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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당나귀(1)

작성자윤선장|작성시간26.06.09|조회수64 목록 댓글 0

고요한 바다 위로 남해의 거친 바람이 불어오던 날, 나는 한산도 의항마을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황당한 만남의 배후에는 내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대책 없고 철없는 한 선장 아저씨의 독단적인 결정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땅, 낯선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1. 화려한 감옥, 그리고 나의 권태
한산도에 오기 전, 내 삶은 도심 속 정갈하게 가꿔진 작은 울산 동물원에 있었다. 매일 아침 깨끗하게 정돈된 바닥을 딛고 사육사들의 특급 케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간을 이동하는 것쯤은 네 살배기인 내게 지극히 평범하고 우아한 일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맑은 눈망울의 토끼들과 온순한 양들, 그리고 매너 좋은 친구들과 평화롭게 상류층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삶이 내게 그리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낮이 되면 수많은 꼬마가 떼를 지어 찾아와 울타리 주변을 에워싸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들이 내미는 달콤한 당근 조각들은 분명 맛이 있었지만, 그 대가로 매일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똑같은 눈빛을 보내야 하는 반복되는 일상은 지독하게 따분했다. 안전하지만 숨 막히는 쳇바퀴 속에서 내 영혼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내 마음속엔 깊은 권태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2. 철판 바닥 위의 쿵쾅거림
그날도 평소처럼 익숙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섰다. 나는 내가 또 다른 멋진 전시장으로 이동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경악했다. 그곳에는 바닷바람과 햇볕에 잔뜩 그을린 구릿빛 얼굴의 한 아저씨가 소 운반차를 대동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설마 내가 저걸 타는 건 아니겠지?’

처음엔 대단한 전문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비좁고 낯선 분위기에 기가 질려 당나귀 특유의 고집을 부리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자, 아저씨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우람하고 기품 있는 내 덩치에 압도당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리는 서툰 손길에서 ‘초보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기가 막혔지만 안절부절못하는 아저씨가 하도 애처로워 보여, 나는 못 이기는 척 소 운반차에 몸을 실어주었다.

은은한 에어컨 바람 대신 사방이 뚫린 1톤 트럭 케이지 안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엔진이 켜지자 차가운 철판 바닥을 타고 기분 나쁜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낯선 풍경들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묘한 신뢰감은 있었지만,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내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아저씨는 가끔 차를 세우고 투박한 손으로 쪼갠 사과를 내밀었다. 맛나서 아작아작 받아먹긴 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저씨는 내가 손이라도 물까 봐 잔뜩 쫄아서 소심하게 사과를 내밀다가, 그만 트럭 바닥에 툭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다정한 마음은 알겠는데 도무지 믿음직해 보이지는 않는 아저씨였다.

#3. 뜻밖의 질주 본능
얼마나 달렸을까. 차가 고속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하자 케이지 사이로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동물원의 인공적인 에어컨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자연의 바람이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다 보니,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어라…?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으면 좋겠다.’

어느새 나는 드라이브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구릿빛 아저씨는 내가 미끄러운 철판 바닥에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하는 듯했다. 특히 커브 길을 돌 때면 차가 거의 멈추다시피 할 정도로 속도를 줄여 아주 눈물겹도록 조심조심 핸들을 꺾었다. 바람의 맛을 알아버린 내 입장에서는 여간 감질나는 게 아니었다.

‘아이고, 아저씨! 나 튼튼하니까 걱정 말고 좀 밟아봐요! 스릴 좀 느껴보자고요!’

하마터면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한 20분쯤 달려 주남저수지 부근에 도착했다.

#4. 주남저수지의 거구 연하남을 만나다
차가 멈춘 곳은 예닐곱 마리의 어른 당나귀 목소리와 발굽 소리, 짙은 냄새가 뒤엉킨 삼엄한 대가족의 영토였다. 척 보기에도 기가 죽을 만큼 거친 녀석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소란스러운 마당 한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녀석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디서 멋을 부리고 왔는지 털을 정갈하게 빗어 넘겨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아주 ‘새단장’을 제대로 한 총각 당나귀였다.

