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교祖師敎의 패궐처敗闕處, 앙산은 풍월로 위산의 허망을 베다
1. 서문序文, 마조화상이 빚어낸 비심비불과 평상심의 민낯
중생은 원래 병이 없기에 본래성불本來成佛이며, 일체법은 한 물건도 없기에 당체當體가 그대로 적멸寂滅하다. “비유하면 진여는 한 물건도 없는 것처럼 선근의 회향도 또한 이와 같나니, 그 체성은 한 물건도 없는 줄을 알지니라.”(譬如眞如 無有一物 善根迴向亦復如是 了知其性無有一物) 화엄경의 십회향품은 무유일물無有一物 곧 “한 물건도 없다.”라고 단언하고, 원각경의 청정혜보살장은 유여허공猶如虛空 바로 “모든 형상이 허공과 같다.”라고 천명한다. “법계해法界海의 지혜로 조견照見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
그러나 마조대사가 창안한 조사교祖師敎는 본래 병 없는 자리에 짐짓 병을 만들고, 다시 처방전을 되파는 언어의 모순에 착종錯綜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조사교가 은폐해 온 근본적 패궐처敗闕處이다. 이를 복우화상伏牛和尙의 시중법문示衆法門이 명백히 증명한다. “즉심즉불即心即佛은 무병자無病者가 질병을 찾는 구절이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은 약방문藥方文으로 질병을 대치對治하는 구절이니라.”(即心即佛 是無病求病句 非心非佛 是藥病對治句)
마조화상의 즉심즉불은 멀쩡한 이로 하여금 질병을 찾게 만드는 허물이 있다. 마치 그 양상이 어떠한가? 사향노루가 바람 앞에 서 있고, 봄에 수꿩이 꿩꿩하며 우는 것과 같다. 자기의 자취를 드러내고자 하는 아상我相의 발로를 면할 수 없다. 이처럼 즉심즉불의 폐해도 적지 않지만, 비심비불에 비하면 조적지혈鳥跡之血에 불과하다.
“모든 형상이 허공과 같다,” “한 물건도 없다.”라는 본래적멸의 자리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이 비심비불의 언어도단은 도리어 진여의 청정함을 가리는 또 하나의 덫이 되었으니, 이는 본래적멸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역불배교逆佛背敎의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더 심각한 도그마는 마조화상이 주창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치명적 허구성에 있다. 마조화상은 범부의 일상적인 마음이 곧 도라고 말했으나, 실상 그들이 요구한 평상심이란 감히 불심佛心이나 성위聖位로 추앙하는 십지보살十地菩薩의 청정무구한 성심聖心에나 해당하는 고도의 경지였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일컫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으며, 취사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정凡情도 없고 성해聖解도 없느니라. 이에 유마경에 이르기를, ‘범부행凡夫行도 아니고, 성현행聖賢行도 아니니,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니라.’라고 한 것이다.”(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舍 無斷常 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
마조어록에 나타난 평상심의 정의가 위와 같다.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절대적 조건을 달아놓고, 이를 한낱 평상심이라 기만하며 괴상망칙한 위선의 언어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불심과 성심을 평상심으로 대체해 버린 이 어리석은 도그마는, 선객들로 하여금 삶의 구체적인 행리를 잃어버린 채 오만한 말장난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다. 즉심즉불을 비심비불로 전복시키고, 십지보살의 성심을 평상심으로 둔갑시켜 탄생한 마조화상의 조사교祖師敎는 방편의 범주를 아예 벗어나 본래의 불교를 왜곡하고 훼손시킨 치명적인 위선일 뿐이다.
