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락메일 -
안녕하세요, 채화입니다.
아, 번외편이요?
두 편밖에 안되는데 쑥스럽네요 ^-^;;
네, 당연히 퍼가셔두 돼요 ^-^
소설 예쁘게 퍼가주세요.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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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청몽채화
감상주실곳 : khyem87@hanmail.net
작가 카페 : http://cafe.daum.net/chaehwa (┗BlueDream┓채화)
작가 버디 : 하얀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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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안, 파라디 1 (작가시점)
“내가 여행간다고 했잖아.”
175의 늘씬한 키, 웨이브를 넣은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흰 피부, 커다란 눈,
높은 콧대와, 굳게 다물어진 빨갛고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인상을 살짝 쓴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듯이,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대꾸한다.
- 그 여행이 해외여행인 줄은 몰랐지, 너 친구들하고 마르세유 간다며!!!
“한국이 더 끌려서.”
-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엄마, 끊어. 나 구경 좀 하게.”
- 저, 저기!!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 건 맞지, 응?
“아니, 친구들은 마르세유 가고 한국에 온 건 나 혼잔데.”
- 넌 도대체 왜 아빠들만 그렇게 쏙 빼닮은 거냐!!!!
“그럼 아빠를 닮지, 옆집 아저씨를 닮나?”
그렇다. 지금 엄마와 싸우고 있는 이 소녀는 시언와 휴인의 딸 파라디.
그러니까, 수화기 속에서 그녀를 향해 화내는 사람도, 우리의 시언이.
올해로 열일곱살을 맞은 파라디는 아빠들의 지극한 사랑과 엄마의 정성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외국인이라 학교에 다녀도 적응을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부모들의 걱정을 물리치고 파라디는 프랑스 안에서도 남자친구들의 구애로
팔불출 아빠 민서를 걱정하게 만들었고,
동성친구들 사이에서도 치솟는 인기로 엄마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기만 하면 다행이련만,
모두가 오냐오냐 키운 이 딸은, 자만심과 싸가지의 결정체로 자라나서
학창시절의 이모.... 그러니까 정이온 못지않은 성격으로 성장했다.
이 간 큰 딸은 지금, 집이 있는 프랑스 파리를 떠나 잠시 마르세유로 여행을 간다고
뻥을 치고.... 한국으로 덜컥 날아와버린 것이다.
- 바, 바꿔줘!! 나 바꿔줘, 누나!!!!
한숨을 쉬는 파라디. 드디어 시작됐다. 아빠들의 극성이.
- 딸!! 보고싶어!! 돌아와!! 나 요즘 니 조각한단 말야!! 니 얼굴이 필요해, 딸!!
딸을 부르며 소리치는 휴인아빠와....
- 괜찮은 거야? 다친 데 없지? 아빠가 걱정돼서... 밥은 먹었어?
잔소리 시작하는 환영아빠와....
- 딸!!!! 지금 돌아오면 아빠가 갖고싶은 거 다 사줄게, 옷? 신발? 귀걸이? 가방?
아예 울부짖는 민서아빠와....
- 딸아, 너 안 오면..... 우리 3일안에 다 피말라 죽는다....
결코 농담같지 않은 협박을 하는 비원아빠.
파라디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대로 핸드폰을 닫아버렸고,
한 술 더 떠 전화가 더 오지 못하도록 전원을 꺼버린다.
금발로 염색이 된 머리위에 걸쳐둔 선글라스를 쓰며,
인천공항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파라디.
말로만 듣던, 엄마와 아빠의 나라, 한국.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는다.
친아빠를 무척 닮은 그녀의 미소가, 미친듯이 눈부셨다.
“엄마, 나 지금 나간다!!!!”
오늘도 아침밥은 물건너가고,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하고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아들.
주린은 그런 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심각한 잠꾸러기 이안.
그는 교복을 입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교복을 입고 잠드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지, 머리가 까치집이야. 손질 안하고 가도 되겠어?”
“괜찮아, 난 잘생겨서 오히려 이런 빈틈을 보여줘야 애들이 열광해.”
“샌드위치 싸놨어. 가는 길에 먹어.”
“아냐, 됐어. 나 버스타고 갈 거야.”
“...... 차 대기하고 있는데.....”
“나 차타고 학교 가는 거 부담스러워, 엄마.”
안이를 보는 주린의 눈빛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주린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녀의 브랜드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선주린의 하나뿐인 아들 이안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옷 브랜드 이름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는 브랜드 이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델 이안이었으니까.
귀여운 얼굴, 큰 키, 선주린으로 인해 키워진 패션감각, 모든 것을 소화하는 옷빨은
현재 열아홉살인 그가 열 다섯 살부터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나 오늘 조금 늦을 거야. 촬영 없으니까 괜찮지?”
“알아, 이모 만나고 올 거지?”
“아... 엄마 울까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왜 울어, 얘도 참....”
“내가 다 알아, 엄마가 날 독차지하고 싶어서 안달난 거.”
안은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였다.
굳이 알게 될 필요 없었던 그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안의 이모인 정이온을 비롯한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전원이
그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언과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것은 죽을때까지 주린과 열음만이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진실이니까.
“아빠는 싫어할 거야. 그러니까 아빠한텐 말하지 마.”
“알고 있어.”
“다녀올게.”
“안아....”
주린의 부름에 큰 집의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안이 돌아본다.
“잘 자라줘서... 난 너한테 너무 고마워, 안아.”
“엄마가 잘 키워서 그래.”
“모든 사실 듣고도 방황 안해줘서 고마워.”
“왜이래, 나 방황 중이야, 나 사춘기잖어.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닌데.
나 고3이면서도 공부도 안하고 여자애들이랑 막 놀러다녀.
그리고 엊그제 친구들이랑 술 먹느라 늦게 들어온거야.
그리고 일주일 전에 나 학주한테 맞은 거 아냐, 옆학교 애들이랑 싸움했어.
그래서 메이크업 담당 누나랑 한 판 했다니까. 입가에 상처 났거든.
아빠한텐 이르지마?“
괜히 주린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과장되게 말하며 씨익 웃는 안.
안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주린의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그녀는 아들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한마디 내뱉는다.
“하늘이 나한테 준 선물이야, 안이 너는.....”
“그런 말 하지마, 엄마.”
“안아.......”
“엄만, 날 버리지 않은 유일한 부모야.”
“............"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기어이 눈물을 쏟는 주린.
안은 웃으며 그녀를 한 번 안아주고는 씩씩하게 소리친다.
“아들 학교 다녀올게요!!”
주린의 앞에서는 농담도 하고 바보같은 행동도 자주 저지르는 안이지만
사실 학교나 촬영현장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그는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보이곤 했다.
나른하고 우아해보이는 모습 덕분에 인근지역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상이 되어있었다.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지나면서 안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키우고 있는 친아빠인 진한과, 자신에게 헌신적인 주린 말고도
친엄마와, 자신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준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남다른 출생의 비밀에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주린이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안이가 사소한 감기로 아프기라도 하면 예정되어있던 패션쇼 스케줄을 취소하고
아들의 병간호에 매달리는 주린이었다.
