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토머스 페인 (개혁가)

작성자껄떡쇠1|작성시간26.06.23|조회수16 목록 댓글 0

1774년 말 런던에서 미국 대표 벤저민 프랭클린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라는 이름의 투지 넘치는 젊은 영국인을 소개받았다. 그의 지적 능력에 감명받은 플랭클린은 이 젊은이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줬다. "미국으로 오라."

   그해 말 프랭클린은 조언대로 토머스 페인은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후 18개월 만에 토머스 펜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매우 유명한 작가가 되었는데, 맹렬한 반영국적 정치 소책자를 써 미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동원하는 데 큰 역활을 했다. 토머스 페인에게는 영국을 떠나는 편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프랭클린을 만났을 때는 이미 여러 사업에 실패하고 채무를 갚지 못해 감옥에 수감되는 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상태였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두 번째 부인과는 별거 중이었다. 그는 학교 교사, 세무 관리 그리고 하인으로도 일했었다. 토머스 페인은 영국 왕정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반면 공화주의에 대한 믿음은 점점 커져갔다. 1774년 독립혁명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줄 기회가 주어졌다.

   1776년 토머스 페인은 <상식>이라는 50장 분량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직접적이고도 명쾌한 산문을 통해 영국 국왕을 공격하고 미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독립전쟁 후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인권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정치 논문인 <인권>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792년에 영국에서 추방당한 후 프랑스로 건너갔고, 프랑스 혁명의 열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3년에 체포되었고 간신히 단두대를 모면했다. 프랑스 감옥에 수감된 동안 조만간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한 토머스 페인은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저서 <이성의 시대>를 집필하여 기성 종교를 공격했다. 이 책은 새뮤얼 애덤스 같은 여러 협력자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1802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뉴욕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토머스 페인은 1792년에 명예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으며 프랑스 국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루이 16세에게 사형선고를 언도하는 데 반대하는 표결을 했고, 이로 인해 이듬해 결국 그 자신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 그의  종교적 관점이 애덤스를 불쾌하게 만들긴 했지만, 둘은 평생의 친구였다. 새뮤얼 애덤스는 1821년에 "페인을 능가하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 원래 토머스 페인의 본명은 "Thomas Pain"이다. 미국으로 이주하고 난 후에 페인의 끝에 e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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