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4-44 의심하지 말라
夫如至理之道는 非諍論而求激揚이며 鏗鏘以摧外道니라.
至於佛祖相承하야는 更無別意요
設有言敎라도 落在化儀三乘五性人天因果니라.
如圓頓之敎는 又且不然하야 善財童子가 皆不求過니라.
《해석》
“대저 지극한 도는 논쟁을 하여 높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를 쳐서 외도를 꺾는 것도 아니다.
불조가 면면이 서로 이어오는 것조차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교화하는 법도에 따른 삼승과 오성과
인천인과의 가르침에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교 돈교는 또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재동자도 남김없이 법을 구하고 선지식을 찾는 일을
마치지는 못하였다.”
《강설》
지극한 도에 눈을 뜬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옆구리를 치면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면서 으스대지 않는다.
마이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않는다.
설사 과거에 불불조조가 면면히 이어온 사실이 있다 해도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부득이하여 펼쳐놓은 교화의식(敎化儀式)이다.
그래서 크게 눈을 뜨고도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들을
가장 훌륭한 도인으로 친다.
다음은 광인 같은 역행보살로서
사람들이 측량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도인을 친다.
가장 낮은 도인은 회상을 열고 사람들을 제접하며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사는 도인을 친다.
그렇다면 무수한 도인들이
이름도 없이 종적도 없이 왔다가 갔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긴 도인들보다 훨씬 빼어난 분들이라 생각하면
매우 아쉽고 서운하다.
좀 더 몸을 낮추고 드러내어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大德아 莫錯用心하라 如大海不停死屍니라.
祇麽擔却하야 擬天下走하나니 自起見障하야 以礙於心이라.
日上無雲하니 麗天普照요 眼中無翳하니 空裏無花로다.
《해석》
“큰스님들이여!
마음을 잘못 쓰지 말라.
마치 큰 바다가 죽은 시체를 그냥 머물러 두지 않듯 하니라.
그렇게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니,
스스로 견해의 장애를 일으켜 마음을 막는 것이다.
해가 뜨고 구름 한 점 없으니 아름다운 하늘에 온통 햇빛이 비친다.
눈에 병이 없으니 허공에 꽃이 없다.”
《강설》
불법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소견은 끝내 남겨두지 않는다.
모두 다 걸러낸다.
바다는 죽은 시체들을 모두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
되지 못한 안목을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녀 봐야
자신의 공부에 방해만 될 뿐이다.
삿된 견해와 바르지 못한 안목은
설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도 결국 도태되고 만다.
큰스님이요,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문전성시를 이루다가도
끝내 그 바닥이 드러나고야 만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인생사와 세상사에 있어서
마치 구름 없는 하늘에 태양이 떠서
온 천지를 환하게 비치는 것과 같다.
눈에 병이 없으면 헛꽃을 볼 까닭이 없다.
사람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에 이상이 없으면 모든 일에 문제가 없다.
道流야 儞欲得如法이면 但莫生疑하라.
展則彌綸法界하고 收則絲髮不立하야 歷歷孤明하야 未曾欠少니라.
眼不見耳不聞이니 喚作什麽物고
古人云, 說似一物이라도 則不中이라하니 儞但自家看하라.
更有什麽오 說亦無盡이니 各自著力하고 珍重하라.
《해석》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법답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직 의심을 내지 말아라.
펼치면 온 법계를 싸고도 남는다.
거두면 실 끝도 세울 데가 없다.
뚜렷하고 호젓이 밝아 일찍이 조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눈으로도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으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다.’하였다.
그대들은 다만 자기 스스로를 보아라.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설명한다 해도 끝이 없다.
각자가 힘껏 노력하여라.
편히 쉬어라.”
《강설》
일물(一物), 즉 마음에 대한 설명이다.
자고로 불교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는 이 마음 하나 밝히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팔만대장경이 모두가 마음 하나 설명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청매조사는 경전 어록을 읽되
마음에 반조하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경전 어록들이 모두가 마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한 물건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러나 흔히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라고 한다.
보조스님은 우리들 한 마음의 다른 이름들을
진심직설에서 소개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심지(心地)·보리(菩提)·법계(法界)·여래(如來)·열반(涅槃)·
여여(如如)·법신(法身)·진여(眞如)·불성(佛性)·총지(摠持)·
여래장(如來藏)·원각(圓覺) 등등이라 한다.
또 조사들의 어록에서는 자기(自己)·정안(正眼)·묘심(妙心)·
주인옹(主人翁)·무저발(無底鉢)·몰현금(沒絃琴)·무진등(無盡燈)·
무근수(無根樹)·취모검(吹毛劍)·무위국(無爲國)·마니주(摩尼珠)·
니우(泥牛)·목마(木馬)·심원(心源)·심인(心印)·심경(心鏡)·
심월(心月)·심주(心珠) 등등 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한 마음을 직접 가리켜 설명하고 있는 어록도 많다.