그 크나큰 사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안은 방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지 그의 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함에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랬기에 모델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탈출구로 시작한 모델활동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으며 폭발적 인기를 가져왔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연예계의 러브콜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지만
모델활동은 전보다 더욱 왕성해져서 이제 학생으로서의 본분보다 모델 이안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아빠인 진한은 아들의 그런 모델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쓸쓸한 눈은 언제나 안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과연 젊은 시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어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안은 지금 열아홉살이다.
이모에게 들었던 [제 1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그 때 열여덟살에 불과했다.
안보다 어린 나이였던 그들이, 친엄마를 돕고 안을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안을 정말 미친듯이 사랑하고 있었을까.
“미안, 아저씨. 오늘은 그냥 걸어갈게요!”
대문을 열고, 대기하던 기사아저씨에게 소리친 안은 버스정류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매만지며 뛰던 안은 문득 자신이 늦었단 사실을 자각했다.
어차피 뛰어도 지각, 안 뛰어도 지각이다.
뛰어도 맞는 거고, 안 뛰어도 맞는 거다.
굳이 뛰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안은 그냥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머리는 까치집에, 안에 자신이 출연한 잡지 한 권이 든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친 채
슬리퍼만을 신고있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스타일리쉬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모습은 비원과 흡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언제나 그런 안의 모습을 보고 역시 모델이란 다르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그 때 안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친구인가,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확인하자...
맙소사, 매니저였다.
“여보세요.”
- 너 지금 어디야?
“오늘 촬영 없잖아. 나 학교가. 이번 주 들어서 처음 가는 거야.”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어제 이야기했지!! 어쩐지 졸려서 정신 못 차리더라.
내가 잠결에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라 그랬지!! 다음주 촬영 이번주로 미뤄진댔잖아!!
매니저가 하는 말을 듣고보니 그런 듯도 싶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버릇이 문제였다.
“촬영 없다고 하니까 엄마도 아무 말 없던데.”
- 너 정신 안 차리지? 오늘 촬영은 핸드폰 광고 지면이다. 옷이 아니고!!!
“아... 그랬나...”
- 지금 데리러 갈게, 어디야?
“아니야. 나 지금 버스 정류장 다 왔어. 버스 타고 갈게, 어디로 가면 돼?”
매니저가 광고현장을 설명해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점차 또 지루해졌다.
이미 알고있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매니저는 안이 못 미더운지
위치를 한 번 설명하고, 또 두 번 설명하고, 자세하게 세 번 더 설명하고...
안은 버스정류장에 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의 눈에 지금 막 택시에서 내리는 한 소녀가 보였다.
아니, 소녀는 맞는 것 같은데, 인상을 보면 더 성숙해보였다.
교복차림도 아니었고, 염색한 머리에 걸쳐진 선글라스도-
어디선가 꼭 본 듯한 인상에 안은 모델일을 하던 기억을 되살렸다.
패션쇼에서 봤던가? 아니면 광고 현장?
소녀의 큰 키라던가, 잘빠진 몸매라던가, 한 눈에 확 튀는 미모라던가.
모델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아저씨, 여기 서울 맞아? 나 여기 지리 잘 모른다고 인천에 내려준 거 아니지?”
택시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소녀.
존댓말이라고는 모르는 소녀인 듯 했다.
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야, 이안!!! 너 내 말 들었어? 너 지금 바로 와야돼!! 스태프들 다 기다려!!
매니저의 고함소리에 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어, 지금 가.”
눈길은 소녀에게 고정한 채 얼빠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한다.
통화를 마친 안은 핸드폰의 밧데리를 확 빼버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뭐라 단정지을 수 없는 강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매니저 형에게 용서를 빌었다.
핸드폰 지면 광고는, 날려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안이 매니저와의 통화를 끝냈을 무렵, 소녀도 택시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안은 성큼성큼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심각한 표정의 안과 달리 소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뭐야, 너 누구야?”
..... 이렇게 건방진 여자애라면 안이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안은 누군가에게 대책없이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예뻐서만은 아니다. 예쁜 여자애들이라면 모델계에 깔리고 널렸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그 쪽... 나 알죠?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 거 같은데.”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너 프랑스 살아?”
“........... 프랑스?”
이탈리아 패션쇼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프랑스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모델... 아니예요?”
“아니야.”
“..... 이름이... 뭐예요?”
“.......... 파라디.”
이름을 묻자 소녀도 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국 땅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안은 파라디란 모델과 만난 적도, 마주친 적도, 같은 무대에 선 적도 없었다.
“...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나 봅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하는 안을 향해.....
“너 이 옷 어디서 산 거야?”
쏘아붙이듯 묻는 그녀.
“이거.... 교복인데요.”
“맙소사, 여긴 진짜 교복이란 게 있어? 나 이런 거 처음봐. 이 옷 이쁘다!!”
외국물 먹은 여자애라는 건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지만,
교복을 보고 신기해하질 않나, 보자마자 반말을 찍찍 써대질 않나.
안의 인내심도 결국 한계에 달했기에, 그는 그녀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야, 너 몇 살이야.”
“십육. 아, 한국 나이로는 십칠이겠다.”
........ 열일곱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십칠이라니.
“근데 왜 반말하냐.”
“반말이 뭔데?”
“....... 왜 말 낮추냐고.”
“말을 낮추는 게 뭔데? 그걸 어떻게 낮춰?”
말이 안 통하는 소녀였다. 안은 그냥 반말로 맞서기로 작정했다.
“말도 잘 못하는 게 한국엔 왜 오냐.”
“이 옷 어디서 사?”
싸움이라면, 그게 몸싸움이 됐든, 말싸움이 됐든 지지않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 앞에서는 모든 게 역부족인 듯 싶었다.
“너 내 말 씹냐.”
“말을 어떻게 씹어? 한국말이 이상한 게 많은거야, 니가 이상한 말을 쓰는거야?”
“한국 온 적 없어?”
“처음이야.”
“..... 입양아냐?”
“엄마도 한국인, 아빠들도 한국인. 너 내가 한국말 잘 못한다고 무시하지마.
넌 프랑스어 한 마디도 못할 거 아냐?“
“아빠들?”
“나 이 옷 사고 싶어. 살 수 있는데가 어디야? 가르쳐줄래?”
졸지에 말 걸었다가, 프랑스에 사는 한국소녀에게 잡히게 된 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교복을 파는 곳을 향해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대충 눈에 띄는 교복점에 데리고 가자 소녀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교복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다니는 학교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한국은 진짜 다들 교복만 입나봐.”
“프랑스랑 비교하지마. 프랑스에도 교복입는 학교 있긴 있을거야, 니가 모르는 거겠지.”
안의 비꼬는 말이 들리는 건지, 아닌건지... 파라디는 교복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넥타이 이쁘다. 맙소사, 이 옷 색깔 봐.”
“너 왜 남자들 교복을 봐, 여자 교복 살 거잖아, 넌 이 쪽이야.”
“여자랑 남자랑 교복이 달라?”
“너 지금 나랑 농담하냐.”
“와, 치마다!!”
교복에 홀린 듯 미친듯이 구경을 해대는 파라디를 보며 안은 한숨을 쉬었다.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을까.
입양된 애도 아니고, 한국인 엄마아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처음 온 걸까.
그리고, 여자들에게 관심없는 자신이 왜 이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을까.
