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강원도 산골의 기억, 그리고 울산의 사육사 언니들
사실, 내가 태어난 곳은 울산이 아니다. 내 고향은 첩첩산중 맑은 공기가 가득하던 강원도의 어느 깊은 산골마을 농장이었다.
풀잎마다 이슬이 맺히던 그곳에서 때 묻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내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찾아왔다. 울산 동물원의 관계자가 농장을 방문했다가, 유독 맑고 예쁜 미소가 돋보이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당나귀 계의 여신(?)이라도 알아본 건지, 나는 그 길로 도심 속 울산 동물원에 ‘스카웃’되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울산에서 보낸 세월이 어느덧 2년이었다.
비록 사방이 꽉 막힌 철창 속에 갇혀 지내야 하는 삭막한 시간들이었지만, 나를 지탱해 준 이들이 있었다. 나를 자식처럼, 동생처럼 끔찍이 아끼고 돌봐주던 사육사 언니들이었다. 언니들은 언제나 세심하고 다정하게 내 털을 빗겨주었고, 마음을 다해 나를 대해주었다. 다른 동료 당나귀 없이 혼자 지내야 했던 외로운 타향살이였지만, 그 언니들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긴 갇힘의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파이프 장벽 너머로 한산도의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나를 키워준 강원도의 푸른 산골, 그리고 나를 아껴주던 울산 동물원 사육사 언니들의 다정한 목소리.
비록 지금은 철없는 선장 아저씨에 의해 이 낯선 섬에 뚝 떨어졌고, 옆에는 덩치만 산만 한 순진한 총각 녀석이 껌딱지처럼 붙어 있지만 말이다. 강원도 산골 소녀에서 울산의 스타로, 그리고 이제는 한산도의 점령군이 된 내 묘한 묘생(驢生)을 되짚어보며, 나는 파이프 너머로 불어오는 짠 바람을 향해 깊은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