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과 도둑
처용(處容)의 하늘에는 달이 떠 있다. 그러나 처용의 방에는 아내를 빼앗아가는 도둑이 있다. 달이 높고 환한 밤일수록 처용의 방은 어둡고 답답하다. 달이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둑이 없거나, 그 어느 한쪽만 없었더라면 처용은 춤을 추지 않았을 것이다.
달과 도둑이 함께 있는 밤의 시간, 그 모순을 지탱하는 유일한 언어는 춤 바로 그것이다.
땅에서는 늘 사람이 도둑맞는다. 하늘의 달빛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지만 너무 먼 곳에 있어 아내처럼 함께 잠자리를 할 수가 없다.
처용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고, 마음의 눈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구름처럼 허공에 떠 있을 수도 없으며 바위처럼 땅에 주저앉아 천년이고 만년이고 그냥 잠들어 있을 수도 없다. 땅의 중력과 영혼의 부상 - 도둑이 있는 땅의 어둠과 달이 떠 있는 하늘의 빛, 그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몸짓은 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욕설의 언어는 시가 되고 분노의 폭력은 춤으로 바뀐다. 하늘의 달빛과 땅의 도둑을 알고 있는 자만이 참으로 이때의 언어를 들을 줄 알고 그 춤을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있다.
고뇌를 드리운 환희이며 절망과 어깨동무를 한 초월이다. 달빛이 없는 언어는, 그 행동은 허공 속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허망한 바람 소리이거나 구름의 율동은 될지언정, 처용의 춤이 될 수 없다.
시인들은 처용의 춤을 배워야 한다. 대체 옛날 서라벌의 그 달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운 것이었기에, 처용은 도둑을 보고서도 춤을 추고 역신은 무릎을 꿇어 부끄러움을 알았는가?
고뇌를 자르는 칼은 달빛이고, 현실을 이기는 행동은 춤이다. 처용의 달을 다시 떠오르게 할 일이다.
내 사랑의 규방 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온갖 것들, 매연과 콘크리트와 기름 묻은 철사와 지폐의 발암물질들, 그것들은 우리의 침대 속에서 사랑과 꿈을 훔쳐가고, 생명의 푸른빛과 그 정절의 물을 오염시킨다. 현대의 독소들을 넉넉히 몰아내고 이길 수 있는 처용의 말과 춤을 배울 일이다.
시인들은 그 도둑과 달빛 사이에서 춤을 춘다.]
지은이: 이어령
출 차 “『문학사상』, 1979. 6
< 슬픈 애기똥풀 이야기 >
김영택
내가 사는 일산 식사동에는 곳곳에 논이 있다. 봄에 모내기한 벼가 쑥쑥 커가는 모습을 오며가며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풍산동 밭에는 재배한 고구마를 판매한다는 안내판이 나붙는다. 나는 논과 밭 주위에 자라나는 풀꽃을 살펴보는 즐거움으로 매일 들길을 따라 산책길에 나선다.
봄 한철 피어나는 꽃마리와 봄맞이꽃은 꽃도 곱고 귀엽지만 이름도 참 예뻐서 자꾸 불러보고 싶어진다. 함께 피어나는 큰개불알풀은 꽃은 예쁘지만 이름 부르기가 조금 민망하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박씨 아저씨에게는 예쁜 별꽃도 꽃다지도 개갓냉이도 쇠비름이나 방동사니처럼 뽑아버려야 할 잡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개망초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봄부터 피어나던 애기똥풀꽃은 무더기로 피어나 절정을 이룬다. 네 살 재호는 알고 있는 꽃 이름이 민들레밖에 없어서 개망초꽃도 민들레라 하고 애기똥풀꽃도 민들레라 한다. 여섯 살 아윤이는 벌개미취를 코스모스라 하고 루드베키아를 해바라기라 부른다.
'가장 재미있게 이름 붙여진 풀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설문 조사를 하면 어느 풀꽃이 대상을 받을까? E여대에서 식물분류학을 가르치는 P교수님이 그 대학 생물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잘 붙여진 풀꽃 이름 설문조사를 했더니 '애기똥풀'이 단연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어느 신설 중학교에서 교화를 정할 때 K선생님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아이들에게도 친숙한 '애기똥풀'을 추천하여 개설요원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똥' 자가 들어가는 식물을 교화로 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애기똥풀은 이름에 '똥' 자가 들어가 학교 꽃도 될 수 없는 슬픈 신세가 되었다.
