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 뒤러
 (도판 8)[자화상 13]Self-Portrait at 13 1484 Silverpoint on paper, 275 x 196 m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우연히도 뒤러의 처녀작으로 남아 있는 것은 13세 소년을 그린 그의 [자화상](도판 8) 이다. 은필(銀筆)을 이용하여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선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뚜렷한 형태로 묘사된 부분에는 이미 훗날의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뒤러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개성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눈만 실물과 다를 뿐이다. 그러나 섬세하게 그린 얼굴에는 전체적으로 독특한 긴장이 들어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거울 앞에 선 모델의 긴장감을 넘어 천재가 세상과 마주할 때의 야릇한 기대감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이 소년은 1471년 5월 21일에 뉘른베르크의 어느 집 뒤채에서 가난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두 형이 있었고 훗날에는 열다섯의 아우들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었으며, 40세에 왕년의 스승의 딸이자 뉘른베르크의 젊은 소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젊은 시절의 뒤러는 아버지를 두 번 그림으로 그렸다. 그는 아버지가 말수가 적었고, 자신의 직업에서는 엄격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으며, 평생 동안 고생을 겪은 분이고, 자식들을 엄한 기독교의 가르침 아래에서 키웠다고 가족사에서 적어 놓았다. 알브레히트는 아버지가 특히 귀여워한 자식이었다.
 (도판 9)[어머니]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1514 Charcoal drawing on paper, 421 x 303 mm Staatliche Museen, Berlin
한때는 매력적인 소녀였던 어머니(뒤러는 어머니를 "아름답고 정직한 처녀"라고 불렀다)는 그녀의 말년의 소묘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도판 9).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인 1514년에 아들이 그린 엄청나게 큰 목탄화가 그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뒤러는 어머니를 떠맡았다. 그녀는 교회에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꼭 교회에 나가셔야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갈 것을 권했다. 이 그림은 수많은 출산에 지치고 궁핍과 노동으로 완전히 쇠약해진 여인의 모습이다. 돌출한 사시와 주름진 얼굴은 무감각하게 희망 없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무시무시한 인상마저 준다.
이상이 뒤러의 부모이다. 그의 대부는 안톤 코베르거라는 유명한 인쇄공이자 출판가였다.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난 뒤 뒤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사의 견습을 받았다. 그리고 견습을 거의 끝마쳤을 때는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는 가족사에다 적어 놓았다. 아버지는 "헛되이 보내버린 세월을 아쉬워했지만" 결국 아들의 뜻을 따랐고 그를 미하엘 볼게무트의 작업실로 보냈다. 그때 뒤러의 나이는15세 중반이었다. 수련 기간은 3년으로 정해졌다. "이 시기에 하느님은 내게 근면함을 주시어 열심히 배우도록 하셨다. " 그러나 그는 작업실에 있는 다른 수련생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19세가 되던 1490년 봄에 뒤러는 편력 여행을 떠났다‥‥‥. 수련 기간이 끝났으므로 아버지는 나를 떠나보내 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부를 때까지 4년 동안 타향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하지 않지만, 다른 기록들을 보면 콜마에 있는 마르틴 숀가우어의 화실이 그의 편력 여행의 주 목적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곳을 둘러서 간 것으로 보이며 콜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예기치 않게 숀가우어가 1491년에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형제들 집에 머물렀고 그 뒤에는 바젤로 가서 목판화에 열중했다. 또 다른 기록은 그가 1494년에 슈트라스부르크에 체류했음을 말해준다.
이미 얘기했듯이, 뒤러는 1494년 오순절부터 다시 뉘른베르크에 돌아와 있었다. 귀향하자마자 그는 남들 하는 대로 아버지가 골라준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아그네스 프라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 평범한 생김새에다 무미건조한 여인이었는데, 독설가들이 그녀를 두고 뒤러에게 시련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 그러나 여기에서는 뒤러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는지는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단지 그가 죽는 날까지 -자식 없이 - 아내와 함께 평범하게 살았다.
