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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 백 야 (white night)
* Written by . 동경바라기
* 출처 . http://cafe.daum.net/ehdrudqkfkrl
* Fancafe. http://cafe.daum.net/ehdrudqkfkrl
* Famcafe. http://cafe.daum.net/Ueolzzang7
* 이 소설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공유,도용,불펌,수정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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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인소닷내에 연재되었다 중단된 소설입니다.
어릴 적, 꿈을 꿨던 일이 실제 현실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단 한 번이 아닌 우연적으로 반복되는 상황을 겪었고,
그 때 이후로는 잠을 자는 것이 무서워졌다. 내가 사는 세상은, 밤인데도 태양이 떠 있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꿈을 꾸는 횟수는 줄어들어, 지금은 일 년에 한번 꿈을 꿀까 말까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마치 습관처럼 말이다.
백야 (white night) : 위도 약 48˚이상의 고위도 지방에서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
북극에서는 하지 무렵, 남극에서는 동지 무렵 일어나며 가장 긴 곳은 6개월 지속된다.
11.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찬 건, 처음 보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간과 손을 꽉 잡고 있는 이타인의 온기.
바닥에 앉아 내가 누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이타인의 등.
그리고 언제부터 깨어나 있던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은사빈이 나와 이타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모습.
어느 샌가 잠에서 깨어나 소파 위로 폴짝 올라선 비누까지.
다시금 눈을 감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떠올렸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몇 시에요?”
“다섯 시.”
“새벽이요?”
“그럼 설마 오후겠어?”
물에 젖은 솜 마냥 온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도 있고 긴장과 불안감 때문에 몸이 더 피곤한 듯싶었다.
이타인에게 잡혀 있던 손을 조심스레 빼내고는 이타인의 고개를 조금이나마 편한 자세로 취하게 해 준 뒤에
비누를 안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은사빈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로 향해 있었다.
“가려고?”
“집에서 저 없어진 줄도 모를 거예요. 몰래 들어가 있어야 해요. 걱정하시니까.”
비누를 품에 안아든 채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려 한 순간이었다.
필요한 대화는 끝났고 어제 일에 대해 혹여나 은사빈이 무언가의 질문을 건넬까 두려워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 채로 현관 쪽에 다가선 순간이었다.
“있잖아, 유재현이랑 얼마나 친해?”
“네?”
“그냥 친구야?”
“친구에요. 그것도 아주 많이 친해요. 거의 매일같이 붙어 다녔으니까.”
“그럼 넌 타인이를 위해서 유재현을 버릴 수 있어?”
멍했던 정신이 또렷해져 갔다.
흐렸던 시야역시 맑아져 가는 기분이었고 은사빈의 질문을 이해하는데 까지는 10초란 시간이 걸렸다.
이타인을 위해 유재현을 버린다? 말도 안 돼.
“왜 그래야 하는데요?”
“타인이랑 재현이가 함께일 수 없으니까. 네가 재현이 옆에 있으려면 이타인을 버려야 하는 거고,
이타인의 옆에 있으려면 재현이를 버려야 해.”
“그것 참 극단적이네요.”
“나는 네가 꽤나 마음에 들어. 그래서 미워하고 싶지 않아. 유재현 때문에 타인이 상처 주는 일 만들지 마.”
“……”
“신발은 아무거나 신고 가. 또 맨발로 가지 말고. 발에 상처 나잖아.”
대화는 그대로 끝이 났다. 나는 이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생각도, 그 사람을 힘들게 할 마음도 없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만큼이나 발걸음 역시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 신발이나 신고 가라는 말에 슬리퍼를 하나 택하긴 했는데
사이즈가 너무 커서 걷다가 벗겨지고 걷다가 벗겨지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느릿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품에 안긴 비누는 어느새 또 다시 잠에 들어 있었다.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찬 새벽빛이 고요한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넌 타인이를 위해서 유재현을 버릴 수 있어?’
타인선배가 급속도로 내게 가까워진 사람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아직 재현이보다 소중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 긴 시간동안 내 옆에 있어준 유재현을 대체 누가 대신할 수 있다는 거지?
만일 두 사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재현이의 손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나는 자꾸만 위험하다고 생각이 드는 이타인의 손을 잡아보려고 하는 것일까?
집 앞에 도착했지만 한동안 멍하니 재현이의 방 창문을 올려다봤다.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 녀석은 대체 날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설령 다음날 정말로 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사고일 뿐이지.’
날 위해서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걸까?
‘그냥 친구야?’
친구일까? 우정이란 감정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투명한 유리병 안에 들어서서 네게 모든 걸 보이고 있는 거라면,
넌 검은 막에 둘러싸여 손만 내밀 뿐 내게 그 무엇도 보이고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마음이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 * *
“음, 카라멜 모카?”
“달아.”
“그럼 뭐 먹고 싶은데요?”
“커피 싫어.”
“그럼 대체 여길 왜 오자고 했어요?”
테이크아웃 커피 점에 오자고 해서 기껏 가게 안으로 들어섰더니만
커피가 싫다고 말하는 이 사람에게 대체 내가 무슨 메뉴를 추천해줘야 하는 걸까?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로 들이닥친 타인선배가 집에 같이 가자고 하더니만 결국 중간에 딴 길로 새서 들어선 곳이 이곳이었다.
하지만 커피는 마시기 싫다고 하고 자꾸만 청개구리 짓을 하는 이 인간덕분에 나는 멍한 얼굴로 메뉴판을 보며 대체 뭐를 시켜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넌 뭐 마시고 싶은데?”
“카라멜마끼야또요.”
“저거?”
“네, 생크림 듬뿍 올라가 있는 거로.”
“하하, 단 거 안 좋아하게 생겼어.”
“저거 그렇게 안 달아요. 난 좀 씁쓸하게 느껴지던데.”
입을 삐죽이며 대답하고는 가방을 뒤적여 지갑을 꺼내들려는데
타인선배가 나보다 빠르게 돈을 꺼내 들고는 카운터 앞으로 가서 주문을 하고 돈을 지불했다.
“카라멜마끼야또 두 잔이요.”
“에? 커피 싫다면서요.”
“너랑 같은 거 마실래.”
차라리 카페라떼를 시킬 걸 그랬다. 그나마 그건 덜 달게 느껴지던데.
이미 주문을 해버린지라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나와 타인선배의 손에는 생크림이 듬뿍 올려진 카라멜마끼야또 한 잔 씩이 들려 있었다.
생크림 쪽으로 빨대를 꽂아 커피를 마신 타인선배의 미간에 자그마한 주름이 잡혔다.
“달아요?”
“조금.”
“차라리 생과일 전문점을 가자고 하지 그랬어요.”
“보이는 게 저것밖에 없었어. 이거라도 안 사먹으면 너 바로 집으로 갈 거 아니야.”
타인선배의 말에 커피를 마시다 말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혜빈이가 말한 이타인은 분명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는 이타인은 다정하고 순수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과 자신의 진짜 모습이 다르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슬쩍 타인선배의 교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저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어.
“집게 핀은 왜 거기에 달고 있어요?”
타인선배의 가슴 쪽 주머니에 집게 핀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딱 봐도 내가 어제 타인선배의 집에 두고 왔던 그 집게 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 너 주려고 가지고 왔어. 네 거잖아.”
“근데 왜 여기다 매달고 다녀요?”
“잃어버릴까봐.”
“너무 튄다고요. 이리 줘요.”
손을 뻗어 집게 핀을 내게 건네는 타인선배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남아 있었다. 나를 배려한 것일까?
타인선배는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해주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하긴, 어제 일로 인해 대충은 알았을 테지.
이상했던 건, 타인선배의 행동이 아니라 재현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루 종일 재현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침에도 혼자 등교를 했고, 오후에는 이 녀석이 갑자기 나를 찾아오는 바람에 재현이의 교실조차 들릴 수가 없었다.
분명 내게 화가 났을 테지. 재현이와 타인선배가 친하게 지내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다시금 타인선배에게 그 부탁을 해보려다 결국 입을 열지 못하고는 다른 질문을 건넸다.
“사빈선배는요?”
“리아 만나러 갔어.”
“리아? 특이한 이름이네요.”
“네 이름도 특이해.”
“설마 선배이름만 하겠어요? 선배 이름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타인이가 뭐 어때서?”
“특이하다고요. 그것도 무척이나.”
더운 날씨 덕분인지 자꾸만 갈증이 났고 내 손에 들린 마끼야또는 벌써 반이나 줄어 있었지만
타인선배의 마끼야또는 변화 없이 거의 그대로라고 볼 수 있었다. 커피를 정말로 싫어하나 싶어 힐끔 쳐다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낀 타인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만 손에 들린 마끼야또를 바꿔치기 해 버렸다.
“에?”
“바꿔먹자.”
뭐라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조금 전까지 내가 마셨던 마끼야또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거 간접키스라고요. 알고나 있는 거예요?”
“응, 알고 있어. 뭐 어때? 직접 입으로도 했는데.”
이 사람 점점 뻔뻔해지고 있어. 커피를 마시다 말고 걸음을 멈춘 채로 멍한 시선을 보내자
타인선배는 그게 또 재밌는 건지 환하게 웃어 보이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멍한 얼굴로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나 역시 천천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선배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했고,
선배의 웃는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
선배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앞쪽에서 걸어오는 무리들 중 재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도 부 애들끼리 무슨 모임이라도 가졌던 건지 재현이의 곁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 재현이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고
재현이 역시 타인선배를 발견한 듯 그대로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이타인 역시 검도를 했었기에 분명 저 아이들을 알고 있을 테지.
재현이의 옆에 서 있던 아이들도 타인선배를 발견하고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타인선배의 시선은 재현이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저렇게 금세 가라앉을 정도로 재현이가 싫은 걸까? 타인선배를 바라보던 재현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어제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재현이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겨 내게로 다가서는 재현이를 향해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고민한 내 자신이 바보 같을 정도로
재현이는 인사조차 없이 그렇게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무언가가 땅 밑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유재현!”
옆에 타인선배가 서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돌아서서 녀석의 이름을 불렀지만 재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저 녀석의 뒷모습은 내게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 * *
초조함이 극에 달해가고 있었다. 손톱은 하도 물어뜯어서 이제 희미하게나마 통증까지 느껴지고 있었고
내 시선은 계속해서 빈 창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자 이미 시간은 9시를 향해가고 있었고 방에 에어컨을 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재현이의 방 창문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10분.
어둡던 방에 불이 켜졌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 재현이의 집으로 향했다.
재현이의 부모님이 부부동반 여행을 가신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열려 있던 현관문 덕분에 쉽게 안으로 들어서서 재현이의 방으로 향했다.
두어 번의 노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이는 지금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나인 걸 알았던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들어간다는 말을 짧게 내뱉고는 문을 열었고,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재현이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재현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이내 몸을 돌려 티 하나를 꺼내어 갈아입고는 다시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할 말 하고 나가라는 듯 한 얼굴이었는데, 재현이의 저런 모습은 낯설다 못해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나한테 많이 화난 거야?”
“뭐가?”
“아까 내가 부르는데도…”
“왜 그냥 갔냐고?”
“……”
“이타인이랑 함께였으니까.”
“재현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가 이타인에게 가까워질수록 나랑은 멀어져 갈 거야.”
또 다시 무언가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전, 길에서 재현이와 만났지만 마치 나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그렇게 지나쳤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가슴 한 편이 휑하게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아픈 느낌. 재현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낯설었고,
무언의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재현이가 나를 버릴까봐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었다.
그 사람으로 택했던 이타인이 생각보다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을 열게 됐다.
재현이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서빈우라는 짐을 반 정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있었기에, 그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재현이를 잃는 대신 얻는 사람이라니. 왜 나는 항상 하나만 가져야 하지?
다른 사람을 옆에 둘 수는 없는 거야? 내 이상한 꿈 때문에? 말을 꺼내야 하는데 바보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눈물에 재현이의 차가웠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릴 만큼 낯설었다.
“울지마.”
“……”
“울지 말라니까!”
화가 난 재현이의 외침이 방 안 가득 울렸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내게 화를 내는 듯, 그렇게 계속해서 재현이의 외침이 이어졌다.
“네가 바라는 거 아니었어? 난 이타인과 절대로 친해질 수 없어.
그걸 알면서도 네가 이타인 옆에 있겠다 고집을 부리는 건 결국 내 옆에 있지 않겠다는 거잖아!”
“너도 나 때문에 힘들 것 같았어. 나 때문에 이상한 시선 받는 것도 싫었고.
원만하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서빈우.”
“네 옆에 누군가가 생기면, 분명 문제가 될 거야.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걸 의존하고 있잖아.
친구인 내가 너한테만 모든 걸 의존하고 있는 걸, 네 옆의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어.
그건 언제든 문제가 되잖아.”
“내가!!”
“……”
“무슨 마음으로 여태껏 네 옆에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해!!”
멍해진 눈가에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이 녀석은 날 위해 많은 걸 희생했었다.
내가 처음 예지몽 때문에 아이들을 향해 이상한 시선을 받았을 때, 내 곁에 남아준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유재현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녀석을 더 믿고 의지했고 내 모든 걸 다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상한 시선을 받았던 만큼 재현이 역시 내 옆에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에게 무성한 소문을 들어야 했다.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한 소문 말이다.
“내 옆에는 항상 네가 있었잖아. 근데 왜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있게 되는 일에 대해 상상하는 건데!”
“재현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내 옆에서 힘들었던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타인을 잡으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난 한 사람에게만 기대는 불안감이 줄어들고, 재현이가 나 때문에 이상한 시선을 받는 것 또한 줄어들 거라 생각했으니까.
나도, 재현이도 조금이나마 편해지길 원했었다.
“내가 너를 버리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버리려 하고 있잖아.”
재현이의 저 말 하나가 왜 저렇게 와 닿는 거지? 난 정말 재현이를 버리려 했던 걸까?
말도 안 돼. 그저, 네가 아닌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었던 것뿐이야. 나눠가지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네가 없으면, 나는 무너져.
“왜 그래 재현아, 그러지마.”
“……”
“내가 어떻게 너를 버려. 어떻게……”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재현이가 내게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이 낯설었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내게 재현이가 천천히 다가섰고 재현이의 두 팔이 나를 안았다.
처음에는 세게 나를 안았던 녀석이 이내 내가 아플 거라 생각한 듯 팔에 힘을 풀고는 조심스레 나를 감싸 안았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냥 있어,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절대로 안 버릴 테니까, 돌아서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
“이타인에게 가지마.”
.
.
현실에서의 확률이란 건 지극히 낮아. 그걸 몰랐던 난, 대체 얼마나 멍청했던 사람인 걸까?
12.
“비누야, 미안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는 비누를 품에 안아든 채로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잠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재현이가 없는 나는 금세 무너져 내릴 걸 알면서도 왜 나는 굳이 이타인의 손을 잡으려 한 거지?
재현이가 내게 그렇게 소리치는 것도 애원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를 내던 재현이는 금세 마음을 가라앉힌 건지 소리쳐서 미안하다는 말을 내게 건넸지만 사실 미안한 것은 나였다.
모르는 척 했던 건지도 모른다. 재현이가 내게 했던 행동들은 친구로서 소중히 대한다기에는 분명 넘치는 애정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 했을 뿐이지. 나는 너를 잃을 수 없다. 그건 여전히 분명한 사실이었다.
너를 옆에 두고 또 다시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인 이타인을 함께 두려고 했던 건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있잖아, 비누야.”
……
“널 다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아.”
잠시 헛된 꿈을 꾼 거라 생각하자. 재현이에게 모두 기대었던 마음을 반 정도 덜고 싶었다.
나도 무겁지 않도록, 재현이도 무겁지 않도록. 그 마음을 이타인에게 반 정도 덜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를 얻어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재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
아직은 이타인이 내게 재현이만큼의 큰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었기에.
* * *
“뭐하는 거야?”
“고양이 돌려주러 왔어요.”
“서빈우.”
“집에도 잠깐 친구네 집 고양이 맡아준 거라고 얘기했고, 오래 못 데리고 있어요.”
“어제까지는 아무 말 없었잖아.”