'똥' 자가 들어가는 식물은 또 뭐가 있을까? 쥐똥나무도 있고 개똥쑥, 말똥비름, 큰방가지똥도 있다. 개똥벌레, 쇠똥구리, 권정생의 강아지똥! 아, 이건 동물이네. 양귀비과 가문에 황금색 꽃잎, 토속적이고 친근한 이름 애기똥풀을 '애기황금풀'로 개명하면 학교 꽃이 될 수 있을까?
나태주 시인은 '무릎걸음으로 앉은뱅이 걸음으로 애기똥풀 꽃들이 처마 밑 물받이 홈통 가까이까지 와 피어 있다. 풀꽃 이름 많이 아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고 노래했다. 또한 안도현 시인은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라며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새봄이 돌아오면 손주들 데리고 들녘으로 나가서 '애기똥풀' 줄기를 살짝 꺾어 노란 아기 똥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리고 강아지똥이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우게 했다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이야기도 들려주리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쓸모가 있다는 얘기와 함께.
시골의 어느 돌담 아래에 홀로 떨어진 강아지똥은 하찮고 냄새나는 존재였어. 봄비가 내리던 날, 강아지똥은 옆에 핀 민들레를 보게 된단다. 민들레는 강아지똥에게 거름이 있어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알려주지. 강아지똥은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감격했어. 강아지똥은 빗물을 기꺼이 받아 자신의 몸을 잘게 부수어 노란 민들레꽃을 피우지. 민들레꽃은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희생을 꽃 속에 담아 더욱 노랗게 피어났어.
출처 : https://mulpure.tistory.com/15854795
● 애기똥풀
안도현
나 서른 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 애기똥풀 2
나태주
무릎걸음으로
앉은뱅이 걸음으로
애기똥풀 꽃들이 처마 밑
물받이 홈통 가까이까지 와
피어 있다
풀꽃 이름
많이 아는 것이
국어 사랑이고
국어 사랑이
나라 사랑이란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애기똥풀 꽃 속에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웃고 계셨다
● 애기똥풀꽃
권달웅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 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한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혼자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조용해, 저기 사람이 왔어
살다보면 삼라만상의 복잡한 일 중
더러운 일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처럼
참으로 어려운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의 노란 애기똥풀꽃이 웃었다
● 애기똥풀꽃
복효근
어디 연꽃만이 연꽃이겠느냐
집 뒤꼍 하수로가에
노랗게 핀 애기똥풀꽃 보라
어릴적 어머니 말씀
젖 모자라 암죽만 먹고도
애기똥풀 노란 꽃잎같이
똥만은 예쁘게 쌌더니라
황하의 탁한 물
암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단다
그래 잘 먹는 일보다
잘 싸는 일이 중한 거여
이 세상 아기들아
잘 싸는 일이 잘 사는 일
시궁창 물가에 서서도
앙증스레 꽃 피워 문
애기똥풀 보아라
어디 연꽃만이 연꽃이겠느냐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다가왔습니다. 유월 들어 두번째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지방선거로 한 바탕 소용돌이 치던 세상, 선거가 끝났다고 하나 아직 그 여진이 남아 있습니다.
방마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초록빛 바람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밖으로만 내닫는 마음을 책상 앞에 앉히고 책도 읽어야 하고 아직 소식 전하지 못한 곳으로 소식도 보내야 하고......아무튼 유월은 바쁜 달입니다.
6월 11일 목요일, 유정독서 모임 있습니다.
유정의 벗님들은 달리 알려드린 음식점으로 17시 30분까지 모여주십시오.
저녁식사후, 솔바람마루에 모여서,
김유정의 수필 <강원도 여자>, 한강의 소설 <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겠습니다.
유월, 70여년의 세월 저편에 새겨진 서러운 상처,
상처는 남아 있지만
그래도 녹음을 짙어가고,
우리들은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라고
박수치며 감사해 합니다.
20260608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