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기도하는 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1471- 1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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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brecht Durer (1471 - 1528 )

 

 

 



(도판 1)[자화상]Self-Portrait at 26, 1498
Oil on panel, 52 x 41 cm, Museo del Prado, Madrid

Hands Praying


 

독일 미술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요약하려고 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뒤러를 말해 왔다. 
몇 가지 주저되는 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는 네델란드 사람들이 최고의 화가로

 렘브란트를 거명하고 벨기에 사람들이 루벤스를 거명하는 것처럼

당연히 독일의 대표적인 미술가로 통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가 17세기의 미술가를 들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큰 세계관의 차이로 갈라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16세기만 놓고 보면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홀바인은 목판화에서도 대중적이지 못했고, 그뤼네발트는 뛰어난 화가이기는 했으나

 오히려 예외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독일 미술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견해가 형성되면서

그뤼네발트는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

 

그는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스스로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고 더 이상 외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의 미술을 추억하면 우리는 곧장 알트도르퍼,

젊은 크라나하,한스 발둥 그린 같은 인물을 기억한다.

이제는 오히려 뒤러가 예외적인 경우로 비쳐진다.

우연히도 그뤼네발트가 수백 년 동안 독일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뒤러의 명성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그뤼네발트의 다양성과 자연스러움에 비할 때 뒤러의

 예술성은 편향적이고 때로는현학적이며 학구적인 느낌을 준다.

 

또 그의 이태리 형식 숭배는 불행하게도

그의 타고난 독일적인·특성을 묻어버린 듯이 보인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생동하는 색채이다.

우리는 합리가 아닌 비합리를 원하며, 구조가 아닌 자유로운 리듬을 원한다.

그리고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이룩된 것을 원한다. 

이런 비판에는 맞서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뒤러가 독일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다른 미술가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된다고 해도,이 거장은 아직도 은밀하게 제왕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도판 2)[기사와 죽음과 악마] Knight, Death and the Devil
1513 Engraving, 245 x 188 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사실 뒤러만큼 우리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미술가도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미술가보다도 뒤러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뤼네발트나 홀바인은 인간이라는 존재로 볼 때는 우리에게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외모에서도 그들은 뚜렷한 모습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뒤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거나 적어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편지와 일기와 기타 수많은 기록에도 아주 정감 넘치는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와 더불어 웃고, 그의 깊은 영혼의 감동을

목격하면서 그와 가까워진다.

뿐만이 아니다.

그가 미술가로도 대중성을 가장 많이 확보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물론 그의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실로 낯선 느낌이 드는 것도 있다.

하지만 많은 작품에서 그는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 곁에 존재한다.

 

얼마나 많은 독일인의 방마다 그의 동판화인 [기사와 죽음과 악마](도판 2)가

 벽에 걸려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독일 미술품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사"라는 작품 원래의 의미가 오늘날에는 보편적으로 이해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곤궁한 삶 속에서 여전히 이 판화를 통해 활력을 얻는다.

 

 다음으로는 [멜랑콜리아]라는 동판화가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정신 노동 종사자들을 위한 것이다.

 뒤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좋지 않은 별자리에 지배당했을 때의 침울함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여러 세부 대목이 낯설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나

 익숙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작품이 탄생한 후 흘러간 400년이라는

 세월을 잊을 정도이다.

 끝으로 그의 명작 동판화 가운데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이다.

이 판화는 우리 마음에 가장 직접적으로 와 닿는 작품이다.

또한 표현의 핵심이 인물이 아니라 공간과 빛의 조화에 있다는 점에서

그의 동판화 중 가장 진전된 작품이다. 

이제는 목판화를 보자. 뒤러의 [요한 계시록]에 있는 세부 장면들, 곧 네 명의 기사,

 유프라테스의 천사들, 용과 힘겹게 싸우는 성 미카엘이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목판화의 양식뿐 아니라 새로운 선의 언어까지 창출되었다.

 

위엄이 흐르는 이 선들은 훗날 풍속화풍의 [성모의 생애]에서는

우아함으로 바뀌었다.

앞의 연작에서는 독창성이 휘몰아치지만 뒤의 판화에서는 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도판 3)[네명의 사도]The Four Holy Men
1526 Oil on lindenwood, 215 x 76 cm (each panel) Alte Pinakothek, Munich

 

사람들은 뒤러가 이 작품들로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이것들이 판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뒤러야말로 판화를 대중적인 독일 미술로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판화는 왜 그의 작품만큼 유명해지지 못했을까?

회화에서는 초상화가 가장 인상적이다. 뒤러가 그린 초상을 볼 때마다 우리가 받는

 인상은 한결같다.

인물이 풍기는 감각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압축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초상화에서 전신상으로 넘어가면, 가령 윈헨 미술관에 있는 [네 명의 사도]

(도판 3, 7)를 보면, 끝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습과 마주친다.

 그 속의 사도 바울 그림이 보편적인 독일 인물화에 속한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이 그림을 한번 본 사람이면 결코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사도 바울의 진지한 눈빛은 미술관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관람객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뒤러의 본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정신의 깊이와 사려 깊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뒤러만큼 드는

미술가도 없다.

게다가 그는 화가 고유의 직관과, 사물을 예리하고 명확하게 관찰하는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묘마다 발산되어 나오는 이 특성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도 더 새롭고

역동적으로 사물을 보는 듯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물의 형태가 완성되어 뻗어나가고, 크기와 공간의 비례가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고,

 심리 상태가 바닥까지 드러나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은 보는 이에게 안정감과

기쁨을 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개개의 그림을 떠난 뒤에도 지속된다.

 물론 이런 인상이 뒤러의 미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명확성과

 사려 깊음, 그가 작품마다 유지하려고 애썼던 한결같은 객관성은 뒤러만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적인 완벽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으로 경탄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모든 창조 대상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시각기관을 되도록 완벽히 사용하겠다는

 야심이 거기에 있다. "눈은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 


(도판 4)[풀밭]The Large Turf
1503 Watercolor and gouache on paper, 41 x 32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그밖에 뒤러의 소묘가 발하는 마력을 완성시키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모든 묘사가 아주 뚜렷한 질서와 비례로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린 손의 모습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우아하고 힘찬 선의 흐름과 연결 덕분이다.

거기에는 산만하거나 극단적이거나 부주의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자로 잰 듯이 뚜렷한 리듬을 타고 움직인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있는, 수채로 그린 그 유명한 [풀밭](도판 4)을 보자.

 그 속의 풀잎들은 아무렇게나 배열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거기에는 형태에 질서를 잡아주는 일정한 조화와 법칙이 있다.

이 배열의 법칙은 엄격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친밀하고 정다운

느낌을 줄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소묘에 있는 선의 형태와 연결뿐만 아니라 인물화에까지 침투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안정감과 절제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쾌활하고 힘찬 생동감으로

 느낄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것이 뒤러의 시민적이고 인간적인 본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관련성이 그의 미술이 지닌 대중성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뒤러의 전모는 아니다.

미술가 뒤러 외에도 「컴퍼스와 수평기에 의한 측량」과 「인체 비례론」을

 쓴 이론가로서의 뒤러도 있다.

그의 삶에서 이 두 가지 직업은 똑같이 중요했다.

따라서 그의 미술에서 약동하는 상상력에 반작용을 하는 학문적 성향을 보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일찍부터 이태리 미술에 끌려 독일적 전통에 외래의 요소를

 도입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차갑고 빌려온 듯하고 형식주의적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런 혐의는 한번 생기면 가라앉히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뒤러가 전혀 다른 미술가가 됐을 수 있고 또 그랬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독일 미술과는 거리가 먼 흔적을 사방에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

 

 알트도르퍼나 젊은 크라나하의 생동하는 활력에 비하면 뒤러의 소묘는 조형성과

 측량 가능한 형태라는 이상에 떠밀려 좁은 길로 빠져들었음을 우리는 뼈아프게

 깨닫는다.

나아가 그뤼네발트 같은 사람과 견주면 뒤러의 고립된 위치는 더욱 고통스럽게

 우리의 의식에 와 닿는다.