다음 날도 재현이는 아침 일찍 먼저 학교를 가버렸고, 나는 또 다시 혼자 등교를 했다.
어제 재현이의 행동으로 봐서, 재현이가 지금 내게 굉장히 화가 난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학교를 마치자마자 내가 한 행동은 비누를 품에 안고 타인선배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통보 적으로 비누를 맡을 수 없다고만 말하자, 타인선배의 표정이 조금 의아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함을 나타냈던 타인 선배의 시선이 조금은 날카롭게 내게로 향했다.
무언가 꿰뚫어보는 듯 한 시선에 결국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봤다.
열린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경계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타인은 안쪽에, 나는 복도 쪽에 서 있었다.
품에 안긴 비누가 야옹- 하고 가늘게 울어 보임과 동시에
이타인의 손이 나를 잡아 이끌었고 그대로 나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고개를 들었고, 타인선배의 얼굴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 참 유감이야.”
“네?”
“나는 여기서 못 멈추겠거든.”
“선배.”
“유재현 때문이지?”
“……”
“흐음, 정말로 그런 거면 나 꽤 화나는데.”
“선배가 재현이랑 사이가 좋지 않아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하게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난 안 불편해. 유재현이 날 불편해할 뿐이지.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가?”
“선배.”
“내가 유재현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문제라면, 한 발 양보할게. 좋게 지내면 되는 거지?”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거?”
“선배.”
“너 맨발로 여기까지 찾아왔을 때도, 숨이 차게 달릴 때도, 나는 네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이상한 애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 더 안쓰럽고, 더 안아주고 싶어질 뿐이었다고.”
“…….”
“반칙이잖아. 네가 먼저 다가와 놓고, 왜 네가 날 밀어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선배였다.
정 안된다면 자신이 한 발 양보하겠다며, 재현이와 좋게 지내겠다고 말했지만 저건 분명 무리가 있었다.
타인선배와는 절대로 친해질 수 없다 말하던 재현이었으니까 말이다.
답답함을 느낀 듯 주머니를 뒤적이던 선배가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친구 아니었나 보네.”
“재현이는 나한테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럼 나한테 손은 왜 뻗었어?”
“재현이가 짊어지고 있는 서빈우란 짐을, 반만 덜어주고 싶었어요.”
“난 그거 환영이야. 서빈우라는 짐, 나한테는 하나도 안 무거우니까 반이 아니라 전부를 덜어도 돼.”
“선배.”
“유재현은 검도 부 애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었어.”
“……”
“그런 유재현이 뜻 모를 행동을 했고, 내 팔이 망가졌어. 평소 생활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운동 같은 걸 해서 무리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지기 때문에 검도를 관둬야 했어.
취미로 운동을 하는 녀석과 다르게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는데 말이지.”
“아.”
“그리고 이제 막 소중해지려는 네가, 그 녀석 때문에 날 완전히 밀어내려고 해.”
“선배 그건…”
“유재현 원망 안 할게. 예전처럼 그 녀석 예쁘게 보도록 노력도 해 볼게.”
“……”
“옆에 있어줘.”
선배의 눈이 힘없이 휘어졌다. 예쁘게 웃어 보이는 것 같았지만,
힘이 하나도 없는 모습에 결국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여전히 내 품에는 비누가 안겨 있었다.
“담배도 끊을까?”
이타인과의 만남을 재현이와 비교한다면, 정말로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10년을 내 옆에 있어준 재현이와 이타인을 비교하려고 해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왜 나는 나만큼이나 이 사람이 가엾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걸까?
“안 그래도 돼요.”
결국 돌아오는 길에도 비누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숨이 막히는 더위와 앞이 보이지 않는 내 감정에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늦은 오후, 재현이의 방은 평소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유재현과의 변함없는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시작된 시기.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 세상의 태양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 * *
방학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폭염은 쏟아져 내리고, 더위에 지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에 네가 없다. 유재현은 여전히 내게 화가 난 상태였다.
질리도록 자주 봐 왔던 얼굴인데,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유재현을 자주 봤다는 말도 되고, 또 그만큼 최근 유재현을 볼 수 없었다는 말도 된다.
짙은 한숨이 후덥지근한 공기 사이를 갈랐다.
“낮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꿈을 꿀까봐 잘 수 없다.
“무섭잖아, 진짜.”
이제 그만 화 좀 풀지.
눈을 감았지만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그저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을 뿐.
항상 재현이가 양보하고 나를 챙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결국 내가 먼저 재현이에게 사과를 건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타인선배를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비누 역시 돌려주지 못한 채로 내가 데리고 있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던, 재현이에게는 핑계로만 들릴 것이 분명했다.
재현이의 손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슬퍼보였던 선배의 얼굴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욕심인가 보다.
여전히 마음은 복잡했다.
“허리 안 아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와 어깨를 살짝 누르는 힘에 그대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혜빈이는 이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타인의 웃는 얼굴을 꽤나 자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날 향해 웃고 있지 않은가.
“선배.”
“또 제대로 못 잔 거야? 무슨 잠을 학교에서 자? 그것도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요령 없네.”
“잔 거 아니에요.”
“그럼?”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무언가가 놓여졌다. 분홍색의 종이 팩에 담긴 딸기 우유였다.
‘간식’ 이라고 짧게 입모양을 해 보이는 이타인의 행동에 결국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런 나보다 더 많은 변화를 보인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타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변화한 것이다.
“선배 안 같네요. 처음 봤을 때는 나 어린애라며 틱틱거리며 무시하더니.”
“내가 언제?”
“그랬잖아요.”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타인선배의 행동에 입을 삐죽여 보였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선배가 내게 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뒤늦게 ‘땡큐’ 라는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아침을 먹지 않고 오는 바람에 출출하던 참이었기에 우유를 남김없이 모두 마셔버렸고
빈 우유팩을 조심스레 접어 휴지통에 넣으려 몸을 돌린 순간,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재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마주치려고 해도 안 만나지더니, 하필 이럴 때.
재현이는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며 나와 이타인을 번갈아 바라봤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타인 선배 역시 그런 재현이를 발견한 듯 턱을 괸 채로 내게 물었다.
“냉전 중?”
“네, 며칠 간 한마디도 못했어요.”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네.”
“선배.”
굳어진 얼굴로 선배를 응시했다. 하지만 타인 선배는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라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이다.
“그런 얼굴 하지마. 어쩔 수 없잖아. 난 나쁜 남자라고. 욕심도 많고, 이기적이고”
“……”
“그래서 이제 서빈우 하나만 쫓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이 진심이 되면 한없이 깊은 애정을 주고,
또 무서울 정도로 한 사람에게 모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것을.
“바보네요.”
“그러게.”
“나는 선배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라고요.”
“하지만 안 버렸잖아.”
“……”
“그게 중요한 거지.”
여전히 마음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재현이의 공간 안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이타인이 내민 손을 계속해서 놓지 못하는 나를 대체 어찌하면 좋은 걸까.
재현이가 나를 차갑게 바라보던 시선이 잊히지를 않는다. 너를 잃는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 * *
괜찮은 척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다.
어렸던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듣는 것과, 상처가 되는 시선들은 분명 감당해내기 힘든 것이었지만
죽어도 변치 않을 한 사람이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한 사람이 내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며칠 간 깊을 잠을 잘 수도,
편하게 쉴 수도 없었던 생활 때문인지 피곤함이 쌓이고 쌓여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움보다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피곤함이 먼저였던 건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을 꾸면서 그 모든 상황이 꿈이란 걸 알았지만 항상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비슷한 꿈을 얼마 전 꾼 적이 있었다.
비누가 사라져 가는 꿈. 며칠 만에 불편하게 잠이 든 지금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비누가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는 꿈이었다.
너무 놀라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책상 위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눈을 떴다.
뜨거운 무언가가 눈에서 흘러내려 하얀색의 노트를 적셔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내 상태에 놀란 건지 비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머리를 다리에 대고 살짝 부비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천천히 일으켜세워 티슈를 뽑아 들고는 눈가를 꾹 눌러보였다.
여전히 피곤함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다시 눈을 감고 자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멍하니 방안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 시선을 두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창문으로 무언가의 실루엣이 비추어졌다. 설마하는 생각도 잠시, 망설일 것도 없이 커튼을 열어젖혔고,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지만 분명 내가 걱정되어 이러고 있었던 거겠지.
너는 항상 그랬으니까. 참았던 눈물이 또 다시 흘러내렸다.
“꿈 꿨어?”
따뜻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네가 날 걱정하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재현아.”
“왜 우는데.”
“비누가 사고 나는 꿈을 꿨어. 눈앞에서 죽었어.”
“…꿈이잖아. 말 그대로 꿈.”
“너무 생생해. 내 앞에서 차에 치여 죽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꿈이야.”
재현이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섭단 말이야.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어떻게 해.
“나 너무 자고 싶어. 졸려 죽겠고, 너무 피곤한데…,”
“……”
“무서워서 잘 수가 없어.”
투정에 불과했다. 내 스스로가 너를 밀어내고 너를 원한다니.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내가 아는 네가 아닌 것만 같아서. 울어도 너는 더 이상 나를 봐주지 않는 걸까. 꿈에 대한 두려움 보다 그 사실이 더 무서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는데. 갑작스레 어디선가 바람에 불어온 건지 커튼이 펄럭였고,
어느새 창을 넘어온 네가 나를 품에 안았다.
“못되게 굴고 싶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네 의지대로 움직여.
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잡고 있고, 이타인을 놓지 않고. 나쁜 게 너야, 아니면 나야?”
“미안해, 재현아.”
“그 소리도 지겹다 이제. 잠을 얼마나 못 잤기에 얼굴이 이 모양이야?”
“무서워서 계속 못 잤어.”
“좀 자. 옆에 있어줄 테니까.”
내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던 재현이는 결국 내 눈물과 불안해하는 모습에 마음이 쓰인 건지
침대에 누운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옆을 지켜주었다.
의자에 앉아 내 손을 잡은 채로 나를 응시하는 재현이의 시선에서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어.
내 곁에 아무도 없었을 때도, 사람들이 날 이상한 애 취급을 할 때도, 내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이 너인데.
이렇게 화가 난 순간에도 결국 내 걱정을 하는 너인데.
미안해, 재현아.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려줄게. 비누 돌려주고, 다시 제자리로 올게.
“잘 자.”
너의 낮고도 떨림을 안은 목소리가 귓가로 전해졌다. 무더운 열대야의 밤이었다.
* * *
“시간 좀 내줘요.”
“무슨 일인데? 나 무서운데. 네가 먼저 이런 말 하니까.”
“잠깐이면 되는데.”
“잠깐이 아니라 길게도 내줄 수 있어. 뭘 그렇게 망설이며 말해?”
교실까지 찾아온 나를 발견하고 조금은 놀랐다는 얼굴로 날 살피는 타인선배였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얼굴로 선배를 응시하는 나와는 달리, 내가 먼저 자신을 찾아주었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타인선배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방을 챙겨드는 선배의 옆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잘 웃지 않는다는 혜빈이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제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변하는 건 한순간의 감정과도 같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챙길 것도 별로 없어.”
어느새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온 선배가 내 손을 잡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혹여 선배와 복도를 지나가다가 재현이라도 만날까 노심초사했지만
어차피 선배와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이는 내게 화가 풀린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행동을 보였다.
며칠 간 혼자 등교했지만 오늘은 재현이와 함께 등교를 했는데 오가는 대화는 별로 없었다.
중립적인 태도였던 것이다. 화가 풀린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왼쪽에서 걷던 선배가 갑자기 걸음을 옮겨 내 오른쪽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강하게 내리쬐던 햇볕이 키가 큰 선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려지고 있었다. 나를 배려한 것이다.
더욱 무겁게 짓눌리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집이요.”
“너희 집?”
“선배한테 줘야 할 게 있어서요.”
오늘은 비누를 원래 주인에게로 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게 내가 내린 결정이고 해야 할 행동이었다. 내 무거운 짐을 반씩 나누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일 수 없다면 내가 택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재현이었다.
선배는 평생을 내 곁에 있어준다는 보장이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재현이는 다르다. 내 곁에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변함없이 있어준 사람이니까.
“너 오늘 좀 이상해, 서빈우.”
“뭐가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평소랑 좀 달라보여.”
“선배.”
“왜?”
“내가 말했었죠? 나 이상한 꿈꾼다고. 내가 꿈을 꾸면 그 꿈이 현실로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고.”
“그랬지.”
“안 무서웠어요? 보통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괜찮아.”
“……”
“그게 서빈우 너라면 괜찮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손을 내밀지 말 걸.
차갑고 냉정하게 생긴 사람이 이렇게 타인에게 금세 마음을 주다니.
생각보다 여린 면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잡고 있던 손을 슬쩍 풀어내고는 두 걸음 정도 앞서 걷기 시작하자 선배가 다시금 내 손을 잡았다.
“서빈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선배를 응시했다.
무언가 굳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선배는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의아함을 느낀 나는
다시 선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왜요?”
“…….”
“왜 그래요?”
흔들리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선배를 의아하게 여겨 선배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선배는 빠르게 내 손을 잡아당겨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힘주어 나를 품에 안았지만
이미 나는 선배가 왜 걸음을 멈추고 이리도 놀란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채고 난 후였다.
선배의 행동보다 내 시선의 움직임이 더 빨랐으니까 말이다.
“보지마.”
“말…도…안 돼.”
“빈우야.”
“왜….”
“…….”
“왜!!!!”
.
.
지극히도 끔찍한 현실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잠 못 들게 만들었다.
나는 왜 그런 꿈을 꾸고도 비누를 안전하게 돌볼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핏빛으로 물든 도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꿈이야.’
주문처럼 너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결국 나는 너 외에는 아무도 함께일 수 없는 외톨이인 것만 같아서,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꿈에서 본 것처럼 죽어버린 비누가 불쌍해서,
그렇게 이타인의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울었다.
13.
“미안해요.”
“네가 왜?”
“오늘 비누 돌려주려고 했었어요. 잘 보살피라고 했는데, 이렇게 선배 손으로 땅에 묻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얀 타인선배의 손에 흙먼지가 묻어나 있었다.
잠시 동안 비누와 함께 있던 나도 이렇게나 많은 슬픔을 느끼는데,
비누와 오랜 시간을 있었고 또 진짜 주인이었던 선배는 지금 얼마나 슬픈 걸까?
하지만 선배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하염없이 우는 나를 달래고 또 달래주었을 뿐이다.
비누를 묻은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손을 탁탁- 털어낸 선배가 가까운 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어내고는 물기를 털어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데리고 있긴 했지만, 비누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어.”
“그럼 그 주인한테 사과해야겠네요.”
“나중에. 그건 그렇고, 나한테 비누를 돌려주려고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데?”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어낸 선배가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하지만 이내 입에 문 담배를 반으로 접어 휴지통에 버리는 선배의 행동에 나는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담배도 끊을까?’
좋은 사람이다. 이타인은 좋은 사람이야. 그걸 알면서도 곁에 둘 수 없는 건, 유재현 하나 때문이다.
“어제 밤에 꿈을 꿨어요.”
허공을 응시하던 타인선배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움직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처음에는 무섭다 싶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 버린 건지 그런 선배의 시선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비누가 죽는 꿈을 꿨어요. 그것도 차에 치여서.”
“…뭐?”
“그리고 오늘, 비누가 차에 치여 죽었죠.”
“서빈우.”
“그래서 더 확실해졌어요. 내가 좀 이상하다는 거. 남들과 다르다는 거.”
“…….”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내 옆에 있어준 사람이 유재현이에요. 아주 긴 시간을 내 옆에 있어줬어요.”
“내가 유재현 보다 널 먼저 만났다면, 나 역시 그렇게 했을 거야.
그 녀석이 먼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아닌 그 녀석이 네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납득하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선배. 예전일이지만, 나는 재현이가 사고를 당하는 꿈도 꿨었어요.”
“…뭐?”
“그 사고로 재현이는 죽을 뻔 했어요. 재현이가 왜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줄 알아요?
이마에 상처가 남았거든요. 내가 그 상처를 보면 미안해 할까봐 가리고 다니는 거예요.”
