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교황 바오로 3세 (선지자)

작성자껄떡쇠1|작성시간26.06.10|조회수10 목록 댓글 0

1545년에 이르렀을 때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세력으로 인해 휘청거리고 있었다. 덴마크, 스웨덴, 영국, 대부분의 독일 등 유럽 북부의 국가가 차례로 가톨릭교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교회를 멈추는 임무를 맏은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였다. 1534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이 이탈리아 추기경은 반종교개혁이라고 알려진 장기간에 걸친 가톨릭 쇄신 운동을 시작했다. 1545년 트렌토 공의회를 시작으로 가톨릭교는 핵심 신념은 옹호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쇄신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오로 3세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라는 이름으로, 주교와 군사 지도자뿐 아니라 교황 보니파스 8세 등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교황이 탄생한 부유한 로마 가문에서 태어났다. 파르네세는 피렌체에 있는 로렌초 데 메디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다. 1493년에는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나이로 추기경이 되었다. 젊은 시절, 미래의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개혁가들의 비난한 여러 남용 행위를 저질렀다. 교회 재산에서 파생된 어마어마한 수익을 보장받는 성직자의 지위에 있던 그는 그 돈을 예술과 궁전에 허비했다. 그러나 교황으로 선출된 후, 바오로 3세는 교회를 변화시키기지 않고는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른 많은 가돌릭 지도자들 보다 더욱 명확하게 인식했다. 여러 추기경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교회 내의 부패를 청산하기 위해 트렌토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수년 동안 간헐적으로 모였지만 교황 바오로 3세가 사망한 후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평판이 안 좋은 남용 행위는 금지했다.

   반면 교회의 쇄신 외에 교황 바오로 3세는 반대 의견을 불식시키고 교회의 교리에 대한 그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일도 했다. 그가 만든 것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종교재판소라고 알려진 검사 성성으로, 1542년에 이단자를 확인하여 처벌하고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는 역활을 맡았다.

 

* 순결 선언을 했음에도 바오로 3세에게는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라는 사생아가 있었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1545년에 파르마의 공작이 되었고 1547년에 암살당했다. 피에르에게는 라누치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바오로 3세는 자신의 손자인 라누치오가 고작 열다섯 살 때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 교황 바오로 3세는 사망 후,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그가 고용한 화가이자 건축가인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로마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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