단순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이 커피 모델을 한 적 있는 같은 학교 여자애와는 인사도 한 적 없으니까.
아니, 자세하게 말하면 운동장에서 마주친 그 여자애가 인사했는데도
안이 먼저 무시했다. 광고현장에서 스태프에게 건방지던 여자애가
안에게는 먼저 착한 척 인사하는 게 짜증났기 때문에.
물론 그 인사를 무시하는 바람에, 학교에선 ‘개싸가지 이안’ 이라고 불렸었다.
“기다려, 입어보고 올게.”
파라디는 마치 명령하듯 중얼거렸다.
안은 이 상황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파라디가 고른 교복은 결국 안이 다니는 학교의 교복이었다.
검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가 조화된 교복.
그렇다, 안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복이 바뀌었다.
주린이 그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을 새로 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안을 위한 교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쩍 길어진 다리탓에 교복을 하나 더 살까, 생각하며 교복을 살펴보던 그 때.
“나 어때?”
탈의실에서 파라디가 나왔다.
교복입은 그녀를 보자, 눈이 부셨다.
아니, 눈이 부신 이유가 교복 때문인지...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고현장이나 팬들에게서 미소가 눈부시다는 말을 자주 듣는 안이지만,
자신이 눈부신 미소를 직접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웃음은 파라디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남자교복이 안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여자교복은 파라디를 위해 제작된 것 같았다.
세상에서 비싸고 멋지고 특이한 옷은 다 입어본 모델 이안이,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황홀함을 느끼고 있다니.
“됐네, 여러 가지 입어보지 말고 그냥 그거 사라. 기다리기 귀찮아.”
안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짜증스런 말투를 만들어내며 중얼거렸다.
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파라디는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모습에 꽤나 만족한 눈치였다.
그녀는 교복의 값을 지불했고, 점원에게 그 교복을 입고 가겠다고 설명했다.
물론, 반말로.
그리고 그들이 가게를 나가려던 순간.
“저기... 모델 이안 아니예요?”
점원 한 명이 안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오며 물었고,
파라디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점원과 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닮았단 소리 가끔 들어요. 이안은 무지 바쁠걸요.”
싸인이라면 귀찮아서 경기를 일으키는 안은 거짓말로 둘러댄다.
“하긴... 근데 너무 닮으셨네요.”
“제가 걔랑 같은 학굔데요, 걔는 실물보다 못해요. 그리고 저처럼 슬리퍼도 안 신구요,
걸어다니지도 않아요. 건방진 게 맨날 밴타고 학교 왔다 갔다...“
안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점원을 보며 그는 속으로 웃었다.
“그럼 가자.”
안은 한참을 떠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있는 파라디의 손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한국에 너 닮은 모델 있어?”
뭐 씹은 표정을 하고있는 파라디.
“어, 왜?”
“한국 모델 수준 알만해.”
뭘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세계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하는 안의 모델수준 타령을 하는 파라디.
“우리 아빠들은 교복도 못 입어봤다는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빠‘들’이래?”
“한국사람들이 왜 맨날 한민족, 한민족 하는지 알겠어.”
“너 또 내 말 씹냐.”
“다들 얼굴색도 똑같고, 머리색도 똑같애. 뭐지, 같다고 생각하는거? 동.. 동...”
“동질감.”
“그래, 동질감 느낄만 해.”
“근데 넌 염색했잖아.”
“그러니까, 나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할래, 우리 미용실 가자.”
“야, 너 가이드가 필요하면 여행사에 문의해야지, 왜 애꿎은 나를....”
“애꿎은 게 뭐야?”
깜빡했다,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애라는 사실을.
“나, 한국 관광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구경하러 왔어.”
“다른 게 뭐냐.”
“경복궁이나 남산이나 박물관 보려고 온 거 아니야. 난 생활을 느끼고 싶었어.”
“..............”
“교복사고, 미용실 가고, 길거리에서 쇼핑하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하는 거.
우리 엄마랑 아빠들이 예전에 그렇게 생활했던 것처럼.“
안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겹게도 눈이 아릴만큼 새파랗다.
날씨 핑계대며 학교도 땡땡이치고, 광고도 때려쳤다고 말한다면 변명이 될까.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미소를 지닌 여자애와 함께 다니는 게 죄가 되진 않겠지.
“가자, 잘하는 미용실 알아.”
머리도 했고, 쇼핑도 했고, 밥도 먹었다.
이제 날이 제법 어둑해지고 있었다.
안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일곱시다.
여덟시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이모, 삼촌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급한 김에 파라디도 데리고 약속장소인 한 공원의 분수앞에 앉아있었다.
친구 하나 데리고 온다고 기분 나빠할 이모나 삼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며 놀릴 망정.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파라디가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다니. 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라디는 역시 까만색의 머리가 더 어울렸다.
검은 색의 교복 치마와 머리 색깔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재밌었어. 너 때문에 그립기만 하던 내 나라가 더 좋아졌어.”
“...... 프랑스는.... 언제 가?”
“조금 있다 가야돼. 8시에 택시타고 공항에 갈 거야.”
“말하지, 데려다줄 걸 그랬네.”
“한국 애들은 오늘 너랑 내가 했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데이트 하겠지?”
“웃기지마, 난 너 여자로 안 보여.”
“나도 너 남자로 안 보여.”
“그럼 그런 말 하지마.”
“솔직히 말해봐, 너 아까 나한테 말 건 거, 내가 이뻐서 그런 거지?
괜히 어딘가에서 본 척 하면서 다가오는 거, 한국남자들의 수법이랬어, 엄마가.“
“공주병하고는....”
신기한 일이었다. 까칠한 안이나, 싸가지 없는 파라디나...
누군가와 단기간에 친해지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루만에 몇 년을 만난 친구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로가 이성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또는... 가족... 같은 예감이랄까.
“꼭.... 오늘 가야돼?”
안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물었다.
파라디는 그런 안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어보였다.
“응, 꼭 가야돼. 안 그러면 우리 아빠들 울어.”
“................”
“아까는 왜 아빠‘들’이냐고 물어보더니, 왜 지금은 안 물어봐?”
“대답안하는 거면, 좋은 건 아닐 거 같아서.”
“...........”
“왜, 그런 거 아냐? 엄마가 재혼하셨다거나....”
“아니, 우리 엄만 아빠밖에 몰라. 아빤 더더욱 엄마밖에 모르고. 뭐라더라... 일..단심?”
“일편단심.”
“그래, 그거.”
“근데 왜 아빠들이야?”
“모르겠어, 그냥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아빠는 네 명이었어.”
네 명이라, 안은 갑자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생각났다.
친엄마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괜히 파라디가 부러워졌다.
“엄마랑, 친아빠랑, 다른 아빠들이 너무 친해서 그런거 아닐까.
다섯명이 되게 친해. 예전부터 친했대. 한 명이 없어지면 나머지 네 명이 못살만큼.
그래서 다섯명이 함께있기 위해 모든 걸 버렸대. 이 한국을 버린 거지.
자신들의 나라를 버리고, 서로를 택한 거야. 그리고 날 낳은 거고.“
“....... 그래서 넌 이번에 한국을 처음 온 거야?”
“응, 엄마랑 아빠들은 한국에 오고싶지 않대. 오고싶은데 올 수 없는 걸 수도 있고.”