“…….”
“사고를 당한 녀석이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한 말은, 날 비난하는 말도 무섭다는 말도 아닌,
네 탓이 아니야, 라는 말이었어요.”
“서빈우.”
“재현이가 먼저라서가 아니라, 내가 유재현을 잃을 수 없어요. 그게 내가 선배와 함께일 수 없는 이유예요.
먼저 손 내밀고 그 손 먼저 놔서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울어야 할 사람은 선배였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나였고,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팔을 뻗어 나를 안아줄 뿐이었다.
미안하다며, 알았으니 울지 말라며.
이해를 받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선배가 그 모든 걸 떠안고 있었다.
흙먼지 가득 묻은 선배의 손을 보니 또 다시 마음이 아파져 왔다. 떠나보낸 비누처럼 나는 이 사람을 놓아야 했다.
돌아가는 길은 혼자였다. 더 이상 울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누워있었다.
혹여 또 다시 꾸게 될지 모르는 악몽 때문에 잠에 들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마른 눈가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늦은 밤, 나를 찾아온 재현이는 모든 상황을 내게 전해 듣고는 내가 잠이 들 수 있도록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마주잡은 손은 따뜻했지만, 마음만은 공허했다.
* * *
“얼마나 울었기에 눈이 그렇게 부었어?”
“슬펐단 말이야.”
“우연이야.”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지금 내 귀에는 나 위로하는 걸로 밖에 안 들려. 내가 그런 꿈을 꿨기 때문이야.”
“서빈우.”
“이제 더욱 확실히 알았고, 타인선배랑도 만나지 않을 거니까 너도 그만 화 풀어.”
재현이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재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 화가 풀린 듯 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재현이의 행동에 답답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과묵하긴 했지만, 화가 나면 더 과묵해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게 고양이는 진작 돌려주라고 했잖아.”
“나도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만해.”
우울해하는 내 기분을 알았던 건지 재현이의 큰 손이 내 머리를 토닥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했는데,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재현이의 두 눈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서빈우.”
“응.”
“난 네가 뭐라 하던, 네 옆에 있을 거야. 10년 이란 시간 동안 내가 네게 준 믿음을 잊지마.”
“알아.”
“하나 덧붙이자면, 그게 우정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알아둬.”
재현이의 감정이 딱 우정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뿐. 답답한 듯 한숨을 내뱉으며 허공을 바라보던 재현이가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또 다른 얘기를 꺼내었다.
“내가 타인이 형한테 잘못한 게 하나 있어.”
사고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무슨 사고인지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그 사고로 인해 타인선배가 검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일로 재현이와 틀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타인이형 일은 분명 사고였어. 사고였지만 일단 내 잘못이 맞아. 형이 뭔가를 원한다면 내가 양보하겠지만, 너는 안 돼.”
“……”
“10년이야. 내가 네 옆에 있던 시간이.”
“재현아.”
“이타인 뿐만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안 돼.”
재현이가 옆에 있던 시간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이 녀석이 내 옆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필요이상으로 내게 모든 걸 퍼부어주었던 녀석이지만 이런 식으로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었는데.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재현이의 시선에 마음이 쉴 새 없이 흔들림을 안은 그 순간,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안 된다? 이상한 논리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팔이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로 둘러졌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향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 재현이의 표정을 봐서도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뒤에 서 있던 거지? 우리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선 사람은 타인선배였고,
지금 재현이가 보는 앞에서 내 어께에 손을 올린 채 재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을게. 그 사고에 대해서는.”
재현이의 시선이 날카롭게 내 어깨 위로 향해 있었다.
“이렇게 쉽게요?”
“응. 이렇게 쉽게, 서빈우 하나 때문에 말이야. 다 잊어줄게. 그러지 뭐.”
“절대로 용서 안 할 것 같더니.”
“그러게.”
“서빈우한테는 나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 이상은 필요 없어.”
“어제까지만 해도 펑펑 우는 서빈우 보면서 알았다고, 그만하자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게 중증이네.
처음에는 서빈우가 나를 필요로 하긴 했지만, 이제는 내가 서빈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이타인.”
“선배도 아니고, 예전처럼 살갑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이타인이라. 원래 이렇게 버릇이 없었어?”
“…치워.”
“뭐?”
“손 치우라고.”
“…유재현.”
“안 들려? 서빈우한테서 손 떼라고!”
계속해서 어깨 위를 응시하는 재현이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안 그래도 내 스스로 타인선배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선배의 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고 결국 재현이의 화가 폭발했다.
복도를 지나던 아이들이 재현이의 목소리에 놀라 이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주위의 시선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두 사람 중 하나라도 달래보려 재현이에게 다가섰지만,
나를 옆으로 밀어낸 재현이가 타인선배의 멱살을 잡았다.
“유재현!!”
힘이 실린 주먹이 그대로 타인선배의 얼굴로 향하려 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조금은 높다 싶은 누군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을 뿐,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허공에서 멈춘 재현이의 주먹이었다.
재현이의 주먹이 타인선배의 얼굴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멈춘 건 내가 재현이의 이름을 부른 것 때문도 아니었고,
타인선배 때문도 아니었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네, 유재현.”
허공에서 멈춘 재현이의 주먹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타인선배의 시선이 놀란 듯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사이의 공간을 통해 복도를 걸어오는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는 여전히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빈선배가 있었다.
“리아야.”
아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이곳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고, 재현이의 이름을 부른 그 여자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선한 인상에 순수해 보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학교에서 입어야 할 교복도 입지 않았고,
재현이의 주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재현이의 옆에 있던 시간이 10년이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타인의 말로 인해 내가 모르는 유재현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게 되었었다.
내가 모르는 유재현은 분명 있었던 것이다. 이타인이 아는 사람이며 재현이를 아는 저 여자는 누구지?
“이리아.”
재현이의 입에서 작게나마 여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리아라는 여자의 뒤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은사빈이
그 여자의 어깨위로 친근하게 손을 올리고는 웃으며 내뱉은 말에,
타인선배의 멱살을 쥐고 있던 재현이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못한 얘기는 마저 이어야지, 유재현.”
.
.
지금 재현이의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14.
“반가운 얼굴이 아니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말이야.”
“어떻게 네가…….”
“내가 못 올 곳 왔어?”
“이리아.”
“아직도 두 사람은 함께 있네?”
아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안 그래도 살얼음판처럼 위태롭던 분위기가
이리아라는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더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뒤 쪽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은사빈의 시선이 잠시 내게로 향했고,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왜 저런 얼굴로 보는 거지?
뭔가 미안한 표정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이좋던 두 사람이 왜 복도 한 가운데서 주먹질을 하려고 해?”
“너 어떻게 왔어? 사빈이가 데리고 온 거야?”
“뭐, 이런 저런 사정이 좀 있었어.”
이타인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재현이는 당황스러움을, 타인선배는 놀라움을, 이리아는 흥미로움을, 사빈선배는 여유로움을 보이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궁금증만을 품게 될 뿐이었다.
일단 재현이가 타인선배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았기에 그 점 하나에 대해서는 다행이라 여기며 조심스레 재현이의 팔을 잡아당겼고,
이리아라는 아이를 향해 있던 타인선배의 시선이 천천히 내 손으로 옮겨졌다.
꽤나 기분이 나쁘다는 얼굴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재현이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만 가.”
무언가 이상했다. 가자고 말하며 재현이를 잡아당겼지만, 재현이의 시선은 여전히 이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마치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재현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무척이나 큰 불안감을 느꼈다.
항상 녀석에게 첫 번째였던 내가, 너에게 첫 번째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시선을 돌려 이리아를 바라본 순간, 아이는 나를 향해 친절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 하나에 왜 나는 소름이 돋는 거지?
“재현아.”
다시 재현이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내게로 시선을 돌린 녀석이었다.
짧게나마 타인선배를 쳐다보고는 내 팔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어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그 아이는 나와 재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실로 돌아와 한참을 망설이다 타인선배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선배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둘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재현이에요. 그러니까 재현이 다치게 하지 말아요.’
탁- 하고 폴더가 닫히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려왔다.
복도에서 보았던 재현이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고 어쩌면 정말로 재현이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 때문에 말이다.
* * *
“아까 그 사람 누구였어?”
“누구?”
“이리아라는 아이.”
“잘 모르는 애야.”
“모르는 애인데 왜 그렇게 반응해?”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데?”
“그냥, 뭔가 불안해보였어.”
앞을 향해 걷던 재현이의 걸음이 그대로 우뚝 멈췄고, 나 역시 재현이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는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재현이가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내 질문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건네지 않았다.
무언가 화가 난 표정이기도 했고, 불안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체 그 아이가 재현이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오늘은 도장 안 갈 거야.”
“정말?”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어?”
“뭐 하고 싶은 거 있냐고.”
정말로 이상했다. 학교를 마치면 항상 도장으로 향하는 재현이가
오늘은 도장에 가지 않겠다며 내게 하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을 건네고 있다.
항상 재현이가 도장에 갔던지라 방과 후에는 혼자 있어야 했던 나로서는
반가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지만, 뭔가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갑자기 왜?”
“그냥, 덥기도 덥고. 오늘 하루는 쉬고 싶네.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야 많지, 네가 항상 바빠서 문제였잖아.”
재현이의 기분이 그나마 풀린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찜찜한 기분은 남아있었다.
이번 여름의 더위는 오래 가려는 건지,
여전히 뜨거운 햇볕이 내게 비추고 있었지만 재현이가 있어 그것 역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보러 가자.”
“봐둔 거 있어?”
“가서 보지 뭐.”
“집에 안 들렸다 가려고?”
“바로 가자.”
자연스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 재현이었다. 조그마한 내 손이 재현이의 손 안에 쏙 들어가 버리고,
그렇게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로 함께 걸음을 옮겨 영화관으로 향했다.
밖의 날씨와는 비교가 될 정도로 영화관 안은 시원하기만 했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겠다며 선택권을 준 재현이의 말에 요새 흥행하고 있다는 영화 한 편을 골라 함께 영화를 봤다.
음식 같은 건 잘 먹지 않는 재현이었지만 날 생각해 준 것인지 아이스티 하나와 팝콘 하나를 사주었고
영화를 보며 나 혼자 열심히 먹어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팝콘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아까워. 그냥 아이스티만 사지 그랬어.”
“입 심심하잖아.”
“넌 안 먹잖아.”
“너 먹으라고 산거야.”
오늘따라 유독 나를 배려해주고 신경써주는 재현이의 모습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워낙에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나를 위주로 행동하던 녀석이긴 했지만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게 화가 나있던 재현이었는데.
변화를 보인 건, 아마 이리아라는 아이를 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재현아.”
“어.”
“너 하고 싶은 건 없어?”
“뭐?”
“매번 나 하고 싶은 것만 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게. 하고 싶은 거 없어?”
영화관을 빠져나가자 다시금 후덥지근한 공기와 뜨거운 태양이 우리 두 사람에게로 비추어졌고
강한 햇살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재현이가 다시금 내 손을 잡는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옆에서 함께 하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서빈우.”
“응.”
“네가 도망치고 싶어지면, 내가 잡으면 되지만.”
“……”
“내가 도망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재현아.”
“같이 가줄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다 버리고 도망갔으면 좋겠다.”
“유재현.”
“너 하나만 데리고,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갑자기 왜 그래? 너 오늘 정말로 이상해. 아까 그 애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네 편이 되어 줄 수 있고, 네 옆에 있어줄 수 있어. 너는 어때?”
“뭐?”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 옆에 있어줄 수 있어?”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질문도, 재현이의 이상한 반응들도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응시하던 재현이가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서빈우.”
“……”
“미안해.”
“뭐가?”
“그냥 미안해. 미안해, 빈우야.”
뜻 모를 사과를 건네는 재현이의 두 눈은 마치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모르는 유재현에 대해 조금은 보게 된 것 같은 날, 미묘한 변화를 보인 건 내가 아닌 재현이 자신이었다.
15.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리아가 갑자기 여길 왜 와?”
“와서 싫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설명을 좀 해달라는 말이야.”
정규수업이 모두 끝났지만 돌아가지 않은 채로 교실에 앉아 있던 사빈이 타인의 말에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창밖의 풍경들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흔들려 보일만큼 오늘의 날씨는 무더웠다.
날씨는 덥고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바람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답답한 듯 목 부분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낸 타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학하려는 거야?”
“글쎄, 그것까지는 아직 리아가 대답을 안 했어. 아, 그리고 비누 일은 내가 리아한테 설명했어. 꽤나 슬퍼하더라.”
“얘는 또 어디 간 건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좀 둘러보고 싶다고 나갔어.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 아까 유재현이랑 복도에서도 한바탕 한 것 같더니만. 무슨 일 있었어?”
“사빈아.”
“말해.”
타인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이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운동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보이자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에 가득 들어찼다.
한 여름이라는 걸 물씬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욕심나고,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서빈우 말하는 거야?”
“왜 하필 유재현 옆에 있는 사람인 걸까?”
“뺏으면 좋은 거 아니야? 너는 너대로 서빈우를 가지고, 유재현한테는 뭔가를 되갚아 주는 거니까.”
“그런 식으로 앙갚음 해주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한 때는 내가 제일 아꼈던 동생인데.”
계속해서 답답함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타인이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는 듯 살짝 표정을 구겼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사빈이를 쳐다봤다.
“왜?”
“다 버렸어.”
“뭘?”
“담배.”
타인의 대답에 사빈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고,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어 타인이에게 건네었지만 타인이는 됐다며 받지 않았다.
빈우 때문이라는 걸 대충 짐작한 사빈은 그저 타인을 바라보다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타인이 다시금 창가로 시선을 돌려 창틀에 팔을 댄 채로 몸을 기대었고
잠시 나마 불어온 바람이 타인이와 사빈이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사빈아. 유재현이 뭔가에 욕심내는 거 봤어?”
“글쎄. 워낙에 감정 같은 거 잘 내보이지 않는 녀석이잖아.”
“욕심 같은 거 잘 안 내는 녀석이 서빈우를 많이 아끼는 거 같아.”
“유재현이?”
“응.”
창밖을 바라보던 타인이의 시선이 또 다시 사빈이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런 사빈이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웃을만한 대답도, 웃을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사빈이는 타인이를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즐겁다는 웃음이 아닌 뭔가 씁쓸하고도 허탈한 웃음이었다.
“왜 웃어?”
“그게 아니라면?”
“뭐?”
“유재현이 서빈우를 진심으로 아끼는 게 아니라면, 너는 어쩔래?”
“무슨 소리야?”
“참 대단해, 유재현은.”
“사빈아.”
“네 일은 사고가 맞아, 타인아.”
“……”
“하지만, 네 사고 앞에 일어났던 일. 그러니까, 그 사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자 이유가 됐던 리아의 사고는 사고가 아니었어.”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 이유를 모를 뿐이지.”
“리아가 알고 있었어.”
“뭐?”
“그 이유를 리아가 알고 있었다고.”
타인의 시선이 무척이나 낮게 가라앉았고, 이내 몸을 돌려 가방을 손에 쥐고는 사빈이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리아, 지금 어디 있다고?”
“글쎄, 가까운 곳에 있겠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교실을 나서는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빈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켜 세웠고 복도로 나가 창가에 기댄 채 멀어지는 타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나도 유재현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
“근데 아니야. 가장 무서운 건, 그 녀석이었어.”
* * *
영화를 보고 저녁까지 먹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면 꼬리를 살랑이며 나를 반기던 비누는 더 이상 없다.
허전한 느낌에 쓰디 쓴 웃음을 입가에 지어보이다 그대로 침대에 앉아 허공을 바라봤다. 무언가 이상한 하루였다.
뜻 모를 재현이의 말들과 알 수 없는 이리아라는 아이. 그리고 타빈선배와의 관계.
머리는 복잡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답을 내 스스로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무언가의 설명을 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기를 10분 여.
창문을 두드리는 무언가의 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창가로 다가서서 창문을 열었다.
“안 자고 또 왜?”
“그러는 너는 왜 안 자?”
“잠이 안 오네. 집이 너무 조용해. 엄마 아빠까지 여행가시고.”
