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燃燈) / 정호승
초파일 날 밤거리를 걸으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에
연등으로 걸려 있는 나를 보고 놀라
뒷골목으로 얼른 도망칠 때가 있다
단 한푼도 연등 값을 내본 적이 없고
등을 밝혀 내마음을 맑고 바르게 해보겠다고 발심(發心)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나를
누가 저 거리의 등불로 매달아놓았는지
누가 나를 점등했는지
오늘도 나는 나를 외면한다
종로 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연등으로 걸린 나를 보고
합장 미소하며 지나갈 때마다
나는 등공양(燈供養)을 한 적이 없다고
인간의 길을 밝힌 적이 없다고
저 거리의 돌멩이로 나뒹굴고 있다고
멀리 소리치며 도망간다
-『편의점에서 잠깐』 정호승 시집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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