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불교를 향한 나의 제언
인생이 사십이 되면 성현은 불혹이나 부동심을 얻지만, 범부는 하나의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나는 기축년생으로 금년 78세에 상당하지만, 나의 생각은 여전히 도라솜[兜羅綿]처럼 부드럽다. 병오년 3월 어느 날 밤 술말해초戌末亥初 시각에 잠자리에 들려고 누우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다.
“아란존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일체 대장경을 구술口述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상나화수존자한테는 아라한법만 전해주고 대승법을 전수하지 않았을까? 만약 어떤 부모가 진귀한 보물을 감추고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도 전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도를 취하고, 멀리서는 사물에서 도를 취한다.”(近取諸身 遠取諸物) 부모와 자식으로 대체하면 명백하다. 아란존자는 아예 대승경전을 구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한테 아라한법만 전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위 생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믿게 되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우리나라를 위시하여 중국과 일본의 처지에서 불교 역사를 보면 삼분할 수 있다. 불멸 이후 협비구까지를 원시불교로 보고, 마명보살 이후 청량국사까지를 대승불교로 보며, 마조화상 이후를 선불교 또는 조사교로 볼수 있다. 대승불교나 조사교는 원시불교의 아라한을 어떻게 볼까?
원각경 현선수보살장을 인용한다. “선남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일백 항하사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의 과위果位를 얻게 할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의당 이 경을 해설하되 게송의 절반을 변별辨別하는 것만 못하니라.”(善男子 假使有人 教百千 恒河沙衆生 得阿羅漢果 不如有人 宣說此經 分別半偈) 가령 보안보살장의 게송을 보자. “일체 제불의 세계는 마치 허공의 공화空花와 같도다. 삼세가 모두 평등하여 필경 미래나 과거는 없느니라.”(一切佛世界 猶如虛空花 三世悉平等 畢竟無來去) 이 게송 중에 전반부나 후반부 중에 하나만 해설해도 그 공덕이 일백 항하사 아라한의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아라한을 보기를 발톱에 피는 고사하고 머리카락 위에 먼지만도 못하게 본다. 그 원시불교 아라한의 법통을 대승불교의 보살들이나 조사교의 조사들이 계승할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 어불성설이 어불성설이 아니다. 모순투성이 속에 한국불교는 서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땅 때문에 넘어진 자는 그 땅을 발판 삼아 일어난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고자 하면 옳은 곳이 없느니라.”(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라고 설파하셨다. 내가 정직하면 진실이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정직하지 못하면 영원히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팔정도八正道를 하나의 용어로 말하면 정직 또는 정심正心이다. 정직한 마음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을 직시하자.
혼돈과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불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마조화상을 파묻고 조주스님을 베어낸 그 무덤 위에서, 깨달음이라는 허상만을 쫓아가던 헛된 발걸음을 멈추자. 청정불성과 환화업식이 모두 원각묘심에서 약동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다음의 불교는 저 멀리 높은 선상禪床에 있지 않다. 본래 무병한 스스로를 믿고,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의 고통을 함께 치유해 나가는 주체적 대자유인들의 실천적 행리, 그것이 바로 불자 여러분과 함께 열어젖힐 새로운 불교의 서막이다.
2026. 6. 18. 15:48, 丙午 甲午 癸亥 庚申, 길상묘덕일 규련원주葵蓮園主 정덕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