과거 마조화상이 교학의 틀을 깨부수고 조사교라는 새로운 파격을 세웠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 조사교가 쌓아 올린 허망한 우상을 다시 전복해야 마땅하다. 마조화상이 던진 비심비불의 덫은 선가 전체를 오도하는 패궐로 확장되었고, 불교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잃어버렸다. 이에 이 글은 선가에서 오랫동안 신비화해 온 위앙종潙仰宗 사자師資 사이의 해체극을 통해 조사교 전체의 패궐을 청량한 풍월의 칼날로 낱낱이 베어내어 드러내고자 한다. 이 철저한 파쇄와 해체의 끝에서 우리는 원시불교의 엄정한 실천과 대승불교의 광대한 서원을 온전히 회복할 것이다. 나아가 원시불교, 대승불교, 조사교를 모두 딛고 넘어선 ‘그다음의 불교’, 즉 인류의 삶을 구체적으로 구제할 새로운 불교의 서막이 이곳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2. 불설과 마설 공안의 원문
이 공안은 952년 설봉스님의 법손 정靜 균筠 양사兩師가 편찬한 조당집에는 없고, 1004년 송대宋代 도원道原스님이 편찬한 경덕전등록에 비로소 나온다. 진위 여부는 논외로 하고 평론하고자 한다.
경덕전등록: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열반경 40권이 얼마만큼은 불설佛說이고, 얼마만큼은 마설魔說이냐?”(師問仰山 涅槃經四十卷 多少佛說 多少魔說)
앙산스님이 답했다. “전부 마왕魔王의 말입니다.”(仰山云 總是魔說)
“향후 그 누구도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구나.”(師云 已後無人奈子何)
“혜적慧寂은 일기一期에 상즉相即한 일입니다만, 행리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仰山云 慧寂即一期之事 行履在什麼處)
“오직 자네 안목이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요, 자네의 행리는 말하지 않겠노라.”(師云 只貴子眼正 不說子行履)
3. 위산스님의 간택, 불섶을 머리에 이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다
기존 선가에서는 이 대화를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이 엄청난 구경각을 증득하여 나눈 격외의 법거량으로 신비화해 왔다. 그러나 냉정하게 그 실상을 파헤쳐 보면 이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우상화에 불과하다.
본래 불사佛事와 마사魔事를 차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원융무애한 경계는 오직 여래의 구경각 하나만 있을 뿐이다. 위산스님이나 앙산스님이 각자 증득했다고 자부하는 경지나 조사들의 역량으로는 결코 미칠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여래의 영역인 것이다. 특히 앙산스님은 일기一期에 상즉相即한 일 바로 이 일기지사一期之事로 일생의 대사를 이뤘다고 자부하겠지만, 이 역시 오만방자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승찬대사 신심명의 첫머리를 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하는 것만을 꺼릴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 확 트여서 명명백백하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그 경계는 하나도 막힘이 없이 툭 터져서 명백하고 명백할 뿐이며, 크게 꺼리는 일은 오로지 간택揀擇뿐이다. 그러나 위산스님은 “무엇이 불설이고 무엇이 마설이냐?”라며 제 발로 분별의 불섶을 머리에 이고 제자와 거량하였으니,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자초했을 따름이다.
“열반경 40권이 얼마만큼은 불설佛說이고, 얼마만큼은 마설魔說이냐?” 부처와 마왕의 법량法量을 쪼개고 갈라 그 수량數量을 재려는 이 오만불손한 질문을 업경대業鏡臺에 비춰보라. 그 업의 무게가 얼마만큼 선명히 드러나겠는가.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 봄 꿩이 제 울음소리에 스스로 자취가 탄로 나는 것처럼, 위산스님은 분별의 덫에 걸려 제 허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허물이 있다. 첫째는 대열반의 교설을 불설과 마설로 섣불리 간택한 패궐敗闕이요, 둘째는 쪼갤 수 없는 부처의 일음一音을 억지로 수치화하려 한 어리석음이다.
또한 위산스님의 이 질문은 투수가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로 던진 느린 직구와 같다. 타자의 배트 중심을 정면으로 겨냥해 준 꼴이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이어질 앙산스님의 장외홈런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4. 총시마설總是魔說이여, 비심비불非心非佛의 분신이로다
“전부 마왕魔王의 말입니다.” 앙산스님이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이는 그가 심원深遠한 구경각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바로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이 주고받은 대화 속에 숨겨진 일기지사一期之事의 진면목이 있으니, “전부 마왕魔王의 말입니다.”라는 총시마설總是魔說이 바로 일기지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총시마설이여, 이는 또한 마조화상의 비심비불非心非佛의 분신이로다.