“아줌마랑 아저씨 여행가셨어?”
“응, 내가 얘기 안 했나?”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재현이를 향해 묻자, 녀석은 나를 빤히 응시하다 말고 갑작스레 창문을 넘으려는 행동을 보였다.
깜짝 놀라 차라리 밑에 문으로 들어오라며 소리쳤지만 막무가내로 창문을 넘어선 녀석은 결국 내 방에 들어섰다.
“진짜로 진화가 덜 됐다니까.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창문으로 와?”
“귀찮아. 졸려?”
“아니. 피곤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아. 아직 늦은 시간 아니잖아.”
졸리지 않다는 내 대답에 녀석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내 침대에 걸터앉았고,
자신의 옆을 손으로 두드리며 앉으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재현이의 옆에 앉자 녀석은 잠시 허공을 응시한 채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분명 무언가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 재현이는 불안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꼭 운동을 했지만,
오늘은 도장에 가지도 않았다는 점이 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뭐 불안한 일 있어?”
“없어, 그런 거.”
“근데 너 오늘 이상해.”
다른 날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재현이의 뜻 모를 행동들이 조금은 낯설었다.
항상 내 앞에서만은 강해보였던 아이가, 오늘따라 왜 이리 약해보이는 거지?
“너랑 나랑 안지가 벌써 10년인가?”
“그렇지.”
“시간 빠르네. 어느새 내 옆에 네가 있는 게 당연하게 됐고, 네 옆에 내가 있는 게 당연시 됐어.”
재현이의 모습이 뭔가 불안해보여서 나까지 그 불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 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재현이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에 반응한 재현이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방안이 더웠지만 에어컨은 틀지 않았다. 재현이도 나도 더위에 약하지만 둘 다 에어컨 바람은 싫어했기에
그저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으로만 더위를 버티고 있었다.
“서빈우. 너는 내가 없으면 어떨 것 같아?”
재현이의 이런 질문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안감을 없애주기만 하던 재현이가 지금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고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재현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질문 하지마. 정말로 도망이라도 가려고 그래? 타인선배 때문이라면 그러지마. 말했잖아,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고.”
“나는 네가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그런 소리 말라니까. 내가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서 그래? 네가 날 버릴 거라는? 안 할게, 이제 안 해. 그러니까 재현아……”
무언가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녀석이 손을 뻗어 나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고 귓가에 재현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너는 나를 얼마나 믿어?”
답은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한 사람이 이 녀석이었으니까.
“나 자신보다 너를 더 믿어.”
재현이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이타인에게 다가선 만큼 재현이에게 멀어졌기 때문에 재현이가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거라면,
나 자신을 비난하고 싶었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고, 불안감만이 나를 휘감는 밤이었다.
* * *
오늘은 도장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재현이었지만
빈우가 잠이 든 뒤에 빈우의 방을 빠져나온 재현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도장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나 기분이 나쁠 때는 항상 운동을 하는 것이 버릇이었던 재현이었기에
오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구를 착용하고 죽도를 손에 든 채 도장의 중앙에 서 있던 재현의 시선이 무척이나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었던 도장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재현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는 듯 여유 있게 등장한 사람은 오늘 재현에게 불안감을 안겨준 리아였다.
“여전히 운동은 열심히 하네. 대회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것도 이런 시간에 말이야.”
무척이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현이 응시하는 곳에는 리아가 서 있었고,
재현은 그런 리아가 반갑지 않다는 듯 차가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재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리아가 그 침묵을 깨버렸다.
“당황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안 무섭니?”
위를 향해 들려 있던 재현이의 죽도가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고,
한 보 정도 앞을 향해 있던 왼발을 오른 쪽과 균형을 맞춰 서고는 리아를 응시했다.
리아는 그대로 재현의 앞에 서서는 냉소적인 웃음을 날렸다. 차갑고도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너는 여전히 검도를 하네. 타인오빠는 검도를 못하게 됐는데.”
“사고였어.”
“내가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어.”
“……”
“너 때문에 내가 다치게 된 거고. 그러니까 타인오빠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 너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현을 향해 날카로운 감정을 내보이던 리아가 화를 참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어 보이고는
재현이의 손에 들린 죽도를 빼앗아 들었다.
“그 때 일부러 나 민 거 맞지?”
“이리아.”
“너무 했다고. 그 때, 잘못하면 나 죽을 수도 있었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아니.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니라, 네 욕심이 부른 결과겠지.”
“입 다물어.”
안 그래도 좋지 않는 감정을 드러내던 재현이 화를 내듯 날카로운 시선을 리아에게로 보냈고,
리아의 손에 들린 자신의 죽도를 빼앗아 들고는 그대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어진 리아의 뜻 모를 말에 재현의 걸음은 도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롤 멈췄다.
“태양이 어둠을 삼켜버렸어.”
“……”
“그래서 그 안에는 밤이 찾아오지 않은 거야.”
“입 다물랬지.”
“난 그 때 분명, 정확히 들었어.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야. 네가…, 그 애의 밤을 뺏은 거야.
그 애는 네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밤을 가질 수 없었던 거고 잠을 잘 수 없었던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가 네 안에서 나오면 어떨 것 같아?”
“헛소리 하지마.”
“헛소리? 계속 그런 식으로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얘기할 생각이니? 난 분명 똑똑히 들었어.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 때 그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네가 당당하다면, 날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어.”
“이리아!”
“예지몽? 웃기지 말라 그래. 그건 우연에 불과해. 그 딴 우연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데? 그 애도 아니?”
“……”
“어렸을 때는 우연에 불과했겠지. 세 번까지는 분명 우연이라고 했겠지만,
나이가 들고, 커가면서도 계속해서 그런 현상들이 반복되어 가니까 그 애는 자신의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거라 믿은 거야.
하지만 그 애가 꾼 꿈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 낸 상황이잖아?
그 애가 믿는 건 너 하나뿐이도록, 꿈의 상황을 전해들은 네가 그 꿈과 똑같은 상황을 현실에서 만든 거라는 걸 그 애도 알아?
참 무서워. 그 애를 혼자 만들어 놓은 당사자가 그 애의 옆에 있어주다니.”
“……”
“결국 넌 버려질 거야. 유재현.”
.
.
‘네가 유재현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
‘네가 유재현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지, 그건.’
.
.
‘너는 나를 얼마나 믿어?’
‘나 자신보다 너를 더 믿어.’
나는 여태껏 너의 어떤 모습을 본 걸까?
16.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이 떠졌다.
항상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기에,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깨고는 했지만 저런 작은 빗소리 하나에 눈을 뜰 줄이야.
새벽빛이 감도는 방 안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여전히 일률적인 속도로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며칠 째 더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했더니만, 결국은 비가 내리는 창밖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운 날씨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약했던 빗줄기가 점점 강해져 가는 건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또한 커져만 갔다.
“많이 쏟아질 건가?”
지금 비가 오는 것은 괜찮지만 아침까지도 저런 상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항상 우산을 써도 옷이 젖는 사태가 벌어진다.
꽤나 많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빗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불이 꺼져 있던 재현이의 어두운 방에 갑작스레 환한 빛이 들어찼다. 잠을 자다 깨어난 것일까?
이런 때도 저 녀석과 통하다니.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서서 커튼을 밀어내고는
재현이의 방을 살짝 엿보았다. 하지만 장난을 치려던 행동은 그대로 멈추고
최대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대체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온 것일까? 창을 통해 보이는 재현이의 모습은
잠을 자다 깨어난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다녀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이 시간에 도장 다녀온 건 아니겠지?”
녀석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눈에 가득 들어찬 건 상처투성이인 재현이의 오른손이었다.
뭘 하다 다친 건지 꽤나 심각한 상처 같아 보였고,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을 열자 재현이가 조금은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을 이용해 창문을 열라는 표시를 해보이자,
잠시 머뭇거리던 재현이가 창문을 열고는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잘 자더니, 왜 또 일어났어?”
“너야말로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거야? 손에 그 상처는 뭐고.”
“……”
입을 열지 않는 재현이를 빤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복잡한 얼굴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말하기 곤란한 건가 보네. 그럼 상처 치료만 해줄게. 붕대를 누가 그렇게 대충 감아줬어?”
엉성하게 감아놓은 붕대를 보며 살짝 표정을 찌푸리고는 구급함을 챙기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언제 또 창문을 넘은 건지 반대편에 서 있던 재현이가 어느새 내 공간 안에 들어서 있었고 그대로 뒤에서 손을 뻗어 나를 안았다.
“빈우야.”
“재현아.”
“미안해.”
“어?”
“정말로, 많이 미안해.”
“무슨 말이야.”
“사고였어. 타인이 형 일은 정말로 사고였어.”
“……재현아.”
“그 앞에 일어난 일은 사고가 아니었을지라도.”
“무슨 말이야, 그게.”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불안해 보이는 재현이의 모습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뭐가 널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어. 나 때문이야?
목구멍까지 차오른 저 말을 꾹 눌러 담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재현이를 품에 안았다.
내가 안기에는 재현이가 나보다 훨씬 큰 키를 지니고 있었지만, 있는 힘껏 재현이를 안아주었다.
“네가 무너지려고 하면 내가 불안하잖아, 재현아.”
재현이 역시 손을 뻗어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녀석에게서 풍겨져 오는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여전히 떨고 있는 재현이를 꽉 안아주었다.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재현이의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를 간지럽히고,
이내 귓가에 나지막이 재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며칠만 떠나고 싶어.”
“재현아.”
“같이 가줘. 함께 있어줘, 빈우야.”
한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괜히 내가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무엇이 재현이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내가 불안하고,
초조해 할 때면 항상 옆에 있어주고 내 곁을 지켜주었던 유재현이다. 헌데,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걸까?
.
.
‘네가 도망치고 싶어지면, 내가 잡으면 되지만. 내가 도망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같이 가줄래?’
재현이가 내게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고 이내 손을 뻗어 재현이를 안아주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의 불안감이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 이유도 모른 채로 슬픔에 잠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같이 있을게. 그러니까 무너지지마 재현아.”
* * *
“무슨 일 있어? 오빠 표정이 왜 그래?”
신발을 벗으며 타인의 집 안으로 들어서는 리아가 초조한 표정으로 거실에 서 있는 타인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집으로 가기 전 잠시 사빈의 전화를 받고 타인의 집에 들른 리아였는데
마치 자기를 기다린 듯한 타인의 태도에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타인은 리아의 목소리에 곧장 반응하며 리아의 손을 잡아당겼고, 그대로 소파에 앉힌 뒤에 시선을 마주했다.
리아는 조금 놀란 얼굴로 타인을 응시했다.
“정말로 무슨 일 생긴 거야?”
“너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아, 그냥 구경 좀 하고 다녔어. 나 오랜만에 온 거잖아.
근데 오빠 정말 무섭게 왜 그래? 나한테 화 난 일 있어?”
“넌 알고 있었다며.”
“뭐가?”
“유재현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
“이유 알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오빠.”
리아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그대로 타인의 손에 붙들려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잡고 있는 타인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 일은 사고가 맞아. 내가 다친 건 사고가 아니지만.”
“널 구하다가 내가 사고가 났어. 네 일이 사고가 아니라면, 내 일도 사고가 아니야.”
“오빠.”
“유재현은 검도부 애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였어.
나뿐만이 아니라 사빈이도 아꼈고, 너도 유재현이랑은 가깝게 지냈잖아.
그런 유재현이 너를 일부러 계단에서 밀었어. 모두들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나와 사빈이는 유재현이 너를 미는 걸 눈앞에서 봤고,
난 널 구하다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검도를 관둬야 했어.”
“……”
“그 사고에 가장 피해를 본 건 나인데도, 여전히 나는 유재현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
“오빠.”
“그러니까 말해. 난 들어야 할 권리 있어. 왜 유재현이 그런 짓을 한 건지 나는 꼭 알아야겠으니까.”
타인의 확고한 말투에 리아는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땅으로 떨어트렸다.
타인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한참을 망설이던 리아가 이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빈우라는 아이 알아?”
“서빈우? 알고 있어.”
“알고 있다면 설명이 빠르겠네. 아주 특이한 애지.”
“특이해?”
“꿈을 꾸면 그 꿈이 현실로 일어난다고 해서, 그 애 때문에 사고를 당한 아이들이 꽤 많은가봐.
그래서 늘 유재현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곁에 두지 않았고.”
“그런 얘기를 왜 꺼내? 상관없는 얘기잖아.”
“상관이 없어? 아니야, 그 때 오빠랑 나랑 당했던 사고는 서빈우와 관련이 있어. 나랑 오빠,
그리고 사빈오빠까지 재현이와 친분이 있었지만 서빈우에 대해서는 재현이 입으로 전해들은 게 없었잖아.
근데 나는 서빈우를 알고 있었거든.”
타인의 시선이 흔들림을 안았다. 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졌다가 떨리는 음성을 뱉어냈다.
평소 무슨 일이 있던지 자신의 감정을 잘 숨겼던 타인을 떠올려 볼 때
지금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 사고가 서빈우와 관련이 있어?”
“유재현이 서빈우를 아끼지. 아주 무척이나 아껴. 서빈우한테만 유독 모든 걸 쏟아부어줄 것 같잖아, 그 새끼.”
“본론만 말해. 대체 무슨 말이야?”
“유재현이 학교 뒤편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듣지 말아야 할 사실을 어쩌다가 듣게 됐고,
그게 두려웠던 유재현이 날 계단에서 민 거야.”
“리아야.”
“무슨 얘기일지가 중요한 거지? 서빈우에 관한 거야.”
리아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투명한 컵에 물을 따라 반 정도 마신 뒤에 다시 거실로 나서서 타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소파에 앉아 리아를 응시하는 타인의 시선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과거의 일에 서빈우가 언급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는 표정이었다.
“우연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알아듣게 말해.”
“서빈우가 꾼 꿈들이 현실에서 일어났고, 그 애는 혼자가 됐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그게 맞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무슨……”
“서빈우는 어릴 때 자신의 꿈에 의해 유재현이 다쳤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어준 유재현에게 모든 걸 의지했지.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에 대한 것도 설명을 했고 말이야.
그래, 어릴 때는 맞아. 그 꿈대로 사고가 난 거야. 하지만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
“유재현이 그 꿈 얘기를 전해 듣고, 그 꿈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낸 거야.”
“!!!!”
두 손을 모아 턱을 받치고 있던 타인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도 놀란 얼굴로 리아를 응시했고 리아는 타인의 반응을 예상했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놀랍지? 완벽하게 서빈우를 혼자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옆에 있어준 거야.”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릴 때 3번 정도의 사고는 정말로 꿈과 현실이 맞아 떨어졌다고 했어.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에 서빈우가 무너지려는 시점이었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서빈우와 유재현이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졌을 때, 다시금 꿈과 현실이 맞아떨어지는 일이 일어났어.
그래서 서빈우는 더 이상 꿈과 현실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고 자기 자신에게 가시를 세웠지.”
“…….”
“남들과 다르다고. 유재현이 아니면 자기 옆에는 아무도 있어주지 않을 거라고.”
“네가…잘 못 알았겠지. 유재현이 그런 짓을 할 만큼 나쁜 녀석이 아니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움직여 다시금 소파에 앉은 리아가 씁쓸한 웃음을 그렸다.
타인의 표정에는 절망감과 분노가 드러났다.
리아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겼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유재현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꿈의 상황을 똑같이 만들어 내는 일을 유재현은 직접 하지 않았어.
누군가에게 지시했지. 그것도 중학교 때까지만 그랬을 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꿈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않았어.
이미 서빈우의 곁에는 유재현 하나뿐이었으니까 말이야.
헌데, 유감스럽게도 예전에 유재현의 일을 도와주던 아이와 통화하는 내용을 내가 들었고,
난 그걸 서빈우에게 말하겠다고 유재현을 협박했어.”
뒤이어 이어진 얘기에 타인은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자신의 귀로 듣고 있는 내용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못된 사람이더라. 나 그 녀석 좋아했거든.
유재현을 뺏고 싶어서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서빈우에게 말하지 않을게, 라고 협박했어.”
