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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악비
출처 : 연애소설창작실
주소 : http://cafe.daum.net/noveloflove
#21.
바람과 같은 속도로 히제를 막아선 하시겐이 차율란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하시겐의 콧대는 짐승처럼 일그러졌으며, 반듯한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여기저기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위협스럽게 자라난 송곳니가 도드라졌다. 무시무시한 살기에 흠짓한 차율란이 허공에서 맞붙은 요검을 뒤로 빼면서 튕겨져 나갔다. 처음보는 하시겐의 모습에 당황한 차율란이 잠시 숨 돌릴틈도 없이 하시겐이 맹수처럼 포악하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요검을 마치 작은 소검인 마냥 휘둘러대는 하시겐의 위력은 대단했다. 소나기보다 더 거세게 내려꽂히는 하시겐의 요검을 간신히 막아쳐내는 차율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형님이였지만,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형님이 지금 이성을 잃고 분노에 눈이 멀어 짐승처럼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위협했다.
하시겐을 피해 차율란이 나무위로 훌쩍 뛰어오르자, 하시겐이 곧바로 그를 뒤따라 높이 뛰어올랐다. 차율란이 착지한 나무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하시겐의 기파에 차율란이 간신히 몸을 피해 달아났다. 차율란이 움직이는 이동경로에 선 나무들이 뒤따르는 하시겐에 의해 무참히 잘려나갔다. 산산조각이 난 나뭇잎들이 비와 섞여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차율란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차율란이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소리도 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하시겐의 섬뜩한 모습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던 차율란이 하시겐의 요검에 팔을 베였다. 보랏빛 피가 튀겨져 나와 하시겐의 창백한 얼굴을 흠뻑 적셨다. 동공이 경직된 차율란이 허공에서 뒤로 넘어가 질퍽한 흙바닥으로 쿵 떨어져내렸다.
흥분한 하시겐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 들지 않았다. 뜨거운 피가 머리끝으로 치솟아 머리통이 터져버릴것 같았다.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때문에 숨이 막힐것 같았다.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착지한 하시겐이 느릿하게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차율란에게로 다가갔다. 피와 비때문에 미끌리는 요검을 고쳐쥔 하시겐이 날카로운 칼끝을 정확히 차율란의 심장에 겨눴다. 높이 들어올려진 요검이 차율란의 심장을 찌르려던 그 순간, 어디선가 은사가 휘리릭 날아와 하시겐의 팔뚝을 휘어감았다. 날카로운 은사가 하시겐의 피부로 파고들어 조그만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은사에 진득한 피가 새어나와 하시겐의 소매를 적셨다. 멈짓한 하시겐이 빨갛게 변한 눈을 옆으로 흘기자, 빗속에서 묘도린이 걸어나왔다. 은사가 쥐어져 있지 다른손에는 반으로 두동강이 난 옥패가 쥐어져 있었다. 이성을 잃은 하시겐이 단숨에 달려들어 반으로 갈라버린 결계였다. 슬픈표정의 묘도린을 바라본 하시겐이 눈을 옮겨 부서진 나무밑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히제를 바라봤다. 빗속에서 떨고 있는 그 작은 존재를 본 순간, 거짓말처럼 하시겐의 얼굴이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아, 지친 숨을 느릿하게 내쉬는 그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온몸의 세포하나하나에 피가 다 빠져나가 퍼석해진것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거친숨을 몰아쉬던 하시겐이 자신의 발아래 죽은듯이 누워있는 차율란을 바라봤다.
"데려가라. 묘도린."
"……."
낮고 거친 하시겐의 음성에 묘도린의 슬픈 눈동자가 서서히 차율란을 향했다. 하시겐의 팔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은사를 거둬들인 묘도린이 차율란에게로 다가가 그를 품안에 끌어안았다. 의식을 잃은 차율란의 팔이 묘도린의 어깨너머로 힘없이 늘어졌다. 묘도린의 눈동자가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거친숨을 몰아쉬는 하시겐의 옆얼굴을 힐깃했다. 묘도린이 보라빛 혁대에 매어진 다른 옥패를 꺼내들자 뿌연 연기와 함께 그들의 모습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풀린 눈으로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하시겐이 느릿하게 히제에 있는곳으로 걸어갔다. 그 짧은 순간이 천년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쿵쿵 거렸다. 그곳에서 이곳까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던가. 얼마나 가슴이 타들어갔던가. 이미 기력을 많이 쇄진한 하시겐의 시야가 힘없이 가물가물했다. 히제는 아직까지 무릎에 얼굴을 깊이 묻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시겐이 히제앞에 서자, 히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온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긴 속눈썹 밑, 선하고 동그란 눈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정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히제를 내려다보는 하시겐은 아무런말이 없었다. 솨아아,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하시겐은 느릿하게 거친숨을 몰아쉬고 있을뿐이였다. 히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하시겐의 목을 가는 두팔로 꼭 감싸안았다. 하시겐의 품안에 얼굴을 묻은 히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
흐릿한 눈동자로 굳은듯이 서 있던 하시겐의 눈가가 경미하게 일그러졌다. 힘없이 내리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들어올린 그가 히제의 작은등을 꽉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눈물이 날만큼 따뜻했다. 그토록 갈구하던 온기였다. 이 작은 존재를, 이 미칠듯이 나를 견딜수없게 만드는 이 작고 나약한 존재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을때. 그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불가능했다. 이미 정신을 차렸을땐 이곳에 내가 서있었다. 피가 끓고 심장이 터져버릴것 같았다. 거부하려 애를 써도 자꾸만 내 마음에 스며드는 너란 인간을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거냐. 하시겐이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을 히제의 보드라운 어깨에 묻었다. 하아, 날카롭게 곤두섰던 온몸의 신경이 누그러지는것 같았다. 하시겐이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오직 아는 말이라곤 그 말밖에 없는것처럼 히제는 그 말만을 연신 읊조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았다. 내가 어떤 신분이라는것도 잊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도 잊었다. 그 순간엔 그딴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넘어질때 접질린 발목보다 그를 향해 뛰는 심장이 더 아릿했다. 차가운 빗속에서 히제는 하시겐을 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안아볼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애타게.
"히제를 데려와라! 히제를 데려오란 말이다! 히제!"
"폐하, 지, 진정하시옵……."
부상을 당한 호제란이 미친듯이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침대옆에 놓여있던 원목 협탁위의 화분이 떨어져 와창장 깨졌다. 당황한 의병들이 호제란의 다부진 두팔을 붙들어 잡고 쩔쩔맸다.
"히제 어딨느냐! 히제!"
미친듯이 발악을 하는 호제란의 잔뜩 갈라진 거친 고함소리가 넓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호제란의 우악스러운 팔부림에 의해 그를 붙들어매고 있던 거구의 의병들이 차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반나신의 호제란의 가슴에는 흰 붕대가 겹겹히 감겨 있었고, 그 마저도 시뻘건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상처가 깊어 출혈이 몹시 심했다. 게다가 하시겐의 요검에 의해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호제란은 절대적인 안정과 치료가 필요했다. 호제란의 구리빛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반듯한 관자놀이며, 목이며 온통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호제란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수 있는게 기적이였다.
"폐하, 공주님은 서포진에 당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된일인지, 율겐장군님께서 알아보신다 하셨으니……."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원대감의 말따윈 필요없었다. 미쳐버릴것 같았다. 이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것만, 아니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불안해서, 초조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호제란의 검은 눈동자가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히제가 없다. 나의 히제가 여기 없다. 나의 품안에 없다. 없다!
팽팽해진 이성의 끈이 날카롭게 끊어지는걸 느낌과 동시에 호제란이 짐승같이 옆에 진열되었던 검을 꺼내들었다. 헉헉, 거친숨을 몰아쉬는 호제란의 날카로운 칼끝이 의원대감의 목젖을 겨냥하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의원대감이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았는게 말이 되느냐. 그럼 히제가 지금 어딨다는거냐. 그 요괴랑 있다는것이냐!"
"요, 요괴라니……폐하, 지금 그게 대체 무슨말씀이십니까. 이, 일단 진……."
"히제를 데려와라! 히제를 데려와. 히제를 데려오라고!"
이성을 상실한 호제란은 극도의 흥분상태였다. 자신의 치명적인 부상상태도 잊은 그가 의원대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질겁한 의병 다섯명이 잽싸게 호제란을 붙잡았지만, 눈이 뒤집힌 호제란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호제란의 피부가 너무 뜨거워 흠짓한 장정들이 쩔쩔매며 호제란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고, 고정하십시오. 폐하!"
"아아아아아아악."
호제란이 자신의 옆구리에 붙잡고 있는 의병들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호제란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오던 의원들이 줄행랑을 쳤다. 피를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피가 흥건한 검을 바닥으로 거칠게 집어던진 호제란이 씩씩거리다가 다시 허리를 꺾어 고개를 앞으로 숙이면서 잔뜩 쉰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아아아아악! 히제를 데려와라! 히제를 데려오란 말이다! 히제를 데려와! 아아아아아악!"
그 요괴랑 같이 있을게 분명했다. 그 요괴가 히제를 바라보겠지. 히제가 내쉰 숨을 들이마시겠지. 둘이 같은 공간에 있겠지.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온몸이 뜯겨져 나가는것 같았다. 당장 이손으로 그 요괴의 눈을 도려내고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눈이 뒤집혔다. 세상이 온통 시뻘건 피로 얼룩졌다. 가슴이 터질것 같이 고동쳤다.
"허억, 하아. 하아."
거친숨을 간혈적으로 몰아쉬던 호제란의 눈이 풀렸다. 진을 다한 그가 고개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나무에 기대 앉아, 지친숨을 내쉬고 있는 하시겐과 히제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한순간이라도 더 서로의 모습을 서로의 눈동자안에 각인시킬 뿐이였다. 하시겐의 볼에 긁힌 상처를 발견한 히제가 쓰게 웃으면서 그곳에 떨리는 손끝을 갖다댔다. 애잔한 히제의 눈빛에 하시겐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히제가 가는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상처를 쓸자, 하시겐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탄츈을 함락했다."
"……."
하시겐의 무겁고 거친 음성에 히제의 손이 멈짓했다.
"머지않아, 헤드리안까지 진격할것이다."
히제는 말이 없었다. 히제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과 같은 푸르게 시린 달빛은 없었지만, 빗속에 갇혀 발목을 붙잡는 세상을 잊은듯 히제와 하시겐은 서로를 깊이 응시했다.
"요괴족의 최고수장으로써 후회하지 않는다."
"……."
"그러나."
하시겐이 볼 근처에 멈춰있는 히제의 손을 감싸쥐면서 그대로 고개를 돌려 작은 손바닥안에 지친 얼굴을 묻었다.
"하시겐으로써 니가 마음에 걸린다."
눈물을 머금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더니, 결국 히제는 울음을 터트렸다.
#22.
안타깝고 슬펐다. 모든걸 되돌릴수는 없을까. 왜 여기까지 왔을까. 호제란에게 사정한다면 이 전쟁을 막을수 있을까. 그러기엔 이미 멀리 와 버린것 같았다.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버린것 같았다. 슬픈눈동자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히제를 올려다 보는 하시겐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히제의 눈가에 큰눈물방울이 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하시겐이 히제의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뻗자, 히제가 그 손을 허공에서 덥썩 붙잡아 두손으로 꽉 움켜잡고 흐느꼈다. 히제가 자신의 동그란 이마를 하시겐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끄윽끄윽 서럽게 울음을 삼켰다.
"당신과 칼을 겨누고 싶지 않아……."
"……."
"나는, 난……."
끄윽끄윽 말을 이어가는 히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시겐의 초록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시겐이 고개를 숙여 히제와 머리를 맞대었다. 참아낼수 없는 감정이, 도저히 억누를수 없는 먹먹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하시겐이 자유로운 다른 한손으로 히제의 등을 감싸안았다. 이를 악문 하시겐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차갑게 외면하고 등지고 돌아서도 어쩔수없이 치밀어오는 그리움을, 억누르고 삼켜내고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이 작은 존재를 향한 갈망을
이 순간마저 참으라 하지 마라. 두번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마저 내게 견뎌내라 하지 마라.
우거진 나무사이로 히제와 하시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릴케장군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릴케장군의 옆모습을 바라본 긴유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잦아드는 빗줄기속에서 인간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주군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예상했던 최악의 결과였다.
"말도 안돼……."
"저게 바로 너의 공주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다."
분노에 치를 떠는 릴케장군의 주먹이 나뭇가지를 부셔트렸다. 릴케장군이 옆에 선 긴유를 노려봤다.
"너희 요괴족과는 정말 지독한 악연이다."
"……."
"공주님은 호제란 폐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 하. 너희 요괴족은 정말……."
끔찍한 악연이다. 너와 난. 애써 긴유를 노려보는 릴케장군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인정하기 싫었다. 부인하고 싶었다. 자신은 눈앞에 서 있는 이 요괴가 싫지 않다는것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것을. 빌어먹게도 그랬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자꾸만 손에 칼을 쥐어주고 있었다. 호제란 폐하를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 하이얀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요괴족은 전멸해야 마땅할 존재였다.
"사랑이라. 너희 인간들은 이상한 말을 쓰는군."
"하. 역시 살육을 즐기는 잔악한 요괴족은 사랑도 모르나보군."
"……."