부연하면, 마조화상이 창안한 조사교의 치명적 독소인 비심비불의 논리를 시의적절하게 들이댄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마조화상의 가르침을 원용하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불설도 또한 당연히 비불설非佛說이 되고, 다시 마왕의 말 곧 마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산스님은 조사교가 스스로 파놓은 비심비불의 덫을 무기로 삼아, 얼마만큼이라는 별상의 양적 분별에 갇힌 스승의 허점을 사정없이 찔러버린 것이다.
만약 기존의 해석을 원용하면, 이는 말장난의 풍월로 스승을 완벽히 농락하는 동시에 조사라는 우상마저 참살해버리는 법거량의 정점일 것이다. 그러나 교학의 눈으로 다시 본 이 사자師資의 법전法戰은 격외의 신비로운 신통방통이 결코 아니다. 교학적 전제인 총상과 별상의 원리조차 망각하고 간택의 함정에 빠진 스승의 한계를 조사의 어록이나 들은 풍월을 빌려온 제자가 사정없이 난도질한 일대 참극일 뿐이다.
5. 상신실명喪身失命했음을 자인하는 항복 선언
“향후 그 누구도 자네를 어찌하지 못하겠구나.” 이는 다소불설多少佛說 다소마설多少魔說과 총시마설의 문답에 연이어진 제3구이다. 어떤 공안을 막론하고, 그 법전은 제3구에서 승패의 징후가 나오는 법이다. 이 제3구는 마설魔說이라는 제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스승 스스로가 상신실명喪身失命했음을 자인한 고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장난의 풍월로 스승을 완벽히 농락籠絡하는 동시에 조사라는 우상마저 참살해버리는 법거량의 정점이기도 하다.
또한 앙산스님이 “전부 마왕의 말입니다.”라는 파격적인 답 직후, 스스로 스승에게 던진 되물음은 이 모든 법거량이 청정각성淸淨覺性의 증득이 아닌 조사 어록이나 들은 풍월의 산물임을 빼도 박도 못하게 입증하는 결정적 스모킹 건(Smoking Gun)이기도 하다.
6. 일기一期의 진면목과 화반탁출和盤托出
앙산스님이 다시 여쭈었다. “혜적慧寂은 일기一期에 상즉相即한 일입니다만, 행리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여기서 즉卽자의 용법에 극도로 유의해야 한다. 앙산스님이 고백한 즉卽은 관념적 등식이 아니다. 질문이 당하當下에 들이닥친 그 찰나의 시기에 마침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조사의 어록이나 들은 풍월, 다시 말하면 비심비불을 변용하여 단박에 들이대고 편승시켰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만약 앙산스님이 진짜 불사와 마사가 하나로 녹아내린 여래의 구경각을 스스로 증득했다면, 제 발밑의 살림살이인 행리를 스승에게 어디 있느냐고 되물어 확인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 스승의 입을 빌려 제 행리를 확인받으려 한 그 유치한 되물음이야말로, 그의 사자후가 그저 외워 둔 어록의 구절을 시의적절하게 배설한 말장난이었음을 만천하에 자백하는 꼴이다.
조사선에서 당두當頭와 일구一句의 찰나적 결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안으로 조주스님의 판치생모版齒生毛 문답이 있다. 그리고 투자의청投子義靑스님의 판치생모 게송을 인용한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판치생모니라.”(州云版齒生毛)
9년을 소실에 홀로 헛되게 머무르니,(九年少室自虛淹)
어찌 당두하여 일구를 전수함만 하랴.(爭似當頭一句傳)
판치생모여, 오히려 심상尋常의 일이로다.(板齒生毛猶可事)
석인이 사가선마저 답파했느니라.(石人踏破謝家船)
여기서 학인의 질문이 당두當頭이고, 조주스님의 답이 일구一句이다. 학인의 질문이 당두하자마자 그와 동시에 종사는 일구로 수응한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자마자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알을 깨뜨려주는 양상과 완벽히 부합한다.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 또는 줄탁동기啐啄同機라 한다.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문답에서 말한 일기지사一期之事의 일기一期가 바로 그러하다. 이 일기는 엄밀히 말하면 위산스님의 질문과 앙산스님의 답변 사이의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지만, 실제는 위산스님의 질문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기지사는 그 찰나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생각일 뿐이다. 앙산이 던진 “전부 마왕의 말입니다.”라는 답변이 바로 이 일기의 찰나에 상즉相即한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 바야흐로 앙산스님의 거대한 천기누설天機漏泄이 일어난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여래의 안목을 흉내 내어 스승의 허를 찔렀으나, 그것은 자기가 직접 밟고 선 경계가 아니었다.