뒤러의 예술적 개성은 처음부터 조형에 대한 비상하고 섬세한 감성을 특징으로 드러냈다. 그는 다른 어떤 미술가보다도 구체적인 사물에 대해 감수성이 유달리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자연 묘사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단순히 뉘른베르크의 지방적 전통을 이어간 사람이 아니라 남독 미술 전체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틴 숀가우어였다. 숀가우어가 준 영향에 비하면 볼게무트와 그 동료들의 가르침은 빛을 잃는다.
게다가 뒤러는 숀가우어의 고향에 체류하면서 그곳 라인 강 상류 지방의 섬세하고 풍부하고 활기찬 미술에 흠뻑 젖어 지냈다. 그러니 그가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일찍 세상을 떠난 스승의 계승자, 그의 완성자가 되리라는 것 말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뒤러가 이태리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숀가우어의 영향은 만테냐의 영향과 충돌했고, 독일의 후기 고딕은 이태리의 르네상스와 만났다.
뒤러가 언제 처음으로 이태리 그림들을 접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직후인 1494년과 1495년에는 그 그림들과 접촉했었다는 징후가 많이 보이고 있다. 때문에 다른 기록을 통해 확실히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그가 알프스를 넘어 여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는 독일에서 이미 이태리 거장들의 동판화를 모방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뒤러는 1495년에 분명히 이태리 땅에 있었다. 이 연도는 훗날 그가 1506년에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11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곧 베네치아에서 받았던 인상을 언급할 때의 시기와 일치한다." 그때 그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는 티를 지방의 산과 계곡을 비롯한 광활한 풍경과 베네치아와 그곳의 화가들을 보고 경험했다. 이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은 만테냐가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는 실로 대단했다. 뒤러는 이태리 전체를 통틀어서 영웅적이고 엄격하며 고대의 정서를 가진 이 파도바의 거장만큼 숀가우어에 대립하는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그의 그림에서 뒤러는 다른 인체와 다른 동세가 들어간 전혀 다른 미의 세계를 보았고 그의 장엄한 파토스에서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과연 북유럽 미술은 여기에 조금이라도 견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가?
물론 뒤러는 하나의 미술을 다른 미술 때문에 내던지지는 않았다. 혹 원했다고 해도 그는 단번에 이태리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중도를 택했고 따라서 숀가우어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미술에서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되지 못하고 병존해 있다. 그것은 모든 변환기의 특징인 불안정한 형태 감각이다. 그러나 젊은 뒤러의 내면에서는 불꽃같은 영혼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젊음의 능력을 위대한 과제 속으로 쏟아 붓게 될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기대한다. 그것은 목판화에서 일어났다. 독특하게도 그는 제일 먼저 선의 미술에 열중했다. 그는 당시 가장 시사성이 짙었던 요한 계시록을 주제로 택했다. 거기에는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던 전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것을 전에는 볼 수 없던 표현력을 지닌 새로운 선으로 아주 커다란 종이에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목판화로 그리고자 했다. 그 목판화는 1498년에 나왔다. (요한 계시록)은 목판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했다. 뒤러의 다른 작품과 달리 젊은이의 대담한 천재성이 발휘된 그 판화들은 특히 창의력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뒤러는 평생 동안관심을 두었던 주제,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대형 목판화였다. 이 연작 목판화는 훗날에 가서 완성되었지만, 초기에 나온 목판화에는 영웅성을 지향하는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감상적으로 묘사된 전통적인 그리스도 수난의 그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뒤러의 초기작에 속하는 세 번째 목판화는 [성모의 생애]이다. 앞의 두 연작 목판화보다 몇 년 뒤에 나왔고 다른 분위기를 내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뒤러는 명상적이고 묘사적인 면모를 보였다. 물론 주제의 성격상 그렇기도 했지만 이는 뒤러의 변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관찰은 더 섬세해지고 폭이 넓어졌으며 묘사 기법은 더 풍부하고 정확해졌다. 명암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선의 흐름도 우아해졌다. 질풍노도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뒤러에게 적용해도 괜찮을까? 젊은 예술가의 강렬한 맥박이 느껴지던 이전에도 그는 열정이 예술적 이성을 압도한 적이 없었다.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재기 넘치는 극단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에 활동한 크라나하 같은 미술가들이 전통의 틀에서 더 많이 벗어나 있었고 일순간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훗날 크라나하는 여기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뒤러의 기술은 애초부터 철저한 객관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주요 관심사는 사물을 속속들이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모사는 뒤러를 통해 처음으로 조형 미술이 인정하는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철저한 묘사를 목표로 삼는 한, 목판화는 적절한 분야가 아니었다. 그가 사물을 세밀히 묘사하고, 그 자신을 위해 작업하고. 또 형태를 위한 형태를 그려낸 것은 동판화의 미세한 기법을 통해서였다. 회화는 당분간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
