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망각과 하얀 거짓말의 무게
살다 보면 삶이 통째로 덜컥거리는 순간이 있다. 오늘이 딱 그러한 날이었다. 문경에서 열리는 시낭송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놓고, 그것을 내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린 것이다. 시를 읊고 아름다움을 심사해야 할 내가, 정작 삶의 중요한 약속 하나를 이토록 허술하게 떨어뜨리고 살았단 말인가.
오전 10시쯤, "지금 오고 계시는지요"라는 조심스러운 문자 한 통이 당도했을 때,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다급한 임기응변이었다. 문경으로 향하던 고속도로 위에서 접촉사고가 났고, 차는 지금 견인되어 가고 있으며, 다행히 나는 다치지 않았노라는 거짓말.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그 하얀 거짓말은 순식간에 내 주위를 무겁게 에워쌌다.
뒤이어 저쪽에서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기 너머로 "정말 괜찮으시냐, 놀라지 않으셨냐"는 진심 어린 걱정이 쏟아졌다. 그 따뜻한 염려를 받으며 멀쩡한 차가 정비소에 들어가 있는 척, 아픈 척, 놀란 척 시름을 섞어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내 목소리가 마치 낯선 이의 것처럼 가늘게 떨렸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고 겨우 예배당에 앉았다. 고요한 기도의 공기 속에서 문득 하나의 생각이 마음에 머물렀다. '아, 주일 예배를 온전히 지키라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망각이었을까.' 내 허물을 덮어주기 위한 하늘의 거룩한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루 종일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진짜로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팽팽하게 곤두섰고, 감쪽같은 거짓말을 해버렸다는 죄스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 비밀을 나는 언제까지 내 마음에 묻어두고 지킬 수 있을까. 상대의 순수한 걱정을 가로챈 대가는 이토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었다.
나의 이 지독한 덜렁거림은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런지.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이것은 내 삶에 울린 참으로 크고 엄중한 경고라고 스스로의 손을 꼭 쥐어본다. 참 고되고, 부끄럽고, 가슴 졸이던 유월의 어느 주일 밤. 허공에 흩어진 거짓말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나는 비로소 평안해질 내일의 나를 향해 깊은 숨을 내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