“리아야.”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애의 마음을 잡아두려다, 결국 참지 못한 유재현이 나와 실랑이를 벌였고 계단에서 나를 밀었어.
순간적인 마음이었겠지. 하필 그 때 가까운 거리에 오빠와 사빈 오빠가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오빠는 날 구하려고 했잖아.
결국 가장 다친 것도, 뭔가를 잃은 것도 오빠였지.”
“…….”
“여기까지가 내가 설명해 줄 수 있는 전부야.”
“…하.”
고개를 뒤로 젖혀 손으로 눈을 가린 타인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한참이나 말을 건네지 않았고 리아는 그런 타인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눈을 가린 타인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나는 재현이가 사고를 당하는 꿈도 꿨었어요. 그 사고로 재현이는 죽을 뻔 했어요.
재현이가 왜 앞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줄 알아요? 이마에 상처가 남았거든요.
내가 그 상처를 보면 미안해 할까봐 가리고 다니는 거예요. 사고를 당한 녀석이 깨어내서 가장 먼저 한 말은,
날 비난하는 말도 무섭다는 말도 아닌, 네 탓이 아니야, 라는 말이었어요.’
‘재현이가 먼저라서가 아니라, 내가 유재현을 잃을 수 없어요.’
손을 치워내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숙인 타인이 절망적인 목소리를 뱉어냈다.
“정말 말도 안 돼.”
“실은 나 유재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서빈우에게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했어.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유재현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결국 오빠까지 다쳤잖아. 매듭을 지어야지. 사실대로 말할 거야.”
“이 일, 사빈이도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타인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러났다.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리고 짙은 한숨을 뱉어내는 타인의 모습에
리아는 미안함을 느끼며 표정을 굳혔고, 혼자 있을 시간을 주려는 건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빠르게 타인의 손이 리아의 손을 잡았다.
“말하지마.”
타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단호한 목소리에 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타인을 불렀다.
“오빠.”
“말하지 마, 부탁이야.”
“오빠는 검도도 못하게 됐잖아. 설마 유재현을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한 때 아끼는 후배였다고?”
“그런 게 아니야!”
“…….”
“이 일로 가장 다치는 건 유재현이 아니라, 서빈우잖아!”
“대체 무슨……”
“다치게 하지마.”
“…오빠. 서빈우가 다치는 게 대체 오빠랑 무슨…”
“부탁이야, 리아야.”
“설마…, 학교에서 함께 있던 것도 그렇고…”
“……”
“오빠 그 애 좋아하는 거야?”
리아의 눈이 흔들림을 안았다. 부탁이라는 것도, 애원이라는 것도 하지 않던 타인이 자신에게 부탁이라며 매달리는 모습에
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타인은 간절했고, 리아의 질문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라며 그 모든 일들을 묻어두자고 리아에게 약속을 받아내 듯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지 말아 달라 말했다.
.
.
‘내가 유재현을 잃을 수 없어요.’
차라리 평생 모르고 살아. 유재현이 만든 세상에 네가 갇혀서 밤이 오지 않는 거라면,
그 녀석의 안에서 평생을 모르고 살아. 그게 이 상황에서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으니까.
17.
“조금 있으면 방학하니까 그 때 가도 될 텐데.”
“왜? 집으로 다시 가고 싶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엄마 아빠도 없어서 걱정은 없는데, 학교가 마음에 걸려서 그렇지.”
“너 중학교 때도 가끔 학교 빠지고 그랬잖아.”
“그거야 나 괴롭히는 애들 때문에 그런 거고.”
날이 덥기도 더웠고 손을 잡는 행동을 즐겨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손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차를 타고 나서도 계속해서 유재현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재현이의 손을 흔들었다.
“갔다가 언제 올 거야?”
“글쎄.”
“무책임한 말이네. 아줌마 아저씨 걱정할 거 아니야. 나야 엄마 아빠 여행가서 괜찮다지만.”
“메모 남겨두고 왔어.”
“메모로 해결 될 일이야? 너 나중에 진짜 혼난다.”
“서빈우.”
“응.”
“아예 오지 말까?”
“어?”
“아예 돌아오지 말까?”
농담처럼 내뱉은 말 같았지만 재현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마주잡고 있는 재현이의 손에 힘이 실렸고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재현이를 응시하자
재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다른 한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농담이야.”
웃는 모습이 좋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만큼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녀석이었기에 더욱 그 모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기차를 타고 내가 살던 곳에서 점점 멀어져감과 동시에 문득 이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재현이가 동시에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금방이겠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재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그렇게 눈을 감았고, 한참 후에야 나를 흔들어 깨우는 무언가의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무슨 잠을 그렇게 곤히 자? 평소에는 잠도 잘 못자면서.”
“몰라, 네가 옆에 있으니까 편해서 그런가 봐.”
“도착했어. 내리자.”
재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그대로 녀석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렸다. 짐은 가볍게 챙겨온 상태였고,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이곳에 왔다. 역을 빠져나가자마자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바람에 살짝 표정을 찌푸려보였는데
거짓말처럼 강한 햇볕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모자는 또 언제 챙겨온 건지, 재현이가 커플로 된 모자를 꺼내어 하나는 내 머리에 씌우고
하나는 자신의 머리 위에 씌우고는 살짝 한쪽 눈을 찡그리며 다른 한 손으로 내 볼을 툭 밀어냈다.
“아무튼 더운 거라면 질색하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고 보면 나와 유재현은 유독 공통점이 많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보니까 자연스레 닮아갔던 건지도 모른다.
역을 빠져나와 함께 향한 곳은 인근의 바닷가였다.
역 근처에서는 바람이 잘 불지 않는 것 같았는데 바다 근처로 갈수록 희미한 바람이 느껴지더니
지금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시원하다 느낄 정도의 바람이 나와 재현이를 스쳐 지나갔다.
생소한 바다 냄새와 탁 트인 풍경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고 신발을 벗고 살짝 발끝을 물에 담갔다가
밀려드는 물살에 도망치 듯 걸음을 옮겼다. 재현이는 그 모습에 웃어 보이다가 나처럼 신발을 벗고 옆에 함께 섰다.
“시원하다, 그치?”
“응.”
손을 잡고 해변가를 천천히 거닐다가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를 집어서는 유재현의 이름을 써넣었고 그 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써넣었다.
함께 있는 게 어느새 당연시 된 우리였다. 그런 녀석을 나는 밀어내려 했었고, 녀석은 끝까지 내 옆에 남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녀석에게 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모래사장에 서서 나를 응시하던 녀석이 갑작스레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주 크게 소리쳤다.
“서빈우!!!!!!!!”
재현이의 목소리에 놀라 잠시 멍한 시선을 보내다가 짧은 웃음을 뱉어냈다. 여전히 재현이의 시선은 바닷가를 향해 있었다.
“바로 옆에 두고 뭘 그렇게 크게 불러?”
“미안해!!!”
“뭐?”
“정말로 미안해!!!”
“고해성사라도 해?”
“고마워!!”
“유재현.”
크게 울렸던 재현이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고 파도가 일렁이는 소리와 바람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앞을 향해 있던 재현이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하는가 싶더니 짙은 검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닷가를 향해 외치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애절하고 간절하게 내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너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환상처럼.
* * *
“안 나왔어?”
“네, 안 그래도 담임이 아침에 연락 된 애 없었냐고 물었었는데요. 아무래도 무단으로 안 나온 것 같아요.”
빈우의 교실 앞으로 찾아간 타인이 밖으로 나오려던 한 아이를 붙잡아 빈우를 불러 달라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빈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의아한 듯 빈자리를 바라보던 타인이 그대로 걸음을 돌려 초조한 얼굴로 어딘가로 향했고
타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재현이 속한 반의 교실이었다.
“유재현 좀 불러줄래?”
“재현이 오늘 안 나왔는데요.”
초조함이 드러났던 타인의 얼굴은 이제 급격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타인을 의아한 듯 바라보던 아이는 그대로 교실 안으로 들어섰고 누군가가 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깨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자 사빈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로 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네. 평소에는 서로 찾지도 않던 녀석들이잖아.”
“빈우가 안 나왔어.”
“응, 두 사람 모두 함께 안 나왔지. 같이 있으려나?”
“사빈아.”
“무섭겠지. 리아가 돌아왔고, 서빈우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그래도 서빈우는 피해자니까, 그 애한테 허튼 짓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같이 있으니 위험하려나?”
타인의 시선이 조금 더 낮아졌다.
사빈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어깨 위에 놓인 사빈의 손을 치워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사빈이 타인의 옆에 서서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별다른 반응 없이 무표정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타인의 얼굴을 확인한 사빈이 이내 짧은 웃음을 뱉어내며 타인을 향해 물었다.
“이타인.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뭐가?”
“리아한테 다 들었다며.”
“그래서?”
“유재현이 왜 그랬는지도 알았다며.”
“어.”
“근데 서빈우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랬어.”
“네 손 망가지고, 네 꿈 포기해야 했어. 유재현 그 녀석이 잃을 수 있는 건 서빈우 하나야. 근데도 다 함구하겠다?”
“은사빈.”
“왜 갑자기 착한 척이야.”
앞을 향해 움직이던 타인의 걸음이 멈추고 그대로 차가운 시선을 사빈에게 보냈다.
한숨 섞인 숨소리가 지금 타인의 복잡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사빈은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듯 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서빈우한테 말해서 서빈우가 무너진다면, 유재현은 서빈우를 잃겠지.”
“그래.”
“근데, 무너지는 서빈우 보면, 나도 다 잃은 느낌 받아야 할 것 같아.”
애원 섞인 타인의 말에 사빈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함을 담아내고 있었고,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타인과 사빈이었다.
교실에 들어서고 창문을 응시하고 있는 타인을 향해 사빈은 힘이 빠져버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내 입으로 먼저 말하지는 않겠지만, 끝까지 숨겨줄 생각은 없어.”
“나도 알아.”
.
.
지독한 여름의 더위도 끝을 달리고 있었다.
* * *
“예쁘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놀다가 향한 곳은 근처의 번화가였다.
더운 날에는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독 오늘만큼은 신이 난 기분으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다녔는데
어느 한 상가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예쁘다는 탄성만을 뱉어냈다.
은색 빛의 팔찌가 햇볕을 받아 강하게 반짝임을 보였다. 평소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하기도 했고,
재현이에게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에 팔찌를 손에 들어 매만지다가 결국 가격을 묻고는 그대로 팔찌를 담아 달라 말했다.
“아, 두 개 주세요.”
재현이만큼이나 그 팔찌가 잘 어울릴 거라 생각이 드는 또 한 사람 때문에 똑같은 팔찌를 더 구입했다.
타인선배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같은 팔찌 선물한 거 알면 화내려나?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타인을 멀리 할 것이고 마지막 선물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자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건지 휴대폰을 손에 든 채로 한참이나 액정을 내려다보는 재현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10분 전부터 재현이의 기분이 유독 좋지 않게 가라앉은 것만 같았다.
의아한 시선을 담은 채 재현이에게 다가서자, 급하게 휴대폰 폴더를 닫고는 내 손을 잡아 보였다.
“오늘은 활기차네? 평소에 더우면 축 늘어져 있잖아.”
“멀리까지 왔는데 평소처럼 축 늘어져 있을 수는 없잖아.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누구한테 연락 왔어? 휴대폰만 빤히 보고 있고.”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재현이를 바라보다가 조금 전 샀던 팔찌 하나를 재현이의 앞에 내밀어 보였다.
“짜쟌- 예쁘지?”
“팔찌?”
“응. 너 주려고 산거야.”
“정말?”
“응, 너 액세서리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튀지도 않고 심플한데도 예쁘더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재현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재현이도 마음에 들어 하고는 했었다.
재현이는 내가 건넨 팔찌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팔에 차보였다.
나는 짧게 웃어 보이며 녀석의 팔을 잡았다.
“진짜 특이해. 오른 손에 차면 안 불편해?”
“응, 난 이게 편해.”
보통 시계나 팔찌 같은 건 왼손에 착용하지만 재현이는 팔찌를 오른 손에 차보였는데 그것은 재현이의 특이한 습관 중 하나였다.
허리를 살짝 숙여 내게로 가까이 다가서는 녀석. 한쪽 눈을 찡그리며 몸을 움츠림과 동시에
재현이의 입술에 빠르게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져나가고, 귓가에 나지막한 재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빈우야.”
“응?”
“오래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
“돌아가자.”
그저 재현이의 기분이 풀려 이제야 돌아갈 생각이 든 거라고 생각했다.
외롭게 무너질 것 같은 재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이제 괜찮아 졌다고만 생각한 것이다.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재현이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재현이가 왜 그렇게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몇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낸 건지에 대해서도, 나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
.
- 딱 다섯 시간 기다려 줄게. 서울 도착하면 서빈우 제자리에 데려다주고, 나 만나러 와라.
.
.
돌아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니? 내가 널 버릴 거라는 생각? 아니면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돌아가는 동안 네가 느꼈을 감정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와.
‘아예 돌아오지 말까?’
차라리 네 말대로 했으면 좋았을까? 나는 여전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
* * *
“그냥 봐서는 절대로 모르겠지. 손을 다쳐서 검도를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말이야.”
죽도를 쥔 타인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도장 입구에 서서 무척이나 낮은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던 재현은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였다. 타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아니, 평온해보이기 보다는 감정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제 시간 안에 왔네. 무시하고 안 오면 어쩔까 생각 중이었는데.”
“……”
“빈우는?”
“자고 있을 거예요.”
“언제부터였더라? 네가 나한테 존댓말을 썼던 게.”
“……”
“예전에는 형, 형 그러면서 잘도 따랐는데.”
타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만 손을 움직였음에도 피곤함이 느껴지는 듯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던 타인이 재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전히 손에는 죽도가 쥐어져 있었다.
“죽도를 조금만 쥐어도 금세 손이 피로해지고 통증이 와. 제대로 된 시합은 할 수도 없지.”
“…….”
“그래도 오랜만에 대련 한 번 할까?”
타인의 말에 재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을 옮겨 도장 한 쪽에 연결 된 문을 열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는
죽도를 한 손에 쥔 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호구를 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봐주지 마라. 상대에 대한 예의 아닌 거 알지?”
재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타인과 재현의 죽도가 허공에서 맞부딪혔고,
마찰음을 내며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죽도를 오래 손에 쥔 채로 움직이기 힘든 타인은 빠르게 시합을 끝내려는 듯 재현을 몰아붙였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재현은 공격적인 모습보다는 타인의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없이 재현을 몰아붙이던 타인의 죽도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라 재현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모든 행동이 멈추고,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재현을 향해 타인은 쓴 웃음을 뱉어냈다.
죽도를 쥐고 있던 한 손을 천천히 떼어내고 호구를 벗은 타인이 재현을 향해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 없니?”
타인의 죽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재현은 손에 쥐고 있던 죽도를 아래로 내리고는 한 손을 이용해 호구를 벗어 타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허공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선은 각각의 복잡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형이 다칠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유재현.”
“정말로 형이 다칠 줄은 몰랐단 말이야. 난 그 장소에 형이 있는 지도 몰랐고, 형이 리아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 줄도 몰랐어.”
“내가 안 다쳤으면 리아는 더 크게 다쳤을 거야.”
“형.”
“넌 지금 정말로 잘못된 게 뭔지 모르겠어? 내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이제 와서 탓하자는 게 아니야.”
타인의 시선이 점점 차갑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기에
타인과 재현을 제외하고 사람 하나 없는 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어둠마저 내려앉은 공간,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내보이지 않던 재현의 두 눈이 조금 붉어져 투명한 눈물을 머금었다.
떨림을 담은 목소리로, 애원 섞인 목소리로 타인을 향해 애원했다.
“나한테서 빈우 뺏지마.”
“유재현.”
“형처럼 검도 관두라고하면, 나 그거 관둘게. 안 해도 좋아. 다른 거 다 잃어도 좋아.”
“지금 그게 중요해?”
“다 잃어도 좋아. 빈우만 뺏지마.”
“너 미쳤어. 서빈우는 어쩌라고.”
“…….”
“이 모든 사실을 알면 서빈우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너한테 배신감 따위랑은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느낄 거고, 그건 그 애한테 큰 상처를 낼 텐데!”
