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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그림이 보이십니까?

작성시간16.12.18|조회수401 목록 댓글 0




                                                           몬드리안(Piet Mondrian)
그림이 보이십니까? 



신 조형주의의 주창자라 불리는 피트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 작품이 왜 좋은 걸까?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럴까요? 간단한 그림 같지만, 몬드리안은 보통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의 시간을 투자하였습니다. 


Solitary House, possibly(1898-1900) 

그렇다면, 왜 많은 시간이 걸린 걸까요? 그 이유는 몬드리안이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끝도 없는 고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정밀하게 사물을 재현한 그림들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상화들은 그리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방향이 있지만, 
몬드리안의 그림은 정해진 결론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완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 그려놓은 몬드리안의 그림을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런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한다는 것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몬드리안 그림의 면 하나 선 하나 색 하나는 그의 생각의 결정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그림들을 보시죠. 

Still Life with Gingerpot II(1912,oil on canvas) 

몬드리안은 사물의 본질을 그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감정은 대상의 외형에서 방해받는다. 
그래서 대상은 추상화 되어야 한다.”대부분 그렇듯이, 
몬드리안 역시 처음 그림을 시작하며, 위대한 화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고민하고, 고흐 마티스 피카소 등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에 관해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림으로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Place de la Concorde (1938-43, oil on canvas) 

그가 30대 후반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대상이 점점 절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만을 보여주려는 몬드리안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40대 이후 그의 그림들은 점점 단순화되며, 
대담한 원색과 선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몬드리안의 그림은 완전한 추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추상화가 피트 몬드리안… 그는 관객을 위해 더욱 더 대상의 본질만을 
정리해서 간결하게 표현했던 것인데 글쎄요… 
그의 그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적화가, 
폴 클레(Paul Klee)


보통 화가하면 그림만을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준비와 노력을 합니다. 
특히 파울 클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수많은 지식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20세기 최고의 지적화가라는 평을 듣습니다. 

클레는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수를 역임할 정도로 지식이 깊었고,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기위해 음악공부를 시작으로,
 수학, 물리학, 화학, 해부학, 등 셀 수 없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goldfish 

보통, 뛰어난 화가들은 외부자극에 관한 특별한 감수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클레는 그런 면에서 무척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이해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고, 
당연히 모든 자연이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 라이오넬 파이닝거는 클레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클레는 깊은 현명함과 놀라운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측정 불가능한 나이를 가졌고, 시간을 초월한 사람이었다. 

 
eros 

1924년 독일 예나에서 열린 미술협회 강연에서 
클레는 현대 화가를 나무에 비유합니다. 
현대 화가는 나무의 뿌리처럼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을 이해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 그 모든 것을
 창작의 힘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창작을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나무뿌리와 가지가 똑같지 않듯이 현대 화가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느낀 것을 시각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self portrait 

파울 클레는 세상의 모든 근원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목표는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관한 
열정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움직임이 들어있고, 
수많은 지식과 그의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파울 클레의 자화상을 한번 보시죠. 
끝없이 예술에 관하여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늘은 파울클레의 고민이 탄생시킨 작품들을 감상해 보시죠. 



  음악이 들리는 그림,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차를 파는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아름다우면서도 지성을 겸비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이 본 것과 색을 매우 잘 기억하는 능력이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부모님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겪었던 이런 변화는 
칸딘스키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Colorful Life(1907) 

부모가 이혼하자 이모는 칸딘스키를 돌보게 되었는데, 
칸딘스키를 무척 사랑했던 그녀는 칸딘스키에게 늘 동화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이런 이모의 사랑은 어린 칸딘스키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 때였습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프랑스 인상주의 전에서
 모네의 건초더미연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인상주의의 느낌들이 들어나기도 합니다. 

Composition VIII 

칸딘스키는 어느 날 모스크바 국립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을 관람하며 경이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오페라의 관현악곡을 들으며 나는 머릿속에서 내가 아는 모든 색을 보았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됩니다. 
칸딘스키에게는 색채와 소리, 
그리고 그림과 음악의 관계는 그냥 개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재하는 것이었죠. 

 
Riding Couple(1906-07) 

바실리 칸딘스키가 그림만 잘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글도 아주 잘 썼습니다. 
그는 미술이론을 계속 공부하면서
 '예술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점 선 면' 등의 책도 썼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미술 공예학교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도 가르쳤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음악을 그린 특별한 화가로, 
그리고 현대 추상미술을 시작한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열정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니스에서 서북쪽 23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방스라는 작은 마을에는 로제르 예배당이 있습니다. 
작은 예배당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히 쉴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당의 다른 이름은 마티스예배당입니다.
 왜냐면 이곳의 모든 장식은 말년 마티스의 손길을 거쳐 탄생된 것들이니까요.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 정화되고 무거운 짐을 덜었다는 생각을 갖길 바랍니다.” 

