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랜지색 미끼와 덜 떨어진 거구의 쇼맨십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꽤 좋았다. 선장 아저씨가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어준 덕분에, 울타리 밖으로 나와 이슬을 머금은 싱그러운 아침 풀을 마음껏 뜯어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 7시 배가 들어올 무렵부터 평화롭던 마리나가 왁자지껄해졌다.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더니, 우리가 쓰는 마구간 청소부터 시작해서 창고 안팎의 온갖 무거운 짐들을 이리저리 옮겨 대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아저씨들은 예전에 우리가 타고 1톤 트럭을 몰고 마당을 연신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철없는 주남 총각 녀석의 뚱딴지같은 심술이 도졌다. 무슨 고집이 발동했는지, 움직이는 1톤 트럭 앞을 육중한 몸으로 떡 하니 막아서고는 비킬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닌가.
트럭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저씨가 차로 녀석의 엉덩이를 천천히 밀면서 지나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주남 총각이 끝까지 버티자 결국 나중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주남 총각의 굵은 목덜미를 손으로 팍 쳤다.
시골 대가족 서열 꼴찌 출신이라도 나름 덩치가 산만 한 수컷이라고, 주남 총각도 대낮에 외지인에게 목을 맞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녀석이 힘을 쓰며 날뛰는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쇠말뚝에 묶여 있던 고리가 툭 터져 버렸다. 졸지에 녀석이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마당 저편에서 지켜보던 우리 선장 아저씨가 깜짝 놀라 달려와 “주남아, 주남아!” 하며 녀석을 달래 목줄을 다시 걸려고 했다. 하지만 힘의 맛을 알아버린 문디새끼는 그럴수록 신이 나서 더더욱 마당을 날뛰었다.
‘와, 재밌겠다! 나도 같이 뛰고 싶다!’
그 박진감 넘치는 광경을 보니 내 안의 질주 본능도 요동을 쳤다. 녀석의 뒤를 따라 같이 뛰어보려고 마당 쪽으로 세차게 대시를 해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울타리 기둥에 단단히 묶인 내 목줄 때문에 엎어지며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쳐 날뛰는 거구의 주남 총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선장 아저씨는 덜컥 겁이 났는지, 녀석을 붙잡다 말고 휭하니 창고 건물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속으로 ‘아이구, 우리 아저씨 또 쫄았네’ 하고 혀를 차고 있던 그때였다.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아저씨의 손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영롱한 오렌지빛 당근이 여러 조각 들려 있었다. 당연히 저 난리를 치는 주남 총각을 당근으로 유혹해 달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라? 아저씨는 난동을 부리는 주남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울타리에 묶여 있는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입에다 달콤한 당근을 쏙쏙 넣어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마당 저편에서 관심도 없는 듯 씩씩거리며 설쳐대던 주남 총각 녀석이, 내가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세상에서 가장 맛나게 당근을 씹어 삼키자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식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만년 꼴찌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녀석은 언제 날뛰었냐는 듯 꼬리를 내리고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아저씨의 손을 바라보며 자기도 달라고 입을 벌리고 보채기 시작했다.
선장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당근 한 조각을 주남 총각의 입에다 턱 물리더니, 녀석이 정신없이 씹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고삐를 잡아 목줄을 덜컥 걸어버렸다. 역시 우리 아저씨는 밀당의 고수였다. 아저씨는 그렇게 상황을 종료시키고 녀석을 내 옆 울타리 안쪽으로 다시 끌고 들어왔다.
문제는 좁은 울타리로 들어오자마자 이 눈치 없는 주남 총각 녀석이 또다시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 몸에 은근슬쩍 거구를 밀착해오며 거친 콧김을 뿜어대는데, 솔직히 이제는 녀석에게 큰 기대도 안 됐다.
‘에휴, 또 시작이네. 그래, 매너상 장단이나 맞춰주자.’
나는 대충 콧구멍만 몇 번 벌렁거려 주고, 윗입술을 까뒤집어 ‘이랴이랴’ 하는 표정으로 대단치 않게 연상 누나로서의 최소한의 예만 갖추어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꼭 선장 아저씨가 눈앞에만 있으면 자신이 엄청난 수컷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모양이었다. 대낮에 외지 아저씨들이 가득하고 주인 아저씨가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었다.
오늘도 녀석은 산만 한 덩치로 내 등 뒤로 기어오르더니, 길다란 거시기를 내 엉덩이 여기저기에 무작정 비벼대기 시작했다. 과녁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흥분에 겨워 허공에다 몸짓을 해대더니, 이내 혼자서 눈알이 헤벌레하게 풀린 채 껄떡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이번에도 내 소중한 곳은 구경도 못한 채 혼자만의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허탈하게 풀어진 눈으로 다시 땅바닥의 풀을 뒤적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고… 이 모자라 대책 없는 당나귀를 도대체 언제쯤이나 사람 만들어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으려나.’
한산도 마리나의 푸른 하늘 아래, 연상 누나인 나의 깊은 한숨 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혀 가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