문제는 녀석의 덩치였다. 세 살배기라는데, 나보다 한 배 반, 아니 거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우람한 녀석이었다. 저렇게 커다란 녀석이 텃세라도 부리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그때 우리 구릿빛 아저씨가 그곳의 주인인 ‘주남 아저씨’와 대화를 주고받더니 그 총각을 차에 태웠다. 주남 아저씨는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 대단한 포스에 눌렸는지, 산만 한 덩치의 총각은 단숨에 기가 죽어 고분고분 트럭 위로 올라왔다. 사과 하나 제대로 못 주던 우리 구릿빛 아저씨와 너무 비교가 되어, 나는 속으로 ‘저 아저씨 보고 좀 배우라고요!’ 하고 잔소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거나 비좁은 케이지 옆자리에 잘생기고 약간 순진해 보이는 총각이 함께하게 되니, 아까 혼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안심이 되었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나 만년 꼴찌요’ 하는 소심함이 가득 적혀 있어서 어쩐지 동질감도 느껴졌다.

다시 차는 한참을 달려 생전 처음 여객선도 타보았다. 40분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은 넓은 마당이 있는 아름다운 한산도 마리나였다. 도심 동물원의 좁은 콘크리트 바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평화로운, 우리의 새로운 안식처였다.

#5. 마리나 점령식, 그리고 노랗게 질린 선장 아저씨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대소동이 터졌다. 낯선 환경에 당황한 주남 총각이 그 산만 한 덩치로 펄쩍펄쩍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선장 아저씨가 고비를 놓쳤고, 총각은 마당을 종횡무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내 마음속에서도 뜨거운 질주 본능이 폭발했다. 동물원 울타리 안에서 묵혀두었던 4년 묵은 스트레스와 권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좋아,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같이 달리는 거야!’

나는 조신한 공주님 타이틀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총각의 뒤를 따라 마당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선장 아저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소하고 재밌던지!

한참을 신나게 달리다 보니 마당 한구석에 염소 두 마리가 보였다. 우리가 달려가니 녀석들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특히 한 마리는 줄에 묶여 도망치지도 못하고 혼이 나간 상태로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호, 호, 호! 이거 동물원보다 백 배는 더 재밌잖아!’

우리는 신이 나서 창고 여기저기를 제집 안방처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이곳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주기 위해 똥도 팍팍 휘갈겨 영역 표시를 해두었다. 완벽한 점령이었다. 저 멀리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선장 아저씨의 얼굴을 슬쩍 보니, 이미 구릿빛은 온데간데없고 노랗게 질려 있었다. 완전히 멘탈이 털려버린 아저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철없는 선장 아저씨가 우리를 유배 보낸 줄 알았더니, 우리가 마리나를 통째로 접수한 것이다.

#6. 대면대면한 첫날밤의 식사
마리나를 한바탕 접수한 후, 이른 저녁 시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피를 흘리는 기싸움은 없었지만, 대면대면한 공기 속에서 드디어 첫 식사 판이 벌어졌다.

여물통 앞에 서자, 옆에 있던 주남 총각 녀석의 마음속에서 묘한 본능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평생 형님들 밑에서 꼴찌로만 살던 녀석이, 이곳은 한산도고 눈앞의 내가 자기 덩치의 절반밖에 안 되니 만만한 모양이었다. 총각은 커다란 몸을 슬쩍 움직여 몸으로 나를 툭 밀쳤다. 나름대로 평생 처음 부려보는 대장 권력의 과시이자 세 살 연하남의 귀여운 허세였다.

나보다 두 배나 큰 거구가 밀고 들어오니 속으로는 짐짓 놀랐다. 하지만 동물원 짬밥과 네 살 누나의 연륜은 어디 가지 않았다. 거칠게 맞받아치는 대신, 나는 ‘에휴, 요 철부지 보소? 귀엽네’ 하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으로 스윽 물러서 주었다. 품위 있는 공주님의 우아한 양보였다.

내가 순순히 수수방관하며 자리를 내어주자, 오히려 당황한 건 주남 총각이었다. 자기가 밀었다고 진짜로 비켜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평생 밀려만 살던 녀석에게 닥친 성공의 순간, 이내 머쓱함이 밀려왔는지 뼛속 깊이 박혀 있던 꼴찌의 배려 DNA가 발동한 것 같았다.

녀석은 웅장한 덩치로 쭈뼛거리며 소심하게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몸을 돌려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다시 열어주었다.

“아, 저기… 누나도 이리 와서 같이 먹어.”

웅장한 덩치로 소심하게 자리를 양보하는 세 살 연하남과, 그런 동생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쿨하게 여물통으로 다가가는 네 살 연상 누나인 나. 싸우는 듯하면서도 서로의 선을 지켜낸, 아주 기가 막힌 밀당의 첫 식사였다.

철없는 선장의 황당한 결정으로 시작된 한산도 의항마을의 동거 생활. 거구의 연하남 주남 총각이 이 스마트한 연상 누나인 나에게 꼼짝 못 하고 잡혀 살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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