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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해설사

정종배 5월 12일 오전 6:23 -망우역사문화공원

작성자유천 홍성례|작성시간26.06.05|조회수0 목록 댓글 0

정종배님의 게시물


 

 

정종배

5월 12일 오전 6:23 ·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 사제지간,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오봉 박현식 김분옥 안맥결, 시인 김동명 백석과 아동문학가 강소천

창밖에 봄비가 세차게 내린다. 봄비가 단비로 쏟아진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분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은 내 삶을 이어주는 단비였다.

학교 다닐 때 단체 아닌 나홀로 매맞은 경우는 고1 4교시 생물 수업이다.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린 뒤에도, 마무리 짓고 계시는데, 우리 군출신 제헌의원이 국회 재임 중에 딱 한 마디 하였다고 농담하는 '밥 먹고 합시다'가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점잖은 생물선생님한테 빰 한대 맞았다.

내 청춘 단비였던 시인 구상은 2004년 5월 11일 운명하였다. 올해가 22주기이다. 은사님 중 유일하게 돌아가신 날을 기억한다. 은사님이 병실에 눕기 전 내주신 시 '우음 2장' 한 구절 <꽃자리> 붓글씨가 지금도 부족한 제자를 늘 지켜보고 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학다리중앙국민학교 5,6학년 담임인 류방현선생님. 두살 위 둘째형 5,6학년 담임도 맡았다. 두 형제가 노는 물이 완전 달라, 가정방문 와서 엄마한테 한 배에서 낳았느냐 물을 정도였다.

병환 중인 어머니로 집안 분위기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2년 동안, 특히 6학년 전원이 여름철 학교 교실에서 잠을 자며 중학교 입시 공부를 하였다. 그 기간이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금도 내 길을 걷고 있지 싶다.

류방현 은사님은 지금도 건강하시다. 서울둘레길을 10회 이상 걸을 정도이다. 올해가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신지 20년이다. 동기들과 함께 참석한 퇴임식장에서 송공시를 낭송했다. 은사님 큰아들이 건대입구역 조양시장 2층 서울현대정형외과의원 개업의로, 그 이후부터 내 몸과 마음을 관리하고 있다.

2000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당시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었다.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디아스포라 전형인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유택을 참배하였다. 그 이후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은 1914년 조선에 왔다. 1년 앞서 온 형님 노리타카는 조각을 전공하였다. 남대문소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하였다. 형님은 '조선도자기의 신'이라 할 정도로 조예가 깊은 도자기 전문가로 활동했다. 두 형제를 우리나라 도자기 업계에선 중흥조로 여길 정도다.

다쿠미 조선총독부 산림과 고원과 기수로 근무하였다. 산림녹화를 위해 애를 썼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한민국 인공림에 37% 차지한 잣나무 씨앗 발아법인 '노천매장법'을, 한국인 노동자들 말을 듣고 힌트를 얻어 터득하여 발견했다.

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민족미술관' 건립할 때와

북아현동 중앙여중고 자리에서 홍릉수목원으로 옮길 때 실무를 맡을 정도로 능력자였다.

동양 3국 공예(민예) 중에 만드는 자에 의한 것이 아닌 쓰는 자에 의해서 실용성 구조성 예술성 등이 쓰면 쓸수록 빛난다는 '조선의 밥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형님의 친구로 노라타카의 조선 도자기 선물로 조선 민예 즉 조선의 미를 탐구하여 이별의 비 한의 미라 규정하였다. 지금도 교과서 시를 공부할 때 언급하고 있다. 두 형제는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 정리하며 보고 들은 굿 연희 농악 등을 조선 민족은 멋 흥취 가락으로 파악했다.

1931년 4월 2일 식목일 준비로 지방 출장 중에 걸린 감기몸살이 급성 폐렴으로 변하여 40살로 운명하였다. 이문동 공동묘지로 상여로 모실 때 조선인들이 서로 상여를 매겠다고 하여 조를 나눴을 정도로 주민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2003년 망우리공원 다쿠미 선생의 유택에서 당시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회장을 맡고 있던 조재명 선생을 만났다. 매년 현창회에서 주최하는 추모식은 물론이고 다쿠미 선생 생애를 다룬 영화 후원회와 촬영 현장 등도 참석하였다.

2011년 다쿠미 선생 80주기 학술세미나에 학생들과 참석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편집을 도맡았다. 그 때부터 다양한 유명 인사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주변에서 그런 분들 어떻게 뵙게 되었는지 궁금해 할 정도로 활동하였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청리은하숙세계시민학교 숙장대행으로 학생들과 함께 하며 일본 다쿠미 고향 2회 동경 릿쿄대학 윤동주시낭송회에도 참석하였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영암군립미술관 명예관장인 동교 하정웅 이사장,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등은 내 삶에 지남차로 자리잡고 오늘밤도 바르게 살아가라 이끌고 있습니다.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와 만남도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얘기를 풍성하게 이어가는 밑바탕으로 이어지고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사제지간 몇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함흥 영생고보 문예부 담당 교사 김동명 시인과 지도교사 시인 백석과 소년문사 강소천입니다. 백석과 소천은 나이 차가 3살로 만학도이지만 소천이 백석을 몹시 따라 첫 동시집인 <호박꽃 초롱> 서문을 썼고, 시집 <사슴> 시 33편은 민족대표 33인 뜻인데 <호박꽃 초롱>도 33편을 수록하였다고 알려졌다.