“혼란스러웠겠다, 어렸을 때는.”
안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았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파라디 또한, 방식은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별로. 잘 살고 있다가 중간에 몰랐던 아빠가 확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당연한 거였거든.
물론 어렸을 땐 친구들 아빠가 한 명씩인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혼 때문에 아빠나 엄마가 두 명씩인 애들도 많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남의 엄마나 아빠에 관심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로등이 켜지며 분수대가 작동되어 물이 튀어올랐다.
안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안은 계속 이야기를 듣고싶어하는 눈치였기에, 파라디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친아빠는 조각을 해. 제일 장난스럽고, 내가 봐도 웃는 게 빛나.
젊었을 땐 되게 귀여웠을 거야. 내가 어렸을 땐 항상 손 잡고 산책했지.
맨날 아이스크림 사줘놓고 자기가 다 뺏어먹었어. 그러다 항상 내가 울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아빠 막 혼내고. 봐, 이 선글라스도 친아빠가 사줬어.
놀아주는 건 최고였지. 제일 웃기기도 했고. 잘 안아주고, 잘 웃어주고.“
부러웠다. 안의 아버지 진한은 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친아빠가 1호 아빠라고 치면, 2호 아빠는 음식점 주인이야. 주방장이지.
음식맛이 끝내줘. 너도 맛보면 아마 뒤로 넘어갈걸? 프랑스 놀러오면 꼭 찾아와.
2호 아빠는 다정하고 자상하고 따뜻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2호 아빠한테 말하지.
화 안내고 조용히 넘어가거든. 아빠가 큰소리나고 싸움하는 걸 워낙 싫어해서.
그래도 조심해야돼. 진짜 화나면 제일 무서워지거든. 1호아빠가 언제 한 번 가출했는데
돌아오자마자 막 두드려패는 거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나한텐 잘해줘, 워낙 딸을 좋아해서.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진한에게 혼나본 적이 있었던가, 안은 생각했다.
“3호 아빠는.... 스토커지.”
“스토커?”
“학교에 진짜 킹카였던 남자애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어. 파티에 같이 가자고.
모르겠어, 날 정말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동양 여자애라 흥미가 있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난 상관 없었지. 난 걔한테 아예 관심 없었거든.
그래도 심심해서 파티에 따라갔지. 근데 3호 아빠가 미행을 한 거야.
알아주는 프리랜서 비즈니스 사업간데, 최면이 있지, 그걸 따라오다니.“
“최면이 아니라 체면이겠지.”
“돈을 잘 버니까 맨날 비싼 물건들로 날 꼬시려고 하지. 안 그래도 난 아빠 좋아하는데.
맨날 친아빠를 경계하거든. 내가 친아빠랑 한 번 놀러가면,
3호 아빠랑은 두 번 놀러가야돼. 안 그러면 삐지고 화내고 장난 아니야.
내가 오늘 안가면 3호 아빠는 울걸? 실종신고 낼 수도 있어.“
지겨워하는 척 해도 파라디의 얼굴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4호 아빠는 잘생겼어. 늙지 않는 것 같아. 말도 잘 안하는데 가끔 되게 웃겨.
2호 아빠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는데 프랑스 아줌마들이 껌뻑 죽는다니까.
이상하게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더라구. 카리스마도 끝내주고.
잘생기고 키도 제일 크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부모님이 학교 오는 날이면
맨날 4호 아빠만 불렀어.“
“........ 그래서 4호 아빠가 갔어?”
“아니, 아빠 네 명이랑 엄마랑 다 같이 오더라구, 항상.”
“엄마는.... 어떤 분이야?”
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파라디의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해. 아빠들을 다 이길 수 있는 파워우먼. 나랑도 제일 잘 통하지.
엄마랑 딸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 사이거든.“
주린도, 안이가 딸이길 바란 적이 있었을까.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파라디의 말에 안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말은... 오늘 아침 주린에게 건넨 자신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꺼냈다.
“너, 내 동생할래?”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인사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안이 그런 말을 꺼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좋아.”
라고 간단히 수긍해버린 파라디의 반응이었다.
자기가 누나하겠다고 우기지는 못할망정, 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오빠라고 불러.”
“그건 싫어.”
“싸가지.”
“너... 모델 맞지?”
안은 파라디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그냥 우리학교에 나 닮은 모델이...”
“아까 미용실에서 어떤 언니가 머리해주면서 물어봤어. 니가 여자 데려오는 거 첨이래.
여자친구냐고 물어봤어. 그러면서 모델이니까 스캔들 나면 어쩔 거냐고.“
“너 설마 내 여자친구라고 대답한 건 아니지?”
“꿈 깨라.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했네요.”
“...............”
“안심하는 거 봐. 스캔들 걱정하는 거 보니까 모델 맞네, 뭐.”
분수는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높낮이를 조절하며 춤추고 있었다.
파라디는 기지개를 켜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해. 프랑스로 돌아갈거야. 여기서 안녕하자.”
“혼자 갈 수 있겠어?”
“원래 혼자 돌아다닐 예정이었는데, 뭐. 니가 나한테 반하는 바람에 데리고 다녔지만.
택시타면 돼. 그리고 너 만날 사람도 있다며.“
밤인데도 불구하고 파라디의 미소에 눈이 부셨다.
안은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한숨을 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잡지였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 흰 셔츠를 걸치고 있는 안이었다.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잡지야. 선물로 줄게. 특집으로 30페이지나 나왔다.”
“............”
“브랜드 이안, 알지? 프랑스에도 있을 거야.”
“......... 너 그 옷 광고해? 나 그 브랜드 되게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랑 아빠들도.”
“나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이야.”
“..........이름이 뭐야?”
“이안.”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 이안이라.
파라디는 피식 웃으며 잡지를 소중히 품에 껴안았다.
“그럼 안녕.”
오빠-동생 사이로 지내자고 약속을 하고서도 그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것도,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오늘 이렇게 이끌리게 된 것처럼,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것을 믿었을 뿐.
“안아!!!!!!!!!!!!”
멀리서 안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도도한 표정을 소유하고 있는 이온이었다. 그 옆에는 이모부 김산이 서있고.
유인이모와 열음삼촌 커플도, 환희이모와 준휘삼촌 커플도 그대로.
“안녕, 난 갈게.”
파라디는 안이와의 악수를 마지막으로 눈부신 미소를 남기며 뒤돌아섰다.
안은 멍하니 교복을 입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그 사이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안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야? 조카, 누구야? 같은 학교인가봐? 여자친구?”
이온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아니, 여동생.”
안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흔치않은 그의 웃음에 모두가 놀란듯했다.
“....이름이... 뭔데?”
열음이 안에게 묻자, 안은 답답한 교복 넥타이를 풀며 기분좋게 대답한다.
“파라디.”
파라디... 프랑스어로 천국.
열음은 뭔가 알 것만 같은 느낌에 그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있는 소녀에게, 아름다운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옛날, 모두를 눈부시게 했던 미소의 휴인처럼.
그 옛날, 모두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시언처럼.
안녕하세요, 채화입니다.
아, 번외편이요?
두 편밖에 안되는데 쑥스럽네요 ^-^;;
네, 당연히 퍼가셔두 돼요 ^-^
소설 예쁘게 퍼가주세요.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작가 : 청몽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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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안, 파라디 1 (작가시점)
“내가 여행간다고 했잖아.”