심부주(心賦註)·심요(心要)·유심결(唯心訣)·진심직설(眞心直說)·
무심합도송(無心合道頌)·심왕명(心王銘)·신심명(信心銘)·
심명(心銘)·식심명(息心銘)·완주음(玩珠吟)·획주음(獲珠吟)·
심주가(心珠歌) 등등 다 열거할 수 없다.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틀린 소리라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이 단락의 공부는 역역고명(歷歷孤明) 미증흠소(未曾欠少)와
설사일물 즉부중(說似一物 則不中)이다.
여기까지가 시중법문의 전부다.
임제스님이 학인들에게 들려주고 싶고 당부하고 싶은 가르침이다.
모든 공부인들에게는 이 시중법문이 특효약과 같다.
팔만장경의 정수다.
임제스님의 사상이니 가풍이니 종풍이니 하는 살림살이가 자세히 녹아있다.
친절하고 자상하다.
천고 만고에 더 덮을 수 없는 주옥같은 법어다.
시중법문을 남겼기에
오늘 날 후손들이 어렵게나마 턱걸이를 해서라도
그 고준한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굳이 어쭙잖은 생각으로 순서를 나눈다면
이 시중법문이 제일이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44 疑心(의심)하지 말라
夫如至理之道(부여지리지도)는
非諍論而求激揚(비쟁논이구격양)이며 鏗鏘以摧外道(견장이최외도)니라.
至於佛祖相承(지어불조상승)하야는 更無別意(갱무별의)요
設有言教(설유언교)라도
落在化儀三乘五性人天因果(낙재화의삼승오성인천인과)니라.
如圓頓之教(여원돈지교)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여
童子善財(동자선재) 皆不求過(개불구과)니라.
大徳(대덕)아 莫錯用心(막착용심)하라
如大海不停死屍(여대해부정사시)니라.
秖麼擔却(지마담각)하야 擬天下走(의천하주)하나니
自起見障(자기견장)하야 以礙於心(이애어심)이라.
日上無雲(일상무운)하니 麗天普照(여천보조)요
眼中無翳(안중무예)하니 空裏無花(공리무화)로다.
道流(도류)야 儞欲得如法(이욕득여법)이면 但莫生疑(단막생의)하라.
展則彌綸法界(전즉미륜법계)하고 收則絲髮不立(수즉사발불립)하야
歴歴孤明(역력고명)하야 未曾欠少(미증흠소)니라.
眼不見耳不聞(안불견이불문)이니 喚作什麼物(환작십마물)고
古人云(고인운), 説似一物(설사일물) 이라도 則不中(즉부중)이라하니
儞但自家看(이단자가간)하라 更有什麼(갱유십마)오
説亦無盡(설역무진)이니 各自著力(각자착력)하고 珍重(진중)하라.
’夫如至理之道(부여지리지도)는’, 지극한 이치의 도라고 하는 것은
‘非諍論而求激揚(비쟁논이구격양)’, 쟁론으로서 격양을 구할 것이 아니다,
자기의 도를 드날릴 일이 아니다 이 말이여.
‘鏗鏘以摧外道(견장이최외도)니라’, 금속 소리, 옥 소리,
이런 소리를 질러 가지고서 외도를 꺾을 것도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至於佛祖相承(지어불조상승)하야는’,
그런데 다퉈서 자기 사상을 드러낸다거나
무슨 언성을 높여 가지고서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그런 것도 아니고
심지어 부처나 조사의 그런 법을 相承(상승),
서로 이어오는 그 마당에 있어서는
‘更無別意(갱무별의)요’, 다시는 다른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設有言教(설유언교)라도’, 설사 언교가 있다 하더라도
‘落在化儀三乘五性人天因果(낙재화의삼승오성인천인과)니라’,
그런 말로서 주고받고 하는 것은 전부 교화하는 의식,
化儀(화의), 교화하는 의식으로서
삼승과 오성의 인천인과에 떨어진 것이다.
‘如圓頓之教(여원돈지교)는’, 원교 돈교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여’, 또한 그렇지 아니해서,
‘童子善財(동자선재)’, 선재동자가
‘皆不求過(개불구과)니라’, 53선지식을 하나하나 친견하러 다녔죠.
53 선지식에게 복을 구하여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여.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려고 돌아다닌 게 아니다 이런 말이여.
‘大徳(대덕)아 莫錯用心(막착용심)하라’, 용심, 그릇 용심하지 말라.
‘如大海不停死屍(여대해부정사시)니라’,
큰 바다는 죽은 시체를 머물러 두지 아니해.