그뤼네발트가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보여준 끝없이 풍부한 회화성에 맞서서

뒤러는 무엇을 내보일 수 있는가?

그뤼네발트는 세상의 온갖 기적을 인정하면서 신성의 세계로 비약했지만

 뒤러는 여기에 뒤쳐져 있다.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능력에서 뒤러의 어느 부활의 그림이 그뤼네발트의 것에

 견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당시의 독일 미술가들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독일적인 특성을 대표했거나 그 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로 그랬는지를 살펴보겠다. 

독일 미술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형태를 짜맞추는

 방식, 곧 우리가 (내키지는 않지만) "회화적"이라는 말로 일컫는 특성일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조형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형태에서 형태로 이어지는

 내밀한 흐름이 있음을 말한다.

단순히 공간 속에 개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을 통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연결하게 해주는 통일적인 생명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개개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의미는 어느 정도는 전체 속에

묻히게 된다. 


(도판 5)[파움가르트너 제단화]Paumgartner Altar
c. 1503 Oil on lime panel, 155 x 126 cm (central), 151 x 61 cm

 (each wing) Alte Pinakothek, Munich

발둥과 알트도르퍼가 그린 [폐허 속의 성 가족]이 그런 특성을 보인다.

거기에서는 어두운 동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의 살랑대는 소리가 들린다.

부서진 성벽의 실루엣을 그린 선은 인접한 선과 독특하게 이어져 있고,

드러난 한 조각의 하늘은 이런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의 모든 형태들이 신비에 가득 차 있다.

윈헨과 베를린의 공공 미술관에도 이와 유사한 종류의 유명 회화들이 있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의 작품을 진정 독일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뒤러는 이와 비슷한 것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의 작품에는 이런 "회화적"인 모티프가 별로 없다.

어쩌면 그는 젊은 날에 가지고 있던 이와 비슷한 형태 감각을 철저히

뿌리 뽑아버렸는지도 모른다.

혹 그랬다고 해도 그 감각은 애당초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파움가르트너 제단화](도판 5) 속의 성가족이나, 역시 초기작으로서

 [성탄절]이라고 부르는 그의 동판화를 회화적인 착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무대가 먼저 세워지고 그 다음에 인물들이 배치된 느낌을 준다.

세부 장면은 매력적일지 몰라도 결정적인 부분, 곧 형태를 이어주는 신비스러운

 연결이 없다. 

숲은 단순히 개별 나무의 합산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숲의 "짜임"이며, (상상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가지와 가지의 관계,

나무와 나무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형태의 속삭임이다.

알트도르퍼가 이런 느낌을 준다.

뒤러도 적지 않게 풍경을 주제로 다루었지만 그의 작품 중에 숲을 그린 회화는 없다.

 

다른 미술가들은 나무의 군집을 보면서 이끼가 돋은 오래된 가지들이 뒤엉킨

모습 따위를 매력적으로 느꼈지만 뒤러는 그런 것을 무시했다.

 아니면 지나치게 분명하고 단순하고 조형적으로, 손에 잡히도록 표현했다.

그런데 독일 미술은 바로 이러한 얽힘과 교차 속에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것이 특별히 많을 필요도 없다.

그뤼네발트는 [이젠하임 제단화]에 그려 넣은 은둔자 그림에서 몇 안 되는

나뭇가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아주 기막힌 광경을 보여주었다. 

뒤러의 고전적인 풍경화, 곧 그의 원숙기에 나온 풍경화에서 두드러진 점은 독특한

 선의 표현과 생생한 공간 묘사이다.

알트도르퍼나 볼프 후버 같은 화가는 이런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소용돌이치는 시내와 험준한 산맥과 빛으로 번득이는 하늘을

묘사하여 마치 땅과 하늘이 똑같은 숨결로 충만해 있는 느낌을 준다.

물론 뒤러의 풍경화들도 대상을 깔끔하게 분리시킨 덕분에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따라서 자연의 체험도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뒤러가 젊은 시절에만 풍경에 관심을 두었지 훗날에는

 거기에서 점차 멀어졌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회화적"인 배경 구성도 없어졌고 "회화적"인 인물 군상도 사라졌다.

대신에 조형성과 개별 인물의 묘사가 더욱 배타적인 의미를 얻었다. 



(그림 6)[인간(아담과 이브)의 타락] Adam and Eve
1504 Engraving, 252 x 194 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그와 동시에 뒤러는 소묘의 명확성에 갈수록 큰 가치를 두었다.

아무리 그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원했고 따라서 독일의 전통이나 당대의 미술과는

 상반된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기하학자의 눈과 도구로 인물들을 훑으면서 측량하고 측량하고 또 측량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우리로 하여금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형태의 역동성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도 그런 감각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해법에 도달했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우리가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내면의 일관된 흐름과 형태의

통일성이며, 그 다음으로 -그것이 존재할 경우 - 구조를 인식하게 된다.

 

 반면에 뒤러는 인체라는 것을 우선 각 부위를 해체한 뒤 거기에 분명한 경계와

 측량이 가능한 형태를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물론이 같은 정의는 잘못된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이 차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윈헨에 있는 뒤러의 [루크레티아]를 발둥이 그린 여성나체화와

 구별해주는 특성이며, 또한 대다수 사람들이 [루크레티아]가 감상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식의 인체 해석에 익숙하지 않으며

그런 뒤러의 해석이 이태리 전범에 영향 받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동판화 [인간의 타락](도판 6)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의 육체나 [기사와 죽음과 악마]에

 등장하는 말의 원형은 독일적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 차이는 이태리의 전범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의상 소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도 그의 조형적인 상상력은 절대적인 명확성을 얻으려는 욕구와 결합하여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지향한 다른 화가들과는 상반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십자가 발치에서 흐느끼는 막달라 마리아는

 여러 겹으로 주름잡힌 옷에 파묻혀 있다.

이런 모습이 조형의절대적인 명확성이라는 시험을 이겨낼지는 의문이지만,

 과연 어느 누가 이것을 측량의 눈으로 보려고 할까?

 

그녀 옷의 주름을 보고 이 여인이 슬피 울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 그림을 뒤러의 [헬러 제단화]에 나오는 사도들의 주름옷이나 윈헨 미술관에 있는

사도들의 옷과 비교해 보라.

뒤러의 주제들은 장엄할지모르지만 인물들은 경직되어 있다.

그들의 표정이 풍부하다고는 해도 그것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그림에서는 추구하는 목적이 각기 다르다.

전자는 거칠 것 없는 비애의 분출이고 후자는 완벽한 평온과 침착함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그 둘을 비교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뒤러가 한번도 열정적이지 못했고 언제나 차디찬 근엄함으로

 일관했다고 탓하게 되는 소이이다.

 

그는 결코 열정이라는 행복을 알지 못했고 매혹적이라고 부를 만한 표현을 보여준

 적도 거의 없다.

그리스도 수난의 묘사를 회화의 핵심 과제로 규정한 그가 강렬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모티프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상한 일이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감동적인 골고다 언덕 장면은 뒤러의 감성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또 알트도르퍼의 [성모의 탄생](뮌헨)에서 한 무리의 천사들이 공중에서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가 교회까지 밀려오는 광경은 뒤러라면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는 감성의 회색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지도 않고 밝은 빛 위로 상승하지도 않는다.

그의 심리묘사가 아무리 섬세해도,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고 "자연스러움"의 매력에

감동되는 경우는 다른 화가들보다 덜하다.

가 그려낸 인간들은 거의 모두 의식이 깨어 있는 밝은 한낮에 살고 있다.

 

비판을 계속하자.

우리는 가시적인 세계를 대하는 뒤러의 태도 전반에 혹시 어떤 차가움이 있지나

않을까하고 의심스럽게 묻는다.

그리고 다른 화가들의 경우 - 가령 볼프 후버가 그러한데 - 현란하고 과장된 형태를

 만들게 한 그들의 열정적인 감성을 지적한다.