동판화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풍경과 동물과 인체 등 모든 주제를 담아냈다. 그러나 중요한 주제는 인간의 나체였다. 이태리에 있을 때 뒤러는 독일에 나체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술가는 인체의 자연스러운 형태부터 터득해야 하고 미술의 궁극적인 과제는 인간의 형태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술가가 인간의 육체에 통달하지 않는 한, 의상을 걸친 모습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가 기존의 몇 안 되는 나체화들, 가령 숀가우어의 [세바스티아누스]를 미흡하게 여긴 것도 거기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체 구조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커다란 실망을 경험한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실물을 그린 작품이지만 우리가 받아든 것은 외국 기성 작품의 모방이었다. 뒤러는 이태리 전범들을 모방했다. 독일 미술에 전혀 새로운 사실성의 개념을 선사할 수도 있었을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서는 남의 손을 거친 미술에 만족한 것이다. 그는 모방을 하면서 여러 요소들을 현학적으로 짜맞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인체는 독일의 그것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무시했다.
 (도판 10)[경배하는 왕들)Adoration of the Magi 1504 Oil on wood, 100 x 11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뒤러가 사실성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주어진 사물의 묘사로 끝나는 자연주의에서 더 나아가 유형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내보이는 미술로 전진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창조주가 뜻한 바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무한정달리 나타나는 개개인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고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그는 일정한 비례 속에 들어 있을 최종적인 미의 모습을 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 공식을 찾아내었고 한동안은 거기에 만족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1504년에 나온 동판화 [아담과 이브]이며. 이것은 미술사에서는 같은 시기에 나온 그의 최고 걸작인 [경배하는 왕들](도판 10)이라는 회화보다 훨씬 비중 있는 작품이다.
완벽한 묘사는 완벽성의 묘사이기도 하다. 뒤러는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한 최초의 북유럽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당시 독일에 자코포 데 바르바리라는 베네치아 화가가 체류하고 있었다는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 그는 자코포와 가깝게 지냈다. 예술적으로는 삼류의 재능인에 불과했고 독자적인 개성도 없었지만, 이태리 화파에 속해 있던 그는 꽤 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마치 심오한 비밀의 보유자인 듯이 행세했던 것 같다. 비례 법칙을 찾으려는 뒤러의 충동은 분명히 자코포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코포가 정확한 정보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사실 뒤러는 새로운 비례 문제와 더불어 동세미라는 이태리식 개념도 차츰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고대의 유명 소묘들을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1504년에 나온 동판화 [아담과 이브]가 거기에 영향 받아 나온 대표작이다.
일년 뒤 뒤러는 두 번째 알프스를 넘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든, 이태리는 이제 다 익은 과일처럼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미술 발전의 나침반은 조용하고 한결같이 한 지점만 가리키지 않았다. 그는 이태리식 인체에만 관심을 두는 로만 사람이 아니었다. 1505년까지 그는 외국의 새로운 양식에도 눈길을 돌리면서 향토적이고 친숙한 주제에도 동시에 몰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시에 [성모의 생애]가 나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동판화 [아담과 이브]와 나란히 그는 [네메시스]라는, 북유럽 인물의 개성이 무한히 발휘된 여성 나체화와, 그 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섬세한 동판화도 함께 제작했다. [성탄절]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이 동판화는 공간에 비해 인물의 비중을 약화시킨 회화적인 구성으로 볼 때 이미 게르만 미술의 후기 단계를 암시한다. 바로 이 시기에 뒤러는 주변의 사물과 독일의 아담한풍경이 가치가 있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대단히 명상적이고 관조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전개된 것과는 전혀 다른 미술 발전을 그에게서 기대한다. 어쩌면 이때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두 방향이 서로 투쟁한 시기였다. 이 대립을 회화적이라는 말과 조형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결국 그것은 게르만 미술관과 이태리 미술관의 대립이었다.
