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사추세츠주에 정착한 청교도들애개 주술만큼 큰 범죄도 없었고, 세라 굿 만큼 대단한 마녀도 없었다. 세일럼 마녀 재판에 기소되었던 세라 굿은 어린 소녀들에게 주술을 건 혐의가 인정되어 1692년에 처형되었다. 법정에서 세라 굿의 남편과 다섯 살짜리 딸은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물론 세라 굿은 마녀가 아니었다. 그해 여름, 세일럼을 휩쓸고 간 집단 히스테리로 처형된 열아홉 명의 여성과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해줄 친구가 거의 없었던 가난하고 평판이 안 좋은 여성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종교적 열정, 편협 그리고 군중 재판의 위험을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세라 굿은 빚 때문에 투옥된 식민지 주민 윌리엄 굿의 아내였다. 이 부부에게는 도로시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다른 여러 희생자처럼 세라도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무례하고 단정하지 못하며 자선단체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재판은 세 명의 어린 소녀가 자신들에게 주술을 걸었다며 이웃을 고발하기 시작했던 1692년 2월에 시작됐다. 세라 굿과 다른 두 명의 여성이 가장 먼저 고발되었다. 그해 3월 그녀의 재판이 열리자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유죄라고 주장했다. 세라 굿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녀가 고양이나 새에게 마법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그녀의 딸도 수감되었고 결국 강요에 의해 어머니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 굿은 교수대로 끌려가면서까지 자신은 무죄라며 저항했다고 한다. 처형 당시 그녀는 서른 일곱 살이었다.
식민지의 고위급 시민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의 지지를 받았던 마녀 재판은 그해 말에 폐지되었다. 20년 후 희생자들이 혐의를 벗으면서 정부는 그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청구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세라 굿의 남편이 떨리는 글씨로 법정으로 보낸 편지가 세라 굿의 재판과 처형에 통렬한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불쌍한 우리 가정을 파괴함으로써 내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세일럼의 모든 희생자들에 대해 2001년에 메사추세츠주에서 공식적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 세라 굿과 다른 죄수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 가운데에는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고조부인 존 호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