그들의 그림에서 산은 급상승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솟아 있고 나믓잎은 급류를

탄 듯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끝없이 샘솟는 자연, 그 무한정한 형태의 충동은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뒤러에게는 젊은 날의 몇 가지 작품을 제외하면 이런 종류의 소묘가 없다.

그는 뒤로 물러나 철저히 객관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객관성도 좋지만 사물에 대한 그의 색채감과 질감은

 좀더 적극적이고 풍부했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그도 표면에 대한 감각은 가지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것은 소묘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회화에서는 왜 그것이 그토록 빈약할까?

윤기 있는 젊은 피부, 값진 옷감의 광택, 분위기 있는

매혹적인 삶의 표현에서 그는 다른 화가들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

그에게 원래부터 색채감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이에 대한흥미를 서서히 상실해 갔다.

그리고 바로 이 감각 속에서 감정의 표현 수단을 발견했을지 모르는

 내면의 충동도 세월과 더불어 사라졌다. 

이렇게 뒤러의 세계가 빈약해질수록 형태의 질서는 더 엄격해지고 고정되었다.

 이는 우리의 감성에 필연적으로 차가운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게르만 미술은 자유롭고 직접적인 표현의 미술이고 - "시를 만드는 것은

감동이지 박자로 셀 수 있는 운율이 아니다" (할러의 「알프스」),

로만 미술은 고정된 형식을 좋아한다.

 

 16세기의 이태리 미술가들은 정열이 넘치는 장면도 아주 엄격한

 구성에 갖추어 넣을 수 있었으나 독일인들은 이것을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생동하는 장면은 자유로운 리듬으로 고동치고 싶어 하지 족쇄를 차려고 하지 않는다.

뒤러의 동시대 화가들에게서 우리는 자유롭게

 약동하는 휘황한 창의력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뒤러는 일찍부터 이태리의 엄격한 양식을 사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인위적으로 인물 피라미드를 세웠다.

 

처음에는 그림의 양쪽 면을 시험삼아 간간이 대칭으로 그렸으나,

 나중에 중반기에 와서 대규모의 역사적 장면을 다룰 때에는

중심축을 강조하고 엄격한 대칭을 이용하여 고정된 구조로 표현했다. 

이것을 우리는 건축적인 구성이라고 부르지만 이 개념은 훨씬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기사와 죽음과 악마]의 정면과 직각 구성, 동판화 [인간의 타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형태도 건축적이다.

다른 작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구성이 이태리사람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우리 북유럽 사람들은

 거기에 예민해지고 이내 그것을 경직된 것으로 거부한다.

 

우리에게 이런 그림들은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는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꾸민 것처럼 느껴지고,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임의의 작품이라도 미학의 법칙은 작용하는 법이니까 이 개념들을

 배타적인 대립 개념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엄격성은 로만 사람들의 엄격성과는 다른 한계를 지닌다.

 

 뒤러의 태도는 일관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고정된 형태의 것 외에도 이상하리만치 자유로운 풍의 작품들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본성을 거부하고

 지나치게 외국의 이상을 받아들였다는 질책을 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놓고 '비전vision"이란 말을 쓰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가!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이태리적인 특성을 가진 주제, 곧 비례미의 문제를 얘기해야 하겠다.

 

뒤러는 인생의 전성기에서 이 문제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된 연구를 하면서 인간의 완벽한 형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시기별로 다른 대답을 내었고 결국에는

궁극적인 완벽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최고의 미는 하느님만이 알고 있고, 우리는 호리호리하거나 넓적하거나,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를 막론하고 그 각기 다른 유형을 관통하는 조화를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이때 우리가 어느 것을

선호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인취향에 달린 문제였다. 

이 같은 숙고가 어느 만큼 뒤러의 미술 작품에 투영되었는가는

 논외로 하고 여기에서는 문제의 본질만 들여다보겠다.

어쩌면 뒤러는 사물의 본질이 일정한 비례 속에 담겨있다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선입견을 따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게르만 사람들은

이태리인들만큼 비례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술은 비례의 "순수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태리인들의 견해이다.

아무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어도 이 비례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별다른 실감을 못 느낀다.

 우리의 감성은 일어나는 사건에 자극 받는 것이지

정지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물에 자극 받지 않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독일 건축의 특징을 결정지은 것은 고정된 비율이 아니라

 특정한 움직임이 주는 인상이었다.

마찬가지로 독일의 조형 미술에서도 인체는 어떤 특정한 비례미에 의한

 효과를 노리기보다는 언제나 역동적인 면에서 파악되었다. 

그러나 뒤러는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생각을 달리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례미라는 것이 점차 그의 실제적인 작업에서 벗어나

저술을 통한 순수 이론적인 연구로 넘어갔어도, 「인체 비례론」을 지은

 그는 이 저술을 통해 삶에 봉사했다는, 다시 말해향후 독일 미술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지금까지 이 기대를 확인시켜 주지 못했다.

이처럼 여러 개의 본질적인 이의를 제기하고 난 지금,

과연 우리는 뒤러가 독일의대표적인 화가였다고 얘기해도 괜찮을까?

오히려 그의 커다란 재능이 외국 모방 속에서 길을 잃고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의 작품 중에는 독창적이고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으며

그것도 젊은 시절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우리에게 낯선 요소들이 침투해 있다.

이태리라는 유혹적인 여성의 무릎 위에서 삼손은 머리카락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뒤러의 생각이 백 번 천 번 틀릴지 모르고

다른 독일 미술가들과 비교해도 그는 불리한 입장에 있을지 모른다.

그의 미술에서 못마땅한 부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고,

우리가 비판하는 것도 그가 사용한 기법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또 그가 이태리에 끌리는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방법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도

그 충동 자체는 아주 건전한 정서에서 나왔을 수 있다. 

비례 문제에서는 한 이태리 미술가가 뒤러에게 불을 지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내밀히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 자극을 그렇게 열렬히 받아들였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주어진 자극을 쫓아 그것을 확대하려는 심미적 취향이 아니라

거의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관심이었다.

모든 사물에는 일정한 비례가 있다.

인체 비례는 그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히 가장 흥미로운 문제이다.

 따라서 미술가는 하느님이 의도했던,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망가져버린 형태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뒤러는 미술가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너는 피조물의 원형적인 미를 되찾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부르짖는 뒤러는 미술에 얼마나 위대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가!

정말이지 미술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인이 되었다. 

뒤러가 남자와 여자의 형태를 실제로 어떻게 구성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필연성을 추구하는 마음, 다시 말해 수학적인 증거처럼

 그 앞에 "꼼짝 못하고 서 있게 되는" 미를 찾으려는 그의 바람이다.

자의적인 것, 우연한 것, 불확실한 것에서 벗어나 "순수한' 형태를 향해 솟아오르려는 갈망,

바로 이것이 "진정한" 비례를 찾으려는 그의 열정적인 노력의 핵심이다.

뒤러는 사람마다 미를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마저도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내려지는 사실에 많이 괴로워했다.

 

 이궁극적인 것, 확실한 것, 완벽한 것에 대한 갈망을 독일적이지 못하다고 거부하는

 사람은 독일의 정신사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는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이상주의로 인해 피 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 독일인들에게는 비례미와 완벽성이라는 개념이 로만 미술에서처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치자.

그렇지만 완벽미가 저 멀리 하늘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별처럼 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사람을 미혹하는 도깨비불이 아니다. 

뒤러의 이상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세상 접근 방식을 기억해 보아야 한다.

그는 순수한 형태에 대해 사유하면서도 주어진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순수한 형태는 자연 속에 깃들어 있다.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자만이 그것을 소유한다.

 자기 마음대로 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몽상가에게 화 있으라.

그런 사람이 내보이는 것은 내면에서 붕괴할 수밖에 없는 사이비 진실에 불과하다. 

이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이제 뒤러의 경직된 형태 배열에서

 낯설게 보이는 것들을 이해하는 디딤돌을 얻었다.

그는 다른 형태 배열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단 하나의 길만을 모색했다.