“행리行履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만약 앙산스님이 진짜 불사와 마사가 하나로 녹아내린 여래의 구경각을 스스로 증득했다면, 제 발밑의 살림살이인 행리를 스승에게 어디 있느냐고 되물어 확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문득 발밑이 허전해진 앙산스님은 “말장난은 이렇게 했습니다만, 진짜 제 실천적 경지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스스로 자기 직접경계直接境界를 실토한 것이다. 그야말로 숨김없이 밑천을 다 드러내 버린 화반탁출和盤托出의 진풍경珍風景이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 스승의 입을 빌려 제 행리를 확인받으려 한 그 유치한 되물음이야말로, 그의 사자후가 그저 도둑질해 온 조사교의 말장난이었음을 만천하에 자백하는 꼴이다. 그는 스승의 패배에 안주하지 않고 이 질문으로 스승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움켜쥔 채 천 길 나락으로 함께 떨어져 버린다. 완벽한 동귀어진同歸於塵이다.
앙산스님은 일기의 찰나에 비심비불이라는 마조화상의 안목을 변용하여 총시마설이란 사자성어로 스승을 제압하는 영리한 언어의 유희를 자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제 발밑의 허접한 살림살이를 들키며 자멸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바로 위선으로 가득 찬 조사교의 권위를 단칼에 해체해 버리는 진짜 살조殺祖의 전말이기도 하다.
7. 사자師資의 동반 자폭
“오직 자네 안목이 바른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요, 자네의 행리는 말하지 않겠노라.” 스승 위산스님 역시 앙산스님이 던진 비심비불의 기지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이에 감히 그 허전한 행리의 밑천을 날카롭게 따져 묻지도 못하고, 오히려 허둥지둥 판을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행리가 빠진 안목이란 한낱 들은 풍월에 불과하거늘, 위산스님은 제자의 말장난에 상신실명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가짜 안목을 추켜세우며 서둘러 대화를 종결짓고 만 것이다. 실천적 알맹이 바로 행리가 없음을 자인한 제자의 고백에, 스승 또한 “안목만 맞으면 됐지, 실천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라며 눙치고 넘어가는 이 마지막 대사야말로 참으로 기가 막힌 동반 자폭의 순간이다.
결국 기존 선가에서 “구경각의 위대한 거량”이라 우상화했던 이 대화의 실상은 타인의 안목을 도둑질해 온 영리한 제자와 그 언어유희에 말려들어 조사교의 위선과 밑천을 송두리째 드러내 버린 스승의 허망한 해체쇼에 불과하다. 또한 조사선이 자랑하는 서슬 퍼런 칼날의 진면목이란, 실상 여래의 광대무변한 구경각성究竟覺性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도둑질이자 언어유희의 파편일 뿐이기도 하다.