20세기 현대 미술사를 뒤적여 보면 제일먼저 등장하는 화가는 마티스입니다. 
야수파 즉 포비즘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피카소가 형태의 재구성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면, 
마티스는 색으로 감정을 표현해 세상을 사로잡았습니다. 
피카소는 마티스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 
그가 표현한 색의 찬란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Matisse - The Red Madras Headress (Mme Matisse), Summer 1907 

마티스는 색채를 통해 외부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부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대담한 변형과 자유로운 터치 강렬한 보색대비, 
평평한 구성 등으로 색채의 해방을 이루었고 
야수파를 이끈 화가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늦게 그림을 시작한 마티스였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죠.
 그는 화가로서 사는 동안 빠짐없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붓 대신 가위를 잡았습니다. 
관절염으로 손이 자유롭지 않았고, 
십이지장 암 으로 인해 몸을 거동할 수 없을 때에도
 그는 침대에 누워 종이를 잘라 붙여 
색종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설화를 바탕으로 꾸민 대작 '왕의 슬픔', 앉아있는 여인을 표현한 연작 
'푸른 누드' '이카루스', '다발', '폴리네시아 하늘',
 '폴리네시아 바다' 등 그가 남긴 색종이 그림들은 장식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몇 가지 색으로도 풍부함을 드러내는 작품들이었습니다. 

Matisse - Icarus (Icare), 1947 From "Jazz" 

Matisse - Blue Nude (IV) Spring 1952 

그의 말년 또 하나의 역작은 로제르 예배당입니다.
 그곳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그가 실내장식 일체를 맡아서 
벽화에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그의 스타일로 완성된 성당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의 조화로 생명의 나무에서 뿌리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제작되었습니다. 

”간결하게 선으로 그려진 성 도미니쿠스와 성모자상도 성당의
 편안함을 만들어주는 요소로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은 현재 마티스의 성당이라 불리며 
그의 작품 인생의 완성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성당을 완성하고 죽기 전 3년간 종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몰두하고 오로지 그림만을 바라보다 
1954년 11월 3일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림과 평생을 함께 한 마티스는 끊임없는 예술적 탐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살아왔습니다. 

20세기 현대미술 야수파의 선구자 앙리 마티스. 
그는 평생 그림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독특한 콧수염을 가진 괴짜, 
달리 


특이한 콧수염, 그리고 기이한 표정들, 언제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유명했던 이 사람은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입니다. 

살바도르 달리
193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전’ 개막식에서 
그는 잠수복 차림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했던 거죠. 
당연히 잠수복의 밀폐로 인해 청중들은 강연을 들을 수 없었고
 정작 본인도 숨이 막혀 오히려 청중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잠수복을 입고 숨이 막혀 허우적대는 
살바도르 달리를 보며 청중들은 오히려 환호했다고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죽을 뻔한 위험 앞에서도 청중은 
그것을 그의 연기로 보고 감탄했다고 하니
 평소 달리의 해프닝이 어떠했었는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어쨌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살바도르 달리의 기행들은 그의 전시가 
언제나 성황리에 치러지는데 기여를 했고 
그가 유명해지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초현실주의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닌 초 현실을 표현하는 예술사조입니다. 
뭐 꿈속이라든지 또는 무의식의 세계 등을 표현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화가로는 달리 말고도 르네 마그리트, 호안 미로 등이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을 볼까요? 

 
기억의 영속 

가장 유명한 그림 '기억의 영속'입니다. 늘어진 시계들, 저 멀리는 바다 
같기도 하고, 앞에는 파리 한 마리와 개미 무리들 같기도 하고, 아무튼 뚜렷하게는 알 수 없는 사물들로 화면이 채워져 있습니다. 초현실의 세계를 표현한 것 인만큼 역시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사실적인 표현에 보는 사람에게 충격을 주며, 관객 스스로가 무언가를 상상할 밖에 없이 만드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잠깨기 직전 석류 주위를 한 마리 꿀벌이 날아서 생긴 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잠에서 깨기
 직전의 꿈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된 작품입니다.
 망망대해 위에 갑자기 석류가 있고 코끼리, 붉은 물고기, 물고기는 
호랑이를 삼키고 있고 호랑이는 달려 나와 포효하며
 벌거벗고 누워있는 여인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 여인 옆에 조그마한 석류와 한 마리의 꿀벌. 
역시 초현실주의 작품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기 누워있는 여인 보이시죠? 
그녀는 달리의 정신적인 뮤즈 이며 아내인 갈라입니다. 
이 꿈은 갈라가 꿀벌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갈라는 살바도르 달리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25살의 달리는 열 살 연상이며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던
 갈라를 만나자마자 그녀와 동거를 시작하고 후에 갈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갈라는 50여년을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살면서 정신적인 존재, 
영감을 주는 수호자로 달리의 삶에 존재하였습니다. 