물론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독일 미술가들도 기성세대의 구조감각을 넘어서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태리 미술의 엄격한 질서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인의 감성에 때로는 무리한 요구를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준 다른 미술가들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의 개별적인 해결이 아니라 불변의 것을 바라는 감정의 눈뜸이다.

이것을 고전적 정서의 특징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는 북유럽 미술에도 고전이 있었음을 말한다.

 물론 북유럽의 고전성은 로만 미술의 고전성과 똑같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태리 미술을 직접 모방함으로써 이 고전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뒤러의 "질서“가 등장한 데에는 또 다른 뿌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도 단순히 취향의문제가 아니었다.

뒤러는 이 세계 속에서 질서를 보았고 질서정연한 것을 생명체 본연의 형태로 생각했다.

 이는 꽃을 그린 소묘와 풀덤불 소묘에서 느낄 수 있다.

거기에는 건축적인 선이나 순수한 수평과 수직 구성은 없지만,

 그림 전체는 질서감으로 충만해 있다.

이는 거대한 건축적 구성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질서감이다. 

질서 정연한 세계는 도덕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기사와 죽음과 악마]에 묘사된 말과 기사에는 경직된 면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고정된 형태 속에서 기사가 지닌 도덕적인 힘의 일부가 느껴지지 않는가?

 고결한 남성은 직립한다.

이 말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이 상징은 네 명의 사도를 그린

거대 인물화에서도 유효하다. 반대로 야만과 방자함은

악의 특성이며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의 특성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뒤러의 미술에서 관찰의 도덕성이라는 말까지 하고 싶어진다.

묘사의 절대적인 명확성이라는 개념, 그때까지의 전통과 관습에서는

 전혀 새로웠던 이 개념을 구체화한 것은 뒤러의 업적이었다.

 

우리가 그의 빈약한 회화성을 놓고 한탄다면 이는 그가 얼마나

긍정적인 장점으로 이 결점을 메웠는지 모르고서 하는 행동이다.

그의 관심은 주로 구체적인 형태에 쏠려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대단히 자신만만해 했다.

 때문에 조형성과 관계없는 것들, 즉 질감, 회화적인 명암, 색채 같은 것들이

 그의 작품에서 빈약하게 보여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빛과 색채는 오로지 조형의 명확성을 위해 봉사할 뿐,

자기 고유의 존재를 갖지 못한다.

조형성과 관련해 관찰자로부터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기초적인 일에 불과하다.

미술이 의도하는 더 큰 목표는 사물을 그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특성에 따라 남김없이 묘사하는 것이다.

이 객관성을 뒤러의 도덕적인 관찰이라고 불러도 좋다.

물론 이 객관성은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회화적인 짜임이 주는 매력에서, 또는 이해 못할 정서가 담긴

 회화에서 뭔가 적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독일인이었고 이런 회화적인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뒤러가 너무도 독일적이지 못한 화가였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이 삭막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태리 양식을 모방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군데군데에서 그의 자연스런 감정이 손상된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는 이태리 미술의 핵심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이태리미술에서 명료함과 선명함을 발견했고

이는 그 자신이 추구하던 것의 완성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발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물을 시각적인 가치로 완전히 분해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것이 중요한 대상이라면 - 남김없이 묘사한다는 데서

 문외한들이 이해하지 못할 기쁨을 느꼈다.

이런 경향은 독일 미술에 드물지만 -

이것도 고전성의 한 특징이다 -

 

결코 한 번밖에 없었던 경향은 아니며,

한 그것을 외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치부해도 안 될 것이다.

독일의 고전성과 이태리의 고전성에는 여전히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러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이태리 미술과는

거리가 먼 [네 명의 사도]에서 이 차이를 얼마나

뚜렷이 보여주었나를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네명의 사도)의 세묘[사도 바울과 마가]

어쨌든 우리는 뒤러가 관찰한 세계가

빈약하다고 탄식할 권리가 없다.

 단지 사물을 대하는 그의 감성이,

강렬한 형태로 세계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화가들의 감성과 달랐을 뿐이다.

 

뒤러는 철저히 사물의 뒤편에 물러나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모든 주관성을 혐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술에 커다란 열정의

 분출이 없다는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뤼네발트 같은 위대한

화가를 예로 들면서 그가 영혼을 뒤흔든

화가였다고 말할 것이고, 그

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십자가 형을 받

그리스도의 고통스런 얼굴처럼 감동적인

장면이 뒤러의 작품에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있다. 

뒤러는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똑같은 주제를 자기만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그려놓아 그뤼네발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그 출발점과 목표는 전혀 다르다.

그뤼네발트의 그림에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고통이 있지만, 뒤러는 고통에 저항하는

힘을 보여준다.

이것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뒤러가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정신적,

도덕적인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그뤼네발트의 그리스도가 더 감동적일

수 있지만, 뒤러의 정신이 발하는 영향력은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것은관찰자의 마음을 내리

 누르지 않고 고양시킨다. 

뒤러가 그린 [성 바울의 얼굴]도

이런 정서에서만 태어날 수 있었다.

[네 명의 사도]는 언제나 뒤러의 진정한

 유산으로인식되어 왔다.

 

그는 이 그림을 의뢰자 없이

그렸으며 고향인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선물했다.

거기에 씌어진 제명이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굳건히 성서의 말씀을 지키라는 경고였고, 사이비 예언자가 나타나 모든 교회와 세속의

법을 무너뜨리는 사회적, 종교적 급진주의를 설파하더라도 굴복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뒤러는 한 자도 뺄 수 없고 한 자도 보탤 수없는 성서를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확고한 기반으로 보았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편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는 당연한 견해였다.

 다른 시대였다면 아마 그는 역사 발전의 정당성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다. 

[네 명의 사도]는 어떻게 뒤러가 화가로서

 당시의 전쟁터 한 가운데로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에게 미술은 단순히 미의 계시자나 신앙의 도구가 아니라,

 정신의 싸움에서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강력한 논리로 사람들을 확신시키지는 못했지만,

도덕성을 내뿜는 위대한 인물화의 힘을 통해 그것을 이룰 수 있었다.

이로써 그가 미술 본연의 과제를 넘어섰는가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다.

 어쨌든 뒤러는 미술가의 직분에 대한 견해에서

또 한 명의 위대한 독일인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쉴러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존엄성은 너희들손에 놓여 있다. " 

뒤러 동판화자료:http://www.29art.com/shopping/product_list.asp?cat1=F&cat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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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뒤러의 생애



“눈은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 뒤러


(도판 8)[자화상 13]Self-Portrait at 13
1484 Silverpoint on paper, 275 x 196 m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우연히도 뒤러의 처녀작으로 남아 있는 것은 13세 소년을 그린 그의 [자화상](도판 8) 이다.

은필(銀筆)을 이용하여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선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뚜렷한 형태로 묘사된 부분에는 이미 훗날의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뒤러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개성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눈만 실물과 다를 뿐이다.

 그러나 섬세하게 그린 얼굴에는 전체적으로 독특한 긴장이 들어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거울 앞에 선 모델의 긴장감을 넘어 천재가 세상과 마주할 때의

 야릇한 기대감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이 소년은 1471년 5월 21일에 뉘른베르크의

어느 집 뒤채에서 가난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두 형이 있었고 훗날에는 열다섯의 아우들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었으며, 40세에 왕년의 스승의 딸이자

 뉘른베르크의 젊은 소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젊은 시절의 뒤러는 아버지를 두 번 그림으로 그렸다.

 그는 아버지가 말수가 적었고, 자신의 직업에서는 엄격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으며,

 평생 동안 고생을 겪은 분이고, 자식들을 엄한 기독교의 가르침 아래에서

 키웠다고 가족사에서 적어 놓았다.

 알브레히트는 아버지가 특히 귀여워한 자식이었다. 


(도판 9)[어머니]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1514 Charcoal drawing on paper, 421 x 303 mm Staatliche Museen, Berlin

한때는 매력적인 소녀였던 어머니(뒤러는 어머니를 "아름답고 정직한 처녀"라고 불렀다)는

 그녀의 말년의 소묘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도판 9).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인 1514년에 아들이 그린 엄청나게 큰 목탄화가 그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뒤러는 어머니를 떠맡았다.

