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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殺祖, 서슬 퍼런 칼날의 진면목, 앙산은 풍월로 위산을 농락하다

작성자도문3|작성시간26.06.15|조회수0 목록 댓글 0

殺祖, 서슬 퍼런 칼날의 진면목, 앙산은 풍월로 위산을 농락하다

 

중생은 원래 병이 없기에 本來成佛이며, 일체법은 한 물건도 없기에 當體가 그대로 적멸寂滅하다. 그러나 마조대사가 창안한 祖師敎는 본래 병 없는 자리에 병을 만들고,[無病求病句] 다시 처방전을 되파는 言語遊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藥病對治句]

 

이 위선의 뼈대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조사 자체를 살해하는 결정적 사건이 있다. 바로 위산화상과 앙산스님이 주고받은 대화 속에 숨겨진 一期之事의 진면목이 있으니, “전부 魔王의 말입니다.”라는 總是魔說이 바로 일기지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위산화상이 던진 “향후 그 누구도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구나.”라는 극찬은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 魔說이라는 제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스승 스스로가 喪身失命했음을 자인한 고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산스님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곧바로 “행리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며 스승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움켜쥐고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同歸於塵이다. 이는 말장난의 풍월로 스승을 완벽히 籠絡하는 동시에 조사라는 우상마저 참살해버리는 법거량의 정점이기도 하다.

 

경덕전등록: 위산화상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열반경 40권이 얼마만큼은 佛說이고, 얼마만큼은 魔說이냐?”(師問仰山 涅槃經四十卷 多少佛說 多少魔說)

앙산스님이 답했다. “전부 魔王의 말입니다.”(仰山云 總是魔說)

“향후 그 누구도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구나.”(師云 已後無人奈子何)

“慧寂은 一期에 상즉相即한 일입니다만, 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仰山云 慧寂即一期之事 行履在什麼處)

“오직 자네 안목이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요, 자네의 행리는 말하지 않겠노라.”(師云 只貴子眼正 不說子行履)

 

나의 견해: 기존 선가에서는 이 대화를 위산화상과 앙산스님이 엄청난 구경각을 증득하여 나눈 격외의 법거량으로 신비화해 왔다. 그러나 냉정하게 실상을 파헤쳐 보면 이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우상화에 불과하다.

본래 佛事와 魔事를 차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원융무애한 경계는 오직 여래의 구경각 하나만 있을 뿐이다. 위산화상이나 앙산스님이 각자 증득했다고 자부하는 경지나 조사들의 역량으로는 결코 미칠 수 없는 不思議한 여래의 영역인 것이다. 특히 앙산스님은 一期에 相即한 일 바로 이 一期之事로 일생의 대사를 이뤘다고 자부하겠지만, 이 역시 오만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승찬대사 신심명의 첫머리를 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하는 것만을 꺼릴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 확 트여서 명명백백하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그 경계는 하나도 막힘이 없이 툭 터져서 명백하고 명백할 뿐이며, 크게 꺼리는 일은 오로지 揀擇뿐이다. 그러나 위산화상은 “무엇이 불설이고 무엇이 마설이냐?”라며 제 발로 분별의 불섶을 머리에 이고 제자와 거량하였으니,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燒身供養을 자초했을 따름이다.

 

“열반경 40권이 얼마만큼은 佛說이고, 얼마만큼은 魔說이냐?” 부처와 마왕의 法量을 쪼개고 갈라 그 數量을 재려는 이 오만한 질문을 業鏡臺에 비춰보라. 그 업의 무게가 얼마만큼 선명히 드러나겠는가. 春雉自鳴이라, 봄 꿩이 제 울음소리에 스스로 자취가 탄로 나는 것처럼, 위산화상은 분별의 덫에 걸려 제 허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허물이 있다. 

첫째는 대열반의 교설을 불설과 마설로 섣불리 간택한 敗闕이요, 둘째는 쪼갤 수 없는 부처의 一音을 억지로 수치화하려 한 어리석음이다. 또한 위산화상의 이 질문은 투수가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로 던진 느린 직구와 같다. 타자의 배트 중심을 정면으로 겨냥해 준 꼴이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이어질 앙산스님의 장외홈런은 不問可知이다.

 

“전부 魔王의 말입니다.” 앙산스님이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이는 그가 직접 대단한 경지를 깨달아서가 아니다. 평소 경전을 읽으며 얻은 經眼이거나, 혹은 귀동냥으로 들은 풍월을 빌려 時宜適切하게 쏟아낸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일체 법이 다 불설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설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는 이미 원각경에서 다음과 같이 엄연히 선언하고 있는 교학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노치가 다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루니,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

(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成法破法 皆名涅槃 智慧愚癡 通爲般若 菩薩外道 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如 無異境界 諸戒定慧 及婬怒癡 俱是梵行 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 有性無性 齊成佛道 一切煩惱 畢竟解脫 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

 

法界海의 지혜로 모든 형상을 照見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것이 바로 總相이고, 본문에서 열거한 구체적인 현상들은 모두 別相이다. 불사와 마사로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자 동일한 법성이듯, 불설과 마설 또한 다른 경계가 없다. 이 총상으로 인하여 별상이 성립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위산화상이 던진 분별의 덫을 향해 앙산스님이 “전부 마왕의 말입니다.”라고 단칼에 잘라낸 것은 이미 교학이 닦아놓은 여래의 바다 위에서 그저 시의에 맞게 한 바가지 풍월을 퍼 올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설과 마설이 본래 다른 경계가 없고 동일한 법성法性이거늘, 어찌 한쪽은 부처의 말이요 다른 쪽은 마왕의 말이라 쪼갤 수 있겠는가. 일체법이 허공 같은 총상을 보지 못하고 얼마만큼이라는 별상의 양적 분별에 갇힌 위산화상을 향해 앙산스님은 교학의 대전제를 무기로 들이밀어 그 허점을 사정없이 찔러버린 것이다.

