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우화상의 약병대치藥病對治와 반산화상의 지종극칙指蹤極則
경덕전등록을 인용한다. “복우산伏牛山 자재선사는 오흥인吳興人이고, 성은 이씨李氏이며, 처음 경산국일徑山國一 선사를 의탁하여 구족계를 받고, 뒤에 남강에서 대적선사大寂禪師를 뵙고 심지心地를 발명했다.”(伏牛山自在禪師者 吳興人也 姓李氏 初依徑山國一禪師受具 後於南康見大寂發明心地)
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난 이후 복우산에 은거했다. 어떤 날 대중에게 말했다.(師後隱于伏牛山 一日謂衆曰)
“즉심즉불即心即佛은 무병자無病者가 질병을 찾는 구절이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은 약방문藥方文으로 질병을 대치對治하는 구절이니라.”(即心即佛 是無病求病句 非心非佛 是藥病對治句)
학승이 여쭈었다. “무엇이 탈쇄脫灑하는 일구一句입니까?”(僧問 如何是脫灑底句)
화상이 답했다. “복우산 아래 고금古今의 풍광風光이니라.”(師曰 伏牛山下古今)
나의 견해: 스승의 날카로운 안목이나 자유자재한 기봉을 자랑하는 것은 제자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이를 거스르고 스승의 부정적인 일면을 드러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복우화상의 무병구병구無病求病句와 약병대치구藥病對治句가 또한 그러하다.
마조화상의 즉심즉불은 무병자로 하여금 질병을 찾게하는 구절이다. 질병이 없는 평상인을 병자로 만들어놓는다. 마치 그 양상이 어떠한가? “사향과 같은 자연향이 있다면, 하필 바람 앞에 설 필요가 있으랴.”(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 마조화상의 즉심즉불은 마치 사향노루가 사향을 자랑하느라 바람 앞에 서있는 꼴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마조화상의 비심비불은 약방문으로 질병을 대치하는 구절이다. 약방문이란 병이 있는 이들한테는 감로수와 같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독약이다. 마조스님은 즉심즉불이라는 전염병을 천하에 퍼뜨리고, 대치하는 처방으로 비심비불이라는 약방문을 팔고 다닌 말하자면 떠돌이 장사꾼이다.
“무엇이 탈쇄脫灑하는 일구입니까?” 병이 들면 마음이 우울하다. 그러나 원래 병이 없으면 산뜻하고 말쑥하다. 이를 탈쇄라 한다. 본래성불하여 그 당처가 청정한 일구는 무엇이냐? 학승의 질문이 그러하다.
“복우산 아래 고금의 풍광이니라.” 이는 마조의 약방문마저 단칼에 베어버리는 청량한 감로수와 같다. 산천의 초목이 이미 만고에 친히 본지풍광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위에 다시 무슨 마음이나 부처가 있고, 무슨 마음도 부처도 아니며, 또 이것은 물건도 아니라는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어디에 있으랴. 복우산 위에는 꽃이 피고 산새가 지저귀며, 아래 시냇물에는 물고기들이 한가하구나.
유주幽州 반산보적盤山寶積 화상은 마대사의 법을 이었고, 북경인北京人이며, 성씨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시중법문示衆法門이 전한다.
“만약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말한다면 지금의 시인時人은 여전히 현미玄微한 경지에 들어갈 수 없고, 만약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지종指蹤의 극칙極則이 될 수 있다.”(若言卽心卽佛 今時未入玄微 若言非心非佛 猶是指蹤之極則)
나의 견해: 상등인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서도 달리고, 중등인은 살갗의 털에 스치기만 해도 달리지만, 하등인은 살갗에 강력히 부딪혀야 비로소 움직인다. 반산 화상이 지금 사람들은 즉심즉불이라는 방편만으로는 현미한 경지에 들 수 없다고 경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 즉심즉불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알아차려야 하는 상등인을 위한 법문이다. “바로 마음이고, 곧 부처이다.”라고 말하자마자, 말 이전에 자기 안의 온전한 청정각성을 단박에 깨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반산화상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학인들은 하등마와 같다. 이에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문자를 따라 지해知解를 내고 만다. 채찍의 그림자를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채찍 자체를 부처라고 착각하고 그곳에 안주해 버린다. 이 때문에 결코 말길이 끊어진 현미한 경지에는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즉심卽心의 바로 그 마음은 성인의 마음이 아니라 범부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 범부의 마음이 고스란히 부처의 마음이니, 이는 곧 원각경 청정혜보살장에서 밝힌 여래경계如來境界와 다름없다. 비심비불이 비량比量이자 방편의 극치라면, 이 즉심즉불은 현량現量이자 실상實相의 극치이다. 이 즉심즉불의 도리에서 대매화상大梅和尙은 곧바로 당처當處를 깨달아 들어갔다.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릴 줄 알았던 상등근기가 바로 대매화상이다.
그렇다면 비량이자 방편의 극치인 비심비불을 반산화상은 어째서 지종指蹤의 극칙極則이라 달리 말했는가? 더욱 구체화具體化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원각경을 인용한다. “수다라교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느니라. 만일 다시 달을 본다면, 가리키는 손가락이 필경 달이 아님을 분명히 알지니라.”(修多羅教 如標月指 若復見月 了知所標 畢竟非月)
지종指蹤은 표월지標月指와 그 의미가 상통한다. 발종지시發蹤指示란 사자성어를 간략히 지종이라 한다. 사냥꾼이 짐승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에게 추적하여 잡아오라고 지시하는 것을 발종지시라 한다. 사냥꾼은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은 스승이고, 사냥개는 수행자이며, 사냥감의 발자취는 언어와 문자로 나타난 법문이고, 진짜 사냥감은 어묵동정의 이전에 존재하는 비밀장 곧 청정각성이다.
부연한다. 비심비불은 왜 지종의 극칙인가? 지종의 극칙이란 사냥꾼이 사냥개에게 발자국을 가리켜 보여주는 방편 중에서 가장 극치에 이른 준칙이라 말할 수 있다. 마조화상이 던진 즉심즉불이라는 사냥감의 발자국을 보고, 미련한 사냥개들은 그 발자국이 진짜 사냥감인 줄 알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발자국만 핥고 있다. 이를 본 사냥꾼 바로 반산화상은 사냥개의 대통 통을 치며, “이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고함지르며 그 발자국마저 지워버린다. 사냥개가 의지하던 마지막 발자국까지 빼앗아 버림으로써, 사냥개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진짜 사냥감을 보게 한다. 곧바로 어묵동정 이전의 청정각성을 직접 추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심비불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바로 표월지 중에서도, 손가락 자체를 달로 착각하는 자들의 눈을 멀게 만드는 가장 잔인하고도 완벽한 손가락 곧 지종의 극칙인 것이다.
복우화상과 반산화상은 모두 마조스님의 문하이다. 동일한 비심비불을 두고서도, 전자는 약병대치藥病對治 곧 약방문으로 즉심즉불의 질병을 대치하는 구절로 보지만, 후자는 방편의 최고봉 바로 지종극칙指蹤極則으로 본다.
부모나 스승을 칭찬하는 것은 하나의 공덕이다. 자기 스승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백천번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지난한 문제이다. 반산화상의 지종극칙은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지만, 복우화상의 병약대치는 온몸에 땀을 흘리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다. 이에 복우화상의 견해에 공경을 표한다.
2026. 6. 12. 14:28, 丙午 甲午 丁巳 丁未, 길상묘덕일 규련원주葵蓮園主 정덕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