스승의 날 노래인 <스승의 은혜>는 강소천이 시인 백석을 기리면서 작시하였고 널리 알려진 시점은 88년 해금된 이후이다.

한영중학교를 설립한 오봉 박현식 선생은 소학교 시절 경시대회 우승하여 도산 선생 강연회를 듣고 도산 선생이 오봉을 무동 태워 식장을 돌았다. 그 계기를 잊지 않고 조선어학회 활동까지 이어졌다.

유관순과 3.1혁명 항일투쟁 만세를 부른 김분옥과 도산에게 아버지 묫자리를 내어준 김봉성의 아내 도산의 조카딸 안맥결은 도산이 세운 평남 강서 점진학교 출신이다. 미군정이 뽑은 여자 경찰 총경 18명에 함께 했다.

또한, 도산이 세운 탄포리교회 권사로 인술을 베풀어 많은 이의 생명을 구했다는 내용이 비문에 새겨 있는 박남신은, 이화여전 간호학과 설립을 주도한 김분옥 여사가 둘째딸이다.

도산과 태허 유상규는 임시정부 비서로 만났다. 3.1혁명 항일투쟁 후 중단한 경성의전 공부를 마무리하라 독려하였다. 경성의전 강사와 태허라는 필명으로 대중의료 보급에 신문과 잡지에 글을 연재하였다. 태허가 병실을 돌면서 얻은 단독으로 순직하자 도산이 주도하여 장례를 치렀다. 도산이 마지막 병실에서 유언을 '평양 선영에 가지 않고 망우리 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다. 조카사위 김봉성 아버지 묫자리를 내줘 도산을 그 자에 모셨다.

1973년 강남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산공원으로 도산 묘지를 이장하였다. 강남은 엄청난 부자동네로 변했다. 대한민국 주춧돌을 놓은 지도자의 유언을 지켜줄 의무가 있지 않은가 싶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가묘를 써 기리고 있지만, 정부와 흥사단 관련자들에게 도산을 재이장하여 유언을 지켜주길 당부한다.

국민화가 이중섭은 몸이 아파 오산학교 휴학한 후 복학하여, 당시 서구 유학파 부부 화가 임용연 백남순을 미술교사로 만난 뒤, 우리 고유 고구려 고분 벽화와 조선과 고향 향토와 사물을 그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MRA 도입과 여성지위향상 활동가 이경숙은 해주 호수돈여중 3년 내리 담임을 맡은 성천 유달영 박사 가르침에 놀라운 변화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시어머니가 우리 며느리는 천사라고 칭찬하였다. 화장한 뒤 사리가 나올 정도로 자기 관리가 뛰어났다.

세브란스의전 최초 조선인 교수이자 피부학과를 개설하고 제2대교장 해관 오긍선은 소학교 교사였다 28세 만학도인 행농 이영준을 기숙사 사감 겸 학생으로 발탁하여 제3대 교장을 역임하고 제헌의원 및 국회부의장 재임하였다.

세브란스 의전 1학년 입학 후 3.1혁명 항일투쟁 뛰어들어 옥고를 치른 뒤 신막병원 화타로 부를 정도로 의술을 펼쳤으나 공중보건의 직책으로 미서훈 항일투쟁가 김찬두

기상학 최초 이학박사학위 기상학회 설립 초대 회장 및 학회지 출간 등을 하고, 국립중앙관상대 초대 대장 이원철 연희전문 스승 뒤를 이어 제2대 관상대장으로 기상관측 기구를 공중 23Km까지 띄워 미래의 한국 항공 기술 밑거름이 된 국채표

제자 비문을 쓴 중앙고보 국사 이병도와 '폐허'의 동인 영어 번영로 선생님

소설가 서해 최학송은 만주를 떠돌면서도 다양한 책을 읽고 춘원 이광수와 편지로 문학 공부를 하였다. 춘원을 믿고 무작정 서울로 와 봉원사로 보냈으나 운허 스님과 다툰 뒤 '조선문단'지에 허드렛일을 맡았다. 조선문단 추천 작가 1호이자. 카프 동맹원 가입하였으나 춘원과의 관계로 활동은 미미하였다. 1932년 서해가 지병으로 죽자 최초 문인장을 치렀다.

인민군 선무반 신분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가족묘지에 잠들어 있는 <동승>을 쓴 극작가 함세덕과 동랑 유치진은 사제이면서 경쟁자 및 뛰어넘는 전형이다.

대종교인으로 민요를 현재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채록하고, 정지용 김영랑 김상용 김동명 시를 작곡한 산남 채동선과 홍난파 작곡가의 관계도 함세덕과 동랑의 관계와 거의 같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 사상계 발행인 아버지 장석인 목사는 1920년 항일투쟁에 가담해 일제 경찰에 추적을 받았다. 의주군을 떠나 삭주군으로 이사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장석인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대관유치원>을 설립하였다. 훗날 리영희 교수가 이 대관유치원을 다녔다.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하기 전 벌초를 하였다는 망우리 공동묘지 선영도 2022년 파주 장준하 평화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오늘도 만나고 뵙는 이가 바로 스승이다. 그 스승님의 힘으로 날마다 걷고 쓰고 활동한다. 단비가 그치고 새벽이 늦게 오는 연서로 진관봉 너머 여명이 아닌 산안개가 봉우리를 가린다. 이렇게 자판 앞에 새벽을 맞은 일도 모든 분들의 응원에 덕분이다.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 가자. 지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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