175의 늘씬한 키, 웨이브를 넣은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흰 피부, 커다란 눈,
높은 콧대와, 굳게 다물어진 빨갛고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인상을 살짝 쓴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그녀의 말을 맞받아치듯이,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대꾸한다.
- 그 여행이 해외여행인 줄은 몰랐지, 너 친구들하고 마르세유 간다며!!!
“한국이 더 끌려서.”
-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엄마, 끊어. 나 구경 좀 하게.”
- 저, 저기!!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 건 맞지, 응?
“아니, 친구들은 마르세유 가고 한국에 온 건 나 혼잔데.”
- 넌 도대체 왜 아빠들만 그렇게 쏙 빼닮은 거냐!!!!
“그럼 아빠를 닮지, 옆집 아저씨를 닮나?”
그렇다. 지금 엄마와 싸우고 있는 이 소녀는 시언와 휴인의 딸 파라디.
그러니까, 수화기 속에서 그녀를 향해 화내는 사람도, 우리의 시언이.
올해로 열일곱살을 맞은 파라디는 아빠들의 지극한 사랑과 엄마의 정성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외국인이라 학교에 다녀도 적응을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부모들의 걱정을 물리치고 파라디는 프랑스 안에서도 남자친구들의 구애로
팔불출 아빠 민서를 걱정하게 만들었고,
동성친구들 사이에서도 치솟는 인기로 엄마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기만 하면 다행이련만,
모두가 오냐오냐 키운 이 딸은, 자만심과 싸가지의 결정체로 자라나서
학창시절의 이모.... 그러니까 정이온 못지않은 성격으로 성장했다.
이 간 큰 딸은 지금, 집이 있는 프랑스 파리를 떠나 잠시 마르세유로 여행을 간다고
뻥을 치고.... 한국으로 덜컥 날아와버린 것이다.
- 바, 바꿔줘!! 나 바꿔줘, 누나!!!!
한숨을 쉬는 파라디. 드디어 시작됐다. 아빠들의 극성이.
- 딸!! 보고싶어!! 돌아와!! 나 요즘 니 조각한단 말야!! 니 얼굴이 필요해, 딸!!
딸을 부르며 소리치는 휴인아빠와....
- 괜찮은 거야? 다친 데 없지? 아빠가 걱정돼서... 밥은 먹었어?
잔소리 시작하는 환영아빠와....
- 딸!!!! 지금 돌아오면 아빠가 갖고싶은 거 다 사줄게, 옷? 신발? 귀걸이? 가방?
아예 울부짖는 민서아빠와....
- 딸아, 너 안 오면..... 우리 3일안에 다 피말라 죽는다....
결코 농담같지 않은 협박을 하는 비원아빠.
파라디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대로 핸드폰을 닫아버렸고,
한 술 더 떠 전화가 더 오지 못하도록 전원을 꺼버린다.
금발로 염색이 된 머리위에 걸쳐둔 선글라스를 쓰며,
인천공항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파라디.
말로만 듣던, 엄마와 아빠의 나라, 한국.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는다.
친아빠를 무척 닮은 그녀의 미소가, 미친듯이 눈부셨다.
“엄마, 나 지금 나간다!!!!”
오늘도 아침밥은 물건너가고,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하고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아들.
주린은 그런 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심각한 잠꾸러기 이안.
그는 교복을 입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교복을 입고 잠드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나지, 머리가 까치집이야. 손질 안하고 가도 되겠어?”
“괜찮아, 난 잘생겨서 오히려 이런 빈틈을 보여줘야 애들이 열광해.”
“샌드위치 싸놨어. 가는 길에 먹어.”
“아냐, 됐어. 나 버스타고 갈 거야.”
“...... 차 대기하고 있는데.....”
“나 차타고 학교 가는 거 부담스러워, 엄마.”
안이를 보는 주린의 눈빛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주린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녀의 브랜드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선주린의 하나뿐인 아들 이안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옷 브랜드 이름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는 브랜드 이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델 이안이었으니까.
귀여운 얼굴, 큰 키, 선주린으로 인해 키워진 패션감각, 모든 것을 소화하는 옷빨은
현재 열아홉살인 그가 열 다섯 살부터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나 오늘 조금 늦을 거야. 촬영 없으니까 괜찮지?”
“알아, 이모 만나고 올 거지?”
“아... 엄마 울까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왜 울어, 얘도 참....”
“내가 다 알아, 엄마가 날 독차지하고 싶어서 안달난 거.”
안은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였다.
굳이 알게 될 필요 없었던 그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안의 이모인 정이온을 비롯한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전원이
그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언과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것은 죽을때까지 주린과 열음만이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진실이니까.
“아빠는 싫어할 거야. 그러니까 아빠한텐 말하지 마.”
“알고 있어.”
“다녀올게.”
“안아....”
주린의 부름에 큰 집의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안이 돌아본다.
“잘 자라줘서... 난 너한테 너무 고마워, 안아.”
“엄마가 잘 키워서 그래.”
“모든 사실 듣고도 방황 안해줘서 고마워.”
“왜이래, 나 방황 중이야, 나 사춘기잖어. 나 그렇게 착한 놈 아닌데.
나 고3이면서도 공부도 안하고 여자애들이랑 막 놀러다녀.
그리고 엊그제 친구들이랑 술 먹느라 늦게 들어온거야.
그리고 일주일 전에 나 학주한테 맞은 거 아냐, 옆학교 애들이랑 싸움했어.
그래서 메이크업 담당 누나랑 한 판 했다니까. 입가에 상처 났거든.
아빠한텐 이르지마?“
괜히 주린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과장되게 말하며 씨익 웃는 안.
안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주린의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그녀는 아들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한마디 내뱉는다.
“하늘이 나한테 준 선물이야, 안이 너는.....”
“그런 말 하지마, 엄마.”
“안아.......”
“엄만, 날 버리지 않은 유일한 부모야.”
“............"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기어이 눈물을 쏟는 주린.
안은 웃으며 그녀를 한 번 안아주고는 씩씩하게 소리친다.
“아들 학교 다녀올게요!!”
주린의 앞에서는 농담도 하고 바보같은 행동도 자주 저지르는 안이지만
사실 학교나 촬영현장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그는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보이곤 했다.
나른하고 우아해보이는 모습 덕분에 인근지역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상이 되어있었다.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을 지나면서 안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키우고 있는 친아빠인 진한과, 자신에게 헌신적인 주린 말고도
친엄마와, 자신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준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남다른 출생의 비밀에도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주린이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안이가 사소한 감기로 아프기라도 하면 예정되어있던 패션쇼 스케줄을 취소하고
아들의 병간호에 매달리는 주린이었다.
그 크나큰 사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안은 방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지 그의 속에서 타오르는 답답함에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랬기에 모델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탈출구로 시작한 모델활동이 예상외로 호평을 받으며 폭발적 인기를 가져왔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연예계의 러브콜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지만
모델활동은 전보다 더욱 왕성해져서 이제 학생으로서의 본분보다 모델 이안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아빠인 진한은 아들의 그런 모델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쓸쓸한 눈은 언제나 안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과연 젊은 시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어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안은 지금 열아홉살이다.
