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 오씨들이 400여년 살아온 집성촌인 감천 마을을 찾아 갔다.
감천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영양 문학 테마 공원이 있었다.
테마 공원을 조성만 해놓고 이후 돌보지 않고 있어서........
시인 오일도(吳一島, 본명 오희병 吳熙秉 1901∼1946)의 생가를 찾아갔다.
오일도는 1901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영양의 천석 거부 오익휴의 차남으로 본명은 희병(熙秉)이었다. 일도는 아명이었는데, 후에 필명으로 사용했다.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집안이라 8세부터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공부한 한학의 영향으로 한시를 창작했으며 한시 78수를 남겼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7세에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근대 교육 체계 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습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1922년 18세 때에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중이던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 시들은 비극적인 낭만성과 압축미가 있어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릿쿄대학(立敎大學)을 졸업하고 1929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중앙, 휘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전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 (중 략) -
1930년대는 오일도가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다. 이는 특히 그가 1935년 시 전문 문예지 ≪시원≫을 창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시원≫은 범시단적 잡지로 출범하면서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카프 계열의 시인들 작품을 싣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오일도는 ≪시원≫을 발간하면서 잡지 발행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지만 안타깝게도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채 1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총 5호 정도만 발간했지만 ≪시원≫은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66804146
<노변의 애가(爐邊哀歌)>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뭇잎 하나도 안 남았겠다.
계절(季節)의 조락(凋落), 잎잎마다 새빨간 정열(情熱)의 피를
마을 아이 다 모여서 무난히 밟겠구나.
시간(時間) 좇아 약속(約束)할 수 없는 오―나의 파종(破鐘)아
울적(鬱寂)의 야공(夜空)을 이대로 묵수(黙守)할 것가!
구름 끝 열규(熱叫)하던 기러기의 한 줄기 울음도
멀리 사라졌다.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로!
고요한 노변(爐邊)에 홀로 눈감으니
향수(鄕愁)의 안개비 자욱히 앞을 적시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나의 사랑아
너의 유방(乳房)에서 추방(追放)된 지 내 이미 오래다.
거친 비바람 먼 사막(沙漠)의 길을
숨가쁘게 허덕이며 내 심장(心臟)은 찢어졌다.
가슴에 안은 칼 녹스는 그대로
오―노방(路傍)의 죽음을 어이 참을 것가!
말없는 냉회(冷灰) 위에 질서(秩序)없이 글자를 따라
모든 생각이 떴다―잠겼다―또 떴다.
―앞으로 흰 눈이 펄펄 산야(山野)에 나리리라
―앞으로 해는 또 저물리라.
- [시원(詩苑)] 제1호(1935. 2) -
오일도 생가 바깥채
오일도 생가 안채
<내 少女>
吳一島
뷘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少女 어디 갔느뇨
.........................
薄紗의 아즈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알른거리다.
낙안 오씨 종택
원경으로 본 낙안 오씨 종택
여성항일운동가 남자현 생가가 있는 석보면 지경리로 향했다.
남자현(南慈賢1872~1933),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곳에 와서야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의 모델이 남자현 지사라 했다. 그러나 내가 그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더욱 알 수 없다.
남자현 지사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안동군 일직면으로, '네이버 지식백과'와 '두산백과'에서는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로 표기하고 있다. 출생지를 안동으로 소개한 곳에서는 남자현의 남편이 살고 있던 곳을 영양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한 남자현 지사 생가의 대문
남자현 지사 생가 안내판에서 남자현 지사가 영양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나 영양 답곡리에 거주하는 김영주와 혼인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복원한 남자현지사 생가
남자현지사 항일 순교비의 앞면
항일순국비의 뒷면에는 장문의 문장이 있었으나 그늘이 짙어 찍을 수 없었다. 아래 사진은 항일순국비의 옆면.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여기 저기 지자체에서 지역사회 문화사업들을 많이 했다. 복원된 건물들 보면서 어느 정도 감안은 한다고 해도 정말 이 정도였을까.....씁쓸해 하면서 지켜보았다.
남자현 지사, 의병활동 중에 돌아가신 남편의 뒤를 이어 유복자인 삼대 독자를 키우며 독립 운동하시다가 돌아가신 여성이다. 1928년 길림에서 안창호 선생과 김동삼 선생이 체포되자 이분들의 옥바라지를 하셨고,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 사건을 조사하러 왔을 때 혈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여성의 몸이지만 직접 몸으로 나서서 항일 운동, 모진 고문을 겪고 단신투쟁 하시다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었다고 한다.
