에 달한다. 또한 자비롭게 길게 늘어진 귀의 길이 역시 약 3.4m에 이른다.

이러한 이유로 제5굴은 오래전부터 ‘대불동(大佛洞)’이라 불려 왔다. 실제로 이 거대한 공간 안에서 부처님을 마주하면, 그것이 인간이 만든 조형물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된다. 북위의 장인들은 오직 사람의 손과 정, 망치만으로 거대한 암벽을 끊임없이 다듬으며, 돌 속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천년의 흙가사


운강석굴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훼손을 겪어왔다.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불상들은 비와 바람, 전란과 인간의 손길 속에서 조금씩 마모되어 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후대의 불자들은 석굴을 보수하고 다시 장엄하며 그 신앙을 이어왔다.

제5굴 본존불 상호. 제5굴 본존불의 전신에는 요·금 시기에 진흙을 덧입히고 화려한 채색을 더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제5굴의 본존불은 북위 시기에 처음 조성된 원형 위에, 遼金 시기 진흙을 두껍게 덧입혀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비록 북위 시대 본래의 모습은 상당 부분 감추어졌지만, 후대 장인들이 새롭게 빚어낸 풍모 또한 깊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본존불의 전신에는 진흙이 덧입혀지고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얼굴과 가슴에는 금박이 입혀져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으며, 머리의 나발과 길게 늘어진 눈썹은 짙은 남색으로 채색되어 장중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袈裟의 표현은 당시 소조(塑造) 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양어깨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옷 주름은 마치 실제 천을 재단해 걸쳐놓은 듯 부드럽고 유려하다. 비록 긴 세월 속에서 가사의 색채는 많이 바래고 일부는 벗겨졌지만, 오히려 그러한 흔적은 이 거대한 불상에 천년 세월의 깊이와 역사적 무게를 더해준다.

 

흥미로운 점은 본존불 양옆에 자리한 높이 약 8m의 협시불을 통해 북위 시기의 원형과 이후 보수된 모습을 서로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본존불 좌측 협시불은 머리 부분에 북위 시대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지만, 신체에는 후대에 덧입혀진 진흙 소조 층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반대로 우측 협시불은 후대의 진흙층이 상당 부분 벗겨져 북위 시기의 본래 조각이 드러나 있다. 특히 褒衣博帶식 가사의 표현과 거친 암벽의 질감은 좌측 협시불의 부드러운 소조 표현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서로 다른 시대가 추구했던 미감과 조형 의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균열 속에서 세운 불법의 공간


제5굴의 두 협시불은 17m 높이의 본존불 곁에 자리하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뿐, 만약 다른 공간에 단독으로 세워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협시불을 암벽에 새겨 넣는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5굴 조성이 시작된 초기부터 석굴 내부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균열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균열은 서벽에서 시작되어 석굴 천장을 가로질러 동벽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제5굴 동벽에 자리한 좌측 협시불을 자세히 살펴보면, 맞은편 서벽의 우측 협시불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지 않고, 본래 예상되는 위치보다 석굴 입구 쪽으로 조금 치우쳐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배치상의 우연이 아니라, 동벽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대형 균열을 피하고자 협시불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조정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제5굴 동·서벽 협시불. 서벽의 협시불은 북위 당시의 본래 조각이 남아 있으며, 동벽의 협시불은 후대에 진흙을 덧입혀 조성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제5굴 서벽, 곧 제6굴과 맞닿아 있는 벽면의 구조이다. 두 거대한 석굴 사이를 가르는 암벽은 매우 얇아, 가장 얇은 부분의 두께는 불과 2~3c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구간에서는 서로 빛이 통과하는 작은 틈까지 확인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얇은 벽체가 천오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대한 석굴을 지탱하며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5굴 서벽에 조각된 협시불이 단순한 조각상을 넘어 구조적으로 암벽을 지지하는 기둥의 역할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5굴은 자연 암반의 균열과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며, 거대한 암벽 안에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북위 장인들의 치열한 도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거친 자연을 상대로 하면서도 그 속에서 균형과 안정성을 찾아내며 공간을 완성해 나갔다. 이러한 공학적 지혜는 깊은 불심과 결합하여, 마침내 장엄한 불법의 공간을 구현해 내기에 이르렀다.

 

[불교신문 3927호/2026년6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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