미동 없던 타인의 죽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대로 타인은 재현의 멱살을 잡았다.
타인의 목소리가 도장을 울리고, 잠시 이어진 침묵 속에 텅 빈 재현의 시선이 타인을 향했다.
천천히 입을 연 재현의 목소리는 소름끼칠 만큼 공허했다.
“형, 빈우 사랑해?”
“…뭐?”
“난 죽어. 걔 없으면.”
18.
“미쳤어. 아예 손 망가트리려고 작정 했어?”
굳어져 버린 타인의 손을 연신 주무르며 화를 내는 사빈의 얼굴이 무척이나 굳어져 있었다.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타인의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깬 사빈이 거실로 나서서 처음 본 것은 소파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타인이었다.
“잠깐 하는 것도 아니고, 몇 시간이나 손을 혹사시키면 어떻게 해?
사빈의 목소리에 짜증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평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드물었던 타인이었기에 더욱 답답한 듯 한숨까지 내쉬며 타인의 손을 응시했다.
다른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로 누워 있는 타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사빈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새근새근 숨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사빈의 도움으로 그나마 떨리던 손이 안정되어 가는 건지 타인의 상태가 점점 평온함을 찾아갔고,
타인은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사빈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빈아.”
“이제야 말할 생각이 좀 드는 거냐?”
“유재현이 서빈우 사랑한다더라.”
“유재현이랑 같이 있었어?”
“걔 없으면 자긴 죽는다고 하네.”
“…….”
“정말로 미친 거 같아.”
타인의 입에서 공허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을 주물러주던 사빈의 행동도 멈추었고
화가 난 듯 표정을 굳힌 사빈이 타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 새끼가 뭐라고 하는데? 말하지 말아달라고 네 앞에서 빌기라도 해?”
“아니.”
“그럼 뭐라고 했기에 네가 이런 상태로 그 새끼 얘기를 하는 건데!”
.
.
‘만일 이 일로 인해 서빈우가 날 버린다면,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다 무너트릴 거야. 같이 죽어버릴 거라고. 그러길 바라는 거 아니지?’
.
.
“사빈아. 우리 이 일 그냥 묻어 버리자.”
“이타인.”
“날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주라. 부탁이야, 사빈아.”
이 일로 인해 무너져야 할 사람은 재현이었지만 자신의 친구인 타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임에
사빈은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지치고, 피곤하고 슬퍼 보이는 타인의 모습에 사빈은 더 이상 타인에게 화를 내지 못했고,
새벽동이 트자마자 학교로 가버렸다. 텅 빈 집 안에는 타인만이 남았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타인은 소파에 누운 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지친 듯 바싹 말라버린 입술로 씁쓸하게 웃어 보이던 타인이 거실을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웠고
한참이나 휴대폰의 액정을 응시했다. 이제는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 타인에게 온 전화는 다름 아닌 빈우의 전화였다.
* * *
“폐인 생활이라도 했어요? 피부도 까칠해졌고, 입술 다 텄다. 머리도 부스스하네.”
“…….”
“폐인 생활한 게 아니라, 이제 나한테는 멋있는 모습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진짜 그런 거예요?”
“……”
“그리고 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교복은 또 왜 입고 있어요?”
혼자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와 마주하고 있는 선배는 지금껏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고
한참이나 떠들어대고 있는 내게 처음 건넨 말은 아주 짧고도 간단한 말이었다.
“괜찮아?”
“뭐가요?”
“괜찮냐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선배야말로 괜찮아요?”
투명한 컵을 매만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항상 단단하고 곧아 보이던 타인선배의 모습이 지금은 많이 흐트러지고 약해진 상태 같았다.
까칠한 피부도, 갈라진 입술도, 부스스한 머리도. 선배는 힘없이 웃으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가 엉망이면서 내게 괜찮냐 묻는 이 사람의 질문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재현이랑 바닷가에 갔었어요. 며칠 있다 올 줄 알았는데, 재현이 마음이 바뀌어서 금세 다시 왔지만요.”
“그랬어?”
“네.”
길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제 타인선배와 함께 나눌 얘기라는 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한 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선배에게 주기 위해서 사두었던 팔찌가 담긴 조그마한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뭇거리며 테이블 위에 그 상자를 올려두었다.
선배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움직였고 나는 애써 웃으며 선배를 향해 말했다.
“선물이에요.”
타인선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어차피 제자리로 돌아올 걸,
나는 뭘 그렇게 도망치려고 했던 걸까? 나지막하고도 슬프게 들리는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별 선물?”
“미안해요. 선배가 나한테 해준 게 많은 것 같은데 나는 해준 게 없는 것 같아서 이거라도 선물하고 싶었어요.”
“결국 네가 마지막으로 택할 사람이 나는 아니라는 소리구나.”
“선배”
“유재현 좋아하니?”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투명한 컵이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을 반사시켰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 보이자 선배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나는 선배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타인 선배를 바라봤고, 선배는 내 웃음의 의미를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
그대로 내가 건넨 선물을 손에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어.”
“네?”
“학교에서 보면 종종 아는 척은 하자.”
“선배.”
“선물 고맙다.”
웃는 얼굴이 아파보일 수도 있구나. 내게 웃어 보이던 선배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선배가 카페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나는 조금 전 타인 선배가 앉아 있었던 그 자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안녕이란 인사도 부질없을 만큼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말이다.
“고마웠어요, 선배.”
당사자에게 들리지 않을 감사의 인사가 허공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여전히 내 세상은 캄캄한 어둠이면서도 잠을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래 생각했다.
나의 세상에는 절대로 내게 등을 돌리지 않을 유재현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 * *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유재현의 옆에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고 웃으며 예전처럼 재현이를 대했다. 가끔 학교에서 타인선배를 만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선배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넬 뿐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날 배려한 것일 지도 모른다.
사빈선배와 함께 있을 때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방학을 하고 난 뒤에는 두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리아라는 아이는 몸이 아파서 학교를 쉬게 된 것이었고, 다시 복학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재현이와도 아는 사이가 같았지만 다시금 학교에 그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재현이는 처음처럼 당황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이냐고 물어보면 그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구였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더 이상 그 아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이상의 질문을 건네지도 않았다.
재현이가 내게 더 이상 이타인에 관한 걸 묻지 않는 것처럼 무언의 약속인 듯 나 역시 이리아에 관해 묻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묻어둔다고 해서 그대로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너무 뜨거워. 열 있잖아.”
날씨가 추워져도 감기조차 걸리는 걸 몇 번 보지 못했을 정도로 재현이는 건강했다.
자신의 몸 관리를 그만큼 철저하게 하기도 했고,
평소 꾸준히 하던 운동덕분인지 몸이 아픈 걸 본 적이 거의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랬기에 이런 재현이의 모습은 내게 무척이나 낯설고도 당황스러웠다.
“진짜 괜찮은 거야?”
심한 감기에 걸려 끙끙대는 재현이를 보며 병원에 가자 말했지만 재현이는 금방 괜찮아 질 거라며 손을 내저었다.
무서워서 병원에는 안가겠다고 떼쓰는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참 고집불통이었다.
화를 내보기도 하고, 입을 삐죽여봐도 재현이는 괜찮다며 웃어 보이는 게 전부였다.
식은땀으로 인해 온 몸이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 좀 끓여줄까?”
“괜찮아.”
“뭐 좀 먹어야 약도 먹고 그러지. 하필이면 아줌마, 아저씨 없을 때 아프고 그래.”
“그러게.”
“너 목소리도 갈라졌다. 더 심해지기 전에 병원가자, 재현아.”
재현이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재현이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몸이 아파서인지 평소보다 너무도 쉽게 내 작은 힘으로도 자신의 몸이 움직이자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는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이 웃겨서 짧게 웃음을 터트리자 재현이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왜 웃어?’ 라며 물어왔고
나는 ‘너 아프니까 진짜 어린 애 같아.’ 라고 대답하며 재현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병원가자.”
옷을 챙기려 몸을 일으켰는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재현이가 날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만 그대로 날 잡아 당긴 것이었고 어느새 재현이의 턱이 내 어깨 쪽을 누르는 듯 하더니만
내게 기댄 채로 새근새근 열에 들뜬 숨을 내뱉고 있다. 내게 거의 안기다싶은 자세로
열에 들뜬 숨소리를 내뱉는 재현이를 가만히 두었다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프니까 좋다. 서빈우한테 내가 어리광도 부릴 수 있고.”
재현이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뭐?”
“매일 너만 어리광 부리잖아.”
“아무리 그래도 아파서 좋다니. 난 걱정돼 죽겠는데.”
얄밉다는 듯 재현이의 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자 재현이는 꽤나 아팠던 듯
내 어께에 묻었던 얼굴을 들더니만 입을 삐죽여 보이고 있었다.
내가 아플 때는 무슨 투정을 부리던 다 받아줬는데 자기가 아플 때는 왜 그러지 않냐는 말을 중얼대며 그대로 누워버리는 녀석이었다.
팔을 뻗어 다시금 재현이를 일으켜보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진짜 안 일어날 거야?”
“자고나면 괜찮아.”
“괜찮기는. 더 심해졌잖아.”
“병원 가기 싫어.”
“진짜 어린애 같아. 알아?”
아무리 구박을 해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내보이려는 듯 이불을 쭉 끌어올려 목 끝까지 덮어버리는 유재현이었다.
평소 어른스럽고 해야 할 일을 똑바로 하던 재현이었기에 이런 어리광은 낯설면서도 뭔가 유재현 답지 않았다.
아프면 다 이렇게 어리광쟁이가 되나?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지갑을 챙겨 들고 그대로 재현이의 방을 나섰다.
“약이라도 사올 테니까 그럼 좀 자고 있어.”
병원에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재현이 때문에 일단 감기약이라도 사와야 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재현이를 위해서 죽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약국과 마트에 가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사고는 그대로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죽을 만들 재료를 사서 마트를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을 사고 장을 보는데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소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나를 볼 때
오늘만큼은 무척이나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신호등이 고장 났나, 왜 이리 신호가 안 바뀌어?”
더운 날씨이든 추운 날씨이든 한 곳에 오래 서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짜증스러움이 밀려와 결국 횡단보도로 건너는 걸 포기하고는 골목 사이로 가는 지름길을 택했다.
처음 이타인과의 만남에 의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다니기보다는 큰 길로 다녀야한다는 교훈을 얻었었는데
고새 그걸 잊은 채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좁은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타인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의 이질적이고도 묘하게 어긋난 모습에 매력을 느꼈었지.
그 꿈은 정말로 이타인을 만나게 된다는 예지몽이었던 걸까? 아니면 우연이었던 걸까?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꿈이 들어맞은 건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 생각하자, 다 지나간 일 뭐 하러 떠올려.”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이타인에 관한 일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을 때가 있었다.
재현이의 앞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데도 가끔씩 이런 경우가 생기고는 했다.
뭐, 오늘은 유재현이 아픈 바람에 혼자인 상태라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번째 골목에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몸을 틀려는 순간,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와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누군가의 모습에 그대로 멈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른쪽 벽을 돌려던 내 몸은 어느새 그 벽에 가려진 채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난 일을 가지고 왜 또 이제와서 얘기를 꺼내?”
“그게 어떻게 지난 일이야?”
“사빈아.”
이런 우연은 반갑지 않았다.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아주 극히 적은 확률의 우연한 만남이었고
학교 밖에서는 두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사빈선배는 내가 타인선배의 곁을 떠나버린 후로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마주친다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불편한 일들 중 하나였다.
그저 막연히 집으로 빨리 가고 싶어 선택한 그 골목에 사빈선배와 타인선배가 함께 서 있었다.
화가 난 듯 굳어진 사람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이대로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더 싸해질 분위기를 예상했기에
그대로 발걸음을 반대편으로 다시 돌리려 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난 학교에서 서빈우랑 유재현이 함께 웃으면서 같이 다니는 거 보면 속이 뒤틀리는데.”
이어진 사빈선배의 말에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역시나 나에 대한 미움이 강했구나.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지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에 결국 그대로 멈춰 서서 두 사람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만 해.”
“넌 잃은 것도 많고, 아프기도 한데 그 녀석은 멀쩡해. 그 자식이 원하는 건 손에 다 쥐었어. 근데도 넌 억울하지도 않아?”
“안 억울해.”
“이타인, 정신 좀 차려. 너랑 나를 제외하고서라도, 서빈우는 어쩔 건데? 걘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유재현 옆에 있어야 하는 건, 걔한테도 못할 짓이야. 걘 평생을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쳤다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그 죄책감은? 그 외로움은?
사실은 그게 아닌데도 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어. 그냥 둬.”
“그게 과연 서빈우가 행복해지는 일 같아? 자신을 속인 유재현의 옆에 남는 게,
정말로 서빈우가 행복해지는 결과라고 생각하냐고.”
“다시 한 번 그 일에 대해 언급하면 너라도 용서 안 해.”
“…이타인.”
“그만하자, 사빈아. 나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도, 힘들어하고 싶지도 않아.”
“……”
“그만하자.”
그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두 사람의 격해진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와 재현이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 얘기들뿐이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왔고 다리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자꾸만 힘이 풀리는 듯 몸이 휘청였다.
간신히 옆의 벽에 손을 짚고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두 사람을 응시했다.
타인선배는 어느새 멀어져가고 있었고 그런 타인선배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사빈선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 듯 꽉 쥐어져 있는 주먹을 보고도 사빈선배의 감정이 지금 무척이나 격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빈우는 어쩔 건데? 걘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유재현 옆에 있어야 하는 건, 걔한테도 못할 짓이야.’
‘걘 평생을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쳤다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그 죄책감은? 그 외로움은? 사실은 그게 아닌데도 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속인 유재현의 옆에 남는 게, 정말로 서빈우가 행복해지는 결과라고 생각하냐고.’
나에 관한 말이다. 나와 재현이에 관한 말이야. 내가 모르는 사실은 뭐고, 재현이가 내게 뭘 속였다는 거지?
사실이 그게 아닌데 내가 죄책감과 외로움을 지닌 채 평생 살아야 한다고? 왜? 대체 뭐 때문에?
무언가에 홀린 듯 움직이지 않던 걸음이 조금씩 움직였고 어느새 나는 사빈선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타인 선배의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고,
담배를 꺼내 물었던 사빈선배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입에 물었던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재현이에게 먹일 약과, 죽을 만든 재료를 담은 봉투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를 담은 사빈선배의 시선이 한없이 흔들림을 안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서빈우, 네가 어떻게 여길……”
“조금 전에 타인선배랑 했던 말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
“유재현이 날 속였어요?”
“……”
“말해요!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
.
태양이 삼켰던 어둠. 이제는 반대로 그 어둠이 서서히 태양을 물들이고 있었다.
19.
‘네 꿈은 예지몽이 아니었어. 그 꿈을 전해들은 누군가가 그와 똑같은 상황을 만든 거야.’
너는 내게 빛이었어. 너무도 밝았던 빛이어서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나의 태양.
‘널 혼자로 만들고 그 옆에 있어줬던 거야.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네 옆에 있을 수 없게 만든 거지.’
너와 나는 함께였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내 옆에 있어주었고 넌 내게 등 돌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었어.
‘네 꿈에 대해 전해들은 그 누군가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유재현이 네게서 밤을 빼앗은 거야. 리아가 돌아왔을 때 유재현의 상태 기억하고 있어?
리아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더 자세히 듣고 싶으면 리아를 찾아가 봐.’
사지가 잘려나가는 기분이야. 심장이 먹먹해져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아.
.
.
‘착각하지마. 이 상처는 너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그저 사고였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네가 설령 유재현이 칼에 찔려 죽는 꿈을 꿔서 다음 날 내가 정말로 죽었다고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사고일 뿐이지.’
그런 네가, 그렇게 말했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쾅- 하는 문소리에 이어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들뜬 숨을 내뱉고 있었던 재현이는 어느새 열이 조금은 내려간 듯 침대에 앉아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세게 열린 문소리에 놀란 듯 나를 응시하는 재현이의 시선에 의아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나와 재현이의 사이를 감쌌다. 그 거리가 너무도 멀어 보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떨림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재현이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물을 흘렸다.