비웃었지만 가엽다는 감정이 마음 한켠으로 스며들었다. 릴케장군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사그라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릴케장군이 긴유를 바라봤다. 릴케장군이 천천히 손을 들어 왼쪽 가슴한켠을 짚었다.
"여기, 심장에 깊이 담았다는뜻이다."
"……."
나뭇잎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긴유의 매끄러운 볼을 타고 턱끝으로 흘려내렸다. 날이 어두워 풀벌레 울음소리가 났다.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긴유와 릴케장군은 침묵했다. 릴케장군의 얼굴을 바라보는 긴유의 눈빛이 흐려졌다.
"너는 왜 하이얀제국의 장수인것이냐."
"……."
"니가 톤트국의 인간이였다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정신을 차린 긴유가 입술을 닫으며 뒤돌아섰다. 차라리 톤트국의 인간이였다면……이렇게 가슴한켠이 공허하진 않았을텐데. 그렇게 생각했었다. 분명. 그렇게. 어이가 없는 자신의 생각에 자조적으로 웃은 긴유가 축축히 젖은 흙길을 걸으면서 릴케장군을 등지고 나아갔다.
"요괴 넌, 내게 너무 쉽게 등을 보여. 내가 뒤에서 찌르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거냐."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써 독하게 내뱉은 릴케장군의 표독스러운 말에 긴유가 멈짓했다. 찢어진 눈매속 그의 눈동자가 옆으로 스윽 움직였다. 뒤돌아보지 않은 긴유의 얼굴이 음영졌다.
"찌르고 싶다면 찔러라."
"뭐?"
무심히 말을 던지곤 다시 걷기 시작한 긴유가 씁쓸한 뒷말을 이으면서 어두운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차피 하시겐님의 손에 곧 죽게 될테니."
어두운 숲속으로 몸을 숨긴 묘도린은 부상당한 차율란을 데리고 요괴의 숲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얼굴이 파리한 차율란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차가워야 할 몸이 뜨거웠다. 빨리 행동해야 했다. 판단과 함께 묘도린이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빗물을 잔뜩 머금은 질척한 흙속에서 꾸물꾸물한 점성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눈, 코, 입이 없는 그림자 요괴가 한동안 흐물거리더니, 완전한 형체를 갖췄다. 나무위에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묘도린과 차율란을 향해 그림자요괴가 그동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림자요괴에게서 하시겐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호제란에 대한 애기를 들자, 차율란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려놔라. 묘도린."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차율란이 묘도린의 손을 밀어냈다.
"요괴의숲으로 돌아가셔야 됩니다."
"하. 니가 설마 내 걱정을 하는거냐. 우습군."
쉽사리 손을 거두지 못하는 묘도린의 말에 차율란이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차율란의 소매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분명히 통증이 심할것이다. 차율란의 상처를 살피는 묘도린의 미간이 경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는 사이, 다시 그림자 요괴는 흙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차율란님. 지금은 치료를 받으셔야 됩니다. 요괴의 숲으로 돌아가셔야……."
"이대로 물러날 내가 아니다."
묘도린의 말을 자르면서 차율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율란의 핏빛 눈동자 표면이 사납게 빛났다.
"그리고 이대로 물러날 호제란이 아니지."
"……."
"호제란에게 간다."
"치우라지 않느냐!"
"폐하! 제발 고정 하시옵소서! 이러다가 정말 큰일나시옵니다!"
"치워라. 어차피 이런 약사발 따위 아무런 의미 없지 않느냐!"
헉헉거리면서 호제란이 의원대감이 들인 약사발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짙은 흙빛의 약이 화려하게 장식된 벽에 부딪혀 벽을 타고 바닥으로 질질 흘러내렸다. 핏기가 가신 호제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으며, 입술이 바짝 메말라 있었다. 언제나 강인하게 빛나던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도 그 빛을 잃었다. 하아, 하아. 연신 더운숨을 토해내는 호제란이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몸속의 내장 하나하나가 다 터져나가는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래도 약은 드셔야 됩니다! 정확히 무슨 독인지는 소인들이 알아보고 있으니……."
열이 높아 의식을 잃지 않는게 기적이였다. 비오는 땀을 쏟아내는 호제란이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정확히 무슨 독인지 명을 알아야 그에 합당한 시료를 할터인데, 도무지 어떤 맹독인지 알아낼수가 없었다. 답답한 의원대감이 쩔쩔매면서 호제란을 말리고 있을때였다. 헉헉거리고 있던 호제란의 모양좋은 입술을 비집고 갑자기 핏물이 주르륵 토해져 나왔다. 세월에 쳐진 의원대감의 주름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하아, 하, 하. 크크큭, 하하하하!"
주르륵 흘러나와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낸 호제란이 시뻘건 피가 잔뜩 묻은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더니, 별아간 소리내어 크크큭, 웃었다. 피를 토한 호제란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천을 준비하던 의녀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고개를 뒤로 젖혀 크게 웃는 호제란의 소름끼치는 광적인 모습에 그자리에 있던 모두가 굳어버렸다. 시뻘건 핏줄기가 호제란의 매끄러운 목젖을 타고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가관이군. 인간."
갑작스러운 차율란의 거친 목소리에 호제란을 빙 둘러싸고 있던 의원대감과 의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바깥으로 도망쳤다. 창턱을 넘어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선 차율란의 눈동자가 호제란을 직시하고 있었다. 다들 처음 보는 요괴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 자리에서 태연한건 미친듯이 웃고 있던 호제란뿐이였다. 차율란과 그뒤에 서 있는 묘도린을 차례로 훑어본 호제란이 뒤로 넘겼던 고개를 앞으로 숙여 눈을 치켜떴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게 용하군."
싸늘한 눈동자를 굴려 호제란의 상태를 가늠한 차율란이 피식 웃었다.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하시겐의 요검에 저렇게 심하게 베이고도 눈을 뜨고 있다니.
"난 절대로 죽지 않는다."
"……."
"히제가 살아있는한."
잔뜩 쉬어서 거친 호제란의 음성에 차율란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마음에 들었다. 저런 광적인 모습. 뭔가를 갖고 싶어서, 빼앗고 싶어서 미칠듯이 초조한 모습. 벼랑끝에 내 몰린 모습. 차유란의 입술이 그림같이 올라갔다.
"그 인간여자가 하시겐을 마음에 두었다는건 아는지 모르겠군."
빈정거리는 차율란의 말에 호제란의 짙은 눈썹이 활처럼 올라갔다. 눈빛이 사납게 변하면서 으르렁거리는 호제란을 본 차율란이 여류롭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팔을 내리고 있는 차율란의 소매 밑으로 탁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자꾸만 고여가는 핏방울을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묘도린의 눈빛이 흐려졌다.
"아나보군. 그럼 하시겐의 요주(妖珠)를 그 인간여자가 가지고 있다는것도 아는가 모르겠군."
차율란을 노려보던 호제란의 동공이 경직됐다. 지금 저 요괴가 뭐라했는가.
"히제가 그 요괴의 요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 하."
뒤통수를 한대 맞은것처럼 머리가 멍멍했다. 호제란이 연신 헛웃음을 치다가 미간을 무섭게 구겼다. 꽉다문 호제란의 입매가 참지못할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그런 호제란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차율란이 비릿하게 웃었다. 어느새 입안에 고인 탁한 피를 거칠게 뱉어난 호제란이 매처럼 눈을 치켜떴다. 좋은 눈빛이였다. 한번 더 믿어봐도 좋을. 찬찬히 호제란을 쓸어보던 차율란이 입을 뗐다.
"한번 더 너를 믿겠다. 인간. 다가오는 태양의 날을 노려라. 요괴의 힘이 최고로 약화되는 날이다. 천하의 하시겐도 그날은 어쩔수 없을꺼다. 하시겐을 죽이려면 그 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요검에 의해 중독된 독을 해독하려면 살아있는 최상급 요괴의 피가 있어야 한다. 그 외에는 죽음뿐이다."
"그래?"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였다. 차율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침대옆에 놓아둔 요멸도를 낚아챈 호제란이 번개처럼 차율란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급습을 당한 차율란의 눈동자가 경직됐다. 반으로 갈린 상처를 통해 푸시식, 분수처럼 튀어나오는 핏물과 함께 차율란이 뒤로 넘어갔다.
"차율란님!"
차율란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묘도린의 날카로운 비명이 거대한 방안을 울렸다. 차율란의 보랏빛 피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쓴 호제란이 순식간에 묘도린을 향해 검끝을 돌렸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충격에 빠진 묘도린은 경직되있었다. 그런 묘도린마저 죽이기 위해 호제란이 요멸도를 앞으로 내리꽂으려는 순간, 바닥으로 쓰러져 죽어가던 차율란이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의 요검을 크게 휘둘렀다. 요검에서 뻗어나온 엄청난 풍파에 밀린 묘도린이 충격에 목이 막혀 소리한번 지르지 못하고 멀리 튕겨져 나가, 거대한 창밖으로 밀려 떨어졌다. 그 뒤를 따라 차율란의 요검도 튕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냥감을 잃은 호제란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몸이 반으로 갈라져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차율란을 내려다봤다.
"요괴족의 최고 수장인 하시겐의 배다른 동생이니, 니 피를 먹으면 되겠지."
온몸을 흠뻑 적신 차율란의 피를 할짝거린 호제란이 광적인 눈동자로 발아래서 죽어가는 차율란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온몸을 들끓으며 요동치던 피가 식는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요멸도를 쥐고 있지 다른 한손으로 차율란의 목에 걸린 차율란의 요주를 끊어 낚아챘다. 신비롭게 빛나는 빨간색의 요주를 손안에서 만지작거린 호제란이 그 요주를 그대로 요멸도에 끼워넣었다.
"아쉽지만, 이정도면 하시겐을 죽일수 있지 않겠느냐. 요괴. 나는 말이다. 요괴족이라면 치가 떨린다. 잘가라."
어느새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온 호제란이 그대로 요멸도를 차율란에게로 내리꽂았다. 태양의 기운이 잔뜩 머금은 요멸도로 인해 차율란이 재빛가루가 되어 허공에서 아로히 흩어졌다. 그 속에서 서 있던 호제란의 손에서 요멸도가 날카로운 금속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캉 떨어져내렸다. 호제란이 두손을 들어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를 내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이 토해낸 핏물이 그득했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크크큭, 하하하, 하, 하하하!"
목젖을 뒤로 젖히면서 크게 웃던 호제란의 웃음소리에 괴로운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호제란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한동안 멈짓해있더니 그대로 손을 위로 올려 피에 흠뻑 젖은 짙은 흑발을 느릿하게 뒤로 쓸어넘겼다.
"크크큭, 큭."
괴롭게 일그러진 호제란의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뒤틀리게 웃고 있는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간다는건 항상 이랬다. 빌어먹게도 자신의 피를 보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죽여야 했다. 죽지 않으려면 먼저 죽여야 했다. 원하는게 있으면 항상 죽여서 빼앗아야만 했다. 처음부터 자신은 빈손이였다. 아무도 손에 자신이 원하는걸 쥐여주지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상도. 빌어먹은 신마저도. 정작 원하는건 별로 없었는데도 말이다. 너의 웃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옅은 눈동자.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나의 너. 너 뿐이였는데도 말이다.
지친숨을 몰아쉰 호제란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얽혀들었다. 누군가의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울리더니,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복차림의 율겐장군이 들이닥쳤다. 율겐장군뒤로 의원대감 벌벌 떨면서 방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새벽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방안에 우두커니 서 있던 호제란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율겐을 바라봤다.
"폐하! 무슨일이 있으신……."
"의원대감은 나가 있어라."
"예? 예."
마침 광적인 호제란에 질릴대로 질린 의원대감이 기다렸다는듯이 조용히 방문을 닫고 밖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호제란을 쓸어보는 율겐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경직되 있었다.
"장군은 내일당장 비밀리에 톤트국으로 떠나라."
유난히 낮고 싸늘한 호제란의 음성과 분위기에 흠짓하던 율겐장군이 눈을 크게 떴다. 전쟁중에 적국으로 비밀리에 들어가라니. 맹독에 큰열을 앓으시더니 정신이 어떻게 되신건 아니실까.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상한 율겐장군의 반응에 차갑게 피식 웃은 호제란이 율겐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하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나를 이렇게까지 벼랑끝으로 몰아가는 요괴를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었다. 그 요괴를 죽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먼저 미쳐 죽어버릴것같았다.
"가서, 내가 말하는 그대로 톤트국의 황제 노르수단에게 전해라."
이성을 잃은듯한 호제란의 기운이 불길했다. 율겐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호제란의 검은 눈동자표면이 소름끼치게 빛났다. 이 호제란을 건들였으니, 이 호제란의 히제를 탐냈으니, 댓가를 치뤄야지.
"요괴족의 수장, 하시겐이 톤트국의 황태자 세포린을 죽였다."
#23.
둘이 함께 말없이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시는 못 볼사람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그 어떤 말도 필요없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깊이 느끼고 있었다. 눈안에 각인시킬듯 하시겐을 바라보는 히제가 힘없이 웃었다. 요멸도에 의해 긁힌 하시겐의 볼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아직도 가슴한켠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요멸도에 베였으니, 재생되지 못하고 결국 흉터로 남을꺼다."
"……."
하시겐의 낮고 거친 목소리에 히제가 쓰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난 작은 흉터마저 이토록 가슴이 시렸다. 누가 이 마음을 알아줄까.