뒤러의 미술에서 독일적인 요소들이 더 이상 무르익지 못한 것은 이태리 여행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독일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이태리 여행을 애석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의 변화는 뒤러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사방에서 남쪽으로 몰려갔다. 독일 미술은 자기 고유의 개성을 펼치기도 전에 먼저 이태리 사람들로부터 조형적인 사고와 건축적이고 엄격한 형태 감각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뒤러는 원숙기에 접어들면서 1505년 가을 두 번째로 이태리 땅을 밟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완과·마무리만 남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1년 반도 채 안 되는 이태리 체류였지만 그의 미술의 외양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각인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그는 다른 용무 때문에 베네치아에 갔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곳으로는 더 여행하지를 않았다. 그가 잠깐 볼로냐를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고 밀라노에도 갔었던 것 같지만 피렌체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미술과 관계된 것들은 베네치아보다 피렌체에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사들의 전투]와 미켈란젤로의 [목욕하는 병사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뒤러가 베네치아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친구 피르크하이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편지에서는 여러 근심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도시에 체류하면서 느낀 행복감이 배어 나오고 있다. 그는 예술가에게 당연한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과의 생활을 만족스럽게 여겼고 귀향할 생각에 잠겨 이렇게 한숨지었다. “태양을 맛본 뒤의 나는 얼마나 그것을 그리워할까. 이곳에서 나는 주인이지만 고향에서는 식객이다. " 반면에 그는 이태리 미술에 대해서는 별로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조반니 벨리니가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최고의 미술가라는 의견이 군데군데 있을 뿐이다. 뒤러의 내적인 발전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에 눈을 돌려야 한다.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 상인들의 교회를 위해 그린 대형 회화, 즉 [장미 화원의 축제]가 이 시기에 나온 주요작이다. 베네치아에 도착하고 바로 의뢰 받은 이 그림에 그는 1506년 가을까지 매달렸다. 그것은 이태리 회화가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림은 완전히 이태리 형식을 따랐다.
이때부터 계속 되풀이된 독일 미술의 이태리 미술로의 동화에 대해 우리는 의심쩍은 마음이 생긴다. 어떻게 뒤러는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베네치아 사람으로 있을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 모습을 유지했고 어느 부분에서 모방을 했으며, 또 모방했을 때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았나를 일일이 논할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뒤러에게 이태리는 더욱 웅대한 형태로 인지되었고, 유기적인 명확성이라는 의미에서 형태의 완성이었으며, 풍부한 조형성의 증가를 의미했다. 그는 웅대한 효과를 내는 구성에 열렬히 파고들었고, 심지어는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형식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것이 피상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동시에 우리는 그의 감성이 영웅성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태리 형식을 모방했다는 인상은 받지 못한다.
뒤러를 화가로 처음 만들어 준 곳은 베네치아였다. 이제야 비로소 회화가 동판화보다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때까지 그는 성화(聖畵)에는 최고의 예술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기존의 인식을 따랐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판이 한 장의 동판화 조각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을 맴돌던 웅대한 효과는 바로 회화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뒤러는 옛날의 뒤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당시 그가 티어가르텐 문 근처에 큰 주택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그의 새로운 각오를 말해준다. 이 집을 우리는 뒤러의 집으로 알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성취와 앞으로의 과제들을 검토했다. 이태리 미술가들은 이미 200년 전부터 고대인들의 유산을 되살려내고 있는 데 반해서 북유럽 미술은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르네상스"라는 개념에도 친숙해 있었고 그것을 "부활"이라고 불렀다. 실제는 이론을 토대로 해야지 단순히 손에 의한 훈련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회화를 학문이라고 불렀듯이, 뒤러도 화가에게 완벽한 이론상의 지식을 요구했다. 이것은 이태리가 준 또 다른 영향이었다.