그녀는 교회에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꼭 교회에 나가셔야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갈 것을 권했다.

 이 그림은 수많은 출산에 지치고 궁핍과 노동으로 완전히 쇠약해진 여인의 모습이다.

 돌출한 사시와 주름진 얼굴은 무감각하게 희망 없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무시무시한 인상마저 준다. 

이상이 뒤러의 부모이다.

그의 대부는 안톤 코베르거라는 유명한 인쇄공이자 출판가였다.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난 뒤 뒤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사의 견습을 받았다.

 그리고 견습을 거의 끝마쳤을 때는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는 가족사에다 적어 놓았다.

아버지는 "헛되이 보내버린 세월을 아쉬워했지만"

결국 아들의 뜻을 따랐고 그를 미하엘 볼게무트의 작업실로 보냈다.

그때 뒤러의 나이는15세 중반이었다. 수련 기간은 3년으로 정해졌다.

"이 시기에 하느님은 내게 근면함을 주시어 열심히 배우도록 하셨다.

" 그러나 그는 작업실에 있는 다른 수련생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19세가 되던 1490년 봄에 뒤러는 편력 여행을 떠났다‥‥‥.

수련 기간이 끝났으므로 아버지는 나를 떠나보내 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부를 때까지 4년 동안 타향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하지 않지만, 다른 기록들을 보면 콜마에 있는

마르틴 숀가우어의 화실이 그의 편력 여행의 주 목적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을 둘러서 간 것으로 보이며 콜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예기치 않게 숀가우어가 1491년에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형제들 집에 머물렀고 그 뒤에는 바젤로 가서 목판화에 열중했다.

또 다른 기록은 그가 1494년에 슈트라스부르크에 체류했음을 말해준다. 

이미 얘기했듯이, 뒤러는 1494년 오순절부터 다시 뉘른베르크에 돌아와 있었다.

 귀향하자마자 그는 남들 하는 대로 아버지가 골라준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아그네스 프라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

 평범한 생김새에다 무미건조한 여인이었는데, 독설가들이

그녀를 두고 뒤러에게 시련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 그러나 여기에서는 뒤러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는지는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단지 그가 죽는 날까지 -자식 없이 - 아내와 함께 평범하게 살았다.

뒤러의 예술적 개성은 처음부터 조형에 대한 비상하고 섬세한 감성을 특징으로 드러냈다.

 

그는 다른 어떤 미술가보다도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 감수성이 유달리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자연 묘사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단순히 뉘른베르크의 지방적 전통을 이어간

 사람이 아니라 남독 미술 전체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틴 숀가우어였다.

숀가우어가 준 영향에 비하면 볼게무트와 그 동료들의 가르침은 빛을 잃는다. 

게다가 뒤러는 숀가우어의 고향에 체류하면서 그곳 라인 강 상류 지방의 섬세하고

풍부하고 활기찬 미술에 흠뻑 젖어 지냈다.

그러니 그가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일찍 세상을 떠난 스승의 계승자,

그의 완성자가 되리라는 것 말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뒤러가 이태리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숀가우어의 영향은 만테냐의 영향과 충돌했고,

독일의 후기 고딕은 이태리의 르네상스와 만났다. 

뒤러가 언제 처음으로 이태리 그림들을 접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직후인 1494년과 1495년에는

 그 그림들과 접촉했었다는 징후가 많이 보이고 있다.

때문에 다른 기록을 통해 확실히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그가 알프스를 넘어 여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는 독일에서 이미 이태리 거장들의 동판화를 모방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뒤러는 1495년에 분명히 이태리 땅에 있었다.

이 연도는 훗날 그가 1506년에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11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곧 베네치아에서 받았던 인상을 언급할 때의 시기와 일치한다."

그때 그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는 티를 지방의 산과 계곡을 비롯한 광활한

풍경과 베네치아와 그곳의 화가들을 보고 경험했다.

 이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은 만테냐가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는 실로 대단했다.

 

뒤러는 이태리 전체를 통틀어서 영웅적이고 엄격하며 고대의 정서를 가진

이 파도바의 거장만큼 숀가우어에 대립하는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그의 그림에서 뒤러는 다른 인체와 다른 동세가 들어간

전혀 다른 미의 세계를 보았고 그의 장엄한 파토스에서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과연 북유럽 미술은 여기에 조금이라도 견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가? 

물론 뒤러는 하나의 미술을 다른 미술 때문에 내던지지는 않았다.

 혹 원했다고 해도 그는 단번에 이태리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중도를 택했고 따라서 숀가우어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미술에서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되지 못하고 병존해 있다.

그것은 모든 변환기의 특징인 불안정한 형태 감각이다.

그러나 젊은 뒤러의 내면에서는 불꽃같은 영혼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젊음의 능력을 위대한 과제 속으로

쏟아 붓게 될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기대한다.

그것은 목판화에서 일어났다.

독특하게도 그는 제일 먼저 선의 미술에 열중했다.

 

그는 당시 가장 시사성이 짙었던 요한 계시록을 주제로 택했다.

거기에는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던 전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것을 전에는 볼 수 없던 표현력을

지닌 새로운 선으로 아주 커다란 종이에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목판화로 그리고자 했다.

 그 목판화는 1498년에 나왔다. (요한 계시록)은 목판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했다.

 뒤러의 다른 작품과 달리 젊은이의 대담한 천재성이 발휘된

그 판화들은 특히 창의력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뒤러는 평생 동안관심을 두었던 주제,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대형 목판화였다.

 이 연작 목판화는 훗날에 가서 완성되었지만, 초기에 나온 목판화에는

 영웅성을 지향하는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감상적으로 묘사된

 전통적인 그리스도 수난의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뒤러의 초기작에 속하는 세 번째 목판화는 [성모의 생애]이다.

앞의 두 연작 목판화보다 몇 년 뒤에 나왔고 다른 분위기를 내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뒤러는 명상적이고 묘사적인 면모를 보였다.

물론 주제의 성격상 그렇기도 했지만 이는 뒤러의 변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관찰은 더 섬세해지고 폭이 넓어졌으며 묘사 기법은 더 풍부하고 정확해졌다.

 명암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선의 흐름도 우아해졌다. 질풍노도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뒤러에게 적용해도 괜찮을까?

젊은 예술가의 강렬한 맥박이 느껴지던 이전에도

그는 열정이 예술적 이성을 압도한 적이 없었다.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재기 넘치는 극단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에 활동한 크라나하 같은 미술가들이 전통의 틀에서 더 많이

벗어나 있었고 일순간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훗날 크라나하는 여기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뒤러의 기술은 애초부터 철저한 객관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주요 관심사는 사물을 속속들이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모사는 뒤러를 통해 처음으로 조형 미술이 인정하는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철저한 묘사를 목표로 삼는 한, 목판화는 적절한 분야가 아니었다.

그가 사물을 세밀히 묘사하고, 그 자신을 위해 작업하고.

 또 형태를 위한 형태를 그려낸 것은 동판화의 미세한 기법을 통해서였다.

회화는 당분간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 

동판화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풍경과 동물과 인체 등 모든 주제를 담아냈다.

그러나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나체였다.

이태리에 있을 때 뒤러는 독일에 나체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술가는 인체의 자연스러운 형태부터 터득해야 하고

미술의 궁극적인 과제는 인간의 형태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술가가 인간의 육체에 통달하지 않는 한,

의상을 걸친 모습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가 기존의 몇 안 되는 나체화들, 가령 숀가우어의 [세바스티아누스]를

미흡하게 여긴 것도 거기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체 구조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커다란 실망을 경험한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실물을 그린 작품이지만

우리가 받아든 것은 외국 기성 작품의 모방이었다.

 뒤러는 이태리 전범들을 모방했다.

독일 미술에 전혀 새로운 사실성의 개념을 선사할 수도 있었을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서는 남의 손을 거친 미술에 만족한 것이다.