"너또한 그럴꺼다."
"……."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내 심장에 남을꺼다. 영원히."
두근대는 심장이 마치 살점을 도려내듯 가슴부근이 시큰거렸다. 먹먹히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낸 히제가 하시겐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하시겐의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말간 히제의 얼굴너머로 보랏빛으로 섞여드는 하늘을 힐깃거린 하시겐이 그제야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시겐의 진심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마른침만 애써 삼켜내던 히제가 하시겐을 따라 일어섰다. 순간 히제가 무릎을 짚고 비틀거렸다. 하시겐의 서늘한 눈매속 눈동자가 밑으로 움직였다. 히제의 가는 발목이 빨갛게 붓고 멍이 들어 있었다. 하시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옷자락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뜯어 찢어냈다. 찌이익, 거칠게 튿어진 천자락을 히제의 발목에 단단히 감는 하시겐을 내려다보는 히제의 눈빛이 흐려졌다.
"우리는 항상 서로때문에 입은 상처를 서로가 감싸주네……."
히제의 가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하시겐이 멈짓했다. 하시겐의 눈동자가 복잡한 심경으로 얽혀들었다.
"앞으론 다시는 다치지 말아."
"……."
"그 상처를 감싸줄수 없는 내 자신이 슬퍼질테니까……."
히제의 목소리가 하시겐 몰래 떨리고 있었다. 괜히 눈가가 아릿해서 히제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히제의 말간 얼굴을 올려다보던 하시겐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히제를 내려다본 하시겐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말이 없는 하시겐이 내뱉은 진심에 히제의 가슴한켠이 아릿해졌다. 히제가 쓰게 웃으면서 하시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가야해."
"……."
"가야만 해. 난."
가서 어떻게서든, 이 전쟁을 막아야 해. 나는.
"요괴족의 수장은 무책임하군."
"그쪽만 하실까."
우파마의 빈정거림에 한미충시장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하지만 저번일도 있고 해서 애써 분을 삭히는 한미충시장군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엉덩이를 땔려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한미충시 장군이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우파마를 한껏노려봤다.
"한미충시 장군의 말이 맞소. 탄츈을 치고 곧바로 서포진을 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듯 말없이 자리를 비우다니. 수장으로써의 자질이 심히 의심되오."
"일이 있으셨겠지요."
한미충시 장군옆에서 그의 말을 거드는 한 하급장수의 말에 우파마의 눈두덩이가 씰룩거렸다. 탄츈관 밖에는 시체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지난밤 피가 한바탕 쏟아내린 뒤라, 땅과 지푸라기가 물에 젖어 불이 잘 타오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시체타는 냄새가 유난히 더 고약했다. 개보다 민감한 후신경을 우파마가 코를 벌름벌름 거렸다. 손톱에 낀 때를 후 불면서 말하는 우파마의 태도에 장수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풋 하고 빈정거렸다.
"요괴족이 일은 무슨."
손톱에 낀 때를 내려다보던 우파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대뜸 고개를 쳐드는 우파마의 얼굴이 험악했다.
"아놔, 보자보자 하니까. 어이, 잘난 인간장수나리 방금 뭐라고 씨부렸습니까? 뭐, 요괴족이 무슨?"
"내말이 뭐 틀렸소? 요괴족이 일은 무슨일입니까? 어디 먹잇감사냥이라도 가시오?"
노골적으로 요괴족을 깔보는 장수의 말에 우파마가 으르렁거렸다. 곧 장수를 향해 달려들것처럼 잔뜩 꼬리를 세우던 우파마가 별안간 피식 웃으면서 여유롭게 의자에 팔을 걸쳤다.
"지들이 못난줄 아는 인간들의 자격지심이란."
"뭐, 뭐요?"
"우리 요괴족이 월등히 우월하니, 그런 마음 드시는게 당연지사겠지요. 아니그렇습니까? 왜? 이 미천하고 할일없는 요괴족이 뭐 틀린 말했소이까?"
홀딱 벗은 사람마냥 얼굴이 시뻘게진 장수가 버럭하여 우파마를 향해 달려들때였다. 묵묵히 앉아서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책사가 고개를 들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그만들 하십시요!"
"하, 기가 막혀서 정말. 이래서 천박한 요괴족이랑은 뭔일을 못해먹겠다니까. 노르수단 폐하도 대체 무슨생각이신지."
책사의 만류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선 장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우파마를 노려보더니, 혀를 차며 회장을 벗어났다. 그런 장수의 뒷모습을 노려보더면서 우파마가 들으란듯이 목청을 크게 높여 투덜거렸다.
"하? 매번 전투가 일어날때면 우리 요괴족 뒤에 숨어서 오줌이나 질질 싸는게 누군데. 나도 지들밖에 모르는 진절머리 나는 인간들이랑은 같이 일 못하겠수다. 흥!"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우파마가 성이 잔뜩 붙은 팔자걸음으로 회장을 벗어났다. 가뜩이나 하시겐님이랑 긴유가 보이지 않아서 자신도 답답한 마당에 속을 벅벅 긁는 무례한 인간들때문에 빈정이 상할때로 상한 그였다. 어깨를 씩씩거리면서 사라지는 우파마를 힐깃거린 책사가 골이 아픈듯 이마를 감싸쥐었다. 한미충시 장군의 꽉 다문 입매가 잔뜩 뒤틀어져 있었다. 회장엔 싸늘한 침묵만이 남았다. 탄츈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바탕 신경전이 오고간 뒤라 분위기는 무겁게 침체돼 있었다. 그때였다. 전갈병 한명이 헐레벌떡 회장안으로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 전갈병에게로 꽂혔다.
"무슨일이냐."
한미충시 장군은 피곤한 표정이였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내는 그의 말에 급한 숨을 몰아쉬던 전갈병이 급하게 예의를 차려 무릎을 꿇으면서 소리쳤다.
"노르수단 폐하께서 한미충시 장군님을 탄지말까지 데려오시라는 명이십니다!"
"뭐? 앞으로 진격을 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한미충시 장군 옆을 지키고 서 있떤 장수의 눈이 커졌다. 시일이 별로 없었다. 어찌된일인지, 요괴족들은 일을 서둘렀다. 물론 자신들도 여유부릴 처지는 아니였다. 코앞에 두고 있는 서포진을 치고 헤드리안 까지 뻗어나갈려면 앞으로 치고 나가도 답답한 지경이였다. 그런데 탄지말로 돌아오라니.
"그게 무슨말이냐? 왕궁에 계셔야 할 폐하께서 지금 탄지말에 계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소인도 어찌된일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폐하께서 장군님을 탄지말로 데려오시라고 하명하셨습니다."
다부진 한팔로 히제를 들쳐안고 서포진 성곽위로 단숨에 뛰어오른 하시겐이 차분하게 착지하면서 히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지가 높은 서포진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어느새 마른 히제의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바람에 마음껏 물결쳤다. 하시겐은 그런 히제의 모든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처음만났을땐 얼굴에 온통 흙먼지투성이였던 건방진 인간병사였다. 누더기 옷을 겹겹히 입고 틀어올려 묶은 머리는 몇가닥 흘러내렸었다. 칼을 들고 잔뜩 날이 선 모습으로 자신을 노려보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한걸음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그녀는 곱게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이였다. 길고 가는 머리칼은 바람에 춤을 추고, 머리에 달린 눈부신 장신구들은 화려했다. 크고 선한눈, 작고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 누구나 한번쯤은 뒤돌아볼 그런 인간여자. 그러나 누구보다 슬픈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 이 내 마음에 깊이 담은 너.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을 귀뒤로 넘긴 히제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하시겐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여기서 한걸음만 돌아서면 다시는 만날수 없을 그였다. 평생 보지 않고 살수 있을까. 그리움에 잠겨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 덜컥 겁부터 났다.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히제가 가는 손을 내밀어 하시겐의 손을 감싸쥐었다. 손안에 감겨드는 그의 긴 손가락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히제가 추억하듯 그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쓸었다.
"이젠 다신 만날수 없겠지……."
씁쓸하게 얽혀들던 히제의 눈동자가 하시겐을 올려다봤다. 첫만남부터 지독하게 무표정이였던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큰손을 다 움켜잡지도 못하는 히제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뿐이였다.
"그리워도……다시는 만날수 없겠지……. 내가 정말……."
"살아있어라."
히제의 말을 자르는 하시겐의 단호한 음성에 히제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시겐이 자신의 손가락을 쓰다듬던 히제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하시겐의 길고 큰 손은 히제의 작은 손을 다 감싸쥐고도 남았다. 따뜻했다.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온기였다.
"……."
"절대로 죽지말고 살아만 있어라."
"……."
"모든것이 끝나면……."
하시겐을 바라보는 히제의 눈동자 표면에 물기가 번져나갔다. 하시겐의 얼굴이 눈가가 일그러졌다. 견딜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올라 참아내려고 애쓰는 목을 쳤다. 뜨거운 숯덩어리를 삼킨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널 데리러 갈테니. 니가 어디에 있든 내가 반드시 널 찾아낼테니, 살아남아라."
"……."
그 말이 지켜질지, 지켜지지 않을지는 이미 중요한게 아니였다. 중요한건 그의 진심이였다. 벅찬가슴에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눈매완 반대로 히제는 환하게 웃었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 이거면 충분했다. 이 순간만을 반추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후회없었다. 히제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하시겐의 요주를 끊어냈다.
"돌려줄께. 당신의 요주."
"……."
"당신에게 중요한거라는걸 알아. 가져가."
히제가 손안에 소중히 움켜쥔 하시겐의 요주를 내밀었다. 받아들 생각을 하지 않던 하시겐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널 데리러 가는 날."
"……."
"그때 받겠다."
"하시겐……."
"그때 되찾겠다. 가지고 있어라."
하시겐이 요주를 쥔 히제의 손을 밀어냈다.
"하급요괴들이 너와 날 구분하지 못할꺼다. 오히려 널 보호하려 들테니, 가지고 있어라."
"……하시겐."
말을 마친 하시겐은 뒤돌아섰다. 성곽밑으로 뛰어내리기전에 하시겐이 힐깃 히제를 옆으로 바라봤다. 하시겐의 풍채가 성곽밑으로 사라졌다. 멈출줄 모르는 몰아치는 바람에 쓰러질듯 위태하게 서 있던 히제가 하시겐의 요주를 꽉 움켜쥐었다. 시린 그의 몸과 달리 눈물이 날만큼 따뜻했다.
"혼자 돌아왔다는게 무슨의미인지 아느냐."
"폐, 폐하……."
겁에 잔뜩 질려 얼굴에 핏기가 가신 치소가 호제란의 발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앞으로만 내달려 숲속을 헤치고 돌아온 치소의 몸은 흙물이 묻고 나무가지에 찢겨 형편이 없었다. 공포에 떠는 치소는 품에 안고 있는 봇짐을 생명줄마냥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치소를 내려다보는 호제란의 싸늘한 눈동자에는 동정심따위의 감정은 전혀없었다. 호제란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검집에서 검이 쓸려빠지는 서늘한 금속소리에 치소의 눈이 경직되었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의미다."
"폐, 폐, 하!"
살벌한 호제란의 목소리가 치소의 작은 두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공포에 목이 막힌 치소의 목소리는 잔뜩 짓눌려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치소의 얼굴이 창백했다. 겁을 주기 위해 한번 떠보는 말이 아니라는걸 치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히제의 옆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왔던가. 미련없이 아비와 형제를 베어버리고 피와 살육에 눈이 멀은 호제란을.
"넌 그동안 필요이상으로 히제와 붙어있었다. 그걸 다 용서한이유는 히제가 널 아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가 그런 주인을 버리고 혼자서 돌아와? 그것도 겁도 없이 내게로? 그건 내손에 죽고 싶다는 의미다."
차갑게 식은 얼굴로 검을 치켜세우던 호제란의 손이 신하의 말에 허공에서 멈짓했다.
"폐하! 히제 공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멈춘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옆으로 스윽 굴린 호제란이 신하의 얼굴을 힐깃하곤 다시 치소를 내려다보다가 검을 던져버렸다. 코앞으로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떨어지는 검때문에 깜짝놀란 치소의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넌 앞으로 히제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것이다."
소름끼치는 말을 남기고 신하와 함께 어두운 복도로 사라지는 호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치소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히제 공주님이 아니였다면 자신은 어쩌면 지금 발치에 떨어져 있는 저 검에 목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긴장이 풀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치소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의를 차려 잔뜩 허리를 굽히는 늙은 신하의 말에 히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손안에 자꾸만 땀이 찼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방문이 무난히 크게 가슴이 다가왔다. 호제란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두려웠다. 공손히 예를 차린 신하가 방문을 열더니, 뒤로 물러섰다.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다리를 끌고 어두운 방안으로 히제가 들어섰다. 검은색 커튼을 쳐놓은 방안은 한치앞을 볼수 없는 어둠이였다. 히제의 몸이 방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갑자기 등뒤에 있던 문이 쾅 닫혔다. 놀란 히제의 눈이 커졌다. 뜨거운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다부진 팔이 히제의 가는 어깨를 넘어 등뒤에 있는 방문을 거세게 닫아버렸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호제란의 눈동자만이 매처럼 빛났다. 사나운 눈이 히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더 미쳐날뛰어야 되는거냐."
#24.