8. 결어結語, 조주스님의 덫, 그리고 불성과 업식의 생처生處 원각묘심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있느니라.”(州云 有)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가죽포대 속으로 처박혀 들어갔습니까?”(僧云 旣有 爲甚麽卻撞入這箇皮袋)
“그놈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州云 爲他知而故犯)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又有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스님이 답했다. “없느니라.”(州曰 無)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데, 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없습니까?”(僧云 一切衆生皆有佛性 狗子爲什麽卻無)
“그놈에게 업식業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라.”(州云 爲伊有業識在)
수행인이 불성의 유무를 묻는 것은 신심信心을 확립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성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 불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불성을 철견徹見한 수행자라면 구태여 타인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물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존 선가에서는 설봉스님의 헌사를 시작으로 조주를 감히 고불古佛이라 추켜세워 왔고, 심지어는 1330년 원나라 문종文宗이 사리탑을 세웠는데 그 탑호塔號가 바로 대원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지탑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이다. 그러나 실제는 이백李白이 “백발이 삼천 장이로다.”(白髮三千丈)라 읊고, “폭포수가 삼천 척을 직하하니 은하수가 구천에서 쏟아지는가 의심되도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고 했던 허황된 문학적 과장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 고불의 실상이 딱 그러하니, 겨우 십신十信 보살에 불과한 이를 최고의 불지佛地라 우기는 가당치 않은 우상화일 뿐이다.
마조화상이 비심비불의 기치旗幟로 초래한 조사교의 비참한 패궐처는 후대 조주스님의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 곧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무無자 화두에 이르러 그 기만적 개화가 절정에 달한다. 마조화상의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이라는 인위적인 말장난을 조주스님은 개의 불성 유무有無라는 또 다른 언어의 덫으로 변주하여 중생들을 거대한 감옥에 가두었다. 이 역시 본래 병 없는 무병자에게 질병을 강제로 주입하고, 다시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 처방전을 되파는 조사교 고유의 악순환이자 구조적 모순이다.
개가 불성이 없다는 이 기괴한 학설은 영겁永劫을 걸쳐 궁구해도 결코 철학적이나 경전적으로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 단지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마조화상이 제멋대로 평상심을 정의하고, 앙산스님이 여래선을 폄하하며 그 위에 조사선을 가립假立한 것처럼, 불성 또한 조주라는 조사가 제 입맛대로 재정의하면 그만인 일이다. 이는 소위 조사라는 권력자들이 부려온 전매특허專賣特許인지라, 그 기만의 역사에서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풍경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물었다.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있느니라.”하니 이는 증익방增益謗이고, “없느니라.”하니 이는 손감방損減謗이며, 다시 유무有無로 간택하여 상위방相違謗을 범하고 말았다. “그놈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 “그놈에게 업식業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라.” 전자는 성인이고 후자는 범부이다. “그놈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 이는 원각경 미륵보살장 중에 “선남자여, 보살이 변화하여 세간에 시현示現함은 애욕이 근본이 됨이 아니고 단지 자비를 쓴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애욕을 버리게 하고자 여러 탐욕을 빌려 생사해生死海에 들어가니라.”(善男子 菩薩變化 示現世間 非愛爲本 但以慈悲 令彼捨愛 假諸貪欲 而入生死)라는 경계와 같다.
어떤 스님이 대위산에 이르니, 위산스님이 면전에 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명백明白한 놈이로고, 명명明明한 놈이로다.”(有僧到大潙 師指面前狗子云 明明个 明明个)
어떤 스님이 바로 위산스님께 물었다. “이미 명명한 놈이라면, 어째서 머리 안에 처박고 그 속에 있습니까?”(僧便問師 旣是明明个 爲什摩刺頭在裏許)
위산스님이 말했다. “어떤 죄과가 있는가?”(師云 有什摩罪過)
“이미 있다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 가죽포대 속으로 처박혀 들어갔습니까?”
“그놈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州云 爲他知而故犯)
“어떤 죄과가 있는가?” “그놈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 양자는 모두 불성이 명명백백하게 약동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데, 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없습니까?”라는 학인의 질문에 “그놈에게 업식業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라.”라고 답해 버렸다. 조주라는 조사는 불성을 재정의할 필요가 없다. 이미 업식으로 정의해버렸기 때문이다. 청정불성淸淨佛性과 환화업식幻化業識이 모두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생기生起하는 본원적 도리를 알지 못하고, 다시 성범聖凡과 생불生佛로 분단하여 간택한 이가 바로 조주스님이다. 이는 간택의 최고종장最高宗匠이며, 또한 언어마술言語魔術의 초절정 고수로서의 면목이 약여할 뿐이다. 마조화상 이후 조사교 조사들이 부려온 신통방통의 실상이 모두 이와 같다.