뒤러는 회화 교본을 쓸 결심을 했다. 거기에서 그는 원근법과 명암과 색채와 구성을 다룰 예정이었고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신체 비례를 다룰 생각이었다. 계획은 일부만 실현되었지만 이 학문적 작업은 이태리 여행 후의 뒤러의 미술 특성을 본질적 .으로 말해준다. 뒤러의 미술에서는 이제 대형 회화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조형성이 두드러진 모티프들을 의미 있게 연결해 볼 생각이었다. 만일 이때 작품 주문이 들어왔다면 새로운 웅장한 그림이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러에게 그런 기회는 별로 없었고, 그 역시 개개의 작품에 끈덕지게 매달리는 성격이라 커다란 흐름이 이내 막혀 버리고는 했다.
뒤러는 실물 크기의 접이 그림인 [아담과 이브]를 의뢰인 없이 그리기 시작했다(1507년). 이 작품은 1504년에 만든 동판화의 필연적인 귀결이자 개작이었다.
다음으로는 비텐베르크 선제후의 의뢰를 받고 그린 [사포르 왕에게 박해받는 만 명의 기독교도들]이란 그림이 나왔다(1508년). 유쾌하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체와 동세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적어도 이것이 대형작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좁은 화폭에 수많은 인물을 작게 그려서 넣어야 했던 이 그림은 뒤러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 열망에 비하면 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서 [성모의 대관식과 무덤 옆의 사도들]이라는 주요작이 탄생했는데(1509년), 헬러라는 상인이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시를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뒤러는 풍부한 내용의 주제를 위엄 있는 장면으로 자유롭게 끌어올렸다. 구도는 이태리방식에 따라 건축적이고, 관을 씌워주는 그리스도의 몸짓이나 핵심 사도들의 자세에도 강인함과 위엄이 들어 있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완전히 조화되지 못했다. 구성의 골격은 알아볼 수 있지만 사도들의 성격에는 형식을 완성시킬 만한 생동감이 없다.
 (도판 11)[만성(란다우어 제단화)]The Adoration of the Trinity 1511 Oil on lindenwood, 135 x 123,4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시기에 나온 마지막 회화인 [만성(萬聖)](도판 11)은 좀더 절제된 작품이다. 조각과 같은 인물은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자연스럽고 통일적인 효과를 낸다. 대지 위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환영이라는 독창적인 모티프와 천진난만하고 다채로운 색채로 인해 언제까지나 기억될 이 그림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이시기의 그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원래 이 그림은 구리 세공사인 란다우어가 뉘른베르크에 설립한 양로원을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이상이 얼마 되지 않는 "대형 회화“ 시리즈이다. 당시 뒤러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미흡하고 불완전한 작품들인가. 그는 독일인들에게 위대한 미술의 개념을 보여줄 생각이었고, 새롭고 강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했으며, 사람들의 관찰을 기존의 편협한 시각에서 해방시키려 했고, 감성과 몸짓에는 이태리에 있을 때 예감처럼 덮쳐 왔던 위엄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정말 독일인의 마음속에 머물면서 영원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들인가? 이 가운데 과연 몇 개가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있는가? 또 여기저기 산재한 그 그림들은 애초부터 제한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위대한 그림을 창조하려는 뒤러의 처음 도약은 멀리 나가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환경을 탄식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한숨지으면서 어떤 낙담의 말을 내뱉었는지 알고 있다. 그는 그저 소묘를 계속하는 편이 더 나을 듯이 생각되었다.
뒤러는 예전에 시작한 목판화 연작인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의 생애]에 다시 착수하여 남은 부분을 추가하여 1511년에 완성본을 냈다. 추가된 목판화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회화에서 보여준 거대한 형태 구성을 따른 것이었다. 구도는 건축적이었고, 인물은 일정한 계산하에 서로 일치시키거나 차이를 두었다. 각 부분은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완성된 목판은 광범위해지고 색감이 강조되었다. 명암은 커다랗게 한 군데로 집중시키거나 서로 대비시켰다. 전체적인 효과는 더 풍부해졌지만 소묘는 단순해졌다. 선은 목판을 하기에 가장 편한 것으로 택했다. 이런 점에서 뒤러는 당시 목판화의 고전적 양식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이어 그는 동판화의 전형적인 형식도 발전시키면서 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동판화와 목판화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뚜렷하게 갈라졌고 그것은 목표에서도 그랬다. 이는 같은 주제를 나란히 다룬 연작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전의 대형 목판화인 [그리스도의 수난]이 완성됨과 동시에 뒤러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두 개의 새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하나는 37점의 목판화 연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16점의 동판화 연작이었는데, 전자가 이른바 소규모의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고차원의 소묘는 온전히 동판화의 몫이었다. 목판화는 더 단순해지면서 간략하고 기초적인, 표현 방식을 추구한 반면에, 동판화는 전문가가볼 때 완벽한 형태와 단축법이 주는 매력과 표면의 질감 처리와 섬세한 빛의 뉘앙스를 과시했다. 이는 목판화가 대중적인 감각에 부합하고 교훈적이고 감동 있는 주제를 추구하는 데 비해서, 전혀 다른 관객층을 지닌 동판화는 이런 목표에 신중히 다가선다는 인식과도 일치했다.
