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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모음

Janos Starker, Cello / Corelli - Cello Sonata in D minor

작성자yoonsart|작성시간10.07.16|조회수84 목록 댓글 0

 

                                            Janos Staker (1924 ~    ) Cello

 

                                         Arcangelo Corelli - Cello Sonata in D minor
                                                               

 

                                                                                1.Preludio

                                                          

                                                                    야노스 슈타커,Janos Starker , Cello

 

  

 

                                                                                          

슈타커가 말하는 내 인생을 바꾼 음악

 

   <이글은 영국잡지 [BBC MUSIC]의 연재기사인 'Music that changed me'의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Janos Starker)편을 옮긴 것이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고,1948년에 지휘자 Antil Dorati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

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어서 지휘자 프릿츠 라이너 아래에서 메트로폴리탄과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을 지냈다.
그는 1958년에 독주자가 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떠났으며  인디아나 대학에서 첼로과 교수가 되기도 했다.

 

...내 나이 여섯살하고 육개월때,나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를 만났다.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게 키스해 주었는데,

나는 일주일간이나 세수를 안했다.

우리는 모두 카잘스의 창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그가 비록 첼리스트들을 위하여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연주는 우리 세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런것은 아니었다 :
첼로연주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뒤,나는 에마뉴엘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오스트리아태생의 미국 첼리스트)을

 만났는데 나는 곧 그의 소리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 바르톡(Bartok)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서 바르톡의 랩소디 1번과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그 연주는 카잘스와는 완전히 다른것이었다.
나는 그의 연주가 항상 첼로소리처럼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 이에 대해서 어떤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는데,그당시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서 첼로라는 것은

 언제나 영화나 라디오에서 사랑에 빠져있거나 죽어가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상(Saint-Saens)의 '백조'가 바로 첼로였다. 나는 이것이 지겨웠다.
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첼로 소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했던 리스트 음악원(Franz Liszt Academy)에서

 레오 바이너(Leo Weiner,헝가리의 유명한 음악 교육자)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헝가리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음악을 듣는법을 가르쳤다.그는 실내악을 지도했다.

1학년때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3학년이 되자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제한이나 조절,그리고 자기억제 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음악은 자기억제와 함께 시작되어져야만 하는 것이고 자기억제는 결코 나중에 덧붙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할 때 우리는 모두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 다음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이 학교에서 코다이(Zoltán Kodály)의 교실은 우리 선생님의 교실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무반주  첼로소나타를 공부할때 나는 작곡자 앞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나는 이 곡을 자주 연주해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역시 많은 로얄티를 받게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내 연주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 집의 수영장에는 '이 수영장은 Kodaly가 세워준 것임'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한번은 내가 그의 무반주 소나타 연주를 끝낸 후 코다이가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 와서 말했다.
"16페이지,네가 거기서 리타르단도로 연주하지 않는다면 네 연주는 최고가 될거야"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G이나 G샵인가요?"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그래"라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 나는 그 부분이 G인지 G샵인지에 대해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지휘자 프릿츠 라이너(Fritz Reiner)는 내 음악인생에 큰 영향력을 남긴 또다른 사람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에서 4년,그리고 시카고에서 5년,이렇게 9년간 그의 밑에서 수석 첼로주자로 일했다. 
그 기간동안 나는 거의 모든 오페라와 관현악곡을 연주했다.  
나는 그에게서 과연 음악이란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다.
그것은 내가 레오 바이너에게서 배운것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 두사람이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프릿츠 라이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였다.
내 경험상으로,그의 음악에 대한 지각,이해력과 음악적 요구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음악적 견해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보다는,그는 내가 옳다고 믿고 있었던 것 -

 (즉 순수성,단순성 그리고 균형성,이것들이 나의 3대 신조이다) - 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우리사이는 상당히 좋았지만 내가 솔로활동과 교직생활을 위해서 시카고를 떠났을 때는 한동안 상당히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는 많이 화를 냈는데,나는 내가 그에게서 쫓겨나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일할때 위대한 명가수들의 연주를 들었던 것은

 내 음악적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특별히 그랬다 -

 단지 그녀의 드라마틱한 부분이  아니라 그녀의 음악연주 전체가 그랬다.
칼라스나 유시 비욜링(Jussi Bjorling)은  내가 내 연주에서 성악적인 질을 추구하도록 해주었을뿐만 아니라

거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성역(聲域)안에서 칼라스가 음색을 바꾸는 것은  정말 주목할만한 것이었고 나 역시 베이스에서 바리톤으로,

테너에서 메조로,소프라노에서 콜로라투라로 부드럽게 음색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이페츠(Jascha Heifetz) 역시 내게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가 프릿츠 라이너와 함께 브람스의 협주곡을 녹음하러 시카고에 왔을때

 시카고 심포니의 첼로수석이었다. 
우리는 목요일 저녁에 이 곡을 공연장에서 연주했고 금요일에 레코딩을 시작했다.
아침 9시에 엔지니어가 물었다.
"준비되셨나요?"
그러자 하리페츠가 말했다.
"준비되지 않았소,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아질것 같진 않군"
우리는 멈춤없이 협주곡 전체를 연주했다.

그것은 우리들중 그 누구도 다시 들을 수 없는 정말 아찔한 브람스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녹음을 다시 들은 다음에 보완을 하기 시작했는데,

17 시간 후에 그들은 드디어 만족하게 되었다. 그것은 뛰어난 연주였다.

 
그렇지만  맨 처음에 단숨에 해치웠던 그 연주에는 어느 면에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코딩과 콘서트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연극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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