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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Callas Opera Aria's

작성자yoonsart|작성시간11.09.27|조회수8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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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1945년 7월 칼라스는 아테네에서

 최초이자 단 한번뿐인 리사이틀을 열고 자신의

 출생지이자 어머니에 비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온 칼라스는 기대했던 미국

 데뷔를 이루지 못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그녀에게 피델리오와 나비부인의 타이틀 롤을 제안했지만

 90Kg의 과체중과 영어로 부르는 오페라에 대한 부담으로 이를 거절 했던 것이다. 
 

칼라스는 1947년 8월 8일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폰키엘리의 오페라<라 죠콘다>의

주역을 맡고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하며 오페라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또한,칼라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죠반니 바티스타 메게니니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메게니니는 칼라스보다 23살이나 연상인 지방 부호였으며

훗날 매니저이자 남편이 된 인물이다.

L.A. Opera Borrows La Maria's "Tosca" Jew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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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게니니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지도를 받게 되었고 칼라스는 점차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해 나갔다.

 
1948년 피렌체 시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세라핀과 칼라스의 노르마는

 이탈리아 벨칸토의 새로운 지평을 선언한 무대가 되었고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그녀만의 전설을 만들어 간다.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

<투란도트>의 타이틀 롤을 맡았고,1951년에는 스칼라 극장에 데뷔하여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엘레나를 불렀다.


베르디와 푸치니뿐만 아니라 벨리니,도니제티의 여러 작품들을 라 스칼라의

 주요 레파토리로 삼은 것은 그녀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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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라 스칼라의 히로인이었던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갑자기 병이나자 칼라스에게 출연요청이 들어오게 된다.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로 데뷔한 이후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노르마>,

<후궁탈출>에 출연하며 금세기 최고의 디바의 진면목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칼라스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그녀 인생의 중요한

인물인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비스콘티는 지적이고 세련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비스콘티의 연기지도는 칼라스를 더욱 드라마틱한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몽유병 여인>,<해적>,<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오페라에서 배역을 관통하는 극적인 표현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이 요구하는 완벽한 테크닉과 연기로 무장한 칼라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세계에 걸쳐 있는 오페라 무대를 정복하는 것뿐이다.
런던 파리,뉴욕,브라질,아르헨티나 등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칼라스 마니아들의 광적인 열광과 뜨거운 갈채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90Kg이 넘는 육중한 몸을 1년간의 다이어트로 28Kg이나 줄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던 칼라스의 전성기는

 꾸준히 이어졌지만 35세가 되던 1959년 9월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만남은 그녀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후원자이자 매니저,그리고 남편였던 메게니니와

10여년에 걸친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으며 오나시스와의 애정행각은

 그녀를 오페라 무대에서 점차 멀어지게 하였다.

 

최고의 패션리더이자 매스컴이 주목하는 여인으로서의

칼라스는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오나시스에게 쏟아 부으며

 오페라 무대에서 얻지 못했던 상류사회의 달콤함에 빠져든다.
이제 마리아 칼라스의 삶의 중심은 오페라에서 오나시스로 옮겨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에 접어들어 그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영원히 곁에 머물러 줄 것 같았던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제클린 케네디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버림받으며 마치 자신이 연기했던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칼라스의 인기는 급속히 하락해 갔다.

 
오나시스와 희대의 연예사건을 치루는 와중에 무대에 서는 횟수는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에게 버림받은 이후에는 더욱 더 무대에 서지 않게 되었다.
1947년 <라 죠콘다>로 데뷔한 이래 13년간의 칼라스 시대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나시스와 파경,그리고 그녀의 음성장애는 결국 그녀를 오페라 무대에서 끌어 내렸다.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스 국적을 가짐으로 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오나시스가 결혼해 줄것을 기대했으나 관계가 멀어져가던

오나시스는 1968년 J.F.케네디 미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했다.
칼라스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1971년과 72년,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일련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옛 동료이며 만년의 연인이자 친구가 된 주세페 디 스페파노와 재회했다.
1973년 스테파노는 그의 딸의 치료비를 위해서 마리아를 설득해 전세계 투어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이 공연은 다음 해까지 계속되었다.
1974년 11월 일본 사포로 공연을 끝으로 스테파노와의 공연은 끝이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975년 오나시스가 죽게되고 칼라스도 1977년 9월 16일 54세를 일기로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무대에서의 칼라스는 그 자태가 단려(端麗)하고 기품과 관록이 묻어났으며,

그 아름다운 거동은 노래와 밀착되어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지금의 가수들과 달라서 성역(聲域)이 넓고,

성질(聲質)이 연연하며 성량(聲量)이 풍부했다.

약성(弱聲)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강성(强聲)은 날카롭고 힘찼다.

그녀만큼 성격묘사나 심리표현에 노력하는 가수는 있지만,

그녀만큼 기교와 용모와 연기력이 뛰어난 가수는 없다.

천재 칼라스라는 말이 결코 헛되이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조차 환영받지 못했던

 마리아 칼라스는 최후의 순간에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오페라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그녀였지만 한 여인으로 살아가기에는 사랑의 상처가 너무도 깊었던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드라마속의 여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며 금세기뿐만 아니라 다음 세기에도 이어질

그녀만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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