언제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았고, 독특한 사고를 가졌던 달리 옆에서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정신적 나눔을 함께 한 갈라가 달리에게는
 무안한 안정감을 주는 최고의 동반자였던 셈이지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외치던 달리 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자체라고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화려하고도 요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하루는 달리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하며
 여유를 즐겨 보시는 건 어떨까요? 

  페인트를 뿌려 스타가 된 
잭슨 폴록 


이 작품을 한번 보시죠. 
무엇을 그린 작품 같으신가요? 
아마 자세히 보셔도 잘 모르실겁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눈에 보이는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제목도 그냥 입니다. 

 
Number 5(1948) 

그런데 이 작가는 이런 알 수 없는 그림을 통해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number 5' 는 2006년 11월 2일 소더비경매에서 
1억 4000만 달러에 팔리게 됨으로써 세상에서 거래된 가장 비싼 작품이 됩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잭슨 폴록입니다. 

뉴욕에서 활동한 작가이고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추상표현주의라 부르며
 또한 이 작가는 액션페인팅으로도 유명합니다. 
여기서 추상이란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 재정리하는 것을 말하며 표현주의란
 자기 자신의 느낌 상태 그런 것들을 표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 무슨 주의, 이즘 이런 것들은 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작가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작가 잭슨폴록도 그랬습니다.
 잭슨폴록은 작품을 하기 전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캔버스는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던 것이고
 잭슨폴록은 그때그때 어떤 행위를 한 것이고 
그렇게 그림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잭슨폴록은 어려서부터 무척 가난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집안은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폴록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거기서도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한 알콜 중독자였고, 술에 취하면 폭력적이었고 종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정신병원에도 여러 번 다녀올 만큼 
문제가 많던 무명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Number 1(1950) 

그런데 그의 천재적 직관력을
 알아본 운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리 크래스너', 당시 뉴욕에서 추상화가로 활동하던 그녀는
 모두가 포기했던 잭슨폴록을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그녀의 노력으로 폴록은 그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된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그리고 콜렉터이자 갤러리스트였던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모인 셋은 폴록이 후에 최고의 화가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기 구겐하임은 그에게 생활비를 대어주고, 
전시회를 열어 주기로 합니다.
 그린버그는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글을 쓰게 되고, 
리 크래스너는 늘 그가 작품에 몰입하도록 뒷바라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폴록은 작품에 더 몰입하기 위해 시골마을인 
롱아일랜드의 스프링스로 이사를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폴록은 마침내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할 
특별한 작품방식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공업용 페인트를 캔버스에 뿌리는 것이었죠. 

그 후 라이프지는 잭슨폴록 특집기사를 실었고 
그는 한 순간에 미국 최고의 작가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가 45살이던 1956년 8월 11일 
그는 음주운전 사고로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작가로 액션페인팅의 작가로
 그의 그림과 함께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미술은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미술이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새로운 것 들은 또 어떤 것일까요.
 한 번 기대해 보시죠. 



  낙서가 예술이 되다 

       · 장 미쉘 바스키아 와 키스 해링
 


예술은 공부한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오늘은 편안하게 작품 감상하시며 
다른 사람들 쳐다보지 말고 그냥  자신에게 빠져서 그림을 즐겨보세요. 

1989년 '나의 왼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연기파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연기자가 자신이 맡은 역을 정의하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 그 캐릭터는 죽어 버린다." 

때에 따라서는 어떤 것이 정의되는 순간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 반면 느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때론 예술이란 그저 느끼면 되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바스키아와 키스해링은 그냥 거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논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작업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에게 솔직한 자유" 입니다. 
그렇기에 그냥 우리들도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그저 같이 놀면 되는 것 아닐까요? 

   바스키아 
 
  키스 해링 



  매혹적인 사랑을 그린 화가 · 
제임스 티소 


칼라사진이 발명되기 한 참 전인 19세기 말경.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덕분에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혹평을 받은 화가가 있습니다. 

제임스 티소 입니다. 

티소는 원래 프랑스 출신입니다. 
본명은 자크 조제프 티소. 
제임스 티소란 이름은 그가 30대 중반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를 따라 개명한 이름입니다. 