교학을 무시하고 여래선如來禪을 폄하하며 오직 조사선祖師禪만을 절대화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를 잃고 조사의 가짜 권위에 복종하는 역불배교逆佛背敎의 괴물을 낳았을 뿐이다. 조사를 죽여야 비로소 부처가 보이고, 마조화상의 약방문을 불태워야 본래 병 없는 대자유인이 드러난다. 위앙潙仰의 해체극解體劇은 오늘날까지 조사라는 위선과 괴상망칙한 평상심의 우상에 매여 질병을 구걸하는 모든 선객들을 향한 서슬 퍼런 방망이질이자, 조사교 전체의 파산을 선언하는 통쾌무비痛快無比한 대할일성大喝一聲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9. 새 불교를 향한 나의 제언
인생이 사십이 되면 성현은 불혹이나 부동심을 얻지만, 범부는 하나의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나는 기축년생으로 금년 78세에 상당하지만, 나의 생각은 여전히 도라솜[兜羅綿]처럼 부드럽다. 병오년 3월 어느 날 밤 술말해초戌末亥初 시각에 잠자리에 들려고 누우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다.
“아란존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일체 대장경을 구술口述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상나화수존자한테는 아라한법만 전해주고 대승법을 전수하지 않았을까? 만약 어떤 부모가 진귀한 보물을 감추고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도 전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도를 취하고, 멀리서는 사물에서 도를 취한다.”(近取諸身 遠取諸物) 부모와 자식으로 대체하면 명백하다. 아란존자는 아예 대승경전을 구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한테 아라한법만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위 생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믿게 되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우리나라를 위시하여 중국과 일본의 처지에서 불교 역사를 보면 삼분할 수 있다. 불멸 이후 협비구까지를 원시불교로 보고, 마명보살 이후 청량국사까지를 대승불교로 보며, 마조화상 이후를 선불교 또는 조사교로 볼수 있다. 대승불교나 조사교는 원시불교의 아라한을 어떻게 볼까?
원각경 현선수보살장을 인용한다. “선남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일백 항하사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의 과위果位를 얻게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의당 이 경을 해설하되 게송의 절반을 변별辨別하는 것만 못하니라.”(善男子 假使有人 教百千 恒河沙衆生 得阿羅漢果 不如有人 宣說此經 分別半偈) 가령 보안보살장의 게송을 보자. “일체 제불의 세계는 마치 허공의 공화空花와 같도다. 삼세가 모두 평등하여 필경 미래나 과거는 없느니라.”(一切佛世界 猶如虛空花 三世悉平等 畢竟無來去) 이 게송 중에 전반부나 후반부 중에 하나만 해설해도 그 공덕이 일백 항하사 아라한의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아라한을 보기를 발톱에 피는 고사하고 머리카락 위에 먼지만도 못하게 본다. 그 원시불교 아라한의 법통을 대승불교의 보살들이나 조사교의 조사들이 계승할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 어불성설이 어불성설이 아니다. 모순투성이 속에 한국불교는 서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땅 때문에 넘어진 자는 그 땅을 발판 삼아 일어난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고자 하면 옳은 곳이 없느니라.”(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라고 설파하셨다. 내가 정직하면 진실이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정직하지 못하면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팔정도八正道를 하나의 용어로 말하면 정직 또는 정심正心이다. 정직한 마음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을 직시하자.
혼돈과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불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마조화상을 파묻고 조주스님을 베어낸 그 무덤 위에서, 깨달음이라는 허상만을 쫓아가던 헛된 발걸음을 멈추자. 청정불성과 환화업식이 모두 원각묘심에서 약동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다음의 불교는 저 멀리 높은 선상禪床에 있지 않다. 본래 무병한 스스로를 믿고,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의 고통을 함께 치유해 나가는 주체적 대자유인들의 실천적 행리, 그것이 바로 불자 여러분과 함께 열어젖힐 새로운 불교의 서막이다.
2026. 6. 18. 15:48, 丙午 甲午 癸亥 庚申, 길상묘덕일 규련원주葵蓮園主 정덕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