뒤러의 작품 중 대단히 독특한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멜랑콜리아]도 동판화이며 둘 다 1514년에 나왔다. 형식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고 지극히 내향적인 느낌만 주는 이 동판화들은 당시에 전혀 새로운 작품이었다. 이 판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뒤러가 이태리를 여행한 후부터 따뜻한 내면의 감정을 얼마나 많이 상실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때 그는 형식에 매달려 있었고 작품마다 형식에 대한 고려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그의 이태리 체류는 훌륭한 학습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습이었고, 학습은 자유롭지 못함을 뜻했다. 이태리식 구성을 따른 [성모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의 연작 가운데 내용이 가장 빈약한 작품이다. 또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감성처럼 좁은 의미에서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의 감수성도 피어나지 못했다. 뒤러는 대형 인물상에 관심을 두면서 내면이 빈약해져 갔다.
 (도판 12)[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his Study 1514 Engraving, 259 x 201 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그런데 이제 갑자기 옛날의 따뜻하고 충만했던 감성의 물결이 되돌아온 것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폭이 넓어지고 내면적이 되었다 (이는 소묘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정말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했고 외국의 전범에서 자유로운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도판 12)와 [멜랑콜리아]는 뒤러의 어느 작품보다도 소중한 독일 민족의 자산이 되었다. 같은 해인 1514년에 이미 언급한 어머니의 초상화 같은 정감 넘치는 소묘가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런 경향은 피렌체에 있는 사도의 초상화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도 무언가를 고통스럽게 추구하는 표정이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다. 뒤러는 성격이 드러나는 훌륭한 초상화를 그리고자 한 것이다. 이제 그는 [헬러 제단화]에서 무덤 옆에 선 사도들 같은 모습은 평범하고 부족하다고 느꼈다.
뒤러는 평생 동안 비교적 주문자에 의존하지 않은 미술가였다. 그는 의뢰를 별로 많이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탄식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장점이었다. 바로 이 같은 내면의 성찰과 사색의 시기에 우리는 그가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아직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감정을 서서히 편안하게 펼쳐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황제가 그를 자기 뜻대로 부리려고 한 것은 간섭이나 다름없었다. 뒤러는 황제의 명성을 과시하는 대규모 목판화 작업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이 같은 작업이 그에게 해로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독일의 장식 미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본다면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좀더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어야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간섭이나 다른 미술가들과 타협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히 경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기도서 여백에 그려 넣은 소묘처럼 그가 혼자서만 작업한 작품들은 모두 생동감에 넘쳐 있다.
한편, 황제와의 관계로 뒤러는 1515년부터 고정 수입에 기댈 수 있다는 이점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그는 100굴드의 연금을 받았는데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하지만 돈은 불규칙하게 지불되었다.
 (도판 13)[황제 막시밀리안의 초상화]Emperor Maximilian I 1519 Tempera on canvas, 83 x 65 cm Germanisches Nationalmuseum, Nuremberg
뒤러가 황제와 개인적인 교분을 맺으면서 나온 최고의 기념비적 작품은 1518년 아욱스부르크 에서 제국회의가 열릴 때 그린 온화하고 재기 넘치는 [황제의 초상화](도판 13)이다. 이 그림을 보면, 뒤러가 1510년대 말기로 가면서 점차 피곤에 빠졌다는 누차 제기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신중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그가 당시 곳곳의 작품에서 무미건조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색감도 차갑고 조화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세밀히 그린 그림들이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장식 미술가로서 미래를 약속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취향 속으로 힘차게 몰입하고 있다. 비록 그의 회화가 전체적으로는 고심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내밀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미슬 양식을 집약해 줄 폭넓은 관찰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단지 문제는 형식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있어서 그의 자연스런 감각으로 충분한가 하는 점이었다.