이모에게 들었던 [제 1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그 때 열여덟살에 불과했다.
안보다 어린 나이였던 그들이, 친엄마를 돕고 안을 태어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안을 정말 미친듯이 사랑하고 있었을까.
“미안, 아저씨. 오늘은 그냥 걸어갈게요!”
대문을 열고, 대기하던 기사아저씨에게 소리친 안은 버스정류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계속 매만지며 뛰던 안은 문득 자신이 늦었단 사실을 자각했다.
어차피 뛰어도 지각, 안 뛰어도 지각이다.
뛰어도 맞는 거고, 안 뛰어도 맞는 거다.
굳이 뛰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안은 그냥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머리는 까치집에, 안에 자신이 출연한 잡지 한 권이 든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친 채
슬리퍼만을 신고있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스타일리쉬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모습은 비원과 흡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언제나 그런 안의 모습을 보고 역시 모델이란 다르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그 때 안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친구인가,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확인하자...
맙소사, 매니저였다.
“여보세요.”
- 너 지금 어디야?
“오늘 촬영 없잖아. 나 학교가. 이번 주 들어서 처음 가는 거야.”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어제 이야기했지!! 어쩐지 졸려서 정신 못 차리더라.
내가 잠결에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라 그랬지!! 다음주 촬영 이번주로 미뤄진댔잖아!!
매니저가 하는 말을 듣고보니 그런 듯도 싶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버릇이 문제였다.
“촬영 없다고 하니까 엄마도 아무 말 없던데.”
- 너 정신 안 차리지? 오늘 촬영은 핸드폰 광고 지면이다. 옷이 아니고!!!
“아... 그랬나...”
- 지금 데리러 갈게, 어디야?
“아니야. 나 지금 버스 정류장 다 왔어. 버스 타고 갈게, 어디로 가면 돼?”
매니저가 광고현장을 설명해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점차 또 지루해졌다.
이미 알고있는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매니저는 안이 못 미더운지
위치를 한 번 설명하고, 또 두 번 설명하고, 자세하게 세 번 더 설명하고...
안은 버스정류장에 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그의 눈에 지금 막 택시에서 내리는 한 소녀가 보였다.
아니, 소녀는 맞는 것 같은데, 인상을 보면 더 성숙해보였다.
교복차림도 아니었고, 염색한 머리에 걸쳐진 선글라스도-
어디선가 꼭 본 듯한 인상에 안은 모델일을 하던 기억을 되살렸다.
패션쇼에서 봤던가? 아니면 광고 현장?
소녀의 큰 키라던가, 잘빠진 몸매라던가, 한 눈에 확 튀는 미모라던가.
모델인 것은 확실해보였다.
“아저씨, 여기 서울 맞아? 나 여기 지리 잘 모른다고 인천에 내려준 거 아니지?”
택시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소녀.
존댓말이라고는 모르는 소녀인 듯 했다.
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야, 이안!!! 너 내 말 들었어? 너 지금 바로 와야돼!! 스태프들 다 기다려!!
매니저의 고함소리에 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어, 지금 가.”
눈길은 소녀에게 고정한 채 얼빠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한다.
통화를 마친 안은 핸드폰의 밧데리를 확 빼버렸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뭐라 단정지을 수 없는 강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매니저 형에게 용서를 빌었다.
핸드폰 지면 광고는, 날려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안이 매니저와의 통화를 끝냈을 무렵, 소녀도 택시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안은 성큼성큼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심각한 표정의 안과 달리 소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뭐야, 너 누구야?”
..... 이렇게 건방진 여자애라면 안이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안은 누군가에게 대책없이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예뻐서만은 아니다. 예쁜 여자애들이라면 모델계에 깔리고 널렸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그 쪽... 나 알죠?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 거 같은데.”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너 프랑스 살아?”
“........... 프랑스?”
이탈리아 패션쇼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프랑스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모델... 아니예요?”
“아니야.”
“..... 이름이... 뭐예요?”
“.......... 파라디.”
이름을 묻자 소녀도 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국 땅에서, 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안은 파라디란 모델과 만난 적도, 마주친 적도, 같은 무대에 선 적도 없었다.
“...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나 봅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하는 안을 향해.....
“너 이 옷 어디서 산 거야?”
쏘아붙이듯 묻는 그녀.
“이거.... 교복인데요.”
“맙소사, 여긴 진짜 교복이란 게 있어? 나 이런 거 처음봐. 이 옷 이쁘다!!”
외국물 먹은 여자애라는 건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지만,
교복을 보고 신기해하질 않나, 보자마자 반말을 찍찍 써대질 않나.
안의 인내심도 결국 한계에 달했기에, 그는 그녀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야, 너 몇 살이야.”
“십육. 아, 한국 나이로는 십칠이겠다.”
........ 열일곱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십칠이라니.
“근데 왜 반말하냐.”
“반말이 뭔데?”
“....... 왜 말 낮추냐고.”
“말을 낮추는 게 뭔데? 그걸 어떻게 낮춰?”
말이 안 통하는 소녀였다. 안은 그냥 반말로 맞서기로 작정했다.
“말도 잘 못하는 게 한국엔 왜 오냐.”
“이 옷 어디서 사?”
싸움이라면, 그게 몸싸움이 됐든, 말싸움이 됐든 지지않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 앞에서는 모든 게 역부족인 듯 싶었다.
“너 내 말 씹냐.”
“말을 어떻게 씹어? 한국말이 이상한 게 많은거야, 니가 이상한 말을 쓰는거야?”
“한국 온 적 없어?”
“처음이야.”
“..... 입양아냐?”
“엄마도 한국인, 아빠들도 한국인. 너 내가 한국말 잘 못한다고 무시하지마.
넌 프랑스어 한 마디도 못할 거 아냐?“
“아빠들?”
“나 이 옷 사고 싶어. 살 수 있는데가 어디야? 가르쳐줄래?”
졸지에 말 걸었다가, 프랑스에 사는 한국소녀에게 잡히게 된 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교복을 파는 곳을 향해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대충 눈에 띄는 교복점에 데리고 가자 소녀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교복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다니는 학교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한국은 진짜 다들 교복만 입나봐.”
“프랑스랑 비교하지마. 프랑스에도 교복입는 학교 있긴 있을거야, 니가 모르는 거겠지.”
안의 비꼬는 말이 들리는 건지, 아닌건지... 파라디는 교복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넥타이 이쁘다. 맙소사, 이 옷 색깔 봐.”
“너 왜 남자들 교복을 봐, 여자 교복 살 거잖아, 넌 이 쪽이야.”
“여자랑 남자랑 교복이 달라?”
“너 지금 나랑 농담하냐.”
“와, 치마다!!”
교복에 홀린 듯 미친듯이 구경을 해대는 파라디를 보며 안은 한숨을 쉬었다.
뭐 이런 여자애가 다 있을까.
입양된 애도 아니고, 한국인 엄마아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처음 온 걸까.
그리고, 여자들에게 관심없는 자신이 왜 이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을까.
단순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이 커피 모델을 한 적 있는 같은 학교 여자애와는 인사도 한 적 없으니까.
