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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체제하의 산업발달

작성자유덕인|작성시간09.06.25|조회수281 목록 댓글 1

막부체제하의 산업발달

   에도시대 200여년, 전란(戰亂)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자, 農業은 더더욱 발달되었다.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

   하여 田畓을 넓히고, 농구를 改良,재배작물의 종류를 多樣化하기도 했다. 쌀(米)이외에 면,생산,채종유등

   各地의 特産物을 商人에게 팔아 富農이 되는자도 있었다.絹織物(견직물)酒,종이 등의 手工業도 발달하였다.

   産業의 발달이나 "참근교대제"의 영향으로 道路交通이 발달하여 전국에 5個의 街道가 생겨나고, 그 가도에

   는 역참이 생겨났다.또 쌀 등의 大量의 물자를 輸送할때는 船가 빈번히 이용되게되어, 航路또한 발달했다.

 

   産業과 交通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融成(융성)하게 되엇다. 막부나 大明(다이묘)가 거둔 연공미는 大阪

   에서 現金과 交換했기때문에 오오사카에는 코오노이께,미쯔이" 등과같은 大商人이 생겨났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政治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大都市가 되고 오오사카는 상인의

   도시,經濟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 천하의 부엌 ] 이라고 일컬어졌다.

 

▣ 쵸오닝 문화

   平和로운 세상이 되자 學問과 藝術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는 중국의 有學, 특히 주자학을 保護하고 막부

   에 學問所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배우게하였다. 주자학은 主君과 部下,父母와 자식 등의 上,下 질서

   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막부의 정치에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武士뿐만 아니라,쵸우닝들도 [ 읽

   기,쓰기, 주산] 등의 敎育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의 교육은 처음에 절에서 行하여졌으나 나중에는 데라

   코야(寺子屋)라고하는 敎育機館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승려나 신관,실직무사들이 교육을 擔當하였다.

 

   5代將軍 쯔나요시(綱吉)의 時代,오오사카,쿄오토에서 쵸오닝들의 새로운 문화(겐로꾸분카/元祿文化:げんろく

 ぶんか)가 생겨났다.오오사카의 쵸오닝인 "이하라 사이카꾸(井原西鶴:いはらさいかく)"는 겐로꾸시대

   서민들의 생활을 [ 好色一代男] 이나 [世間胞算用]등의 小說에서 묘사 하였다.그의 소설에는 貨폐경제가

   발달하여 돈이 인간생활을 支배하게 된 사회에서 돈이 運命이 左,右되는 서민들의 모습이나, 당시의 開放

   的인 響樂生活이 매우 事實的으로 그려져 있다.

▣ 3代改革

    에도시대가 시작되고 100여년이 지난 겐로꾸시대부터, 막부의 財政이 어렵게 되었다.막부는 質이 나쁜

    貨폐를 자주 발행했기때문에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物價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특히

    下級武士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月給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없어서 商人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무사의

    신분을 매매하는者 조차 발생하게되었다.18세기前半 8代將軍 요시무네(吉宗)는 막부의 財政을 再建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亨保의 改革) 우선 새 논(新, 田)을 개척하여 세수증대를 計劃하고

    무사들에게는 사치를 禁하고 節約을 名하였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화폐가 농촌에서도 使用되게되자, 농민사이에서 貧,富의 차가 커지고 농촌을 떠나

    都市로 나가는 貧農들도 많아졌다.또 冷害나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죽는 자 도 많이 나와 농촌의 비참함

    은 그, 극에 달하였다.18세기 末, 막부는 재차 정치의 개혁을 단행, 무사에게 儉약을 명하고 무사가 상인

    들로부터 빌린돈은 갚지않아도 좋다는 명을 내려 무사의 생활을 도와주었지만,改革은 失敗로 끝이났다.

    (實政의 改革)

    막부는 재정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의 세금을 점점더 부과하게 되었다.생활에 곤란을 느낀 농민은

    연공을 輕減시켜줄것을 藩主나 中央政府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않으면 力으로써 저항했다[百性一撥]

    막부는 이를 嚴하게 禁止하였지만,18세기 중반이후가 되면서 잇키(亂)는 자주 發生하였다.또한 가난한 쵸

    오닝들도 에도(江戶)나 大坂에서 미곡상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의 대상인을 습격하여 가옥파괴,방화,약탈

    등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1837年 전직관리였던 "오오시오 헤에하찌로오"는 가난한者를 위하여 오오사카

    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말았다.이, 반란이 진압된뒤 막부는 세번째개혁(天保의改革)을 단행

    하여 무사에게는 검약을 명하고, 大商人들에게는 買占賣惜"을 하는 組合을 금지시키는 등, 조치를 취하였

    지만. 이 또한 成功하지는 못하였다.

 

▣ 新 學問( 새로운 학문 )

    유학이 여전히 주도적이었지만 이에 比判的인 입장을 취하는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등의 새로운 학문

    이 생겨나왔다.국학은 일본의 古傳을 연구하여 일본고유의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국학자들은 [ 万葉集

    ]이나 [ 古事記 ] 등을 실증적인 方法으로 연구하였다.국학자중에서 [ 古事記傳 ] 이라는 "고사기(古事記)"

    의 주석書를 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有名하다. 국학은 後日 천황의 직접정치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존황사상"이나 외국세력을 배척하는 양이사상을 키워 막부末期에 일어난 "존황양이운동"의 추진력

    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학문이나 知識은 쇄국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덜란드로 부터 傳하여졋기 때

    문에 난학(蘭學)으로서 발달했다. 그중에서 특히 발달한 것이 醫學의 硏究로 스기타 겐빠쿠(杉田玄白)등은

    네덜란드의 解部學冊(해부학책)을 번역하여 [ 解體新書 ] 를 出販하였다. 또 히라가겐나이(平賀源內)는

    새로 배운 학문을 응용하여 일본에서 最初로 發電幾(발전기)를 제작하고 이노오 타다타까(伊能忠敬)는 서

    양의 技術을 도입하여 일본전국의 실측지도를 製作하였다.양학에의해, 서양의 事情을 알게됨에 따라 막부

    의 쇄국정책이나 양이사상에 반대하고 일본의 개국을 주장하는 자 들이 늘어났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막부

    를 무너뜨리는 運動과 연결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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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멍텅구리 | 작성시간 10.05.0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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