그때 어떤 섭리와도 같이 네델란드 여행이 시작되었다(1520년/1521년). 이 여행에는 딱시밀리안 황제의 후계자인 젊은 칼 5세로부터 연금을 재차 확인 받는다는 분명한 용무상의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또 한 번의 전면적인 환경변화가 자신의 감성에 얼마나 유익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초의 용무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네델란드에 머물렀다.
당시 뒤러는 오십줄에 접어들었지만 감수성은 여전했고 변신의 능력도 있었다. 네델란드 미술을 관찰하면서 그는 다시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개개의 그림보다는 수많은 이국적 풍물들이 더 신선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마치 새로운 감각 기관과 촉수가 생겨난 듯했고, 그것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물을 탐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이때만큼 크고 분명하게 느껴진 때는 없었다. 그는 자연과 또 한 번 새로운 관계를 맺는 듯했고, 모든 사건, 모든 인간, 모든 사람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면서 그것들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특정한 소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원숙한 미술가로서 자신의 창작 방식을 근본부터 수정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세상과 처음 마주하듯이 정확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창작에 임했다.
지금도 그의 작은 스케치북의 일부가 전해오고 있으며,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풍부한 내용의 일기도 이 시기의 뒤러와 동행하는 즐거움을 늘려준다. 동시에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뒤러의 인간적이고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고백들도 있다. 그는 단지 호기심에 찬 여행자가 아니었다. 네델란드에서 그는 젤란트(네델란드의 남서부 해상에 있는 주)에서 육지로 밀려온 고래나 미국에서 건너온 황금보다 더 놀라운·사건을 목격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었다. 네델란드에서 그는 화산 지대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세인들의 긴장은 무시무시한 폭발로 터져나올 기세였고 한순간 에라스므스가 이 흐름의 정점에 설 듯이 보였다. 뒤러는 에라스무스가 교류하는 집단에 드나들었다. 그가 일기에서 에라스무스에게 그리스도의 전사로 나서달라고 청하는 격정적인 대목은 단지 세상모르는 몽상가의 토로가 아니었다. 그는 주의 깊게 사태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종교재판을 피해 어쩔'수 없이 귀향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뒤러는 진지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의 스타일은 단순해지고 객관적이 되었으며 대담해졌다. 그는 이따금 멜란히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전에는 색다른 것과 화려한 다양성이 주는 매력에만 사로잡혔다고 탄식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자기 약점을 알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이 고전적 시기에 나온 작품 가운데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윈헨에 있는 [네 명의 사도]뿐이다. 이것은 사실 다른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그림이다. 하지만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다른 그림들이 완성을 보았다면, 일례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성모와 성자들]처럼 독일의 르네상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엄한 성화들이 완성되었더라면, 그의 개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인상을 풍겼을 것이다.
 (도판 14)[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523 Woodcut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마찬가지로 대형 목판에 새기려 한 [그리스도의 수난]의 마지막 판화도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온전히 작품의 주제에만 몰입하면서도 완숙한 기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판화로 옮겨진 것은 [최후의 만찬](도판 14)뿐이고 다른 장면들은 소묘로만 남아 있다. 연작 전체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반면에 초상화에서는 중반기보다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뒤러는 초상화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완벽한 세부 묘사를 자랑하는 걸작들이다. 뒤러는 그 옛날 이태리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문제를 자기 미술의 우선 과제로 삼아 아담과 이브를 그린 적이 있다. 이 마지막 시기에 각인을 준 작품은 [네 명의 사도]이다. 이것도 그는 주문자 없이 그렸고 훗날 의미심장한 제명을 덧붙여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바쳤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느낀 그는 과부들의 집을 빼앗는 가짜 예언자와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이며 그 말씀에는 한 자도 보탤 수 없고 한 자도 뺄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위정자들은 그가 위대한 도덕적 인물로 입상처럼 그려놓은 이 사도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판 15)[홍수(악몽)] Dream Vision 1525 Watercolour on paper, 30 x 43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뒤러가 마음속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많은 기록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그는 스팔라틴에게 쓴 1520년의 편지에서, 자신이 크나큰 불안에서 빠져나을 수 있었던 것은 루터 덕분이었다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 네델란드 체류 때 쓴 일기에는,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 후 사라졌다는 소문을 접했을 때의 절망과 탄식이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뒤러가 종교개혁의 인물들과 맺었던 관계나 그가 종교개혁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자세히 추적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또 다른 세계를 사유하고 있었고 이런 사유는 그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강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뒤러는 우울한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과 연이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한 대목에서는 그를 포함하여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안고 살았던 끔찍한 중압감이 느껴진다. 그는 1503년에 체험한, 이상하게도 십자가가 비처럼 내리던 사건을 전율스럽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홍수](도판 15)가 퍼붓던 1520년의 한 악몽을 전하는 대목은 마치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처럼 읽힌다. 이런 고백들은 시대의 불안감을 섬광처럼 비춰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들은 그가 배움과 관찰에서 얻은 끝없는 기쁨으로 상쇄되었으며, 사실 이런 기쁨들이 그의 전체 인상을 결정하는 특성들이다.
