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関ヶ原の合戦 勝利で 德川家康 の天下

작성자柳 덕인|작성시간13.02.18|조회수442 목록 댓글 2
    ▣ 関ヶ原の合戦 ▣ (要 約) 豊臣秀吉를 補佐하며 江戸를 本據地로 勢를 擴張하고 있던 德川家康는 秀吉가 죽자 그의 아들인 秀賴(ひでより)의 後見人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1,600年9月15日 家康는 對立 關係에 있던 石田三成(いしだみつなり)를 関ヶ原에서 擊破하며 朝廷의 實權을 掌握하고 天下를 호령하게 됩니다. 豊臣秀吉の死亡 豊臣秀吉는 自身의 죽음을 豫見하고 五大老(ごたいろう)’라고 불리는 다섯 名의 大名를 自身의 아들인 秀賴(ひでより)의 後見人으로 任命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朝鮮으로 出兵한 軍事들의 歸還과 自身의 아들을 豊臣家의 後繼者로 세울 것을 付託하는 遺言을 남기고 世上을 떠납니다. 이때를 즈음하여 豊臣家의 家臣들은 官僚派와 武斷派로 나뉘어 對立하고 있었습니다. 그 對立은 朝鮮出兵에서 極에 達했으며 加藤淸正(かとうきよまさ) 福島正則(ふくしままさのり)를 筆頭로 한 武斷派는 機會만 있으면 사료파의 筆頭인 石田三成를 치려 했고 마침내 武斷派의 일곱 武將은 그의 집을 急襲합니다. 敵의急襲으로 多急해진 三成는 敵이나 다름없는 家康에게 도움을 請해 危機를 벗어나지만 佐和山城(さわやまじょう)에 蟄居하고 政治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会津(あいづ)征伐と三成の擧兵 한便 五大老의 한 名이었던 上杉景勝(うえすぎかげかつ)는 京都에서 福島県으로 돌아가 擧兵을 準備합니다. 그 사이 京都에서는 景勝가 聯合軍을 이끌고 올라 온다는 所聞이 퍼집니다. 이에 豊臣는 大阪城으로 景勝 불러들이지만 이를 繼續 拒絶, 緊張은 높아만 갑니다 結局 6月2日, 家康는 軍令發表와 함께 大名들을 이끌고 征伐에 나섭니다. 이에 對해 三成는 佐和山城에서 軍事會議를 열고 家康를 非難하며 毛利輝元(もうりてるもと)를 隊長으로 한 擧兵을 宣言합니다. 西軍(三成軍)の動向と東軍(家康軍)の西進 擧兵을 宣言한 後 迅速하게 움직였던 西軍은 먼저 大坂城을 占領하고 東君에 屬한 大名들의 妻子를 人質로 삼습니다. 하지만 東軍의 細川忠興(ほそかわただおき) 妻인”ガラシャ”가 人質이 될 것을 拒否하고 주검을 選擇하자 西軍은 人質들을 모두 풀어줍니다. 이에 對해 家康는 크게 動搖하지 않았으며 豫定대로 代見城(ふしみじょう)을 攻擊하여 채 보름이 되기도 前에 陷落시킵니다. 城 陷落 後 家康는 大名들을 모아 西軍의 擧兵을 알리고 江戸城으로 돌아갑니다. 江戸城에 到着한 家康는 福島正則(ふくしままさのり)를 비롯한 豊臣家의 將帥들을 먼저 先發隊로 出發시카고 그 사이 서둘러 大名들에게 協力을 要請한 後 3万 軍隊를 이끌고 江戸를 出發하여 9月14日에 関ヶ原에 布陣합니다. 戰鬪の推移 戰鬪를 爲해 関ヶ原에 모인 東軍과 西軍의 軍事는 各各 7萬4千과 8萬4千 程度였습니다. 數字上으로 보면 當然히 西軍의 優勢로 볼 수 있었습니다. 関ヶ原에 모인 약 16万의 軍隊는 안개 속에서 開戰信號 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午前 8時頃, 東軍의 井伊直政(いいなおまさ)가 西軍의 宇喜多秀家(うきたひでいえ) 陣營을 向해 鐵砲를 쏘며 開戰이 始作됩니다. 開戰 初의 戰勢는 一進一退의 攻防을 거듭했지만 西軍이 若干 優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午前 9時頃이 되면서 三成軍의 1陣이 崩壞됨과 同時에 戰勢는 家康에게 有利하게 흘러갔습니다. 白兵戰이 繼續되는 가운데 午前 11時頃이 되자 三成가 危險에 빠집니다. 黒田長政(くろだながまさ)와 細川忠隆(ほそかわただたか)의 猛攻을 받고 孤立된 것입니다. 이에 島津義弘(しまづよしひろ)에게 援軍을 要請하지만 그 쪽 事情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때 三成는 待機하고 있던 1万5千의 小早川秀秋(こばやかわひであき)軍의 參戰을 追求하는 烽火를 올립니다. 하지만 秀秋는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當時 秀秋는 家康에게 變節을 約束했으나 開戰 以後에도 쉽게 決定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狀態였습니다. 開戰 以後 時間은 4時間이 흘렀습니다. 正午가 조금 지난 時点에서 家康 陣營에서 秀秋 陣營 쪽으로 한發의 鐵砲가 發射됩니다. 秀秋에게 去取를 決定하라는 最後의 通牒이었습니다. 이 信號를 받고 秀秋는 變節을 굳히고 곧장 待機하고 있던 山을 내려와 戰鬪에 參與합니다. 以後 西軍의 大谷吉継(おおたによしつぐ)軍에 屬해 있던 4名의 將帥도 軍事들을 連鎖的으로 變節에 同參하며 戰勢는 瞬息間에 壓倒的 優位로 흘러가 午後 1時頃에는 西軍의 總 後退가 이루어집니다. 戰後處理 家康는 戰鬪 後 곧장 大阪城으로 들어가 戰後 處理를 始作합니다. 敗北한 三成와 小西行長(こにしゆきなが)는 斬首하고 西軍에 屬해 있던 大名들의 領地를 沒收 하거나 削減합니다. 東軍에 參與했던 大部分의 將帥들은 領地의 數가 크게 늘었는데, 家康의 境遇 250万石에서 400萬石으로 大幅 늘렸습니다. 反面, 豊臣家의 境遇에는 220万石에서 65万石으로 大幅 줄여 이 둘의 立場이 完全히 逆轉되었고, 天下는 이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고래 | 작성시간 13.02.18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명근 | 작성시간 17.05.25 감사합니다ㆍㆍ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