언제라도 기어이 그 죽은 시체는 밖으로 밀어내고 만다.
‘秖麼擔却(지마담각)하야’,
시체와 같은 그런 언교를 짊어지고, 그렇게 짊어지고.
‘擬天下走(의천하주)하나니’, 천하를 돌아다니려고 하나니.
‘自起見障(자기견장)하야’, 스스로 견해의 장애를 일으켜 가지고서.
‘以礙於心(이애어심)이라’, 마음을 장애하는 것이다.
‘日上無雲(일상무운)하니’, 저 태양 위에 해가 비춘 데는
거기는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구름이 하나도 없죠.
‘麗天普照(여천보조)요’, 아주 빛나는 하늘이 널리 비침이요,
‘眼中無翳(안중무예)하니’, 눈에는 가림이 없어.
아무런 가림이 없으니
‘空裏無花(공리무화)로다’, 허공 속에는 꽃이 없다.
병 났을 때 허공에 꽃이 있지 눈에 아무 것도 가린 것이 없으면
허공에 꽃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지.
전부 세상에 이런 저런 게 있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병이 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道流(도류)야 儞欲得如法(이욕득여법)인댄’,
그대들이 여법하고자 할진댄
‘但莫生疑(단막생의)하라’, 다만 의심을 내지 마라.
‘展則彌綸法界(전즉미륜법계)하고’, 펼치면 법계에 가득차고,
‘收則絲髮不立(수즉사발불립)이라’, 거둬들이면 터럭 끝도 세울 수가 없다.
펼치면 우리 한마음이 어디인들 안 가는데 있습니까.
미륜법계, 법계에 가득 차.
그런데 거둬들이면 그야말로 송곳 꽂을 땅도 없다고 하듯이
정말 털끝 하나도 세울 수가 없는 그렇게 좁아 들어가는 것이
또 이 한마음의 도리라.
그러면서 ‘歴歴孤明(역력고명)’,
오직 이것만이 이 세상에 빛나고 있다,
孤明(고명), 참 표현 잘 했어요.
역력하게, 이것만이 이 세상에 빛나고 있는 거여.
눈앞에 펼쳐져 있는, 또 우리 인식 속에 있는,
또 내가 그동안 경험해 온 모든 세상은 바로 이것의 그림자라, 고명.
이것만이 홀로 빛나고 있는, 이것의 그림자일 뿐이라.
우리가 오십 년 육십 년 칠십 년 살아왔다 하더라도
그 살아온 모든 경험 전부가 이것의 한 그림자일 뿐이다.
‘未曾欠少(미증흠소)니라’,
일찍이 조금도 그것에서 거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
‘眼不見耳不聞(안불견이불문)이니’,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喚作什麼物(환작십마물)고’, 이것을 뭐라고 불러질 것인가.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좋겠는가.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説似一物(설사일물)이라도 則不中(즉부중)이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곧 맞지 않다.
참 정말 아주 근사한 말이죠.
‘儞但自家看(이단자가간)하라’, 그대들, 단자가간하라.
이것은 어디서 달리 다른 데서 구하고
무슨 경전이나 어록에서 설명 듣고 알려고 하지 말고
그대는 다만 스스로 보라. 自家看(자가간)하라, 스스로 보라.
‘更有什麼(갱유십마)오’, 다시 무엇이 있는가
‘説亦無盡(설역무진)이니’, 아무리 이것은 이야기하려고 해도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
수 천년 수 만년 동안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이건 다 말할 수가 없어.
‘各自著力(각자착력)하고’, 각자 스스로 힘을 붙이고
‘珍重(진중)하라’, 그리고는 쉬어라.
시중이 끝인데 시중의 끝 법문이 아주 그럴듯하지요.
그러면서 이 한 물건, 이것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니까 여기에 착안하라.
그 외에 여타 다른 것들은 전부 편의상
이러고저러고 설명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임제록 중에서도 제일 중요하고
또 우리들이 생각하고 설명하고 하면 그런대로 이해가 좀 되고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고 뭔가 알 바가 있는 그런 내용들이 사실 시중이죠.
그 다음에 저 위에서 상당 법문은
너무 격이 높아서 알듯 말듯한 그런 내용들이었고
시중은 참 좋은 내용들이 많았고
조사스님들이 많이 인용하는 그런 내용들이고
또 아주 격한 그런 표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부처라고 하는 것은 마치 똥통이나 같은 것이다,
그리고 보살이니 나한이니 하는 것은
전부 사람을 묶고 얽어매는 죄인 취급하는 그런 가쇄와 같은 것이다,
이런 표현하며 등등 참 별별 아주 매정하고 극적인 그런 표현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러나 이 시중(示衆)이 정말 귀중한 법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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