이 후기에 뒤러의 주요 관심사는 이론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때 교과서로 만들 계획을 세웠던 「회화교본」에서 인체 비례에 관한 장을 따로 떼어내어 이 부분만 출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뒤러는 완벽한 전형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는 사람의취향이 변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 때문인 듯이 생각되었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인 목표는 변화하는 전형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형식의 조화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다양한 인체 유형이 지닌 비율을 설정하였다. 수차례에 걸친 실제 측량과 아주 작은 신체 부위에까지 실행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일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 결과가 확정적이지 못하더라도 그는 이 방법을 아주 높이 평가했고, 이런 인체 측량없이는 독일 미술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내용이 확실히 이해되도록 하기위해 인체 비례에 관한 저술에 앞서서 별도로 도형 기하학 교본을 냈다(1525년). 이책은 수학자로서의 뒤러를 만족시킨 독창적인 저술이었다. 이런 수학적인 상상력은계속해서 그를 축성술로 안내했다. " 그는 축성술에 관한 논문 집필도 시대적으로 중요한 작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체 비례에 관한 저술은 다시 한번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이 대표서의 출간은 뒤러가 죽은 해인 1528년으로 미루어졌고 그는 책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론서를 중시한 뒤러의 자세에는 그의 동시대인들도 공감했다. 그들은 뒤러를 평가하는 초기의 글에서, 그가 이론과 실제를 접목시킴으로써 독일 미술을 새로운 단계에 올려놓았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이런 평가를 내린 사람은 피르크하이머와 카메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뒤러의 진가는 그의 저술에 있지 않다. 또 이론가로서의 뒤러가 미술가 뒤러에게 득이 되었는지 아니면 해를 입혔는지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당대 최고의 교양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형 미술가라는 직업이 독일 문화계에서 공인된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은 뒤러 덕분이었다. 또 하나 말해둘 것은, 인체 비례에 관한 그의 성찰이 개인적인 취미가 아니라 커다란 시대적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은 인체가 지닌 자연의 완벽함이라는 기본 개념에 기초하고 있었으면 이는 바로 르네상스의 핵심 개념을 일컫는 단어였다.
뒤러는 1528년 4월 6일, 57세가 채 못 되어 사망했다. 불규칙한 네델란드 여행 때문에 생긴 질병이 수 년 동안 그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외양도 망가뜨리다가 이제 그를 데려간 것이다. 그가 생의 말기에 그린 자화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만년의 초상화는 젊은 시절에 그린 수많은 자화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뒤러의 모습은 윈헨 미술관에 있는, 이상화되어 그려진 그의 자화상이다. 실물과 닮지는 않았지만 그의 본질적인 성품이 모두 담겨 드러나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 사상가 같은 이마를 갖춘 위엄 있는 얼굴, 풍부한 감성이 엿보이지만 의미심장하고 지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입술, 관조적이기보다는 관찰하는 듯한 눈이 그렇다.
불타는듯하면서도 준엄했다. - 이렇게 페터 코르넬리우스는 뒤러의 본질을 갈파했다.

기도하는 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