그는 모방을 하면서 여러 요소들을 현학적으로 짜맞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인체는 독일의 그것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무시했다. 


(도판 10)[경배하는 왕들)Adoration of the Magi
1504 Oil on wood, 100 x 11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뒤러가 사실성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사물의 묘사로 끝나는 자연주의에서 더 나아가 유형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내보이는 미술로 전진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창조주가 뜻한 바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무한정달리 나타나는 개개인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고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그는 일정한 비례 속에 들어 있을 최종적인 미의 모습을 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 공식을 찾아내었고 한동안은 거기에 만족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1504년에 나온 동판화 [아담과 이브]이며.

이것은 미술사에서는 같은 시기에 나온 그의 최고 걸작인 [경배하는 왕들](도판 10)이라는

 회화보다 훨씬 비중 있는 작품이다. 

완벽한 묘사는 완벽성의 묘사이기도 하다.

뒤러는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한 최초의 북유럽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당시 독일에 자코포 데 바르바리라는

 베네치아 화가가 체류하고 있었다는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

 

 그는 자코포와 가깝게 지냈다. 예술적으로는 삼류의 재능인에 불과했고

독자적인 개성도 없었지만, 이태리 화파에 속해 있던 그는 꽤 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마치 심오한 비밀의 보유자인 듯이 행세했던 것 같다.

 

비례 법칙을 찾으려는 뒤러의 충동은 분명히 자코포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코포가 정확한 정보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사실 뒤러는 새로운 비례 문제와 더불어 동세미라는

 이태리식 개념도 차츰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고대의 유명 소묘들을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1504년에 나온 동판화 [아담과 이브]가 거기에 영향 받아 나온 대표작이다. 

일년 뒤 뒤러는 두 번째 알프스를 넘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든,

이태리는 이제 다 익은 과일처럼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미술 발전의 나침반은 조용하고 한결같이 한 지점만 가리키지 않았다.

 그는 이태리식 인체에만 관심을 두는 로만 사람이 아니었다.

1505년까지 그는 외국의 새로운 양식에도 눈길을 돌리면서

 향토적이고 친숙한 주제에도 동시에 몰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시에 [성모의 생애]가 나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동판화 [아담과 이브]와 나란히 그는 [네메시스]라는,

북유럽 인물의 개성이 무한히 발휘된 여성 나체화와, 그

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섬세한 동판화도 함께 제작했다.

 

[성탄절]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이 동판화는 공간에 비해 인물의 비중을 약화시킨

 회화적인 구성으로 볼 때 이미 게르만 미술의 후기 단계를 암시한다.

 바로 이 시기에 뒤러는 주변의 사물과 독일의 아담한풍경이 가치가 있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대단히 명상적이고 관조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전개된 것과는 전혀 다른 미술 발전을 그에게서 기대한다.

어쩌면 이때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두 방향이 서로 투쟁한 시기였다.

이 대립을 회화적이라는 말과 조형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결국 그것은 게르만 미술관과 이태리 미술관의 대립이었다. 

뒤러의 미술에서 독일적인 요소들이 더 이상 무르익지 못한 것은

이태리 여행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독일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태리 여행을 애석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의 변화는 뒤러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사방에서 남쪽으로 몰려갔다.

독일 미술은 자기 고유의 개성을 펼치기도 전에 먼저 이태리 사람들로부터

 조형적인 사고와 건축적이고 엄격한 형태 감각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뒤러는 원숙기에 접어들면서 1505년 가을 두 번째로 이태리 땅을 밟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완과·마무리만 남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1년 반도 채 안 되는 이태리 체류였지만

그의 미술의 외양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각인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그는 다른 용무 때문에 베네치아에 갔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곳으로는 더 여행하지를 않았다.

그가 잠깐 볼로냐를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고

밀라노에도 갔었던 것 같지만 피렌체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미술과 관계된 것들은 베네치아보다

 피렌체에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사들의 전투]와 미켈란젤로의 [목욕하는 병사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뒤러가 베네치아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친구 피르크하이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편지에서는 여러 근심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도시에 체류하면서 느낀 행복감이 배어 나오고 있다.

 

그는 예술가에게 당연한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과의 생활을

 만족스럽게 여겼고 귀향할 생각에 잠겨 이렇게 한숨지었다.

 “태양을 맛본 뒤의 나는 얼마나 그것을 그리워할까.

이곳에서 나는 주인이지만 고향에서는 식객이다.

" 반면에 그는 이태리 미술에 대해서는 별로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조반니 벨리니가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최고의 미술가라는 의견이 군데군데 있을 뿐이다.

뒤러의 내적인 발전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에 눈을 돌려야 한다.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 상인들의 교회를 위해 그린 대형 회화,

즉 [장미 화원의 축제]가 이 시기에 나온 주요작이다.

베네치아에 도착하고 바로 의뢰 받은 이 그림에 그는 1506년 가을까지 매달렸다.

그것은 이태리 회화가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림은 완전히 이태리 형식을 따랐다. 

이때부터 계속 되풀이된 독일 미술의 이태리 미술로의 동화에 대해

우리는 의심쩍은 마음이 생긴다.

어떻게 뒤러는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베네치아 사람으로 있을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 모습을 유지했고 어느 부분에서 모방을 했으며,

또 모방했을 때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았나를 일일이 논할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뒤러에게 이태리는 더욱 웅대한 형태로 인지되었고,

유기적인 명확성이라는 의미에서 형태의 완성이었으며, 풍부한 조형성의 증가를 의미했다.

 

 그는 웅대한 효과를 내는 구성에 열렬히 파고들었고,

심지어는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형식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피상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동시에 우리는 그의 감성이 영웅성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태리 형식을 모방했다는 인상은 받지 못한다. 

뒤러를 화가로 처음 만들어 준 곳은 베네치아였다.

이제야 비로소 회화가 동판화보다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그는 성화(聖畵)에는 최고의 예술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기존의 인식을 따랐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판이 한 장의 동판화 조각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을 맴돌던 웅대한 효과는 바로 회화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뒤러는 옛날의 뒤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당시 그가 티어가르텐 문 근처에 큰 주택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그의 새로운 각오를 말해준다.

 이 집을 우리는 뒤러의 집으로 알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성취와 앞으로의 과제들을 검토했다.

이태리 미술가들은 이미 200년 전부터 고대인들의 유산을 되살려내고 있는 데 반해서

 북유럽 미술은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르네상스"라는 개념에도 친숙해 있었고 그것을 "부활"이라고 불렀다.

 실제는 이론을 토대로 해야지 단순히 손에 의한 훈련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회화를 학문이라고 불렀듯이,

 뒤러도 화가에게 완벽한 이론상의 지식을 요구했다. 이것은 이태리가 준 또 다른 영향이었다. 

뒤러는 회화 교본을 쓸 결심을 했다.

거기에서 그는 원근법과 명암과 색채와 구성을 다룰 예정이었고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신체 비례를 다룰 생각이었다.

 계획은 일부만 실현되었지만 이 학문적 작업은 이태리 여행 후의

 뒤러의 미술 특성을 본질적 .으로 말해준다.

뒤러의 미술에서는 이제 대형 회화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조형성이 두드러진 모티프들을 의미 있게 연결해 볼 생각이었다.

만일 이때 작품 주문이 들어왔다면 새로운 웅장한 그림이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러에게 그런 기회는 별로 없었고, 그 역시 개개의 작품에

끈덕지게 매달리는 성격이라 커다란 흐름이 이내 막혀 버리고는 했다. 

뒤러는 실물 크기의 접이 그림인 [아담과 이브]를 의뢰인 없이 그리기 시작했다(1507년).

 이 작품은 1504년에 만든 동판화의 필연적인 귀결이자 개작이었다. 

다음으로는 비텐베르크 선제후의 의뢰를 받고 그린

 [사포르 왕에게 박해받는 만 명의 기독교도들]이란 그림이 나왔다(1508년).

