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무너지면 사망.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니 가슴속엔 느낌이,
마음엔 양심이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저 사람
왜 저래 아마 양심도 없는 것 같아.
행동은 그렇게 하고서도 어쩜
저렇게 뻔뻔스럽지?
저게 사람이야.
짐승도 저렇게 하진 않겠다.
우린 자라면서 법상머리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수저 드시기 전엔 제아무리
배가 고파도 먼저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예의를
배웠습니다.
맛있는 반찬은 아버지 앞으로
차려놓고 아버지 먼저 드시고
남으면 조금씩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진 드시기 전에 먼저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셨지요.
밥을 드시다가 배고픔 참으시고
남겨주기도 하셨지요.
그 습성이 몸에 배어 지금도 할멈이 수저를 놓기 전엔 밥상머리에서 먼저 일어서질 않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내와 사랑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더 중요한 건 배려하는 게 세상살이에서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천금을 보아도 내 것이 아니면
탐하지 마라.
열심히 노력하고 근검절약해서
자수성가하라.
그게 옳은 줄 알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세상은 성난 파도 같은 세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황금만능 주의로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능은 무궁무진한가 봅니다.
내로남불이 득세하니 양심 따윈
착착 접어 호주머니 집어넣고 떼법을 정당방어로 법꾸라지들이
입으로 득세하고 있습니다.
공격 방어가 너무 복잡하여
착하고 시야가 흐린 서민들은
이 놈이 잘한 건지 저 놈이 못 한 건지 혼돈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못다 못한 천국을 안내하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분들이 열을
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요.
눈에 보이는 그분들의 모습엔
사랑이 엿보입니다.
저들이 그나마 있었기에 은혜의 꽃이 가끔 내 눈에도 피어 사람다운
행동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한 게 있습니다.
사람이라 그런지 이들도 홍해 바다도 아니면서 진영 논리에 휩싸여 짝 갈라집니다.
요즘 같으면 옳고 그름이 있긴 한가?
천국과 지옥도 사람이 만들어 낸
함정 같다는 한쪽 뇌의 유혹이
나를 덮어버립니다.
길 객은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백로인척 하지 마세요.
세상이 다 까마귀 세상입니다.
까마귀 백로를 구분할 수 있는
밥상머리 교육을 무언 중 하셨던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밥상머리에 앉아 할멈과 아들 딸
옆에 두고 옛날이야길 합니다.
우리 할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고지식하니 내가 이 고생이지.
잘났어 영감탱이.
그러면서도 진수성찬을 만들어
영감인 내 앞으로 밀어줍니다.
아이들은 우리 어머닌 지금도
콩깍지가 아버지한테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다른 부모들은 이 방 저 방 딴 방이라는데,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원앙이니 천생연분이라고 합니다.
비록 어렵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벌어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거울을 보며 당신 작은 것에 만족하라.
큰 그릇은 당신 것이 아니다.
큰 그릇은 당신보다 배고픈 이에게
양보하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주름하나가
도망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양심이 도망가면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배가 고파도 양심이 무너지지 않은 내 이웃과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배려가 있는
사회가 되길 기도하고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