“빈우야.”
내 눈물에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이 아픈 몸을 이끌고 다급히 내게 다가서려 한 순간,
“비누도…”
“……”
“네가 죽였어?”
그대로 재현이의 걸음이 멈추고 녀석과 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놀란 듯 나를 응시하는 재현이의 시선이 한없이 흔들렸다.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하란 말이야, 재현아. 아니지? 내가 잘못들은 거야. 은사빈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나한테 이래.
“…빈우야.”
“아니지?”
“빈우야.”
“아니야, 그치? 다들 너랑 나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너와 내가 너무 단단하게 얽혀 있으니까,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서로 멀어지지 않으니까. 너랑 나 떼어놓으려고 장난치는 거야. 그치?”
“……”
“재현아, 아니지?”
“……”
“왜…아니라고 말을 못해? 말해!!! 말 하란 말이야!!!”
찢어질 듯 한 내 목소리가 그 공간을 울렸다. 내가 아무리 울어도 재현이는 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떨고 있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이라며 아무리 소리쳐도 넌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건네지 않았다.
“미안해 빈우야.”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네가 운다.
네가 울고 그 눈물에 내가 운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태양이, 나의 세상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 *
“무슨 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야. 여태 뭐 들었어?”
“은사빈.”
“너랑 나랑 떠드는 얘기를 서빈우가 들었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고.
아마 지금쯤 유재현은 땅 끝까지 추락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은사빈!!”
타인의 외침이 그 공간을 가득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침없이 사빈의 멱살을 잡은 타인의 손이 희미한 떨림을 안고 있었다.
화가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싸늘한 시선으로 사빈을 바라보고 있던 타인의 두 눈이 붉어져 있는 것도 같았다.
“이미 다 들었다니까. 너랑 나랑 떠드는 얘기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내용의 대화들이었어.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그 뜻을 알 수 없는 대화였다고.”
“화를 내며 자신을 속인 게 뭐냐고 묻는 애한테, 내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데?”
“은사빈!”
“넌 유재현 때문에 꿈을 잃었어. 내가 아끼는 리아는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
“내가 왜 그 자식한테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 건데? 서빈우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야. 걘 피해자니까.”
“제정신 아닐 거야. 서빈우 보고 그 큰 상처를 어떻게 감당해 내라고. 걔는 어쩌라고.”
“……”
“내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잖아!!”
타인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고 그 눈물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사빈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 보였다.
재현을 미워하긴 했지만 이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빈우였다.
그걸 사빈 역시 알고 있었고 타인이 부탁한 일이기도 했지만
불안감에 소리치는 빈우에게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난 후였던지라 후회를 해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싸우지도 않던 두 사람이 목소리 높일 만큼 중요한 일이 터진 모양이네.”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으로 향했다.
외출을 하려는 건지 옷을 챙겨 입은 리아가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을 응시하더니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지는 대충 짐작 가는데, 왜 두 사람이 싸워? 대체 왜 유재현과 서빈우의 일로 둘이 싸워야 하는 건데?”
“리아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약속 있어서 나가려는 거면 조용히 나가.”
“무슨 약속인지는 안 물어봐?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빈우가 나보고 잠깐 만나자는데, 어떻게 해?”
타인의 두 눈이 놀란 듯 커지고 사빈은 그대로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타인의 상태에 리아 역시 불편하고도 걱정스러운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울더라. 미쳐버린 사람처럼 울면서 나보고 만나자는데, 어떻게 하냐고.”
“…….”
“이미 다 알고 전화했으면서, 나한테 무슨 얘기를 들으려는 건지.”
“…나가지마.”
“그럼 어떻게 하라고?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 아니야.
이건 서빈우가 알아야 할 일이기도 하고, 이미 모든 일에 대해 대충은 알게 된 상태고.”
“…….”
“오빠가 아무리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사빈의 멱살을 잡고 있던 타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대로 타인은 눈을 감아 버렸다. 차라리 현실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 * *
‘어릴 적 세 번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야. 유재현이 다쳤던 꿈도 네가 꾼 꿈대로 일어난 현실이지.
하지만 세 번까지는 우연에 불과하다며 너 역시 큰 불안감을 갖지 않았지.
하지만 나이가 들고 또 다시 꿈과 현실이 들어맞기 시작하자 너는 네 자신을 믿지 못하고 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지.
넌 남들과 다르다며 말이야. 하지만 그건 네 꿈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네 꿈에 대해 전해들은 유재현이
그 꿈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낸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마음이 커졌던 유재현이 널 옭아매려 한 거지.
네 꿈 때문에 사람이 죽은 적은 없지? 그저 다치는 정도로 끝났으니까. 그걸 모두 유재현이 누군가에게 지시한 거야.
그 꿈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낸 거지. 그 통화 내용을 내가 직접 들었고,
모든 사실이 드러날까 불안감을 느꼈던 유재현이 날 계단에서 밀었어.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타인오빠는 날 구하려다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검도를 관뒀지. 너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꿈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적 거의 없지?
이미 네가 유재현의 곁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기에 유재현이 그 일을 멈춘 거야. 그리고 내가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지?
네가 타인오빠에게 기댔기 때문에 유재현이 경고차 했던 행동이겠지. 이게 내가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의 전부야.
네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그대로 살면 되는 거지만,
지금 내가 한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다는 걸 명심해 둬.’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손끝이 떨려 컵을 제대로 잡는 것조차 힘이 들었고 그대로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는 꿈에 대해서는 분명 재현이에게 그 꿈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했었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어릴 때는 그것이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고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내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 결과, 나는 유재현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고 했었다.
친구처럼 지내는 아이들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고 항상 일정한 선을 그어뒀었다.
그렇게 나는 유재현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리아의 말대로 중학교 때까지 몇 번 정도 들어맞던 꿈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 해, 타인선배의 꿈과 비누의 꿈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나는 분명 비누의 꿈에 대한 얘기를 유재현에게 했었다.
하지만 이타인의 꿈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유재현이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잖아. 그건 우연인가?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계획된 거니?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야?
“미쳤어, 돌았어 유재현.”
붉어진 두 눈이 점차 흐릿해져만 갔다. 이리아는 이미 자리를 뜬 상태였지만 나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고 나서야 카페를 나섰고 멍한 초점을 유지한 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헛웃음이 자꾸만 입가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너에 대한 배신감이, 너를 잃어야 한다는 상실감이 나를 잠식해간다.
“빈우야.”
울지마, 네가 왜 울어. 울어야 할 사람은 나야.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언제부터 나를 기다렸던 걸까? 안 그래도 감기기운이 있던 녀석이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아픈 걸 알 수 있을 만큼 수척해진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린 채로 유재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아니다, 이게 꿈이면 또 다시 이 꿈이 현실에서 일어날까?
“유재현.”
“울지마. 내가 미안해, 빈우야.”
“죽여 버릴 거야, 너.”
“그래, 차라리 죽여.”
“용서 못해 유재현.”
“빈우야.”
“죽일 거야. 절대로 용서 안 해.”
“삐뚤어진 생각으로 너한테 몹쓸 짓 한 거 나 후회하고 있어. 이제 안 그럴게.”
“날 속였어. 그 긴 시간동안 너는 나를 속였어.”
“나 너 없으면 안 돼. 빈우야.”
“……”
“나 버리지마.”
날 버린 건 너야.
“그러지마 빈우야.”
네가 날 버린 거라고. 네가 날 배신했어.
“차라리 죽여. 너 없으면 나 죽어 빈우야.”
“그럼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 해. 재현아.”
“……”
“그럼 믿을게. 응?”
“…빈우야.”
“제발 아니라고 말 해.”
“……”
“제발…”
쏟아지는 눈물 앞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네 손을 잡고 아무리 애원해도 너는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애원해도, 내가 부정하는 현실은 꿈이 아니었다.
너를 용서할 그 어떤 구실도 찾지 못해. 재현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내가 없으면 죽어?
그런데 왜 그랬어. 널 용서할 단 하나의 이유라도 남겨줬어야지.
‘너 없으면 나 죽어 빈우야.’
.
.
“유재현은 이제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사라져.”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다던 너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았던 그 말. 태양이 사라지고 달이 기울었다.
밤을 찾았다 해도 여전히 잠들 수 없는 나의 세상은 어둡고도 두려움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잠들 수 없는 나의 세상.
20.
“괜찮은 거야?”
“괜찮아 보여요?”
“아니.”
“근데 왜 괜찮냐고 물어봐요. 안 괜찮은 거 알면서.”
웃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엉망으로 갈라진 입술이 웃으려고 할 때마다 싸한 통증을 만들어냈다.
차가운 냉수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들어 타인선배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픈 건 나인데 왜 선배 얼굴이 더 수척해요? 야위어 있는 타인선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씁쓸한 웃음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울었다. 그리고 며칠은 미친 사람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바쁘게 생활을 해보기도 했고, 하루 내내 잠만 잔적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 긴 시간동안 유재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에게 재현이의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디 갔다 왔어?”
“여행이요. 엄마 아빠한테도 말 안하고 가는 바람에 실종신고까지 해서 난리 났었어요.”
“서빈우.”
“그래도 마음은 조금 나아졌어요. 혼자 여행하는 거 무서웠는데, 그것도 이제는 나름 괜찮네요.”
“살 너무 빠졌다. 제대로 먹고 다니긴 하는 거야?”
“선배야 말로 제대로 먹고 다니긴 해요?”
내 반문에 타인선배는 힘없이 웃어 버렸다. 둘 다 서로에게 뭐라 할 처지가 되지 못할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빈 선배는 어떻게 지내요?”
“아, 사빈이 미국 갔어.”
“네?”
“가기 전에 네 얼굴 보고 싶어 했는데, 하필 네가 말도 없이 여행가 버리는 바람에 그것조차도 못 했다고 미안해하더라. 사과 하고 싶어 했어.”
“뭘요?”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그 사실들 감춰줄 걸 그랬다고 말하더라.”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입 안 가득 텁텁한 느낌이 전해졌다.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를 꺼낼 때, 웃어넘길 수 없다는 건 아직도 그 상처가 내게 크다는 걸 뜻하겠지.
“못됐네요. 이미 다 저질러 놓고 그렇게 말하는 거.”
“그러게.”
“미안하다는 말은 나중에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해요. 다른 사람 통해서 듣는 사과는 썩 유쾌하지 않으니까.”
“그래.”
“근데 왜 갑자기 미국에 갔어요?”
“아, 리아 때문에.”
“이리아요?”
“복학준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꾸더니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했거든. 리아가 아예 질려버렸더라.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다고 하네. 사빈이가 리아를 많이 아껴. 병원에 있을 때도 자주 찾아가고는 했는데,
이번에 리아가 유학 결정하자마자 자기도 공부 하고 싶고 리아 혼자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함께 갔어.”
“대단하네요, 그 결단력.”
“그래.”
“근데 이리아가 뭐에 질렸다는 거예요? 잘 지내던 것 같았는데.”
나를 응시하던 선배의 시선이 잠시 창가 쪽으로 향했다. 분주히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차고,
다시금 내게 시선을 돌린 선배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유재현 말이야.”
“네?”
“소식 들었니?”
잠시 멍해진 시선을 보냈다. 내 앞에서 그 누구도 재현이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 아빠가 혹여 재현이에 대한 얘기를 꺼낼까봐 집에 있을 때는 거의 방에 혼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선배의 입을 통해 재현이의 소식을 듣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손끝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리아가 유재현을 찾아갔었는데, 그 녀석이 손목을 그었어.”
멍해진 머릿속이 점차 새하얘져간다.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에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리아가 보는 앞에서 그랬나봐. 미친놈이야, 정말로.”
“…하.”
“너 사라졌을 때, 찾지도 않던 녀석이었어.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죽으려고 하더라.”
“……”
“난 그 녀석이 무언가에 욕심내는 걸 못 봤는데. 무섭기까지 했어. 정말로.”
타인 선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그려졌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선배를 바라봤고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없으면 죽는다 말했던 녀석이었다. 넌 정말로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런 상처를 준 거니?
양면적인 네 사랑에 나는 어찌해야 좋은 건지 길을 찾지 못해. 감았던 눈을 뜨고는 선배와 시선을 마주했다.
미워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을까? 유재현이 죽을 만큼 미우면서도 나는 녀석을 잘라내지 못했다.
내 사랑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괜찮아요?”
“아직 병원에 있어.”
“선배. 나요, 여행가 있는 동안 유재현 생각 많이 했어요. 그 새끼가 나한테 한 짓을 다 알고도 너무 보고 싶은 거 있죠.”
“그랬어?”
“미친 건 나일지도 몰라요.”
“빈우야.”
“아무도 나한테 그 녀석 소식을 얘기해주지 않더라고요.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드는 건 뭐예요?
끔찍하게 미워요, 그 녀석이. 근데 돌아서면 유재현의 얼굴이 떠올라요.”
“어떻게 하고 싶니?”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떠난 건데, 결국 다시 돌아왔잖아요.”
웃고 있었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흘릴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손을 뻗어 얼른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게 슬프기 만한 얼굴로.
“울지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널 위한 쪽으로 결정해.”
“……”
“네가 유재현을 다시 받아들인다고 해도 누구 하나 널 비난하지 못해.”
“……”
“그러니까 서빈우 네가 가장 행복해지는 쪽으로 결정해.”
눈물을 닦아주던 선배의 손이 멀어지고 이내 테이블 위에 조그마한 종이 하나가 놓였다.
의아한 듯 선배를 바라보는데, 옷과 지갑을 챙겨든 선배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게 무언의 말을 남기고 그대로 멀어져 갔다.
“재현이 있는 곳이야. 버릴 거면 버리고, 가서 얼굴 볼 거면 봐.”
내가 재현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심장의 반이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이미 선배의 자리는 비워졌고
나는 한참 후에야 그 종이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가 적어준 주소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병원이름과 병실의 호수가 적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손목을 그었어.’
미친 새끼. 네가 뭘 잘했다고 죽으려고 해.
걸음이 더욱 더 빨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네가 있는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듣는다면 미쳤다고 할지도 몰라.
다신 네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만들어. 네가 뭔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병실 앞에 서서 유재현의 이름을 확인하고도 나는 한참이나 문을 열지 못했다.
“하아.”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너의 모습이 보였다.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얼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너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건지 너는 미동조차 없었다. 죽어버린 사람 같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너는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네가 설령 유재현이 칼에 찔려 죽는 꿈을 꿔서 다음 날 내가 정말로 죽었다고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사고일 뿐이지.’
“빈우야, 미안해.”
창가를 응시하고 있던 녀석의 입술이 움직이는 가 싶더니 천천히 내게 건네는 사과를 뱉어냈다.
내가 있는 줄도 모르면서, 아무도 없는 병실에 대고 말이다. 내가 아는 유재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지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정말로 내가 네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넌 죽을 거니?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그대로 돌아서서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서빈우 네가 가장 행복해지는 쪽으로 결정해.’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 것. 이미 답은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었다. 바보처럼.
* * *
열린 창을 통해 바람이 새어 들어와 땀이 흐른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싸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려고 해도 무겁게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로부터는 잠을 자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꿈을 꾸지도 않았었다.
헌데, 지금 이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캄캄한 어둠속, 그 안에 단 한곳만 불빛이 들어찼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들어찬 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낯익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섰다.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꿈일까? 아니면 현실이니?
“저기요, 잠깐만요.”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상할 정도로 나를 감싸는 공포감과 불안감에 온 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남자의 곁에 가까이 다가서려 해도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앞을 향해 걷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고
천천히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순식간에 트럭 한 대가 남자를 치고 지나갔다.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도로에 쓰러진 남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망치려 그대로 뒤를 향해 손을 짚은 순간,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의 모습에 도망치지 못하고 앞을 향해 기어가듯 몸을 옮겼다.
“안 돼. 안 돼.”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손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은색의 심플한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팔찌.