 유쾌하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체와 동세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적어도 이것이 대형작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좁은 화폭에 수많은 인물을 작게 그려서 넣어야 했던

이 그림은 뒤러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 열망에 비하면 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서 [성모의 대관식과 무덤 옆의 사도들]이라는 주요작이 탄생했는데(1509년),

 헬러라는 상인이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시를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뒤러는 풍부한 내용의 주제를 위엄 있는 장면으로 자유롭게 끌어올렸다.

 구도는 이태리방식에 따라 건축적이고, 관을 씌워주는 그리스도의 몸짓이나

 핵심 사도들의 자세에도 강인함과 위엄이 들어 있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완전히 조화되지 못했다.

구성의 골격은 알아볼 수 있지만 사도들의 성격에는 형식을 완성시킬 만한 생동감이 없다. 


(도판 11)[만성(란다우어 제단화)]The Adoration of the Trinity
1511 Oil on lindenwood, 135 x 123,4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시기에 나온 마지막 회화인 [만성(萬聖)](도판 11)은 좀더 절제된 작품이다.

조각과 같은 인물은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자연스럽고 통일적인 효과를 낸다.

 대지 위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환영이라는 독창적인 모티프와 천진난만하고 다채로운

 색채로 인해 언제까지나 기억될 이 그림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이시기의 그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원래 이 그림은 구리 세공사인 란다우어가

뉘른베르크에 설립한 양로원을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이상이 얼마 되지 않는 "대형 회화“ 시리즈이다.

당시 뒤러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미흡하고 불완전한 작품들인가.

 

그는 독일인들에게 위대한 미술의 개념을 보여줄 생각이었고,

새롭고 강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했으며,

 사람들의 관찰을 기존의 편협한 시각에서 해방시키려 했고,

 감성과 몸짓에는 이태리에 있을 때 예감처럼 덮쳐 왔던 위엄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정말 독일인의 마음속에 머물면서 영원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들인가? 이 가운데 과연 몇 개가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있는가?

 또 여기저기 산재한 그 그림들은 애초부터 제한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위대한 그림을 창조하려는 뒤러의 처음 도약은 멀리 나가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환경을 탄식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한숨지으면서

어떤 낙담의 말을 내뱉었는지 알고 있다.

그는 그저 소묘를 계속하는 편이 더 나을 듯이 생각되었다. 

뒤러는 예전에 시작한 목판화 연작인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의 생애]에 다시 착수하여 남은 부분을 추가하여 1511년에 완성본을 냈다.

추가된 목판화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회화에서 보여준 거대한 형태 구성을 따른 것이었다.

구도는 건축적이었고, 인물은 일정한 계산하에 서로 일치시키거나 차이를 두었다.

각 부분은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완성된 목판은 광범위해지고 색감이 강조되었다.

명암은 커다랗게 한 군데로 집중시키거나 서로 대비시켰다.

전체적인 효과는 더 풍부해졌지만 소묘는 단순해졌다.

선은 목판을 하기에 가장 편한 것으로 택했다.

 이런 점에서 뒤러는 당시 목판화의 고전적 양식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이어 그는 동판화의 전형적인 형식도 발전시키면서

 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동판화와 목판화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뚜렷하게 갈라졌고 그것은 목표에서도 그랬다.

 이는 같은 주제를 나란히 다룬 연작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전의 대형 목판화인 [그리스도의 수난]이 완성됨과 동시에

뒤러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두 개의 새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하나는 37점의 목판화 연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16점의 동판화 연작이었는데,

 전자가 이른바 소규모의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고차원의 소묘는 온전히 동판화의 몫이었다.

 

목판화는 더 단순해지면서 간략하고 기초적인, 표현 방식을 추구한 반면에,

 동판화는 전문가가볼 때 완벽한 형태와 단축법이 주는 매력과 표면의

 질감 처리와 섬세한 빛의 뉘앙스를 과시했다.

 이는 목판화가 대중적인 감각에 부합하고 교훈적이고 감동 있는 주제를

추구하는 데 비해서, 전혀 다른 관객층을 지닌 동판화는

 이런 목표에 신중히 다가선다는 인식과도 일치했다.

뒤러의 작품 중 대단히 독특한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멜랑콜리아]도 동판화이며 둘 다 1514년에 나왔다.

 형식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고 지극히 내향적인

느낌만 주는 이 동판화들은 당시에 전혀 새로운 작품이었다.

이 판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뒤러가 이태리를 여행한 후부터 따뜻한 내면의

 감정을 얼마나 많이 상실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때 그는 형식에 매달려 있었고 작품마다 형식에 대한 고려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그의 이태리 체류는 훌륭한 학습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습이었고,

 학습은 자유롭지 못함을 뜻했다.

이태리식 구성을 따른 [성모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의 연작 가운데 내용이 가장 빈약한 작품이다.

또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감성처럼 좁은 의미에서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의 감수성도 피어나지 못했다.

 뒤러는 대형 인물상에 관심을 두면서 내면이 빈약해져 갔다. 


(도판 12)[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his Study
1514 Engraving, 259 x 201 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그런데 이제 갑자기 옛날의 따뜻하고 충만했던 감성의 물결이 되돌아온 것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폭이 넓어지고 내면적이 되었다 (이는 소묘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정말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했고 외국의 전범에서

 자유로운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도판 12)와 [멜랑콜리아]는

뒤러의 어느 작품보다도 소중한 독일 민족의 자산이 되었다.

 같은 해인 1514년에 이미 언급한 어머니의 초상화 같은

정감 넘치는 소묘가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런 경향은 피렌체에 있는 사도의 초상화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도 무언가를 고통스럽게 추구하는 표정이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뒤러는 성격이 드러나는 훌륭한 초상화를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제 그는 [헬러 제단화]에서 무덤 옆에 선 사도들 같은 모습은 평범하고 부족하다고 느꼈다. 

뒤러는 평생 동안 비교적 주문자에 의존하지 않은 미술가였다.

그는 의뢰를 별로 많이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탄식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장점이었다.

 바로 이 같은 내면의 성찰과 사색의 시기에 우리는 그가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아직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감정을 서서히 편안하게 펼쳐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황제가 그를 자기 뜻대로 부리려고 한 것은 간섭이나 다름없었다.

 

뒤러는 황제의 명성을 과시하는 대규모 목판화 작업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이 같은 작업이 그에게 해로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독일의 장식 미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본다면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좀더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어야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간섭이나 다른 미술가들과 타협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히 경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기도서 여백에 그려 넣은 소묘처럼

그가 혼자서만 작업한 작품들은 모두 생동감에 넘쳐 있다. 

한편, 황제와의 관계로 뒤러는 1515년부터

 고정 수입에 기댈 수 있다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그는 100굴드의 연금을 받았는데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하지만 돈은 불규칙하게 지불되었다.


(도판 13)[황제 막시밀리안의 초상화]Emperor Maximilian I
1519 Tempera on canvas, 83 x 65 cm Germanisches Nationalmuseum, Nuremberg 

뒤러가 황제와 개인적인 교분을 맺으면서 나온 최고의 기념비적 작품은

1518년 아욱스부르크 에서 제국회의가 열릴 때 그린

온화하고 재기 넘치는 [황제의 초상화](도판 13)이다.

 

이 그림을 보면, 뒤러가 1510년대 말기로 가면서 점차 피곤에 빠졌다는

 누차 제기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신중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그가 당시 곳곳의 작품에서 무미건조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색감도 차갑고 조화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세밀히

그린 그림들이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장식 미술가로서 미래를 약속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취향 속으로 힘차게 몰입하고 있다.

 

 비록 그의 회화가 전체적으로는 고심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내밀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미슬 양식을 집약해 줄 폭넓은 관찰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단지 문제는 형식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있어서

 그의 자연스런 감각으로 충분한가 하는 점이었다. 

그때 어떤 섭리와도 같이 네델란드 여행이 시작되었다(1520년/1521년).