"내가 얼마나 더 죽여야 되느냐."
"……."
"아버지도 죽였다. 형들도 죽었다. 어린동생도, 어머니도 모두 이손으로 죽였다! 대답해! 얼마나 더 죽여야 하느냐. 얼마나 더 해야 니 성이 차겠느냐! 얼마나 더 내가 미쳐 날뛰어야 되냔 말이다!"
악에 찬 호제란의 괴로운 고함소리가 어두운 방안을 울렸다. 점점 어둠에 눈이 익은 히제의 갈색 눈동자에 고통에 일그러진 호제란의 얼굴이 보였다. 호제란의 매같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히제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그 모습에 히제의 두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히제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해! 내가 얼마나 더 죽여야 되느냐! 대답하란 말이다!"
히제의 눈이 경직되었다. 호제란이 다부진 손을 뻗어 히제의 가는 목을 꽉 틀어쥐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부서질 나의 히제였다. 호제란의 눈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참아낼수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머리가 터져버릴것 같았다. 호제란의 손에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악력이 거세져 숨을 쉴수 없는 히제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그 요괴를 사랑하느냐."
거친숨을 몰아쉰 호제란의 싸늘한 목소리가 히제의 귓가에 울렸다. 히제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호제란은 손에 더욱 힘을 줘 히제의 가는 목을 졸랐다. 마치 대답을 듣기 싫다는듯이. 히제의 작은 얼굴에 피가 쏠려 빨갛게 달아올랐다. 켁켁거리는 히제의 작은손이 호제란의 큰 손을 덮었다.
"그 요괴를 사랑하느냔 말이다!"
호제란의 악에 바쳐 소리질렀다. 자신이 목을 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호제란은 히제에 의해 목이 졸리는것같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고 숨이 끊어질듯 구석에 몰린 그런 초조한 얼굴이였다.
"사……랑해."
목이 졸려 켁켁거리면서도 히제는 끝끝내 그 말을 간혈적으로 내뱉어버렸다. 차갑게 외면하고 돌아서도 어쩔수없이 피어올라 온몸에 스며드는 치명적인 그라는 존재를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호제란의 위협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을 도저히 참아낼수 없었다. 히제의 대답에 호제란의 눈이 경직되었다. 거짓말처럼 호제란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히제가 호제란의 발아래 허리를 꺾어 켁켁거렸다. 히제의 가는 목이 멍이 들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히제의 머리 위로 차갑게 식은 표정의 호제란이 있었다. 모든것을 다 잃은것 같은 호제란의 공허한 눈동자가 얽혀들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히제가 무너져내리는 기분으로 소리질렀다. 호제란에게 목이 졸려 잔뜩 마르고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 하."
호제란의 공허한 헛웃음이 히제의 정수리 위로 퍼져나갔다. 호제란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 하. 혀로 느릿하게 입안을 쓴 호제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호제란의 검은 눈동자표면으로 물기가 번져나갔다. 갈곳을 잃은 호제란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손끝을 미세하게 움직이던 호제란이 별안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힘을 너무 줘 손톱이 손바닥안을 파고 들어갔다. 비릿한 피가 찢어진 손바닥에서 스며나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내렸다. 호제란이 눈동자를 내리깔아 발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히제를 내려다봤다. 히제는 연신 하시겐을 사랑한다고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닥쳐라."
잔뜩 갈라진 음성이 새어나왔다. 멈짓한 히제가 고개를 들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호제란을 올려다봤다.
"그를 사랑해요. 난."
"닥치라 했다!"
화를 애써 삼켜내는 호제란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호제란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히제를 노려봤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천천히 히제를 쓸었다. 손안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히제의 가늘고 긴 머리카락. 하얗고 작은 얼굴. 눈물이 그렁그렁한 크고 선한 눈. 나를 미치게 만드는 너의 모든것. 차라리 죽여버릴까. 다시는 그딴말 하지 못하게. 다시는 나 말고 그 누구도 쳐다보지 못하게, 생각하지도 못하게. 그리워하지도 못하게. 죽어버릴까. 그러면 완전히 널 소유할수 있을까. 이 터질듯이 들끓는 피가 가라앉을까. 그래버릴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소름끼치게 변했다. 어금니를 악문 호제란이 바람같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요멸도를 뽑아들었다.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요멸도의 날카로운 칼끝이 정확하게 히제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히제가 눈동자가 일렁였다.
"내놔라."
"……."
"니가 하시겐의 요주(妖珠)를 가지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내놔라."
분노를 참고 있는 호제란의 칼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시겐의 요주란 말에 히제의 눈이 경직됐다. 자신도 모르게 히제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하시겐의 요주를 꽉 움켜쥐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듯이.
"시, 싫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히제가 뒷걸음질 쳤다. 히제의 선명한 거부 반응에 호제란의 반듯한 미간이 구겨졌다. 호제란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무섭게 일그러지던 호제란이 갑자기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못빼앗을것 같으냐."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호제란이 들고 있던 요멸도를 던져버렸다. 그가 다부진 팔로 히제를 붙잡으려던 순간, 히제가 목걸이 끈을 끊어 손안에 쥐고 있던 하시겐의 요주를 그대로 삼켜버렸다. 경악한 호제란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히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눈을 질금감은 히제의 목울대가 크게 위로 올라갔다. 호제란이 멈짓한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으로 목을 감싸쥐고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친 히제가 호제란의 검은 눈동자를 비장하게 직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시겐의 요주. 당신은 절대로 가질수 없어."
"……."
"당신은 날 못죽이니까……."
죽일수 있었다면 오래전에 죽었을 자신이였다. 호제란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제를 바라보던 호제란의 눈빛이 짙어졌다. 아니다. 차라리 먹어버릴까. 뼈째로 씹어 삼켜버릴까. 피한방울까지 모조리 다 마셔버린다면 내것이 될까. 그럴까.
"하, 하. 하하, 하하하하!"
호제란이 갑자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호제란의 웃음소리가 침묵을 타고 흘렀다. 크크큭, 목을 크게 뒤로 젖혀 웃는 호제란의 모습은 이미 제정신 아니였다. 히제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히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끊어졌다. 호제란이 고개를 젖힌 그대로 한동안 시간이 멈춘듯했다. 히제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안이 따끔거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호제란의 얼굴은 언제 웃었냐는듯 소름끼치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죽일수는 없지만, 가질수는 있지."
히제가 도망치기도전에 호제란이 빨랐다. 맹수같이 달려들어 히제의 팔을 붙잡아 낚아챈 호제란이 그대로 히제를 끌어당겨 자신의 커다란품에 그녀를 가두면서 보드라운 목덜미에 미친듯이 입술을 부볐다.
살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커다란 바위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누워있는 묘도린의 볼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툭 떨어져내렸다. 묘도린이 손안에 꽉 쥐고 있는 차율란의 요검 손잡이에는 묘도린의 요주가 매어져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차율란의 마지막모습이 묘도린의 눈동자표면을 타고 흘렀다. 묘도린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감기는 눈꺼풀에 의해 모습을 감췄다. 운명이 가혹했다. 견딜수가 없어졌다.
살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떠나고자 한다면 떠날수 있었다. 차율란이 붙잡아둔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곁에 남은것이였다. 일일히 그 순간에 매달리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과 차율란에게 앞으로 함께 할 많은 순간이 있을꺼라고 믿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그때 그때, 그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했다. 괴로웠다. 온몸에 피가 다 말라버린듯이 공허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를 잃어버리고 살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억눌러도 치밀어오르는 슬픔에 끝끝내 감은 묘도린의 눈꺼풀을 비집고 서글픈 눈물이 새어나왔다. 꽉 다문 묘도린이 입술이 울음을 머금고 가늘게 떨렸다. 점차 수많은 빗방울이 떨어져내려 묘도린의 몸을 적셔나갔다.
앞으로의 삶도, 요괴족의 미래도 세상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내게 살아갈 의미를 부여해주지 못했다. 그딴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떨리는 속눈썹과 함께 느릿하게 눈을 뜬 묘도린의 눈동자에 비장함이 서렸다.
존경했던 하시겐님을 위해서, 사랑했던 차율란을 위해서, 호제란을 죽여야 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묘도린이 빗속에서 낮은 목소리를 그림자요괴를 불러냈다.
"시, 싫어! 호제란!"
경악에 가득 찬 히제의 비명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 날카롭고 절박한 비명소리도 호제란의 무지막지한 행동을 막지 못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호제란이 미친듯이 히제에게 입을 맞췄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호제란의 거친 행동에 히제의 입술이 찢어져 비릿한 피가 새어나왔다. 공포에 질린 히제가 미친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런 히제를 간단히 제압하며 몸을 밀착해 더 꽉 끌어안은 호제란이 히제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떨어진 히제가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던 찰나, 호제란이 히제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사이로 움켜잡아 다시 침대로 눕혔다. 호제란의 품아래 갇힌 히제가 몸을 뒤집으려고 하자, 호제란이 히제의 어깨를 틀어쥐어 강제로 앞으로 돌려 눕혔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호제란이 히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충격과 공포에 질린 히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호제란, 호제란!"
울음에 찬 히제의 비명소리도 소용없었다. 호제란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들끓던 피가 역류해 아무런 생각도 할수 없었다. 어느새 히제의 옷이 호제란의 손에 벗겨져 허리근처를 맴돌았다. 히제가 바르르 떨면서 두손으로 호제란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냈다. 호제란의 몸은 믿을수없을 만큼 뜨거웠다. 흠짓한 히제가 눈을 질금 감고 몸부림쳤다. 호제란이 강인한 힘으로 히제의 팔목을 움켜쥐고선 자신의 상의를 뒤로 벗어냈다. 질색한 히제가 몸을 웅크렸다. 호제란이 히제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폐하. 율겐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당장 폐하를 긴히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릴케장군의 단정한 음성이 문너머로 들려왔다. 하아, 하아. 거친숨을 몰아쉬는 호제란의 뜨거운 숨결이 히제의 코끝에 닿았다. 히제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였다. 호제란의 흐려졌던 눈동자가 제색을 찾았다. 호제란이 자신의 몸아래 몸을 웅크리고 상처입은 어린짐승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히제를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히제가 겁에 질려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호제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제기랄.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킨 호제란이 상의를 걸치면서 냉정하게 방안을 나섰다.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히제의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기다렸다는듯이 터져나오는 울음에 히제가 두손으로 입술을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어깨만은 감출수가 없었다.
"톤트국의 노르수단의 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는 당장에 폐하를 만나 그일에 대한 진상을 소상히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저와 함께 톤트국의 최전방 탄지말까지 동행했습니다. 거기서 폐하의 답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가지고 돌아온 율겐의 말에 금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느릿하게 입술을 쓸던 호제란의 눈이 짙어졌다. 율겐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오직 히제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아직도 손끝에 히제의 온기가 감겼다. 호제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눈을 내리깐 호제란이 율겐을 힐깃했다. 손아래서 무겁게 닫혀있던 입꼬리가 위로 매끄럽게 올라갔다. 탁탁, 팔걸이를 두어번 툭툭 친 호제란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북쪽 곤루족에게 갖다와라."
"네? 혹시 곤루족에 원병을 요청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전쟁을 할마음이 없는데, 원병을 요청해서 무엇하겠느냐."
전쟁을 할맘이 없다니. 종잡을수 없는 주군의 생각에 율겐의 눈썹이 활처럼 위로 올라갔다.
"폐하, 그게 도대체 무슨말씀이십니까?"
"갖다와라. 율겐. 뒤에 숨어 이 전쟁을 몰래 훔쳐보면서 곤루족도 느낀것이 많을테니 말이다."
#25.
탄츈관에서 멀지않은 숲속에 우파마가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커다란 나무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오래된 고목나무 껍질엔 이름도 모르는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무 밑둥으로 펼쳐진 흙바닥은 느릿하게 올라왔다가 내려갔다는 반복했다. 우파마의 탐탁찮은 눈동자가 탄츈관 성곽위로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최 인간들의 속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을 치를 맘이 있긴 있는건지. 없는것 같으면서도 바삐 움직이고 저들끼리 수근수근거리고. 우파마가 두툼한 입술에 물고 있던 마른잎새를 잘근잘근 씹었다.
"소루, 이 지랄맞은 전쟁이 언제 끝날것 같냐."
우파마의 걸걸한 목소리에 나무위에 날개를 접고 서 있던 소루가 긴꼬리를 말아올렸다. 우파마는 자주 알수 없는 인간의 말을 섞여쓰곤 했다. 소루의 호랑이의 것을 닮은 눈동자가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을 힐깃거렸다. 파란기운을 머금고 있는 어두운 하늘에 별이 눈부셨다.
"머지않아, 곧 끝나야 합니다."
"합니다……. 라. 너도 느끼고 있지? 태양의 날이 코앞이라는거."
우파마가 입에 물고 있던 마른잎새를 푸, 불어 내뱉었다.
"몸이 예전같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이런데 하급요괴들은 오죽하겄냐."
나무에서 등을 뗀 우파마가 별이 유난히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뭔가 가슴 한켠이 묵묵히 쓰려오는것 같았다. 인간계집들처럼 월경인가, 달달인가라도 하나. 속없이 낄낄 웃은 우파마가 엉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시겐이 탄츈의 성곽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승전때문에 흥에 겨워 술판을 벌인 보초병들은 술에 쩔어 창을 품에 색시처럼 안은채, 성벽에 몸을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벌린 입새론 침을 질질 흘리며 입다심을 하는 그들 주위로 검은자기로 된 술병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성곽위에서 서서 서늘한 눈동자로 그들을 쓸어본 하시겐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이 없는 어둡고 후미진곳으로 걸어가던 하시겐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오셨습니까."