내가 재현이와 타인선배에게 각각 선물했던 그 팔찌와 똑같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 팔찌의 모양이 확실해지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 돼!!”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던 모습. 눈을 떴을 때, 싸한 느낌이 손끝부터 전해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나의 꿈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유재현이 내 꿈을 현실에서 만들어 낸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꿈을 꾼다 해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자마자 조금 전의 상황이 마치 실제 상황이었던 것처럼 손끝에 통증이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다가 텅 빈 방안을 둘러봤다.
“꿈이야, 꿈이잖아 서빈우. 꿈이라고.”
아무리 내 스스로를 달래 봐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집을 뛰쳐나갔고, 어딘가를 향해 뛰고 또 뛰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쾅쾅-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리자 얼마 후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이 놀란 듯 나를 응시했다.
“서빈우?”
“괜찮아요?”
“뭐?”
“다친 데 없어요? 괜찮아요?”
“왜 그래, 너.”
나를 응시하는 타인선배의 시선에 또 다시 불안감이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날 잡아주더니 이리 저리 내 상태를 살폈다.
선배의 손에는 은색의 팔찌가 고스란히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데도 다친 데 없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다쳐?”
“그래, 꿈이에요. 꿈이야. 그대로 일어날 리가 없어.”
“빈우야.”
“너무 생생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만 같아서, 그래서 무서웠어요.”
“또 꿈 꾼 거야? 아직도 시달려? 그래, 꿈이야. 네 꿈은 이제 현실로 일어나지 않아 빈우야.”
선배는 손을 뻗어 나를 안아주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구겨 신은 채 달려온 내 모습에
그렇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나의 세상에는 밤이 찾아왔고 이제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세상에 있었지만 여전히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곳은 대체 어디니?
* * *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선배는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내게 말했다. 불안해하는 내 상태를 걱정했던 것이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터벅터벅 지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갑자기 사라졌으니 또 엄마에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현관 앞에 섰는데 벌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뭔가 다급한 듯 집을 나서려던 엄마와 시선이 마주했다.
“엄마.”
“빈우야.”
“아,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왔어.”
“빈우야, 어쩌면 좋니.”
“왜 그래? 그리고 갑자기 급하게 어딜 그렇게 가?”
“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구나.”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생겼어?”
“빈우 네가 갑자기 혼자 여행가는 바람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재현이 부탁이기도 해서 얘기 안 했는데,
재현이가 병원에 입원을 했었어. 착실하고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엄마.”
“설명하자면 긴데, 재현이가 손목을 그어서 병원에 입원을 했었거든. 근데 재현이가 오늘 갑자기 병원에서 뛰쳐나갔나봐.”
“뭐?”
“사고가 났다더구나.”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지고 내게 무언의 말을 건네는 엄마의 말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귀머거리처럼 그렇게 귀를 막고,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을 건네지 못했다. 아, 왜 나는 이제야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일까?
‘진짜 특이해. 오른 손에 차면 안 불편해?’
‘응, 난 이게 편해.’
.
.
꿈에서 봤던 남자는 은색의 팔찌를 오른손에 차고 있었다.
21.
“재현아!!! 재현아!!!”
찢어질 듯 끔찍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엄마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상태였다.
널 다신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네가 너무 미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죽는다고 말하던 네게 등을 돌린 건 날 속인 너에게 주는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끔찍하게도 너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널 찾지 않았다.
이중적인 내 사랑에, 그리고 네가 준 배신감에 점점 숨이 가빠져 왔다.
“말도 안 돼.”
재현이는 수술실로 곧바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붉은 피가 떨어져 있었다.
네가 아파한 증거, 네가 죽어가는 증거. 거짓말이야. 내 꿈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잖아. 네가 만들어낸 상황이었잖아.
근데 왜 내 꿈이 또 다시 현실에서 일어나. 나 벌주는 거니? 끝까지 이렇게 나 괴롭힐래?
“안 돼. 죽지마.”
붉은 피를 보고 나서야 네가 나를 정말로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줌마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 그리고 수술실에서 생과 사의 선을 넘나들고 있는 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재현아, 네가 없으면 나는 무너져. 그런 내게 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니?
널 놓을 수 없으면서도 널 곁에 둘 수 없는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네가 죽을까봐 겁이 나.
숨도 못 쉴 정도로 달려 왔는데 널 볼 수가 없어. 심장이 죽을 만큼 뛰어도 죽지는 않아.
내가 지금 그래. 눈 감지마 유재현. 다 용서할게. 네가 나한테 어떤 잔인한 짓을 했던지 다 용서할게. 죽지마. 곁에 있어줘. 부탁이야.
* * *
“누가 보면 너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인 줄 알겠다.”
“……”
“유재현 안 죽었어. 살았잖아, 근데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해?”
“눈을 안 뜨잖아요.”
“뜰 거야. 그러니까 너부터 정신 좀 차려.”
병원 냄새가 너무도 싫었다. 지독하게 무거운 조용함도, 일정하게 들려오는 기계음도, 모두 다 싫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누워있는 네 모습을 응시하는 것은 내게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한 상처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유재현의 곁을 지켰다. 타인 선배가 소식을 듣고 가끔 찾아와서 나를 챙겨주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넘어서 화를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 스스로가 내 몸을 돌보지 않았기에 선배는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 내가 꿈을 꾸고 선배가 다쳤을까봐 뛰어갔던 날, 기억해요?”
“빈우야.”
“왜 나는 그 순간, 재현이가 다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요?”
“네 탓이 아니야. 이제 다 알았잖아, 네 꿈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아니요. 어릴 적 세 번은 진짜였고, 그 뒤에는 유재현이 만들어 낸 상황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 꿈과 현실이 맞아 떨어진 거예요. 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섯 번째구나.
나 선배랑 만나는 것도 꿈꿨었거든요.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진짜로 내 꿈이 현실에서 들어맞은 거라고요.”
“서빈우.”
“어쩌면 유재현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내 꿈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재현이가 그 횟수를 늘렸던 것뿐이지 결국 우연이 아니란 거예요.”
고개를 숙인 채 또 다시 울었다. 갈라진 입술과 볼품없이 말라버린 두 손, 선배는 그런 내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왜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냐며. 자신은 욕심을 버렸으니 그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몇 번의 발작이 있은 후에는 아예 죽은 사람처럼 눈을 뜨지 않았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일정한 호흡만을 뱉어내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은색의 팔찌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재현이의 표정은 평온해보였지만 금방이라도 날 떠나버릴 것 같아서 무척이나 불안해보였다.
“재현아, 나 힘들어.”
“……”
“네가 자꾸 잠만 자니까 내가 잘 수가 없어. 네가 옆에 있어줘야 내가 잘 수 있는 거 너는 알잖아.”
“……”
“자꾸 이렇게 나 힘들게 할 거야?”
“……”
“눈 떠, 제발. 안 떠날게. 네 옆에 있을게.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그렇게 웃자. 네가 이대로 눈 감으면 난 어떻게 살아.
내가 그런 꿈을 꿨는데, 그리고 네가 사고가 났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 재현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평온한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지쳐가고만 있었다.
애써 웃으며 괜찮은 척도 해보고 네가 깨어날 때까지 버티기 위해 타인선배의 말대로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고는 했다.
그대로 다 토해버린 적도 있었지만 나름 강하다 싶을 정도로 그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병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항상 미안하다 말했고 엄마는 내 걱정을 하며 네 몸부터 챙기라 말을 하고는 했었다.
그 날 역시 새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재현이의 옆을 지켰다.
불편한 자세로 간이의자에 앉아 허리를 굽힌 채 침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과 습한 공기 속에 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가 손을 꽉 쥐는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천천히 눈을 떴다.
“재현아.”
어느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재현이가 날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꿈일까? 아니면 현실이니?
아무래도 좋아. 재현아, 내가 여기 있어. 그러니 너도 내 옆에 있어야 해.
“왜 이렇게 말랐어.”
“너 때문이잖아. 왜 자꾸 내 속 썩여.”
“미안해, 빈우야.”
“미안한 거 알면 나한테 자꾸 이러지마.”
“나 많이 밉지?”
“그래, 미워죽겠어.”
“나는 너를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것이 싫었어. 완전한 나만의 서빈우를 원했어.”
“재현아.”
“잘못된 걸 알면서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
“미쳤다고 해도 좋아. 아니, 난 미쳤어.”
“……”
“사랑해 빈우야. 난 죽어서도 너 사랑할 거야.”
“재현아.”
“이렇게 죽어서라도 네 마음속에, 기억 속에 남을 거야. 영원히.”
재현이의 큰 손이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푹 쉬어.”
단 한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재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재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 네가 앉아 있던 차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그렇게 모습을 감춰버렸다. 땅 끝까지 추락하는 느낌과 함께 몸에 힘이 풀리고 누군가가 내 어깨를 세게 쥐었다.
뜨거운 눈물이 눈가를 적셨고 몸을 일으키자 놀란 듯 나를 응시하고 있는 타인선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꿈 꿨어? 왜 울어?”
거친 숨을 뱉어내며 시선을 살짝 틀자, 여전히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내뱉고 있는 재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이러지마. 너는 나를 떠나면 안 돼. 또 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 재현아.
“선배, 나 꿈을 꿨어요.”
“꿈?”
“재현이가 날 떠나는 꿈이요. 아주 영영 떠나버리는 꿈.”
“빈우야.”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재현이 때문이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었던 거겠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난 살 수 없어요. 이 애가 없으면, 살 수 없어.”
.
.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네가 설령 유재현이 칼에 찔려 죽는 꿈을 꿔서 다음 날 내가 정말로 죽었다고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사고일 뿐이지.’
재현이가 내게 했던 말이 귓가를 울렸다. 재현아, 어릴 때 내가 꿈을 꾸고 넌 크게 다쳤어.
그리고 다 커버린 지금, 나는 또 다시 네가 사고를 당하는 꿈을 꿨고 넌 이렇게 누워만 있어.
그리고 오늘, 네가 나를 영영 떠나는 꿈을 꿨어. 넌 날 떠날 거니? 그럴 거야?
“선배.”
“응?”
“나 잠깐 혼자 있게 해줘요.”
“빈우야.”
“부탁이에요.”
내게로 뻗으려던 선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없이 돌아서서 병실 문으로 걸음을 옮겼고 선배가 문을 닫고 병실을 나서기 전 나는 나지막이 선배를 향해 말했다.
“고맙고 미안해요 선배.”
내 목소리가 선배에게 전해졌을지 전해지지 못했을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만일 네 말대로 네가 다치거나 죽는 꿈을 꾼다면, 나는 그게 현실이 되지 않도록 눈을 뜨지 않을 거야. 영원히.’
“일부러 그런 거야?”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에는 웃음이 그려졌다. 재현아. 나 졸려. 그런데도 잘 수가 없어.
네 곁이 아니면 나는 언제든 나쁜 꿈을 꿨잖아. 이제 편히 자도 될까? 그래도 될까?
‘사랑해 빈우야. 난 죽어서도 너 사랑할 거야. 이렇게 죽어서라도 네 마음속에 기억 속에 남을 거야. 영원히.’
약속 지켜 유재현. 죽어서도 너는 나 사랑해야 해.
.
.
.
밤이 찾아오지 않는 나의 세상을 버린다. 영원한 밤을 찾아서, 태양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세상이라 해도 나는 그 세상에서 잠이 들 것이다. 영원히.
* * *
“와- 날씨 더럽게 좋다. 눈이 부실 정도네.”
“따라오지 말라니까.”
“왜? 나도 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 그나저나 벼락 맞는 거 아닌가 몰라.”
“뭐?”
“나 미워할 거 아니냐. 괜히 찝찝하네.”
검은 색의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언덕을 올라 추모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 손에 국화꽃을 든 남자의 얼굴은 눈에 띄게 그 선이 확실하고도 단정한 얼굴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쓰지 않던 안경을 쓴 남자의 두 눈은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2년 전 그 날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맑은 하늘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고
하나의 사진 앞에서 멈춰선 두 사람은 제각각 아무런 말없이 한동안 사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공간, 국화꽃을 손에 든 타인은 돌아서서 잠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참아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빈은 사진 쪽으로 손을 뻗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는 말 직접 하러 오라고 해서, 이렇게 직접 하러 왔다. 미안, 서빈우.”
“……”
“이제, 편안히 자고 있는 거니?”
조금은 맑은 느낌이 나는 사빈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공간에 울렸고, 그대로 타인에게 손을 뻗어 타인의 몸을 돌려세웠다.
“이 새끼 봐라. 얘 너 때문에 운다. 이 못된 여자야.”
“은사빈.”
“왜 그렇게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냐,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빈과 타인, 두 사람 모두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안에는 재현과 빈우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세상으로 떠나버린 두 사람. 타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국화꽃을 내려놓았다.
“타인아.”
“왜?”
“서빈우 말이야. 안 무서웠을까? 죽는다는 거 꽤나 무서울 것 같은데.”
“자신이 죽는 것보다 유재현이 자신을 떠난다는 것이 더 무서웠겠지.”
“그랬을까? 하지만 유재현이 서빈우를 배신했고, 서빈우는 유재현을 보지 않았었잖아.”
“몇 번이고 생각났었다고 하더라. 미운데, 죽을 만큼 미운데 보고 싶었다고 했어.
서빈우는 처음부터 유재현이 아니면 안됐던 거야. 미움보다 사랑이 더 컸나보지.”
“그럴까?”
“유재현이 병원에 있을 때 말이야. 서빈우가 유재현이 자신을 떠나는 꿈을 꿨다고 했어.
그 꿈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서빈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유재현이 자신을 떠난다는 공포감이 더 컸던 거야.
진짜 바보 같은 사랑이지. 유재현은 서빈우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고, 서빈우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으니까.”
“……”
“지독해. 정말로 지독해. 넌 무섭지 않아?”
“뭐가?”
“서빈우가 자살을 한 시간에 유재현의 숨이 멈췄어.”
“그런 일이 가능해?”
“모르지. 나도 놀라워. 어쩌면 유재현이 끝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서빈우를 데려갔던 건지도 몰라.”
타인과 사빈 모두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사진속의 두 사람과는 달리,
사빈과 타인은 그 두 사람을 보고 슬픈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먼저 나간다. 오래 못 기다리니까 짧게 인사만 건네고 나와.”
사빈이 타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고,
타인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사진만을 바라봤다.
타인의 팔에는 여전히 빈우가 선물한 은색의 팔찌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안식을 찾아, 평온하게 잠들기를.”
……
“나의 사랑아.”
.
.
태양이 어둠을 삼켜 버렸고 나의 세상에는 밤이 찾아오지 않았다.
나의 태양아, 나의 사랑아.
이제는 내가 네 곁이 아니면 잠이 들 수 없는 게 아니라, 네가 내 곁이 아니면 잠이 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나는 너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의 사랑아.
내가 네 곁으로 가지 않는다면 넌 또 다시 잠들지 못한 채 괴로워하겠지.
내게 사랑을 애원하지 않았어도 그게 너라면 나는 내 사랑을 남김없이 모두 주었을 텐데.
나의 불쌍하고 가련한 사랑아. 그것이 마지막 네 욕심이라 해도, 나는 너의 세상에 남을 것이다.
‘만일 네 말대로 네가 다치거나 죽는 꿈을 꾼다면, 나는 그게 현실이 되지 않도록 눈을 뜨지 않을 거야. 영원히.’
.
.
나의 태양 곁에서 영원히 잠들다. 그것이 밤이 찾아오지 않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백야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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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 10.01.21 으앙 ~ 완전 재밌어요 좀... 새드인거 같긴 하지만 어찌보면 해피일수도?? 전. 재현이가 좋았거등요 히힛
무튼 잘보고 갑니다~ -
작성시간 10.01.21 새드 ,,,,히히 저도재현이가좋아서 해피일수도 ,,,아저 저런 광적인 사랑너무 좋아요 제가이래서동경바라기님소설이넘좋다니까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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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 10.03.12 진짜 너무너무 재밌어요!! 글 읽으면서 처음으로 댓글남길 정도로요~~빈우랑 재현이랑 둘 다 살아서 잘되길 바랬지만 그래도 죽어서라도 함께여서 다행인것 같아요 ㅠㅠ 동경바라기님 최고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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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시간 10.04.23 대박이당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