이 여행에는 딱시밀리안 황제의 후계자인 젊은 칼 5세로부터 연금을 재차 확인 받는다는

 분명한 용무상의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또 한 번의 전면적인 환경변화가

자신의 감성에 얼마나 유익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초의 용무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네델란드에 머물렀다. 

당시 뒤러는 오십줄에 접어들었지만 감수성은 여전했고 변신의 능력도 있었다.

네델란드 미술을 관찰하면서 그는 다시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개개의 그림보다는 수많은 이국적 풍물들이 더 신선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마치 새로운 감각 기관과 촉수가 생겨난 듯했고,

그것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물을 탐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이때만큼 크고 분명하게 느껴진 때는 없었다.

 그는 자연과 또 한 번 새로운 관계를 맺는 듯했고, 모든 사건, 모든 인간,

모든 사람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면서 그것들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특정한 소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원숙한 미술가로서 자신의 창작 방식을 근본부터 수정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세상과 처음 마주하듯이 정확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창작에 임했다. 

지금도 그의 작은 스케치북의 일부가 전해오고 있으며,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풍부한 내용의 일기도 이 시기의 뒤러와 동행하는 즐거움을 늘려준다.

 동시에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뒤러의 인간적이고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고백들도 있다.

그는 단지 호기심에 찬 여행자가 아니었다.

 

 네델란드에서 그는 젤란트(네델란드의 남서부 해상에 있는 주)에서 육지로 밀려온

 고래나 미국에서 건너온 황금보다 더 놀라운·사건을 목격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었다.

네델란드에서 그는 화산 지대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세인들의 긴장은 무시무시한 폭발로 터져나올 기세였고 한순간

 에라스므스가 이 흐름의 정점에 설 듯이 보였다.

뒤러는 에라스무스가 교류하는 집단에 드나들었다.

그가 일기에서 에라스무스에게 그리스도의 전사로 나서달라고 청하는

격정적인 대목은 단지 세상모르는 몽상가의 토로가 아니었다.

그는 주의 깊게 사태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종교재판을 피해 어쩔'수 없이 귀향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러는 진지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의 스타일은 단순해지고 객관적이 되었으며 대담해졌다.

그는 이따금 멜란히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전에는 색다른 것과 화려한

 다양성이 주는 매력에만 사로잡혔다고 탄식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자기 약점을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이 고전적 시기에 나온 작품 가운데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윈헨에 있는 [네 명의 사도]뿐이다.

이것은 사실 다른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그림이다.

하지만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다른 그림들이 완성을 보았다면,

일례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성모와 성자들]처럼 독일의 르네상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엄한 성화들이 완성되었더라면,

그의 개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인상을 풍겼을 것이다. 


(도판 14)[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523 Woodcut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마찬가지로 대형 목판에 새기려

한 [그리스도의 수난]의 마지막 판화도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온전히 작품의 주제에만 몰입하면서도

완숙한 기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판화로 옮겨진 것은 [최후의 만찬](도판 14)뿐이고

 다른 장면들은 소묘로만 남아 있다. 연작 전체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반면에 초상화에서는 중반기보다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뒤러는 초상화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완벽한 세부 묘사를 자랑하는 걸작들이다.

뒤러는 그 옛날 이태리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문제를

 자기 미술의 우선 과제로 삼아 아담과 이브를 그린 적이 있다.

이 마지막 시기에 각인을 준 작품은 [네 명의 사도]이다.

이것도 그는 주문자 없이 그렸고

훗날 의미심장한 제명을 덧붙여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바쳤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느낀 그는 과부들의 집을 빼앗는

 가짜 예언자와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이며 그 말씀에는

 한 자도 보탤 수 없고 한 자도 뺄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위정자들은 그가 위대한 도덕적 인물로 입상처럼

 그려놓은 이 사도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판 15)[홍수(악몽)] Dream Vision
1525 Watercolour on paper, 30 x 43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뒤러가 마음속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많은 기록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그는 스팔라틴에게 쓴 1520년의 편지에서, 자신이 크나큰 불안에서

빠져나을 수 있었던 것은 루터 덕분이었다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

네델란드 체류 때 쓴 일기에는,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 후 사라졌다는

소문을 접했을 때의 절망과 탄식이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뒤러가 종교개혁의 인물들과 맺었던 관계나 그가 종교개혁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자세히 추적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또 다른 세계를 사유하고 있었고 이런 사유는

 그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뒤러는 우울한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과 연이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한 대목에서는

 그를 포함하여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안고 살았던 끔찍한 중압감이 느껴진다.

 그는 1503년에 체험한, 이상하게도 십자가가

 비처럼 내리던 사건을 전율스럽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홍수](도판 15)가 퍼붓던

1520년의 한 악몽을 전하는 대목은 마치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처럼 읽힌다.

 이런 고백들은 시대의 불안감을 섬광처럼 비춰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들은 그가 배움과 관찰에서 얻은 끝없는 기쁨으로 상쇄되었으며,

사실 이런 기쁨들이 그의 전체 인상을 결정하는 특성들이다. 

이 후기에 뒤러의 주요 관심사는 이론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때 교과서로 만들 계획을 세웠던 「회화교본」에서

인체 비례에 관한 장을 따로 떼어내어 이 부분만 출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뒤러는 완벽한 전형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는 사람의취향이 변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 때문인 듯이 생각되었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인 목표는 변화하는 전형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형식의 조화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다양한 인체 유형이 지닌 비율을 설정하였다.

 수차례에 걸친 실제 측량과 아주 작은 신체 부위에까지 실행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일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 결과가 확정적이지 못하더라도 그는 이 방법을 아주 높이 평가했고,

 이런 인체 측량없이는 독일 미술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내용이 확실히 이해되도록 하기위해 인체 비례에 관한

 저술에 앞서서 별도로 도형 기하학 교본을 냈다(1525년).

 이책은 수학자로서의 뒤러를 만족시킨 독창적인 저술이었다.

이런 수학적인 상상력은계속해서 그를 축성술로 안내했다.

" 그는 축성술에 관한 논문 집필도 시대적으로 중요한 작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체 비례에 관한 저술은 다시 한번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이 대표서의 출간은 뒤러가 죽은 해인 1528년으로 미루어졌고

그는 책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론서를 중시한 뒤러의 자세에는 그의 동시대인들도 공감했다.

그들은 뒤러를 평가하는 초기의 글에서, 그가 이론과 실제를 접목시킴으로써

독일 미술을 새로운 단계에 올려놓았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이런 평가를 내린 사람은 피르크하이머와 카메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뒤러의 진가는 그의 저술에 있지 않다.

또 이론가로서의 뒤러가 미술가 뒤러에게

득이 되었는지 아니면 해를 입혔는지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당대 최고의 교양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형 미술가라는 직업이 독일 문화계에서 공인된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은 뒤러 덕분이었다.

또 하나 말해둘 것은, 인체 비례에 관한 그의 성찰이 개인적인

취미가 아니라 커다란 시대적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은 인체가 지닌 자연의 완벽함이라는 기본 개념에 기초하고 있었으면

 이는 바로 르네상스의 핵심 개념을 일컫는 단어였다. 

뒤러는 1528년 4월 6일, 57세가 채 못 되어 사망했다.

 불규칙한 네델란드 여행 때문에 생긴 질병이 수 년 동안 그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외양도 망가뜨리다가 이제 그를 데려간 것이다.

그가 생의 말기에 그린 자화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만년의 초상화는 젊은 시절에 그린 수많은 자화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뒤러의 모습은 윈헨 미술관에 있는, 이상화되어 그려진 그의 자화상이다.

실물과 닮지는 않았지만 그의 본질적인 성품이 모두 담겨 드러나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 사상가 같은 이마를 갖춘 위엄 있는 얼굴, 풍부한 감성이 엿보이지만 의미심장하고

 지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입술, 관조적이기보다는 관찰하는 듯한 눈이 그렇다. 

불타는듯하면서도 준엄했다. - 이렇게 페터 코르넬리우스는 뒤러의 본질을 갈파했다.



                                                       

a002.jpg

기도하는 손

 

Melencolia I, 1514, Engr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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