만약 기존의 해석을 원용하면, 이는 말장난의 풍월로 스승을 완벽히 농락하는 동시에 조사라는 우상마저 참살해버리는 법거량의 정점일 것이다. 그러나 교학의 눈으로 다시 본 이 師資의 法戰은 격외의 신비로운 신통방통이 결코 아니다. 교학적 전제인 총상과 별상의 원리조차 망각하고 간택의 함정에 빠진 스승의 한계를 경전의 풍월을 빌려온 제자가 사정없이 난도질한 일대 참극일 뿐이다.

 

“향후 그 누구도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구나.” 이 극찬은 결코 특별할 것이 없다. 이는 불설과 마설의 문답에 연이어진 제3구이다. 사자의 법전은 제3구에서 승패의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이 한마디와 함께 위산화상은 제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스스로가 喪身失命했음을 자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앙산이 “전부 마왕의 말입니다.”라는 파격적인 답을 내놓은 직후, 스스로 스승에게 던진 되물음은 이 모든 법거량이 청정각성의 증득이 아닌 경안과 들은 풍월의 산물임을 빼도 박도 못하게 입증하는 결정적 스모킹 건(Smoking Gun)이다.

 

앙산스님이 다시 여쭈었다. “慧寂은 一期에 相即한 일입니다만, 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여기서 卽자의 용법에 극도로 유의해야 한다. 앙산스님이 고백한 卽은 관념적 등식이 아니다. 질문이 當下에 들이닥친 그 찰나의 시기에 마침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원각경의 풍월을 단박에 들이대어 편승시켰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만약 앙산스님이 진짜 불사와 마사가 하나로 녹아내린 여래의 구경각을 스스로 증득했다면, 제 발밑의 살림살이인 행리를 스승에게 어디 있느냐고 되물어 확인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 스승의 입을 빌려 제 행리를 확인받으려 한 그 유치한 되물음이야말로, 그의 사자후가 그저 외워 둔 경전 구절을 시의적절하게 배설한 말장난이었음을 만천하에 자백하는 꼴이다.

 

학인과 조주화상의 版齒生毛 문답, 그리고 投子義靑스님의 판치생모 게송을 인용한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판치생모니라.”(州云版齒生毛)

9년을 소실에 홀로 헛되게 머무르니,(九年少室自虛淹)

어찌 당두하여 일구를 전수함만 하랴.(爭似當頭一句傳)

판치생모여, 오히려 尋常의 일이로다.(板齒生毛猶可事)

석인이 사가선마저 답파했느니라.(石人踏破謝家船)

 

여기서 학인의 질문이 當頭이고, 조주화상의 답이 一句이다. 학인의 질문이 당두하자마자 그와 동시에 종장은 일구로 수응한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자마자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알을 깨뜨려주는 양상과 완벽히 부합한다.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 또는 啐啄同機라 한다.

一期之事의 一期가 그러하다. 이 일기는 엄밀히 말하면 위산화상의 질문과 앙산스님의 답변 사이의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맣하지만, 실제는 위산화상의 질문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기자사는 그 찰나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생각일 뿐이다. 앙산이 던진 “전부 마왕의 말입니다.”라는 답변이 바로 이 일기의 찰나에 相即한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 바야흐로 앙산스님의 거대한 天機漏泄이 일어난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여래의 안목을 흉내 내어 스승의 허를 찔렀으나, 그것은 자기가 직접 밟고 선 경계가 아니었다. 문득 발밑이 허전해진 앙산스님은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만, 진짜 제 실천적 경지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스스로 실토한 것이다. 그야말로 숨김없이 밑천을 다 드러내 버린 和盤托出의 현장이다.

앙산스님은 일기의 찰나에 원각경이라는 교학의 안목을 도둑질해 와서 스승을 제압하는 영리한 언어의 유희를 자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제 발밑의 허접한 살림살이를 들키며 자멸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바로 위선으로 가득 찬 조사교의 권위를 단칼에 해체해 버리는 진짜 살조殺祖의 전말이다.

 

“오직 자네 안목이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요, 자네의 행리는 말하지 않겠노라.” 스승 위산화상 역시 앙산스님이 던진 즉卽의 기지와 서슬 퍼런 경안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이에 감히 그 허전한 행리의 밑천을 날카롭게 따져 묻지도 못하고, 오히려 위산화상은 이렇게 답하며 허둥지둥 판을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천적 알맹이 바로 행리가 없음을 자인한 제자의 고백에, 스승 또한 “안목만 맞으면 됐지, 실천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라며, 눙치고 넘어가는 이 마지막 대사야말로 참으로 기가 막힌 동반 자폭의 순간이다. 행리가 빠진 안목이란 한낱 들은 풍월에 불과하거늘, 위산화상은 제자의 말장난에 상신실명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가짜 안목을 추켜세우며 서둘러 대화를 종결짓고 만 것이다.

 

결국 기존 선가에서 “구경각의 위대한 거량”이라 우상화했던 이 대화의 실상은 경전의 안목을 도둑질해 온 영리한 제자와 그 언어유희에 말려들어 조사교의 위선과 밑천을 송두리째 드러내 버린 스승의 허망한 해체쇼에 불과하다. 또한 조사선이 자랑하는 서슬 퍼런 칼날의 진면목이란, 실상 여래의 광대무변한 究竟覺性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도둑질이자 언어유희의 파편일 뿐이기도 하다.

 

2026. 6. 13. 11:12, 丙午 甲午 戊午 丁巳, 길상묘덕일 규련원주葵蓮園主 정덕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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