아니, 자세하게 말하면 운동장에서 마주친 그 여자애가 인사했는데도
안이 먼저 무시했다. 광고현장에서 스태프에게 건방지던 여자애가
안에게는 먼저 착한 척 인사하는 게 짜증났기 때문에.
물론 그 인사를 무시하는 바람에, 학교에선 ‘개싸가지 이안’ 이라고 불렸었다.
“기다려, 입어보고 올게.”
파라디는 마치 명령하듯 중얼거렸다.
안은 이 상황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파라디가 고른 교복은 결국 안이 다니는 학교의 교복이었다.
검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가 조화된 교복.
그렇다, 안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복이 바뀌었다.
주린이 그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을 새로 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안을 위한 교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쩍 길어진 다리탓에 교복을 하나 더 살까, 생각하며 교복을 살펴보던 그 때.
“나 어때?”
탈의실에서 파라디가 나왔다.
교복입은 그녀를 보자, 눈이 부셨다.
아니, 눈이 부신 이유가 교복 때문인지...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고현장이나 팬들에게서 미소가 눈부시다는 말을 자주 듣는 안이지만,
자신이 눈부신 미소를 직접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웃음은 파라디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남자교복이 안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여자교복은 파라디를 위해 제작된 것 같았다.
세상에서 비싸고 멋지고 특이한 옷은 다 입어본 모델 이안이,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황홀함을 느끼고 있다니.
“됐네, 여러 가지 입어보지 말고 그냥 그거 사라. 기다리기 귀찮아.”
안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짜증스런 말투를 만들어내며 중얼거렸다.
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파라디는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모습에 꽤나 만족한 눈치였다.
그녀는 교복의 값을 지불했고, 점원에게 그 교복을 입고 가겠다고 설명했다.
물론, 반말로.
그리고 그들이 가게를 나가려던 순간.
“저기... 모델 이안 아니예요?”
점원 한 명이 안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오며 물었고,
파라디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점원과 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닮았단 소리 가끔 들어요. 이안은 무지 바쁠걸요.”
싸인이라면 귀찮아서 경기를 일으키는 안은 거짓말로 둘러댄다.
“하긴... 근데 너무 닮으셨네요.”
“제가 걔랑 같은 학굔데요, 걔는 실물보다 못해요. 그리고 저처럼 슬리퍼도 안 신구요,
걸어다니지도 않아요. 건방진 게 맨날 밴타고 학교 왔다 갔다...“
안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점원을 보며 그는 속으로 웃었다.
“그럼 가자.”
안은 한참을 떠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있는 파라디의 손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한국에 너 닮은 모델 있어?”
뭐 씹은 표정을 하고있는 파라디.
“어, 왜?”
“한국 모델 수준 알만해.”
뭘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세계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하는 안의 모델수준 타령을 하는 파라디.
“우리 아빠들은 교복도 못 입어봤다는데....”
“너 아까부터 왜 계속 아빠‘들’이래?”
“한국사람들이 왜 맨날 한민족, 한민족 하는지 알겠어.”
“너 또 내 말 씹냐.”
“다들 얼굴색도 똑같고, 머리색도 똑같애. 뭐지, 같다고 생각하는거? 동.. 동...”
“동질감.”
“그래, 동질감 느낄만 해.”
“근데 넌 염색했잖아.”
“그러니까, 나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할래, 우리 미용실 가자.”
“야, 너 가이드가 필요하면 여행사에 문의해야지, 왜 애꿎은 나를....”
“애꿎은 게 뭐야?”
깜빡했다, 말이 안 통하는 여자애라는 사실을.
“나, 한국 관광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구경하러 왔어.”
“다른 게 뭐냐.”
“경복궁이나 남산이나 박물관 보려고 온 거 아니야. 난 생활을 느끼고 싶었어.”
“..............”
“교복사고, 미용실 가고, 길거리에서 쇼핑하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하는 거.
우리 엄마랑 아빠들이 예전에 그렇게 생활했던 것처럼.“
안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겹게도 눈이 아릴만큼 새파랗다.
날씨 핑계대며 학교도 땡땡이치고, 광고도 때려쳤다고 말한다면 변명이 될까.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미소를 지닌 여자애와 함께 다니는 게 죄가 되진 않겠지.
“가자, 잘하는 미용실 알아.”
머리도 했고, 쇼핑도 했고, 밥도 먹었다.
이제 날이 제법 어둑해지고 있었다.
안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일곱시다.
여덟시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이모, 삼촌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급한 김에 파라디도 데리고 약속장소인 한 공원의 분수앞에 앉아있었다.
친구 하나 데리고 온다고 기분 나빠할 이모나 삼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며 놀릴 망정.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파라디가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다니. 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라디는 역시 까만색의 머리가 더 어울렸다.
검은 색의 교복 치마와 머리 색깔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재밌었어. 너 때문에 그립기만 하던 내 나라가 더 좋아졌어.”
“...... 프랑스는.... 언제 가?”
“조금 있다 가야돼. 8시에 택시타고 공항에 갈 거야.”
“말하지, 데려다줄 걸 그랬네.”
“한국 애들은 오늘 너랑 내가 했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데이트 하겠지?”
“웃기지마, 난 너 여자로 안 보여.”
“나도 너 남자로 안 보여.”
“그럼 그런 말 하지마.”
“솔직히 말해봐, 너 아까 나한테 말 건 거, 내가 이뻐서 그런 거지?
괜히 어딘가에서 본 척 하면서 다가오는 거, 한국남자들의 수법이랬어, 엄마가.“
“공주병하고는....”
신기한 일이었다. 까칠한 안이나, 싸가지 없는 파라디나...
누군가와 단기간에 친해지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루만에 몇 년을 만난 친구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로가 이성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또는... 가족... 같은 예감이랄까.
“꼭.... 오늘 가야돼?”
안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물었다.
파라디는 그런 안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어보였다.
“응, 꼭 가야돼. 안 그러면 우리 아빠들 울어.”
“................”
“아까는 왜 아빠‘들’이냐고 물어보더니, 왜 지금은 안 물어봐?”
“대답안하는 거면, 좋은 건 아닐 거 같아서.”
“...........”
“왜, 그런 거 아냐? 엄마가 재혼하셨다거나....”
“아니, 우리 엄만 아빠밖에 몰라. 아빤 더더욱 엄마밖에 모르고. 뭐라더라... 일..단심?”
“일편단심.”
“그래, 그거.”
“근데 왜 아빠들이야?”
“모르겠어, 그냥 태어났을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아빠는 네 명이었어.”
네 명이라, 안은 갑자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생각났다.
친엄마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이미 죽고 없었지만...
괜히 파라디가 부러워졌다.
“엄마랑, 친아빠랑, 다른 아빠들이 너무 친해서 그런거 아닐까.
다섯명이 되게 친해. 예전부터 친했대. 한 명이 없어지면 나머지 네 명이 못살만큼.
그래서 다섯명이 함께있기 위해 모든 걸 버렸대. 이 한국을 버린 거지.
자신들의 나라를 버리고, 서로를 택한 거야. 그리고 날 낳은 거고.“
“....... 그래서 넌 이번에 한국을 처음 온 거야?”
“응, 엄마랑 아빠들은 한국에 오고싶지 않대. 오고싶은데 올 수 없는 걸 수도 있고.”
“혼란스러웠겠다, 어렸을 때는.”