음영진곳에서 긴유가 모습을 드러내렸다. 푸른 달빛에 드러나는 긴유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했다. 하시겐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긴유를 앞에 두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하시겐이 아무렇지않게 다시 발걸음을 뗐다. 마지막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차분하게 하시겐을 응시하고 있던 긴유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하시겐의 행동때문에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저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스쳐가는 하시겐을 붙잡는 긴유의 음성이 거칠었다. 멈짓한 하시겐의 구슬같은 초록빛 눈동자가 옆으로 스윽 움직였다.
"내가 왜 너를 죽여야 하느냐."
용의 울음을 닮은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하시겐의 담담한 음성에 긴유의 눈빛이 흐려졌다. 긴유가 손안에 쥐고 있던 자신의 요검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그냥 화가 났다. 정해지지 않은 뭔가를 향해 이유없이 자꾸만 화가 났다. 하시겐을 바라보지 않고 굳은듯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긴유가 마른 입술을 뗐다.
"저는 대장님을 배신했습니다."
말을 이어가던 긴유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지금도 죽이고 싶습니다. 그것이 대장님을 거역하는일이라도 그래야 했습니다. 대장님과 우리 요괴족에겐 델타산이 그것을 얻기 위해선 하이얀제국을 패망이 필요합니다. 대장님이 조금이라도 망설이는게 싫었습니다. 제가 모시는 대장님의 발목을 잡는건 그 어떤것이라도 싫었습니다. 그 인간여자를 죽이려 했던것. 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계를 뚫지 않았던거. 후회하지 않습니다."
긴유의 눈동자가 주체할수 없을만큼 떨리고 있었다. 요검을 쥐고 있는 다부진 손마저 떨렸다. 그것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역시 무언가에 의해 흔들리고 후회하고 있다는것을. 떨리는 긴유와 반대로 하시겐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이였다. 하시겐이 아름다운 눈동자만 옆으로 움직여 잠시 그런 긴유의 옆얼굴을 힐깃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하시겐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후회하지마라."
주체할수 없이 떨리고 있던 긴유의 눈이 커졌다. 하시겐이 낮고 느릿한 음성으로 말을 이으면서 그런 긴유를 스쳐 지나갔다.
"널 지금 여기서 죽이지 않은것. 나도 후회하지 않을테니."
"술을 더 가져와라."
"폐하, 벌써 삼일째이옵니다. 군사회실엔 한번도 납시지 않으……."
"술을 더 가져오라하지 않았느냐!"
원로내신의 만류에 술에 취한 호제란이 악을 쓰며 상을 쓸어버렸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술병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호제란의 곁에서 술시중을 들던 여인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창백해져선 부들부들 떠는 여인들의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한껏 치장되어 있었다. 옷이라고 입은 얇은 천조각은 아슬아슬하게 가슴만 가리고 있을뿐이였다. 여인들의 듣기싫은 비명소리에 호제란의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술에 취할대로 취한 그의 흑요석같은 눈동자는 그 빛을 잃고 흐릿했다.
"폐하! 여기는 전장이옵니다! 지금은 나라의 성쇄가 달린 전쟁중이옵니다!"
원로내신은 답답했다. 호제란이 없는 군사회실을 지키는 장수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코앞에 둔 탄츈을 허망하게 빼앗기고 심기일전하여 군사를 추스러 반격을 하기는 커녕 자신의 주군, 호제란은 밤낮을 잊고 술과 여자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냈다.
"전쟁? 내가 누구를 위해서 전쟁을 하느냐. 내가 뭐 때문에 전쟁을 하느냐! 누구 좋으라고 전쟁을 하느냔 말이다! 내가!"
생각할수록, 내뱉을수록 가슴이 터질것 같이 화가 났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머리와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다. 타들어갈것만 같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갈증에 말라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미칠것 같았다. 아니 미쳐서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벼랑끝에 몰린 맹수처럼 호제란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 공격적인 고함소리에 원로내신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호제란이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옆에 진열되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서늘한 검날이 빛났다. 원로내신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원목탁상을 한손으로 옆으로 밀어던져버린 호제란이 검끝으로 바닥을 끌면서 원로내신에게 다가갔다. 호제란이 검을 치켜드는 순간, 릴케장군이 달려와 호제란의 팔을 위에서 꽉 붙잡았다.
"아니되옵니다! 폐하!"
"놔라! 이거 놔란 말이다! 놔!"
제 성을 못이긴 호제란이 미친듯이 발악을 했다. 무지한 힘에 릴케장군의 관자놀이를 타고 미지근한 땀이 흘러내렸다. 막무가내로 휘둘러대는 검이 릴케장군의 팔을 스쳤다. 섬뜩한 통증에 릴케장군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끝끝내 릴케장군은 호제란을 놓지 않았다. 뒤에서 창백하게 질려 입을 벌리고 굳은듯이 서 있던 여인들이 재빨리 옷가지를 챙겨들고 도망쳤다. 한참을 미친듯이 발악을 해대던 호제란이 제풀에 지쳐 헉헉거리면서 늘어졌다.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뜨거운 호제란의 단단한 몸을 타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런 호제란을 뒤에서 단단히 붙잡고 있던 릴케장군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크크큭, 하하."
"폐하……."
호제란이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나자빠져 정신을 못차리던 원로내신이 허겁지겁 일어나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안심한 릴케장군이 탄식같은 한숨과 함께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호제란의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진이 다 빠져나간듯 공허했다. 크크큭, 쓰게 웃으면서 호제란이 입을 뗐다.
"히제는 아직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느냐."
"……예. 폐하……."
"하, 하. 크크큭. 언제 먹을꺼라드냐. 이 호제란의 가슴이 다 타서 죽으면 그때야 먹을꺼라드냐."
헛웃음을 토해내던 호제란이 크크큭, 괴롭게 웃었다. 무릎에 팔을 괴고 지친듯 고개를 숙이는 호제란을 서서 내려다보는 릴케장군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벌써 삼일째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버린 공주님도 그 마음에 무게를 더했다. 그리고, 그리고……이성과 이성의 공백기간에 떠오르는 그 요괴도.
"아직은 죽을수 없다. 아직은……."
내일이면 율겐이 돌아온다. 곤루족의 수장과 함께 돌아온다. 그때쯤이면 서신을 받은 노르수단도 이곳에 당도하겠지. 그때까지 이 호제란, 절대로 죽을수 없다.
"지금 뭐하시는겁니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긴유가 화를 내고 있었다.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 가늘게 떠릴고 있었다. 유난히 낮은 긴유의 목소리에 탄츈 회장에 앉아있던 장수들 몇이 흠짓 어깨를 떨었다. 소규모의 성인 탄츈은 험한 히라시야 산맥의 지형때문에 바닥도 고르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히라시야 산맥 지형에 맞춰져 제멋대로인 구석이 많았다. 좁은 숙소에서 부대끼고 있는 병사들은 시시한 기 싸움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그랗게 뚫린 창밖으로 나태해진 병사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이 보였다. 창밖을 힐깃 거린 우파마가 보란듯이 혀를 내둘렀다.
"약속한 시일이 훨씬 지나고 있습니다. 속전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차분한 분노를 머금고 있는 긴유의 말에 책사가 안경을 고쳐쓰면서 쩔쩔맸다.
"군의 책임자인 한미충시 장군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왕궁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는 모양이니, 명이 올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나참, 인간들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속결을 해야 된다면서 하시겐님을 찾고 난리더니. 그때 부락부락성을 낸건 다들 잊으셨나? 어쩜 하나같이 저리들 뻔뻔하신지."
책사의 말에 우파마가 콧웃음을 쳤다. 노골적으로 인간장수들을 빈정거린 우파마의 말에 정곡을 찔린 장수몇이 헛기침을 했다. 몇몇은 시뻘게진 얼굴을 감추며 공들어 손질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그놈의 빌어먹은 체면들은. 흥. 눈쌀을 찌푸린 우파마가 고개를 팩 돌렸다.
"아무튼 더이상은 불가합니다."
"긴유 말이 맞소. 우리 요괴족은 더이상은 안됩니다. 인간장수 나리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럴 타당한 이유가 있소. 그러니까 더이상 미지근한 말로 흐지부지 시간끌지 말고 정확히 언젠지 확답을 주시오. 그래야 우리도 철수를 하던지, 톤트국의 노르수단인지, 노르스름인지 그 인간 뒷통수를 쳐 델타산을 빼앗을거 아니오."
농을 섞은 우파마의 적나라한 말에 톤트국 장수들의 얼굴이 일제히 구겨졌다. 흥, 그럼 누가 겁먹나. 콧방귀를 낀 우파마가 팔짱을 끼면서 낄낄거렸다.
"우파마."
찢어진 눈을 옆으로 움직인 긴유가 차분한 목소리로 우파마를 저지했다.
"쳇. 내가 뭐 틀린말했냐? 태양의 날은 코앞이고 이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면 노르스름을 쳐서 델타산을 빼앗아야 할거 아니야. 빈손으로 돌아갈꺼냐? 다른 요괴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특히 차율란님이 우리를 잡아먹으려 드실게다. 흥."
"듣자, 듣자 하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오! 노르수단 폐하를 능멸한것도 모자라, 전쟁중에 발을 빼겠다니!"
한 젋은 장수가 탁상을 쾅 내리치면서 분개했다. 울그락 불그락 해진 젋은 장수와 달리 긴유의 얼굴을 차분했다.
"우리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
"하시겐님은 약속을 절대 어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일까지 확답을 주십시오."
긴유의 고양이같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책사의 얼굴을 쓸었다. 그 싸늘한 시선에 책사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차분하게 말을 마친 긴유가 소매를 늘어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히 회장을 나서는 긴유의 뒤를 따라나서면서 우파마가 들으란듯이 혀를 찼다.
"인간들이란."
술에 취한 호제란이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애써 다잡는 호제란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벽을 짚으면서 힘겹게 무거운 다리를 옮긴 호제란이 히제의 방문앞에서 멈춰섰다. 하아, 하아. 뜨거운 숨을 몰아쉰 호제란의 흐릿한 눈동자가 굳게 닫힌 히제의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호제란이 손으로 방문을 짚었다. 오래된 나무판자가 끼이익,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날봐……날보란말이다! 피하지 말고 날봐! 숨지 말고 나와 날 보란말이다!"
흥분한 호제란이 이마를 방문에 쿵 하고 박았다. 반듯한 그의 미간이 괴롭게 구겨졌다. 호제란의 단단한 주먹이 부서져라 방문을 두들겼다. 술에 취한 호제란이 주정을 부리듯 발악을 했다. 미친듯이 악을 쓰는 호제란의 갈라진 고함소리가 싸늘한 복도를 갈랐다.
"하아, 하아. 문열어! 문열어! 문열고 나를 봐! 오직 너를 원해서, 니가 가지고 싶어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나를 봐! 나와서 나를 보란 말이다!"
문을 부술듯 주먹질을 해대던 호제란이 거친숨을 몰아쉬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호제란의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니가 뭔데, 대체 니가 뭔데, 나를 이렇게 벼랑끝으로 몰아가. 왜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거냐. 니가 뭔데. 호제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아, 하아. 하아."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표면에 서글픈 물기가 서렸다. 호제란의 관자놀이를 타고 미지근한 땀방울이 흘러내려 날렵한 턱선을 타고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아, 호제란의 단단한 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호제란이 방문에 이마와 주먹을 기댄 그 자세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히제의 방문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호제란의 눈동자가 어미를 잃은 새끼짐승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목구멍이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킨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제발 나와. 나와서 니가 아니면 안되는 날 보란말이다……."
호제란이 괴로운듯 눈을 질금 감았다. 자신의 몸 아래서 상처입고 떨고 있던 히제가 떠올라서 괴로웠다. 화가 났다. 갈곳 없는 화가 자신을 잠식해가는것 같았다. 나의 영혼. 나의 인형. 너무 아까워서 내 안에만 꼭꼭 감추두고 싶었던 소중한 너. 나의 너.
"잘못했어……."
미친듯이 화를 내다가 어린아이처럼 호제란이 어깨를 떨었다. 호제란이 이마를 기대고 있는 방문 너머론 히제가 등을 대고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가는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안에 얼굴을 묻고 있는 히제의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지친 숨을 몰아쉬면서 끝끝내 열리지 않은 방문을 바라보는 호제란의 눈빛이 소름끼치게 변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나를 계속 미치게 만드는 너. 그래도 포기할수 없는 나. 끝까지 가겠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너를 가질수 있다면 기꺼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이 몸을 내던질테니.
#26.
뜨거운 여름의 숨결을 머금은 바람이 하시겐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하게 볼에 난 흉터가 시큰거렸다. 하시겐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한켠이 아릿했다. 하시겐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보내지 말걸 그랬다. 하시겐이 눈을 떴다. 서늘한 눈매속 비취색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오래된 나뭇가지에 서서 히라시야 산맥을 굽어보던 하시겐이 흙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긴 옷자락이 미지근한 밤바람에 펄럭였다.
`당신과 칼을 겨누고 싶지 않아…….'
