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9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
(시집 {학의 추락}, 1971)
이 시의 화자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논리적인 관계가 희박해 보이는 몇 개의 경험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의 연상을 통해 빚어내는 묘한 분위기를 응시한다.
화자는 어느 해 여름엔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러 승려들의 독경 소리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고, 오늘 다시 찾은 이 절에는 눈 속에서 매화꽃이 벙글고 있다. 이 시간의 경과는 여름부터 겨울까지 면벽 수도하는 '노승'의 정진(精進)을 의미한다. 이 오랜 정진 끝에 득도(得道)한 노승의 눈매에 감도는 '미소'처럼 서설(瑞雪) 속에서는 '비로소 매화 봉오리'가 벙글고 있다.
'매화 봉오리'와 노승의 눈매에 감도는 '미소'가 묘하게 병치되어 동일화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 이 시 감상의 관건(關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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