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쇠창살 너머의 평화로운 감금 생활 (둘째 날의 기록)
선장 아저씨가 차를 몰고 나가버린 텅 빈 마리나. 나와 주남 총각은 파이프 난간에 턱을 괴고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1톤 트럭에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서웠고, 내리자마자 마당을 미친 듯이 질주하며 염소들을 기절시켰던 터라 온몸이 뻐근했다. 파이프 세 개에 갇힌 게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히 숨을 고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당 저편에서 지천에 깔린 풀을 뜯는 염소 녀석들과 꼼지락거리는 토끼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울산 동물원에 있을 때는 매일 철창 너머로 소리를 지르는 꼬마들을 상대하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여기 동물 친구들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조용히 흐르는 바다 소리와 싱그러운 풀 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때, 옆에서 같이 목을 빼고 있던 주남 총각 녀석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며 몸을 밀착해왔다.
‘뭐야, 이 듬직한 덩치는?’
옆에 서 있으니 녀석의 덩치가 정말 엄청나게 크다는 게 다시 한번 실감 났다. 내 몸집의 거의 두 배는 되는 우람한 녀석인데, 신기하게도 무섭기보다는 묘하게 든든한 구석이 있었다. 주남저수지 대가족 틈에서 만년 꼴찌로 눈치만 보며 자랐다더니, 덩치 값도 못 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이 보면 볼수록 순진하고 귀여웠다.
“야, 주남이. 너도 저 바깥세상이 되게 넓어 보이지?”
내가 슬쩍 말을 건네듯 귀를 쫑긋거리자, 녀석도 알아들었는지 커다란 귀를 내 쪽으로 쫑긋하며 콧김을 씽 뿜었다. 비록 철없는 선장 아저씨가 쳐놓은 파이프 장벽 뒤에 갇힌 신세였지만, 든든하고 잘생긴 연하남이 곁에 동반자로 서 있으니 이 고요한 감금 생활도 제법 견딜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좁은 창고 입구에서 우리 두 연하남녀가 살을 맞대고 지내야 할 앞으로의 열흘. 선장 아저씨가 없는 조용한 마리나에서, 우리 둘만의 기묘하고도 은밀한 탐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1. 파이프 장벽과 쇠창살 너머의 신세계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선장 아저씨는 창고 입구에서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뚝딱거리는 소리에 밥을 먹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워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저씨가 커다란 파이프 세 개를 가지고 오더니, 우리가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창고 입구를 튼튼하게 가로막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세상에! 이제 막 도심 동물원의 감옥을 탈출해 진짜 자유를 찾았나 싶었는데, 다시 갇히는 신세라니!’
자유의 단맛을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쇠창살 같은 파이프 뒤에 갇히게 되자, 덜컥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저씨는 파이프 장벽을 완성하고 나더니 우리 둘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또 날뛰어 마당을 엉망으로 만들까 봐 단단히 단속을 하겠다는, 아주 결연하고 굳은 결심이 선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안심했다는 듯 털레털레 걸어가 차를 몰고 마리나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마당에 주인도 없겠다, 나와 주남 총각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방금 아저씨가 만들어놓은 난간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파이프 사이에 길쭉한 목을 나란히 기대고 서서, 울타리 밖 푸른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드넓은 마당에는 초록빛 싱그러운 풀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그 마당 끝너머로는 반짝이는 한산도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시선을 조금 돌려보니, 마당 한편에서는 어제 우리 기세에 눌려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던 그 염소 녀석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지천에 널린 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풀 사이로 조그마한 토끼들도 여기저기 쏙쏙 나타나더니, 하얀 입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염소에 토끼라니, 묘하게 내가 살던 울산 동물원 친구들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여긴 사방이 꽉 막힌 콘크리트 벽도 없고,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꼬마들도 없었다.
파이프 세 개에 가로막혀 당장 저 풀밭으로 뛰어 나갈 수는 없었지만, 코끝으로 전해지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고 있으니 묘한 설렘이 다시 피어올랐다. 내 옆에 나란히 목을 빼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이 순진한 거구 연하남과 함께, 이 아름다운 섬에서 보낼 앞으로의 열흘간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창살 너머의 풍경을 보며 긴 한숨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