언제라도 그 작은 존재를 향해 그 누구보다 빨리 달려갈수 있는 강인한 다리를 가졌다. 하지만 요괴족의 수장으로써의 책임이 다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언젠가 다 버리고 너에게 갈테니, 기다려라. 차율란에게 모든걸 다 내어주고 너와 같은 작은 존재가 되어, 평범한 존재가 되어 미련없이 너에게 달려갈테니.
"폐하. 톤트국의 왕, 노르수단과 곤루족의 수장 템킨이 지금 지하 비밀 회장에 모두 모였습니다."
율겐이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호제란에게 고했다. 무릎에 팔을 걸치고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옆으로 스윽 움직였다. 율겐의 비장한 얼굴을 힐깃거린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다시 먼 허공을 응시했다. 밤새도록 히제를 기다렸지만, 굳게 닫혀진 견고한 방문은 끝끝내 자신을 거부했다. 방문에 기대고 있는 등이 시렸다. 픽,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린 호제란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다 모였다. 서대륙의 세 중심이. 이 호제란의 무대로. 호제란의 눈동자 표면에 어둠이 번졌다. 율겐을 따라나서기전 호제란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등지고 선 히제의 방문을 힐깃거렸다.
히제야. 끝을 향해 가보자. 나, 호제란 그리고 그 요괴. 우린 공생할수 없으니. 반드시 한명이 죽어야 이 지독한 비극이 끝이 나겠지.
호제란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비장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호제란의 앞을 율겐이 안내했다. 탁한 먼지가 이는 길게 뻗어진 복도를 걸어가던 호제란이 율겐이 따라 후미진 벽면 안쪽으로 들어섰다. 율겐이 작은 벽돌을 돌려 안으로 밀어넣자, 묵직한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벽면이 옆으로 드르륵, 밀렸다. 탁한 먼지가 부유하면서 코끝을 간지럽혔다. 건장한 사내가 무리없이 들어갈 만한 어두운 공간이 드러났다. 율겐이 앞서 어두운 지하계단으로 들어섰다. 음침한 벽면 곳곳에 횃불이 매어져 있었다. 노랗게 흔들리는 불빛속으로 호제란이 한참을 내려가자, 어느덧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동그란 원목탁상을 둘러싸고 노르수단과 곤루족의 템킨이 마주앉아있었다. 노란 횃불에 흔들리는 그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짙은 브라운 계열의 후드를 뒤집어쓴 노르수단이 호제란의 등장과 함께 후드를 목뒤로 넘겼다. 오랜 세월이 겹겹히 쌓인 주름진 노르수단의 옆에는 근엄한 표정의 팬피치 대장군이 앉아있었고, 팬피치 대장군의 뒤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주위를 살피는 살쾡이같은 한미충시 장군이 서 있었다. 호제란의 매같은 눈동자가 그들을 차례로 쓸어보다가 템킨에게로 옮겨졌다. 층층이 잘려있는 거친 흑발의 템킨은 북쪽의 야만족답지 않게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릴때, 귀 밑에서 턱선을 타고 목으로 길게 이어진 핏빛의 붉은 문신이 인상적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없는 템킨의 얼굴 뒤로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옆으로 땋은 머리에 상의를 걸치지 않은 사내의 구릿빛 몸은 우락부락했다.
"하이얀제국의 호제란폐하이십니다."
율겐이 노르수단과 템킨에게 예를 갖추면서 호제란을 소개했다. 지금 이 어두운 비밀 지하실엔 서대륙의 세명의 중심이 앉아있었다.
"익히 알고 있지."
호제란과 전쟁을 치르고 있고, 예전부터 호제란을 경멸했던 노르수단이 눈썹을 구기면서 툭 내뱉었다. 그에 비해 곤루족의 템킨은 말없이 무심한 눈으로 호제란을 한번 힐깃거릴 뿐이였다. 템킨의 초록색 눈동자가 빛났다. 탄트라 제솝을 본적은 있었으나,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쥔 그의 아들 호제란을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였다.
"본론부터 들어가겠다."
노르수단의 마땅찮은 시선에 비릿하고 여유롭게 웃은 호제란이 다부진 손에 꽉 쥐고 있던 세포린의 서신을 탁상위로 던졌다. 템킨의 눈동자가 아래로 움직였다. 쳐진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노르수단의 눈이 커졌다. 그건 옆을 지키고 있던 팬피치 대장군이나 한미충시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분명 톤트국 왕가에서 사용하는 서신지였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쳐진 그 서신에 적혀있는글귀는 분명히 익히 알고 있던 세포린의 친필체였다.
"보다시피 톤트국의 황태자 세포린이 나에게 직접 보낸 서신이다."
호제란의 말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르수단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포린의 서신을 움켜잡았다. 경직된 눈동자를 굴려 서신에 쓰인 글귀를 빠르게 읽어 나가는 노르수단의 표정이 파리하게 굳어갔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그런 노르수단을 힐깃했다.
"변방, 우부나루에 있던 하이얀제국의 공주, 히제가 그곳을 탈환한 요괴족의 수장 하시겐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톤트국의 왕, 그대도 알다시피 그대의 아들은 하이얀제국와 톤트국의 국교가 폐지된 이후에도 히제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내가 알고 있었으니, 그대도 어느정도 짐작은 했겠지. 히제를 도와주려 하던 톤트국의 황태자 세포린이 나에게 직접 밀서를 보냈다. 요괴족의 수장, 하시겐의 손에서 히제를 빼돌리겠다고."
"하, 하……."
호제란의 말에 노르수단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포린의 서신을 붙잡고 있는 노르수단의 검버섯이 핀 손이 분노를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그같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걸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자신을 이같이 들끓게 하는것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에 격분한 하시겐이 나와 세포린의 약속장소까지 쫓아와 요검으로 그를 죽였다."
"이, 이, 이! 개같은 요괴족이!"
노르수단의 눈이 충혈됐다. 머리끝까지 들끓어오르는 분노에 노르수단이 손에 꽉 쥐고 있던 세포린의 서신을 거칠게 내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제란의 눈동자 표면이 매끄럽게 빛났다. 쾅, 노르수단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탁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묵묵히 호제란의 애기를 듣고 있던 템킨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요괴족의 수장, 하시겐이 그랬다는 증거가 있나."
"그럼 누가 죽였단 말이냐."
노르수단에게서 고개를 돌린 호제란의 싸늘한 눈동자가 템킨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대."
템킨의 대답에 호제란과 템킨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강렬하게 마주쳤다. 굳어져있던 호제란의 표정이 풀리더면서, 호제란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왜."
"……."
"내 입장에선 세포린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히제를 아무런 댓가도 없이 돌려주었으니, 그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세포린을 죽였다면 그의 목을 잘라 탄츈관의 성곽에 매달았을것이다. 그게 톤트국의 사기를 떨어트리는데 유리했을테니."
호제란이 템킨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호제란의 말이 옳았다. 그게 전쟁에 더 유리했을것이다. 팬피치 장군이 경미하게 턱을 끄덕였다.
"세포린의 시신을 직접 확인해서 알겠지만, 인간의 검은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자를수 없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고 할지라도."
"……."
"내가 내 목숨하나 부지하기 힘든 그 상황에 요괴의 검을 빼앗아 세포린을 죽였다고 생각할테면 해라."
호제란의 살벌한 눈동자가 템킨에서 거둬졌다. 노르수단은 여전히 터져나오는 치욕과 분노를 삼켜내고 있었다. 팬피치장군의 얼굴이 몰라보게 굳어졌다. 그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한걸음 물러나 있던 한미충시 장군을 불러냈다.
"한미충시장군. 그대는 뭐 할말 없소. 그 누구보다 요괴족을 잘 알꺼라고 생각하는데."
세 왕이 뿜어내는 엄청난 기압에 잔뜩 움츠려 있던 한미충시 장군이 흠짓 어깨를 떨면서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나왔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그가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호제란의 기압에 눌린 한미충시 장군이 무의식적으로 호제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펴, 평소 요괴족은 그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주 다툼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타, 탄츈으로 진격하는 진로를 가지고 요괴족이 말도 안되는 주, 주장을 해서 세포린 황태자전하를 비롯한 저의 톤트국의 장수들과 그들간의 다툼과 신경전이 심했습니다."
"내 이놈들을!"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노르수단이 버럭 소리질렀다. 움찔한 한미충시 장군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소인의 짧은 소견으론 그 하시겐이라는 요괴놈이 눈엣가시 같던 세포린님을 죽인게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놈이 캥기는게 있는지, 세포린님의 서거이후로 잠시동안 말도없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폐하!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이건 오만방자한 요괴족의 그 요상한 힘을 믿고 우리 톤트국을 능멸한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하는 우리 톤트국을 완벽하게 기만한것입니다! 아무리 톤트국이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 해도 어찌 그렇게 극악무도할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한나라의 황태자전하를 그렇게 살해할수가 있습니까! 끝까지 몰랐다면 몰라도 알아버린 이상, 절대로 요괴족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격분한 팬피치 장군이 소리쳤다. 팬피치 장군옆에 앉아있던 노르수단의 얼굴이 분노에 형용할수만큼 일그러졌다. 분노에 치를 떠는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얼마나 심성이 착한 아들이였던가. 왕좌에 눈이 멀어 앞뒤 없이 달려드는 자식들하고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좋은 아들이였다. 얼마나 예뻐하던 자신의 아들이였던가. 노르수단의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꽉 움켜진 주먹에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모든게 완벽했다. 모든 정황이 자신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완벽하게 이 호제란의 손바닥안에서 놀고 있었다. 호제란이 손을 쥐었다, 폈다.
"듣자하니, 명백히 톤트국과 요괴족에 관한 일인것 같은데. 그대, 호제란. 곤루족의 수장, 나 템킨을 부른 연유는 무엇인가."
다잡은 사냥감을 노려보는 매처럼 노르수단을 바라보고 있던 호제란이 느릿하게 템킨에게로 몸을 돌렸다. 분노에 치를 떨던 노르수단과 팬피치, 한미충시 장군의 눈이 일제히 호제란과 템킨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정말 톤트국만의 일인것 같은가."
"……."
"그대, 곤루족도. 톤트국도, 나 하이얀제국도 지켜봤듯이 요괴족의 전투력은 가히 최강이였다."
"그래서?"
"한나라의 황태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요괴족이 과연 톤트국이 내어주는 조그만한 델타산 하나로 만족할까."
템킨의 눈썹이 활처럼 위로 올라갔다. 호제란의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인간고기에 맛을 들인 요괴가 그 강력한 요검을 들고 기껏 조그만한 산이나 지키면서 살아갈수 있을까."
"그게 무슨말입니까?"
팬피치대장군의 근엄한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르수단의 눈동자 또한 몰라보게 일렁였다. 그들의 눈앞에 그려지는 끔찍한 미래에 한미충시 장군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미충시 장군의 뒷목에 오한이 스며들었다. 호제란이 탁상에 두 손을 짚으면서 멋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허리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즐긴다. 본래 습성이 그러하다. 그런 그들은 델타산을 얻으면 더 좋은 요람이 욕심날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바다를 끼고 있는 숲도 가지고 싶어지겠지."
"……."
"요괴족이 어떨것 같냐."
"마, 맞습니다! 저, 저희와 함께 있던 요괴족놈들은 자신들이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면서 항상 큰소리를 쳤습니다. 인간을 깔보며 항상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공포에 넋이 나가 벌벌 떨면서 호제란의 말을 거드는 한미충시 장군은 이미 완전히 호제란에게로 손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자신의 거드는 한미충시 장군의 발언에 호제란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노르수단의 눈동자는 이미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팬피치 장군의 심장이 기분 나쁘게 고동쳤다. 팬피치 장군은 오래전부터 그 점에 대해서 깊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힘이 되는 요괴족의 전투력을 마냥 기뻐하고 박수를 치기엔 그들은 너무 강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눈엣가시 같은 하이얀제국을 없앨수 있다 해도, 언젠가 요괴족의 눈치만 보면 살아야 할 암담한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미 오래전부터 싹트고 있던 그였다. 우리의 용맹한 전사는 돌아서면 치명적인 독이 된다.
"나 하이얀제국을 치면 그 다음은 어딜것 같으냐."
"토, 톤트국……."
팬피치의 장군이 목소리가 감출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끔찍했다. 요괴족은 최강이였고, 그런 요괴족이 톤트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 장면은 상상조차 비극이였다.
"톤트국. 그 다음은 어딜것 같으냐."
공포를 이끌어내는 호제란의 매같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템킨에게로 옮겨갔다.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뜬 템킨과 호제란의 시선이 마주쳤다.
"곤루족."
템킨이 담담한 표정으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됐다. 호제란의 모양좋은 입술이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건 조그만 땅덩어리를 가지고 벌이는 영역싸움이 아니다. 우리끼리 싸우다 지치기만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요괴족이다."
"……."
그 자리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공포에 점점 잠식되는 그들의 눈동자가 호제란의 뜻대로 맘껏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후면 탄신일이다. 그날을 요괴들은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더군. 그리고 그날은 요괴족의 최대의 약점이다. 신이 우리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탁한 지하실엔 무겁고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더이상 그 누구도 호제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호제란이 탁상에서 손을 떼면서 느릿하게 허리를 곧추 세웠다. 호제란의 위험한 눈빛이 소름끼치게 빛났다.