A Passing Storm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티소는 20대가 되자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갑니다. 그곳 파리에서 그는 마네 드가 등과 사귀며, 
19세기 미술의 새로움을 접하게 됩니다. 

제임스 티소는 이때부터 독자적인 자신만의 매우 예쁘고 패셔너블한 
그림들을 그려갑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상류층들은 본인들의 모습을 너무나 예쁘게 그려주는 제임스 티소를 마음에 들어 했고, 티소는 그때 
패션잡지 베니티페어(허영의 시장)의 일러스트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 보불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패하자 
곤경에 처하게 된 티소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영국에서도 그의 그림은 매우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고. 부자들은 패션과 고급스런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패션에 조예가 깊었고 프랑스풍을 가미한 예쁜 그림을 그리던 
제임스 티소의 신선한 작품들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Katheleen Newton In an Armchair 

그러던 어느 날 티소에게 운명적인 여인이 나타납니다. 40세이던 
티소에게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은 22살의 캐슬린 뉴튼 입니다. 

그녀는 아이가 하나 있었던 이혼녀였습니다. 하지만 티소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죠. 티소는 그 후 그녀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캐슬린은 그 후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하나 더 낳게 되지만, 티소는 그녀를 끝없이 사랑합니다. 그 후 친하던 귀족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멀리하게 됩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길지 않았습니다. 티소의 뮤즈였던 캐슬린 뉴튼은 
폐병에 걸리게 되고, 그것을 비관한 나머지 그녀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큰 상실감에 빠진 제임스 티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그녀를 한 장의 작품
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을 훌훌 떠납니다. 

The Garden Bench 

프랑스로 돌아온 티소는 그 후 성지를 순례하며 죽기 전까지 많은 종교화들을 남겼습니다. 미에 대한 특별한 감성을 가졌던 제임스 티소는 화가로서 많은 화려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또 주위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만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남겼습니다. 

- 컨텐츠 제공 · 서정욱 [미술토크] / 조선일보 2010.10.06.

honybee.gif  거울이 있는 그림 


우리가 늘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854년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 기계의 편리성에 감탄하면서도, 대기시간이 길고 운행속도가 느리다며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발명자 엘리샤 오티스는 큰 고민에 빠졌고 그 후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해 보지만 이용자들의 불평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직원의 아이디어로 너무나 간단하게 이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거울을 달았던 거죠. 
그 후 불평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나르시시즘(narcissism)! 정신분석학 용어로, 자기애(自己愛) 인데. 
물에 비친 자기모습에 반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바라보다가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독일의 정신과 의사 P. 네케가 지칭한 용어입니다. 

이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로 다루어져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 화폭에 담겨졌습니다. 감상해 보시죠. 
니콜라 베르나르 레피시에의 꽃으로 변한 나르시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시스, 니콜라 푸생의 에코와 나르시스입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시스' 

거울 이야기가 나왔으니 거울이 등장한 작품들을 볼까요?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불리는 17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입니다. 

우리는 그림 속 비너스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거울 속 에 흐릿하게 비친 비너스의 얼굴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큰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의 모델은 벨라스케스의 애인 플라미니아 트리바라는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벨라스케스는 아름다운 비너스를 그린 것일까요? 아니면 누드화를 그리고선 비너스로 감춘 것일까요? 

 벨라스케스의 'Venus at her Mirror' 

벨라스케스가 화폭에 거울을 등장시킨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라스 메니나스입니다.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 

이번에도 그는 거울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담았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그림의 뒤쪽 벽에 거울이 걸려있고 그 속에는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거울 속의 인물은 왕 필립 4세와 왕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벨라스케스는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는 것이고, 그 광경을 공주와 하녀들이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공주 마르가리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왕과 왕비가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튼 벨라스케스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거울 앞의 비너스” 에도 
“라스 메니나스” 에도 거울을 사용하였습니다. 

거울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간을 보여주는 작품은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입니다. 

얀 반 에이크 Van Eyck, Jan - 'The betrothal of the Arnolfini', 1434 

이 그림은 신랑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신부 조반나 체나미의 결혼식 서약 장면을 그린 매우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가운데에 벽에 걸린 볼록 거울로 시선을 돌려 보세요. 거울에는 신랑과 신부의 뒷모습과 함께 우리가 보지 못했던 공간에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중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은 얀 반 에이크. 화가 자신입니다. 여기서도 거울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여 주는 역할로 사용되었습니다. 

거울은 직접 볼 수 없는 공간을 보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는 직접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죠. 그런데 때론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에 빠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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