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변(勘辨)
15-2 도적에게 집을 맡기는 격이다
後潙山이 問仰山호되 此二尊宿意作麽生고
仰山云, 和尙作麽生고
潙山云, 養子에 方知父慈니라.
仰山云, 不然하니다.
潙山云, 子又作麽生고
仰山云, 大似勾賊破家니다.
《해석》
뒷날 위산스님(771-853)께서 앙산스님(803-887)에게 물었다.
“이 두 존숙들의 참뜻이 무엇이겠는가?”
“화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
《강설》
위산 스님과 앙산 스님의 재점검과 평가는 늘 이어진다.
위의 선문답에 대해서 위산 스님은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앙산스님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산스님은 순리,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앙산스님은 역리, 즉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다.
너저분하게 주해를 단다면
순리와 역리는 표현이 비록 다르지만
불교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같은 것임을 안다.
쌍차(雙遮-부정)는 곧 쌍조(雙照-긍정)고
쌍조는 곧 쌍차이기 때문이다.
차조동시(遮照同時)와 기용제시(機用齊示)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은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지팡이는 몸을 의지하는데도 쓰이고 사람을 치는 데도 쓰인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 도량(道場)이지만
우리는 열심히 건립한다.
그리고 거기서 산다.
환화(幻化)인 공양 거리를 불상 앞에 열심히 올린다.
일체법이 중도 아닌 것이 없다.
양변을 떠나기도 하고
양변을 수용하기도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5-2 도적에게 집을 맡기는 격이다
後潙山(후위산)이 問仰山(문앙산)호되
此二尊宿意作麼生(차이존숙의자마생)고
山云(앙산운), 和尚作麼生(화상자마생)고
潙山云(위산운) 養子(양자)에 方知父慈(방지부자)니라.
仰山云(앙산운), 不然(불연)하니다.
潙山云(위산운), 子又作麼生(자우자마생)고
仰山云(앙산운), 大似勾賊破家(대사구적파가)니다.
‘後潙山(후위산)이 問仰山(문앙산)호되’,
후에 위산이 앙산에게 묻되
‘此二尊宿意作麼生(차이존숙의자마생)고’,
이 두 늙은이들, 이 두 선지식, ‘존숙’ 하면 선지식이란 뜻입니다.
이 두 선지식의 뜻이 어떻습니까?
‘仰山云(앙산운)’, 앙산이 말하기를,
‘和尚作麼生(화상자마생)고’, 화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潙山云(위산운)’, 위산이 말하기를,
‘養子(양자)에 方知父慈(방지부자)니라’,
양자에, 자식을 키워봐야 바야흐로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속 사람들 그러잖아요.
출가해서도 마찬가지고.
상좌를 들여 봐야 그 은사 스님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세속에서는 자식을 낳아봐야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게 된다,
그렇게 표현을 했고.
‘仰山云(앙산운)’, 앙산이 말하기를,
그 소리 듣고는
‘不然(불연)하니다’, 그게 아니다.
‘潙山云(위산운)’, 위산이 말하기를
‘子又作麼生(자우자마생)고’, 그대는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가.
‘仰山云(앙산운)’, 앙산이 말하기를,
‘大似(대사)’, 크게 같다, 똑같다.
‘勾賊破家(구적파가)’, 도적에게 집을 맡겼다가
도적이 집을 거덜 낸 것과 같다.
破家(파가)라고 하는 말은 ‘집을 다 털렸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 입장하고 똑같다, 그렇게 했어요.
위산스님의 말과 앙산스님의 말이
뜻이 영 반대로 가고 있는데 그 낙처는 크게 반대가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봐야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이나
도적에게 집을 맡겼다가 오히려 도적이 집을 다 털어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나
일맥상통하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깊이 참구해야 할 그런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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