"요괴족을 없앨수 있는 기회는 오직, 평생에 단 한번, 지금 이 순간뿐이다. 선택은 자유다. 요괴족을 믿고 사이좋게 차례로 개 죽음을 당하던지. 아니면 이 호제란과 손을 잡고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붙잡아, 영원히 공생하며 살아남을지. 선택해라."
너를 원했을때 부터 나는 이미 예정된 운명처럼 지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와 더러운 피 더 묻힌다고 달라질게 무어냐.
히제야. 끝을 향해 가자.
#27.
히제의 공허한 시선이 칙칙한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어두운 방안을 가르는 한줄기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속에 몸을 숨긴 히제가 가는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 닿이는 햇빛이 뜨거웠다. 손을 거둔 히제가 호제란에게 졸려 퍼렇게 멍이 든 목을 찬찬히 쓸었다. 아릿했다. 딱 그 만큼, 가슴도 아릿했다. 히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먹지 못해 앙상하게 마른 피부가 까슬했다. 부르튼 히제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어쩌면 호제란을 설득할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비극적인 전쟁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였다. 착각이였다.
이미 우리 모두는 강을 건너버린게 아닐까.
괴롭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떨리는 두손으로 가린 히제가 그 자세로 한참을 떨었다. 히제의 손목을 타고 서글픈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운다고 달라지는건 없습니다."
낯설지만 고운 미성이 별안간 들려왔다. 히제가 손을 내리고 주위를 쓸었다. 서글픈 눈물방울이 아슬하게 걸친 히제의 선한 눈이 커졌다. 청아한 모습의 묘도린이 그늘진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뜨는 묘도린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히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도 날 죽이려 왔나요."
한동안 쓰지 않았던 목에서 거칠고 메마른 음성이 튀어나왔다. 히제의 물음에 묘도린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죽이려 한다면, 죽어줄순 있습니까."
묘도린의 말끝은 날카로웠다. 히제의 눈이 공허하게 얽혀들었다. 멍울진 눈물이 눈동자표면으로 번져나가 묘도린의 모습이 잠시 흐려졌다.
"아니요."
"……."
"난 절대 죽을수 없어요."
"……."
"그가 절대 죽지 말라 했으니까. 언젠가 데리러 올테니, 절대로 죽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랬으니까."
묘도린을 직시하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히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것이 버겁고 막연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속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우리가 서 있었다. 침대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히제를 바라보는 묘도린이 눈빛이 짙어졌다. 손안에 꽉 움켜쥐고 있던 차율란의 요검을 고쳐쥐면서 묘도린이 모양좋은 입술을 뗐다.
"하시겐님, 호제란, 둘중에 한명이 죽어야 이 모든게 끝납니다."
히제의 눈동자가 슬프게 흔들렸다. 묘도린이 손끝으로 차율란의 요검을 살짝 쓸었다. 손끝에 감기는 느낌이 아련했다. 가슴 저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아릿한 감정에 묘도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
히제는 참을성있게 그 공백을 기다려주었다.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힘겹게 삼켜낸 묘도린이 다시 입을 뗐다.
"나는 호제란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할것입니다. 둘중에 한명이 죽어야 한다면 그대는 누구를 선택할껀가요."
호제란을 따라 퀘퀘한 지하실을 나온 노르수단이 후드를 뒤집어써 모습을 감췄다. 템킨과 호제란이 먼저 눈인사를 했다. 거구를 사내를 힐깃거린 템킨이 가자, 노르수단과 호제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췄다. 방금전까지의 적이 지금의 동료였다. 호제란이 경미하게 턱을 끄덕이자, 노르수단도 턱을 주억거렸다. 팬피치대장군, 한미충시 장군과 노르수단이 사라졌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호제란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폐하. 릴케장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집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호제란이 고개를 들었다. 율겐장군의 뒤로 릴케장군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초췌했다. 호제란의 짙은 눈동자가 릴케장군을 향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야심한 시각이였다. 릴케장군이 예를 차려 고개를 숙이면서 호제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드르륵, 의자를 끌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호제란이 릴케장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하이얀제국은 마지막 전투를 할것이다."
마지막전투? 알수없는 소리에 릴케장군의 눈이 커졌다가 경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말씀이십니까."
예상한 반응에 피식 웃은 호제란이 릴케장군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곤 손을 거뒀다.
"대륙에 길이 남은 전투가 내일 일어날것이다. 톤트국이 요괴족을 앞세워 서포진으로 올테니, 우리의 총병력은 앞에서. 톤트국의 총병력은 뒤에서. 그리고 곤루족은 옆에서 치고 들어올것이다."
릴케장군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순없지만, 불길했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말씀입니까."
"요괴라는 신의 실패작을 우리 인간들의 손으로 세상에서 지워버리는거다."
호제란의 말에 릴케장군이 들고 있던 검을 놓쳐버렸다. 날카로운 마찰소리를 내면서 칼이 차가운 바닥에 널부러졌다. 소음에 호제란의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호제란의 옆에 비껴서있던 율겐이 자신의 형인 릴케장군을 빤히 바라봤다. 당황한 릴케장군이 서둘러 검을 집어올리면서 호제란의 차가운 눈동자를 직시했다. 릴케장군의 눈동자와 손이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 릴케장군이 손에 힘을 줬다.
"릴케장군의 부대는 서쪽에서 곤루족을 마중하고 있어라. 히라시야 산맥을 잘 모르는 곤루족이 자칫하면 덫에 걸릴수도 있으니, 그들을 서포진까지 데려와 측면에서 요괴족을 쳐라."
"……."
호제란의 명령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릴케장군의 심장이 터질것 같이 요동치고 있었다. 요괴족을 친다고? 서대륙의 최고의 병력들이 손을 잡고 요괴족을 친다고. 그 요괴가 죽는다고? 순간 릴케장군의 머리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아련한 얼굴 하나가 있었다. 릴케장군의 눈동자가 주체할수 없을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호제란의 눈빛은 위험했고, 진심이였다. 진심으로 요괴족의 전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장군은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폐하."
릴케장군이 고개를 숙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숙인 고개 및의 얼굴이 창백했다. 릴케장군의 정수리를 내려다본 호제란이 만족스러운 대답에 율겐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자칫하면 서포진이 통째로 날아갈수도 있는 위험한 전투속에 히제를 두고 싶지 않다. 율겐은 내일 일찍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히제를 데리고 헤드리안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가라."
호제란의 명령에 율겐이 눈썹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진행한 일이였다. 대륙에 길이 남을 역사였다. 그 영광의 순간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공주님을 수행하라니.
"페하, 전 폐하의 곁을……."
불만을 토로하려던 율겐의 말을 단호한 호제란의 음성이 잘랐다.
"진정으로 내게 충성하고 싶다면 히제를 지켜라."
율겐이 입술을 지긋히 깨물었다. 깊은 한숨을 삼킨 율겐이 마지막으로 입을 뗐다.
"폐하, 히제공주님께선……."
"열지 않는다면 부셔서라도 끄집어낼꺼다."
늦은밤, 탄츈으로 돌아온 한미충시 장군은 비밀리에 장수들을 군회실로 불려들였다. 야심한 시각에 별안간 떨어진 밀령에 장수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하나둘씩 군회실로 모여들었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탁상의 중심에 앉아 미리부터 장수들을 기다리고 있던 한미충시 장군은 마지막 한명이 의자에 앉는것을 확인하곤 입을 뗐다. 한미충시 장군의 얘기가 진행될수록 졸음이 스며들던 장수들의 눈이 커졌다. 굳어진 얼굴의 장수들이 비장한 눈을 했다.
"이 일은 절대로 비밀이다. 알겠느냐."
긴 애기를 끝맺으면서 한미충시 장군이 으름장을 놓았다. 회실에 모여있던 장수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차례로 쓸어본 한미충시 장군의 더듬이마냥 기른 수염이 만족스럽게 씰룩거렸다. 눈엣가시 같던 그 건방진 요괴놈들을 삼국의 협력하여 쓸어버린다니 상상만으로도 든든하고 희열이 들끓어올랐다. 한미충시 장군이 곁을 지키고 앉아있던 책사에게로 정착했다.
"절대로 요괴족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오. 내일 긴유라는 요괴를 만나는 책사의 임무가 클꺼요."
"……."
한미충시 장군옆에 앉아있던 책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비록 언행에 있어 우리 인간과 요괴족이 다소 맞지 않았다, 할지라도 숱한 전쟁을 함께 치뤄가며 살을 부대끼면서 알게된 요괴족은 고서에 나오는것처럼 해악한 존재가 아니였다. 그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을뿐이였다. 다투면서 미운정이 들은 요괴족이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꾸미고 있는 짓은 아무리 대륙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을 해도 결국은 자신들을 도와준 요괴족의 뒷통수를 치는 추악하고 더러운 배신일뿐이였다.
"책사는 내일아침 그들을 만나서 이번 전투만 무사히 승전으로 끝낸다면 더이상 전쟁에 개입하지 않아도 델타산을 내어줄것이라고 전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추악한 배신을 외면할수밖에 없는 자신이 더 더럽고 추악할지도.
호제란은 어두운 처소에서 앉아있었다. 탁상에 팔을 괴고 깍지낀 손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그는 새벽이 올때까지 굳은듯이 앉아있었다.
탄츈관의 하시겐은 나무턱에 기대 앉아 떠오르는 불꽃같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의 날이였다. 하시겐의 비취색 눈동자에 작열하는 태양의 들어섰다. 하시겐의 눈이 짙어졌다. 더운열기에 벌써 숨이 막혀오는것 같았다.
밀령을 받고 전쟁을 준비하는 톤트국의 병사도, 이미 율겐의 명에 따라 히라시야 산맥을 오르고 있는 하이얀제국의 추가병력의 군사들도, 깊고 험난한 리사이야 산맥 하단부근을 향해 몸을 숙여 이동하는 곤루족도,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릴케장군도 잠들지 못하는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대륙에 길이 남을 마지막 전투를 향한 그 찬란한 끝자락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새벽의 빛이 원형의 창을 통해 안으로 스며들자, 깍지낀 손등에 여전히 이마를 기댄채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여 창밖을 힐깃거렸다. 유난히 아름다운 새벽이였다. 눈물이 날만큼. 이상했다. 호제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손을 푼 호제란이 의자에 깊이 등을 묻었다가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끼이익,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호제란이 횅한 복도를 쓸어보았다. 보초병 한명까지, 하이얀제국의 병사들은 모조리 다 곧 일어날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폭풍전야였다. 호제란이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수 있는 히제의 방으로 걸어갔다. 호제란이 여전히 굳게 닫혀있는 방문앞에 멈춰섰다.
"처음부터……너였다."
호제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악마에게 이 영혼을 팔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좋을, 그렇게 지독하게 사랑한 여자가 이 방문 너머에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호제란의 히제의 방문을 쓸었다. 아련히 기억에 젖어드는 호제란의 눈이 공허했다.
"이유같은건 생각해본적이 없다. 아마 생각해봤다해도 이유같은건 처음부터 없었을것이다. 그냥……너였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뒷받쳐줄 세력이 없는 천한 신분의 어머니는 사치스러운 삶에 만족했고 그 외에 어머니에게 필요한건 없었다. 태어나자 마자 여러 유모의 손을 옮겨다니면서 길러진 나는 뼛속까지 시렸다. 그래서 였을까……. 발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이손으로 직접 베어버리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호제란의 어깨가 떨렸다.
"형제들은 더러운 피를 가진 나를 경멸했고 나는……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에 외로웠다. 햇빛도 세상도 싫었다. 아무도 안아주는 이 없는 궁이 싫었다. 저주받은 피도 싫었고,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는 아버지도 미웠다. 그런데 너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햇살같이 웃던 너를……. 나와 달리 축복받은것 같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너를 훔쳐 보는데,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눈물이……났다. 너의 눈부신 미소를 내 마음에 담았다. 니가 너무 갖고 싶었다. 너의 따뜻한 웃음을 손안에 그러잡고 싶었다. 그러면……나도 행복해질수 있을것 같았다. 살아갈 의미가 생길것 같았다. 너를 갖기 위해서, 니가 한번이라도 나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나는 왕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서 어린나이에 내손으로 칼을 들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끔찍했다. 무서웠다……. 나도 인간이다. 전쟁은 끔찍했고, 처음 사람을 죽였을땐…… 너의 방문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친듯이 울었다."
눈물이 차올라 호제란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호제란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호제란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상했다. 발끝부터 휘감아올라오는 이 서글픈 감정은 뭐라고 설명할수 있을까.
"……제발, 제발 나를 봐라."
추웠다.
"……지옥이라도 찬란하게 받아들일 이런 나를 봐라……제발."
그때였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칵. 문이 열렸다.
#28.
살짝 열린 어두운 방문틈새로 히제의 하얗고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많이 야윈 히제를 바라보는 호제란의 경직된 눈동자가 일렁였다. 뭔가 알수없는, 뭐라고 정의내릴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어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오랜세월 먼지같이 겹겹이 쌓인 감정이 퍼져올라오는것 같았다. 호제란이 느릿하게 히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히제는 피하지 않았다. 까슬한 히제의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호제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너를 가질수만 있다면 지옥도 눈부실 이런 나를……버리지마라."
