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
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
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
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
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반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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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에서
목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말에 울컥해진다 시를 써 받은 목돈을 손에 쥐고 행복해 하는 그 스스로의 만족감이 깊이 스며 있다 때문에 어머니의 임대아파트 보증금으로도 줄 수 없고 아내에게 덜컥 내 줄 수도 없고 애인과 함께 술 한 잔 먹을 수도 없는 가슴 속에 오래 오래 남겨두고 싶은 돈이 아닌가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만든 돈이 아닌가 그 돈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함이 가득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누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혼자 몰래 갖는 생각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몇 일은 가슴 뿌듯한 어떤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이 가슴 속에 활짝 피어 있었을 것이다 애인의 빤쓰를 엉겁결에 숨기듯 품고 다니는 목돈, 그 돈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는 시인으로 살아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이겨냈기 때문에 더 행복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