고을학교 전용버스 이신배 사장님, 오늘도 얼음에 채운 수박 준비해 오셔서 땡볕에 지친 도반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다음 방문지는 '재령 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이었다.
(16:40~17:35)
‘두들'은 둔덕(가운데가 솟아서 불룩하게 언덕이 진 곳)의 경상도 방언이다. 대한 제국 시절 이곳 두들에 광제원( 廣濟院, 백성의 질병을 고쳐 주던 국립 병원)이 있어서 '원두들' 혹은 '원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 은 영해(寧海) 출신. 현감 함(涵)의 아들, 그는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 이곳에 들어와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 하였다. 석계의 4남 숭일이 선업을 이었고 후손들이 더해저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재령이씨 집성촌 출신으로 의병대장 이현규, 독립운동가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 등이 있다.
차도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자 돌담장 안에 광록정, 그러나 문이 잠겨 있었다.
광록정 담장을 벗어나자 '두들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 아래에 '장계향'이란 이름자가 나타났다.
장계향(張桂香 1598~1680)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 . 이 시명의 부인.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남인의 이론가의 한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다.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을 남겼다. 《음식디미방》은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 조리서.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 종부에게 전해지고,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필사본으로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음식디미 체험관 건물, 저 잘 지어진 건물은 일 년에 몇 번이나 사용하게 될까.
재령 이씨 집성촌의 문화재들
원리 주곡 고택
재령이씨 집성촌, 원리 두들마을 출신으로 시인 몽구 夢駒 이병각(李秉珏1911년 ~ 1941)이 있다.
이 병각은 서울 중동학교 입학(1924)했으나 광주학생 사건 여파가 서울에 미치자 이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1929). 1930년에 대학진학을 위해 도일, 중앙대학 중퇴. 반체제 운동, 청년운동등 민족운동에 가담. 1933년 9월 14일자 『조선일보』에 시 「시대의 총아(寵兒)」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눈물의 열차>가 당선되었다.
이병각은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그는 시 이외에도 소설, 수필, 평론활동을 했으나 194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비오는 거리>
이병각
저무는 거리에
가을 비가 내린다.
소리가 없다.
혼자 거닐며
옷을 적신다.
街路樹 슬프지 않으나
눈물 흘린다.
[ 문장] 1939. 12
석천서당, 이시명이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과 유림이 중건하고 '석천서당'으로 개명했다.
해상고택
석간고택. 소설가 이문열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내던 집이라 한다.
유우당, 항일시인 이병각이 살던 집이다.
'유우당'은 1833년 이상도가 주남리에 세운 집인데 이동호가 이곳 두들마을로 옮겼다. 항일 시인 이병각의 집이기도 하다.
유우당 기둥을 받치고 있는 밑돌이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석계고택, 석계 이시명 선생과 정부인 장계향이 함께 살던 집이다.
이시명의 부인 장계향은 1670년경, 동양 최초의 여성에 의한 조리서적, 최초의 한글 조리서를 저술했다.
(사진은 인터넷 이미지 모음에서 인용)
*쉽게 읽힐 수 있는 최초의 한글 궁체로 필기한 조리서.
이 책은 국수·만두 따위의 주식류, 국·찜·회·김치·구이 같은 부식류, 인절미·강정 같은 떡과 한과류, 오가피주·황금주·소곡주 같은 술 종류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두들 마을을 끝으로 오늘의 고을학교 행사는 일단락을 지었다.
두둘마을에서 17시 35분에 출발했다.
버스가 휴게소에서 머물렀을 때, 강남여 선생이 아이스 캔디를 29개나 사서 회원들에게 돌렸다. 이지범 교감선생께서는 튀밥을 사오셔서, 비닐봉지에 든 튀밥을 굳이 꺼내시어 교감선생의 땀 묻은 맥고모자에 담아 돌리셨다.
이교감 선생이 내게 맥고모자를 내밀며 튀밥을 꺼내라고 하셨을 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와서 튀밥을 잡는대신 깔깔대며 웃어대자
"땀 묻지 않았어요. 어서 드세요!"
하시는 바람에 튀밥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폭염경보가 내린 곳에서 땀으로 목욕하며 찾아다닌 영양고을
피곤하기는 했지만,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