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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키요에의 시원

작성자남십자성|작성시간09.09.17|조회수369 목록 댓글 2

우키요에의 시원


18세기까지만 해도 막부와 봉건귀족의 에도코로繪所는 카노파狩野派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노 탄유狩野探幽와 그의 형제들의 직계 계승자들인 4왕조(분파)의 화가들이 쇼군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 오쿠에시라는 화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살고 있던 에도 지역의 명칭에 따라 카지바시, 코비키쵸, 나카바시, 그리고 하마쵸라고 불렀다.
이 밖에도 카노파의 자손들과 제자들은 대대로 오모테에시表繪師라는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채용되었으며 또 다른 무리의 카노 화가들은 무사계급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지방 번주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화실을 주도하기 원한 것도 카노파 화가들이었다.
이런 현상을 카노파의 독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체제 하의 화가들은 획일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화 양식을 바꾼다거나 기법을 개량할 수 없었고, 3세기 동안 쇼군의 거처를 장식하거나 다른 어용장식화 제작을 위해 조상들, 특히 탄유에 의해 성립된 본보기를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옛 미술품의 감정을 의뢰받기도 했다.
그들의 유일한 장점은 19세기 화가들에게 전통 회화 기법을 충실히 전승시키는 것이었다.
산라쿠山樂의 손자이며 일본의 바사리Vasari로 불리는 카노 에이노狩野永納(1631~97)를 비롯한 이 화파의 몇몇 문인화가들은 귀중한 역사 기록과 화가들의 전기 외에도 지금은 사라진 옛 그림들의 모사본을 남겼다.


현존하는 것들 대부분은 무명화가들이 그린 발랄하고 매력적인 여러 유형의 여인들을 최신 유행의 의상을 한 모습이다.
기녀, 무희, 유나湯女라고 불리는 정조 관념이 해이한 대중목욕탕 종업원들이 이런 회화에서 주요 모델이 되었으며,
이중 가장 독창적인 예가 아타미熱海 미술관 소재 <유나>로 여섯 명의 유나들이 코소데라고 하는 가느다란 띠와 화려한 짧은 팔 키모노로 한껏 차려입고 뽐내듯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다.
이 무명화가가 사용한 기법은 이전의 어느 기법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은 것이다.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쾌락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고 이는 17세기 중반에 완숙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런 작품들은 우키요에浮世繪의 시원이 된다.
이 용어는 1681년 이전에는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중국 육조시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인간, 인세人世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송대의 문학에 이르러서는 세상 일이 허무하고 뜬구름처럼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도 1681년경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우키요 조시 浮世草子』라는 대중소설이 출간되어 역시 문학에서 먼저 이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근심 많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키요에 외에도 우키요 가사(우산), 우키요 보시(모자) 등 에도 시대에 유행한 물건들에도 적용되었다.


17세기부터 목판화가 현저하게 증가한 출판물의 삽화로 많이 이용되었다.
풍속화의 발전과 목판화 기법의 개량이 표현을 위한 양식 발전에 계기가 된 것이다.
에도의 출판업자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1618~94)에 의해 그때가지 본문에 종속되던 삽화는 예술적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모로노부는 자신이 1677년 이후에 출판한 1303종의 그림책繪本에서 그림이 글씨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었고, 이전 삽화가들이 지켜온 전통적인 무기명에 반기를 들어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들 그림책들 중 많은 부분이 요사와라吉原 지역의 유흥가에서 일어난 남녀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대 사람들은 이런 회화를 둥둥 떠 있는 세상의 그림이란 의미로 우키요에라고 불렀다.
모로노부가 성공한 이유는 그의 양식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판화 제작의 최신 기술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육필화肉筆畵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판화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과 기법은 일본 판화 초창기 전성기부터 1765년까지 급속도로 발달했다.


쿄호亨保 연간(1716~36)에 이르러 화가 겸 출판업자 오쿠무라 마사노부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더욱 진보된 새로운 기법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빨간색, 노란색, 녹색, 보라색 등 여러 가지 색이 판화에 사용되었으나 늘 붓으로 직접 채색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붉은색을 대치한 보다 아름다운 장미빛 홍색(베니)의 이름을 따라 베니에紅繪라 불리었다.
출판업자와 화가들은 목판화를 사용하여 채색을 가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중국 다색 판화의 기법,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서예용 색지 제조법을 참작하여 몇 가지 색 홍, 청 등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각 색채는 각각 다른 목판으로 가해졌으며 이들 목판들은 표식見當에 의해서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했다.
이 기법은 약 20년 동안 유행했고 여기에 보라색과 노란색을 첨가함으로써 차차 다색 판화 기법의 완성 단계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
약 1세기 동안의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 일본 판화는 니시키에錦繪라고 불리는 다색 판화에서 기법적 그리고 미적 완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에도는 조용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시민은 수준 높은 생활에 걸맞는 우아함과 세련미의 이상을 한껏 추구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긴 건 1720년 막부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기독교 이외의 양서洋書에 대해 내렸던 금지 조치를 완화시키고부터였다.
요시무네 시대吉宗時代(1716~36)에 지금의 동경인 에도는 상업적으로 발전했고 전국의 산물을 에도로 보내기 위한 총집결지의 역할을 한 소위 ‘천하의 부엌’으로 불린 오사카에는 유통과 제조업이 성행했다.
막부 재정의 재건에 앞장을 선 요시무네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을 폈는데 예를 들면 1720년 그는 “약물의 가격이 비싸므로 빈민은 이를 구할 방도가 없어서 한심하게 질병으로 넘어지는 일이 많음을 개탄하여 이들 빈민을 구제한다”는 취지로 막부로 하여금 일본 국내에 자생하는 약초 채취를 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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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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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멍텅구리 | 작성시간 10.05.05 감사합니다
  • 작성자청실 홍실 | 작성시간 10.06.05 첨 우키요에를 본 것은 일본 엽서에서 였읍니다..사무라이 얼굴인가..??모르겠지만 멋진 그림이라 엽서를 잘 간직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러다 고호 그림이나 모네의 그림에 일본그림이 배경처럼 나타난것에 놀라워햇었지요...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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