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생전에 그의 조국 독일은 지속적인 종교적 폭력과 사회적, 정치적 혼란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케플러는 궁정 쿠데타, 농민 봉기, 심지어 자신의 가족을 겨냥한 마녀사냥까지 견뎌냈다. 이런 힘든 배경에도 그는 행성들이 천체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현대 과학적으로 이해해냈다.
케플러는 슈바벤이라는 독일 남서부 지방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버린 '부도덕하고, 거칠며, 싸움을 일삼는 병사'였다. 그래서 케플러는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원래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려고 열세 살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1591년에 신학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594년 그라츠에 정착해 수학 교수가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결혼했다. 그러나 1600년에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길 거절하면서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같은 해에 프라하로 피신한 그는 덴마크 천문학자인 튀코 브라헤를 소개받았다.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 프라하로 피신한 브라헤가 이 젊은 수학자를 조수로 고용하면서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고 난 후 황제의 수학자가 되었다. 브라헤의 자세한 관찰에 일부분 의존하면서 케플러는 별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세 가지 물리적인 법칙의 개요를 작성했다. 그는 1609년 <신천문학>이라는 논문에서 첫 두 가지 법칙을 발표했고, 세 번째 법칙은 1619년에 출간되었다. 브라헤와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확고히 믿었던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최초의 글을 출간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 중부에서 발발한 종교 갈등이었던 30년 전쟁의 혼란으로 케플러는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2년 동안 그는 독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폭력을 피하려고 애썼다. 케플러가 사망한 후 그가 묻힌 교회 경내가 군대의 침입으로 약탈당하고 훼손되면서 케플러의 파란만장한 삶에 슬픈 후기를 남기게 되었다.
* 나사는 2009년 3월 케플러의 이름을 딴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이는 생물이 살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찿아내기 위해, 먼 태양계에 있는 지구 크기의 행성들을 찿아 은하계를 탐색할 수 있도록 고안 되었다.
* 케플러는 마녀 혐의를 받은 어머니 카타리나를 변호하기 위해 1615년에서 1620년 사이에 뷔르템베르크를 여러 번 방문해야 했다. 카타리나는 '마녀의 통제력'으로 열두 살 소녀를 마비시킨 혐의를 받고 수감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케플러가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배후를 조정한 후 풀려나 운 좋게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케플러의 증조할머니를 포함해 수십만 명의 유럽 여성이 17세기 초에 유럽 중부를 휩쓴 마녀사냥으로 화형당했다.
* 천문학 외에도 케플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전 4년으로 기정사실화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