안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았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파라디 또한, 방식은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별로. 잘 살고 있다가 중간에 몰랐던 아빠가 확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당연한 거였거든.
물론 어렸을 땐 친구들 아빠가 한 명씩인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혼 때문에 아빠나 엄마가 두 명씩인 애들도 많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남의 엄마나 아빠에 관심가지는 것도 아니고...“
가로등이 켜지며 분수대가 작동되어 물이 튀어올랐다.
안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안은 계속 이야기를 듣고싶어하는 눈치였기에, 파라디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친아빠는 조각을 해. 제일 장난스럽고, 내가 봐도 웃는 게 빛나.
젊었을 땐 되게 귀여웠을 거야. 내가 어렸을 땐 항상 손 잡고 산책했지.
맨날 아이스크림 사줘놓고 자기가 다 뺏어먹었어. 그러다 항상 내가 울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아빠 막 혼내고. 봐, 이 선글라스도 친아빠가 사줬어.
놀아주는 건 최고였지. 제일 웃기기도 했고. 잘 안아주고, 잘 웃어주고.“
부러웠다. 안의 아버지 진한은 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친아빠가 1호 아빠라고 치면, 2호 아빠는 음식점 주인이야. 주방장이지.
음식맛이 끝내줘. 너도 맛보면 아마 뒤로 넘어갈걸? 프랑스 놀러오면 꼭 찾아와.
2호 아빠는 다정하고 자상하고 따뜻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2호 아빠한테 말하지.
화 안내고 조용히 넘어가거든. 아빠가 큰소리나고 싸움하는 걸 워낙 싫어해서.
그래도 조심해야돼. 진짜 화나면 제일 무서워지거든. 1호아빠가 언제 한 번 가출했는데
돌아오자마자 막 두드려패는 거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도 나한텐 잘해줘, 워낙 딸을 좋아해서.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진한에게 혼나본 적이 있었던가, 안은 생각했다.
“3호 아빠는.... 스토커지.”
“스토커?”
“학교에 진짜 킹카였던 남자애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어. 파티에 같이 가자고.
모르겠어, 날 정말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동양 여자애라 흥미가 있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난 상관 없었지. 난 걔한테 아예 관심 없었거든.
그래도 심심해서 파티에 따라갔지. 근데 3호 아빠가 미행을 한 거야.
알아주는 프리랜서 비즈니스 사업간데, 최면이 있지, 그걸 따라오다니.“
“최면이 아니라 체면이겠지.”
“돈을 잘 버니까 맨날 비싼 물건들로 날 꼬시려고 하지. 안 그래도 난 아빠 좋아하는데.
맨날 친아빠를 경계하거든. 내가 친아빠랑 한 번 놀러가면,
3호 아빠랑은 두 번 놀러가야돼. 안 그러면 삐지고 화내고 장난 아니야.
내가 오늘 안가면 3호 아빠는 울걸? 실종신고 낼 수도 있어.“
지겨워하는 척 해도 파라디의 얼굴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4호 아빠는 잘생겼어. 늙지 않는 것 같아. 말도 잘 안하는데 가끔 되게 웃겨.
2호 아빠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는데 프랑스 아줌마들이 껌뻑 죽는다니까.
이상하게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더라구. 카리스마도 끝내주고.
잘생기고 키도 제일 크고, 카리스마도 있어서 부모님이 학교 오는 날이면
맨날 4호 아빠만 불렀어.“
“........ 그래서 4호 아빠가 갔어?”
“아니, 아빠 네 명이랑 엄마랑 다 같이 오더라구, 항상.”
“엄마는.... 어떤 분이야?”
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파라디의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쾌해. 아빠들을 다 이길 수 있는 파워우먼. 나랑도 제일 잘 통하지.
엄마랑 딸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 사이거든.“
주린도, 안이가 딸이길 바란 적이 있었을까.
“난, 내가 복잡한 사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그저 남들보다 더 사랑받고 자란 것 뿐이야.“
파라디의 말에 안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 말은... 오늘 아침 주린에게 건넨 자신의 말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꺼냈다.
“너, 내 동생할래?”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인사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안이 그런 말을 꺼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좋아.”
라고 간단히 수긍해버린 파라디의 반응이었다.
자기가 누나하겠다고 우기지는 못할망정, 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오빠라고 불러.”
“그건 싫어.”
“싸가지.”
“너... 모델 맞지?”
안은 파라디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그냥 우리학교에 나 닮은 모델이...”
“아까 미용실에서 어떤 언니가 머리해주면서 물어봤어. 니가 여자 데려오는 거 첨이래.
여자친구냐고 물어봤어. 그러면서 모델이니까 스캔들 나면 어쩔 거냐고.“
“너 설마 내 여자친구라고 대답한 건 아니지?”
“꿈 깨라.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했네요.”
“...............”
“안심하는 거 봐. 스캔들 걱정하는 거 보니까 모델 맞네, 뭐.”
분수는 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높낮이를 조절하며 춤추고 있었다.
파라디는 기지개를 켜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해. 프랑스로 돌아갈거야. 여기서 안녕하자.”
“혼자 갈 수 있겠어?”
“원래 혼자 돌아다닐 예정이었는데, 뭐. 니가 나한테 반하는 바람에 데리고 다녔지만.
택시타면 돼. 그리고 너 만날 사람도 있다며.“
밤인데도 불구하고 파라디의 미소에 눈이 부셨다.
안은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한숨을 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잡지였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 흰 셔츠를 걸치고 있는 안이었다.
“어제 나온 따끈따끈한 잡지야. 선물로 줄게. 특집으로 30페이지나 나왔다.”
“............”
“브랜드 이안, 알지? 프랑스에도 있을 거야.”
“......... 너 그 옷 광고해? 나 그 브랜드 되게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랑 아빠들도.”
“나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이야.”
“..........이름이 뭐야?”
“이안.”
브랜드 이안 전속모델 이안이라.
파라디는 피식 웃으며 잡지를 소중히 품에 껴안았다.
“그럼 안녕.”
오빠-동생 사이로 지내자고 약속을 하고서도 그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것도, 없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오늘 이렇게 이끌리게 된 것처럼,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것을 믿었을 뿐.
“안아!!!!!!!!!!!!”
멀리서 안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도도한 표정을 소유하고 있는 이온이었다. 그 옆에는 이모부 김산이 서있고.
유인이모와 열음삼촌 커플도, 환희이모와 준휘삼촌 커플도 그대로.
“안녕, 난 갈게.”
파라디는 안이와의 악수를 마지막으로 눈부신 미소를 남기며 뒤돌아섰다.
안은 멍하니 교복을 입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그 사이에 [제 2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는 안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야? 조카, 누구야? 같은 학교인가봐? 여자친구?”
이온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아니, 여동생.”
안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흔치않은 그의 웃음에 모두가 놀란듯했다.
“....이름이... 뭔데?”
열음이 안에게 묻자, 안은 답답한 교복 넥타이를 풀며 기분좋게 대답한다.
“파라디.”
파라디... 프랑스어로 천국.
열음은 뭔가 알 것만 같은 느낌에 그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있는 소녀에게, 아름다운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옛날, 모두를 눈부시게 했던 미소의 휴인처럼.
그 옛날, 모두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시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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