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당나귀(8)

작성자윤선장|작성시간26.06.13|조회수33 목록 댓글 0

#19. 헛발질의 대가, 그리고 울타리 안의 단식 투쟁(?)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울타리 밖 신선한 풀밭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좁아터진 울타리 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만 했다.
​아무래도 선장 아저씨가 어제 일로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다. 대낮에 외지 아저씨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산만 한 덩치로 헛방만 쾅쾅 날려대며 기가 막힌 쇼를 보여줬으니, 아저씨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는 주남 총각 녀석은 아저씨가 울타리 근처로 걸어올 때마다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쪼르르 다가갔다. 그러고는 듬직한 대가리를 들이밀며 나름대로 필사적인 애교를 떨어댔다. 아침에 맛있는 당근이라도 또 줄까 싶어 잔뜩 기대한 눈치였다.
​하지만 오늘 아저씨의 반응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평소 같으면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거나 눈길이라도 줬을 텐데, 오늘은 그저 귀찮다는 듯 녀석의 얼굴만 손으로 가볍게 툭툭 칠 뿐이었다. 도무지 반가워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한 섬 아저씨의 얼굴 그 자체였다.
​‘에휴, 이 문디새끼야. 아저씨가 지금 네 녀석한테 단단히 삐진 것도 모르고 꼬리를 흔드나.’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저씨의 냉랭한 태도 때문에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한테까지 돌아왔다. 밖에 널린 무성하고 싱그러운 풀밭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는 온종일 울타리 안쪽에 이미 짧아질 대로 짧아진 거칠고 질긴 잔풀만 감질나게 뜯어야 했다.
​맛없는 풀을 아작아작 씹고 있자니, 어제 엉덩이 여기저기에 거시기만 비벼대다 혼자 껄떡 넘어갔던 주남 녀석의 허당 짓이 다시금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녀석이 제때 과녁만 딱 맞췄어도 아저씨가 기분이 좋아서 오늘 아침부터 특급 당근에 신선한 풀밭까지 풀코스로 쐈을 텐데 말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강원도 산골에서 울산 동물원을 거쳐 이 먼 한산도까지 왔는데, 수컷 하나 잘못 만나서 이 좋은 날에 갇혀서 굶주려야 하다니.’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남 총각은 아저씨에게 까인 게 무안했는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또 눈치를 보며 몸을 비벼왔다. 나는 녀석을 향해 들으라는 듯 거칠게 콧김을 ‘씽!’ 뿜어주고는, 얼마 남지 않은 짧은 풀바닥을 거칠게 파헤쳤다. 과연 이 눈치 없는 연하남 녀석이 아저씨의 마음을 돌리고, 내 타오르는 배란기를 제대로 책임질 날이 오기는 할는지. 한산도 마리나의 야속하게 맑은 하늘 위로 가여운 도심 숙녀의 한숨이 깊어만 가는 하루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