이상하게 추웠다. 뼛속까지 지독하게 시렸다. 꽉 다문 호제란의 어금니가 떨리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그런 호제란을 바라보는 히제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말없이 흐느끼던 히제가 손을 들어 울고 있는 호제란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눈물이 날만큼 따뜻한 히제의 손안에 얼굴을 묻으면서 호제란이 끄윽, 끄윽 울음을 삼켰다.
"제발……제발 니가 없으면 안되는 이렇게 절박한 나를 버리지마……."
울음을 머금은 히제의 입술역시 떨리고 있었다. 히제가 느릿하게 호제란의 볼을 쓰다듬었다. 흠짓한 호제란이 이내 곧 서글픈 눈물방울을 떨어트렸다. 어미에게 몸을 부비는 새끼짐승처럼.
히라시야 산맥 하단부근에서 곤루족을 기다리며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앉아 술잔을 주고 받고 있었다. 데운 술로 긴장을 푸는 노련한 병사들이 크, 쓴소리를 내면서 잔을 털었다. 아무렇게나 솟아있는 바위위에 앉아 그 모습을 내려보던 릴케장군에게 친버린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술잔을 건넸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
두툼한 갑옷을 차려입고 있던 릴케장군이 눈을 내려 작은잔속에서 일렁이는 술을 내려다봤다. 릴케장군이 친버린이 내민 술잔을 받아들여 한번에 들이켰다. 알싸했다.
"지금 하이얀제국은 텅텅 비었습니다. 모든 병력이 히라시야산맥으로 몰렸으니까요."
"……."
"정말 대단한 전쟁이 될겁니다."
릴케장군이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느릿하게 돌렸다.
"곤루족의 전사들은 늑대의 후예아닙니까. 정말 큰 전쟁이 될겁니다. 정말."
친버린이 살짝 몸을 떨었다. 옆에 앉았던 릴케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시리도록 아름답던 새벽이 어느새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릴케장군이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 되시옵니까."
유난히 말이 없는 릴케장군의 옆모습을 힐깃거린 친버림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조금 있으면 일어날 대 전투때문에 자신은 벌써 부터 손끝이 떨렸다. 대륙에 길이 남을 역사의 한순간에 자신이 서 있는것이였다. 생각만으로 온 몸의 세포가 전율을 했다. 조심스럽게 묻는 친버림을 뒤돌아본 릴케장군의 얼굴이 창백했다. 친버린을 향해 힘없이 웃어보인 릴케장군이 검을 고쳐쥐면서 친버린을 스쳐갔다.
긴장이 아니였다. 이건 명백한 슬픔과 지독한 상실감이였다. 예전이라면 지금의 이 상황을 나라에 대한 영광이라 여기며 충스럽고도 자랑스러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그러기엔 자신은 그 요괴를 알아버렸다. 추악한 대륙의 역사따윈 자신에게 아무런 영광도 행복도 가져다줄수 없었다. 가슴한켠이 답답했다. 큰 돌덩어리 하나가 묵직히 무게를 더하는것 같이 숨이 막혔다.
태양아, 조금만 늦게 떠라. 제발 조금만 늦게 떠라. 조금이라도 더 내게 시간을 줘. 나무밑둥에 기대 털썩 주저앉은 릴케장군의 오른쪽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릴케장군이 왼손으로 오른손을 꽉 잡아 경련을 막았다. 괴로웠다. 괴로워서 미칠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릴케장군이 뒷머리를 나무에 쿵쿵 내리찍었다. 차라리 곤루족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이리로 안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밖에 빌수없는 병신같은 자신이 미웠다. 눈을 질금 감고 있던 릴케장군이 별안간 눈을 떴다. 어디선가 땅이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릴케장군의 시야에 저 멀리서 수천의 병사가 이쪽으로 몰려오는것이 보였다. 친버린이 릴케장군에게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장군님, 벌써 곤루족이 오나봅니다!"
굳은듯이 앉아있던 릴케장군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친버린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친버린의 눈이 릴케장군에게로 향했다.
결전의 아침이 왔다. 서포진의 집합장에서 군사들이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가슴이 떨려 잠을 설친 그들의 얼굴은 그늘졌지만,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만은 총명하고 비장했다. 한켠에서는 궁수들이 머리에 깃을 꽂고 화살촉을 다듬고 있었다. 날카로운 촉에 치명적인 독을 붓질하고 있었다. 성곽위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호제란이 돌계단을 내려가 서포진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율겐과 히제에게 다가갔다.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히제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유난히 더 눈이 부셨다. 오늘따라 모든게 더욱 더 강렬했다. 호제란이 느릿하게 자신의 가슴한켠을 쓸었다.
"공주님이 무사히 헤드리안 왕궁까지 당도하시면 곧바로 돌아와 전투를 치르겠습니다."
마차를 살피고 있던 율겐이 다가선 호제란에게 예를 갖추면서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전투가 될것이 분명했다. 곤루족의 중심지도 지금의 하이얀제국처럼 개미한마리 없이 텅텅 비어있었고, 톤트국의 왕궁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대륙의 세 중심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였다. 고개를 든 율겐을 향해 호제란이 경미하게 턱을 끄덕였다. 만족한 율겐이 비껴서자, 마차안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히제와 치소가 보였다. 치소의 뒤론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시녀 한명이 더 있었다. 호제란이 히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자, 하시겐의 갑옷이 든 보따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치소가 흠짓했다. 치소와 시녀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주자, 호제란과 히제가 단둘이 남아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히제와 호제란의 둘다 눈밑이 붉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모든것이 끝날것이다. 이 전쟁을 끝낼꺼다. 난."
"……."
호제란의 차분한 음성에 히제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더운 바람이 히제의 긴 머리칼을 날렸다.
"다시는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꺼다."
어떻게, 어떻게 이 사람을 마음아파 하지 않을수 있을까. 가여웠다. 지독히 가여웠다. 세상을 다 가지고서도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아파 하지 않을수 있을까. 끝을 알면서도 지독하게 자신의 사랑을 갈구하는 불쌍한 남자. 넓은 하이얀제국에서 호제란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은 많았다. 자신보다 아름다운 여자도 많았다. 호제란의 조각같은 얼굴을 쓸어보는 히제의 코끝이 찡해졌다. 절로 차오르는 눈물이 히제의 큰눈에 맺혔다.
"알아요……. 당신이 손에 피를 묻힌 이유를……알아요."
간혈적으로 떨리는 히제의 음성에 호제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옥을 자처한 이유를……알아요."
히제가 하얗고 작은 손을 뻗어 호제란의 손을 움켜잡았다. 수없이 많은 피를 묻힌 죄많은 남자의 손끝이 첫사랑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히제의 순수한 손을 자신의 더러운 손을 더럽히는것 같아서 호제란이 손을 뒤로 빼려던 순간 히제가 더욱 꽉 손을 움켜잡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히제의 흐느낌이 커졌다.
"사실은 어머니의 사랑을…… 원했다는것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것도 알아요."
히제의 붉은 입술이 주체할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가 미치도록 사랑한 여자의 옅은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욕심없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게 다였던 당신을…… 이렇게 벼랑끝으로 몰아간게 나라는걸 알아……."
울지 않기 위해 호제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맺힌 히제의 선한 눈이 호제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더럽지 않아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다른 그 누구가 아니라, 자신을……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갈구했던 히제의 시선이였다. 히제가 자신에게 더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더러운 자신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잠이 들때마다 죽은사람들이 자신의 목을 졸랐다. 끝없는 침전과 침전 뿐이였다. 그런데 히제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수 있을까. 결국 호제란은 억눌린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겁내는 아이처럼 호제란이 히제의 작은손을 꽉 움켜잡았다. 호제란의 다부진 어깨가 들썩였다.
히제의 애잔한 눈동자가 어린아이처럼 우는 호제란을 얼굴을 담았다.
"……이번엔 당신을 기다릴께요. "
호제란이 멈짓했다. 믿을수 없다는듯이 커진 호제란의 눈동자가 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제가 세상 그 누구보다 슬프게 웃었다.
"당신과 함께 할께요."
#29.
햇볕이 유난히 뜨거웠고, 들짐승소리, 심지어는 풀벌레 울음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아침이였다. 부러 그늘진 자리에서 만남을 주선한 긴유의 표정은 평소보다 굳어있었다.
"한미충시 장군님께서 전하라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쪽이 불가하다가 말씀드린것은 전해드렸습니까."
한미충시 장군의 말을 전한 책사가 긴유의 싸늘한 음성에 흠짓 몸을 떨었다. 힐깃, 차분한 긴유의 얼굴을 바라보는 책사의 눈동자는 죄책감이 얽혀드는 명백한 괴로움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긴유를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저 요괴의 차분함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애써 긴유의 눈을 피하면서 책사가 주춤 안경을 고쳐썼다.
"이번 한번 뿐……입니다. 오늘 전투만 무사히 끝마치면 더이상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한번에 델타산을 거셨습니다."
"오늘이여서 안되는것입니다."
긴유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책사의 뒤에 장승마냥 서서 그런 긴유를 힐깃거리던 톤트국의 젊은 장수 한명이 어둡고 음슴한 막사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긴유뒤에 조용히 앉아있는 하시겐을 발견하곤 큼, 헛기침을 했다. 긴유의 고양이같은 눈동자가 치켜떠졌다.
"그런데, 저, 요괴족의 수장은 왜 저런 쓰개같은것을 뒤집어 쓰고 있는거요?"
입을 쩝쩝 다시면서 인간장수가 목을 쭉 뺐다. 긴유의 눈썹이 활처럼 위로 올라갔다.
"그것또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긴유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 묵묵히 앉아있는 자신의 주군, 하시겐을 힐깃했다. 유난히 치명적인 태양빛을 피해 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하시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오똑한 콧날과 하얀 턱끝이 눈에 띌까 말까, 한 정도였다. 긴유의 대답에 젋은 장수가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탄신일에 요괴족이 수를 못쓴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군.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건방진 요괴족놈들. 몇 시간후면 지들 목이 날아가는것도 모르고. 내심 속으로 요괴족을 시기했던 젋은 장수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 다시금 물었다.
"그럼 그 우파마란 요괴는 왜 보이지 않는거요?"
긴유의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사나운 눈빛에 흠짓한 인간장수가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그것까지 대답해야 합니까."
당연하지. 그 새끼가 제일 눈에 거슬렸거든. 싸잡아 죽일려면 모두 한데 있어야 제맛이지. 콧웃음을 친 장수가 속으로 칼을 갈았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젋은 장수의 언행에 앞에서 선 책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괜한 의심 사고 싶지 않다면 대답해주는게 좋을꺼요."
책사의 속이 메스꺼웠다. 자신이 저 장수와 같은 인간이라는게 수치스러워졌다. 낮은 숨을 내쉰 긴유가 고양이같은 눈을 치켜뜨면서 대답했다.
"요괴의 숲에 갔습니다."
"거긴 왜 갔소?"
"단순히 필요한 약재를 구하기 위해 심부름을 보냈을뿐입니다. 됐습니까."
속이 뒤틀렸다. 별거 아닌것때문에 그 요괴를 놓치게 되다니.
"큼, 됐소이다."
아쉬운 입맛을 다신 젋은 장수가 뒤로 물러났다. 하긴, 다 쓸어버린뒤 혼자가 되어 어쩔줄 몰라하는 그 요괴놈을 잘근잘근 씹어 괴롭히다 죽이는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곧 여유만만한 표정을 회복한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긴유를 바라봤다. 긴유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때까지 긴유앞에 굳은듯이 서 있던 책사가 주춤, 물었다.
"어찌하실……겁니까."
책사가 긴유의 눈치를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책사의 눈동자엔 괴로움이 그득했다.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책사의 눈이 커졌다. 긴유의 차분하고 덤덤한 눈동자가 책사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잠시 철렁했던 책사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이 순간이 괴롭고도 괴로웠다. 하지만 자신은 톤트국의 인간이였다.
"청을……."
"……."
"들어주십시오."
말을 마친 책사가 눈을 질금 감았다. 평생 죄책감에 늙어가 초라한 노인이 되면 두고두고 가슴에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나약한 인간이였고, 그들은 적이 많은 요괴족이였다. 자신이 마음이 아프다 해서 막을수 있는 전쟁이 아니였다. 이런 큰 일을 좌지우지하기엔 자신은 고작 나약한 신하일 뿐이였다. 청을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책사의 얼굴이 긴유 모르게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책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긴유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긴유가 고개를 돌려 하시겐을 바라봤다. 하시겐은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비늘 갑옷을 입고 그위에 붉은 혁대를 매고 있었다. 짙은 계열의 후드를 뒤집어쓴 하시겐의 창백한 얼굴이 그늘졌다. 드러난 턱끝이 미세하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왔다. 허락의 의미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 긴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긴유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요괴족을 이끌고 서포진으로 출전하겠습니다."
"우리 톤트국의 대군이 곧 뒤따를거요."
젋은 장수의 말에 책사가 하시겐과 긴유에게 예를 차려 고개를 숙였다. 젋은 장수가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서는 동안에도 깊이 머리를 숙인 책사는 쉽사리 허리를 세우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강했으며, 신의를 지킬줄 알았던 요괴족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다. 힘겹게 돌아선 책사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그런 책사를 힐깃 본 장수가 피식 웃으면서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자, 우리 요괴족의 최후의 무대를 향해 갑시다."
히라시야 산맥위로 거대한 까마귀떼가 몰려들었다. 엄청난 숫자에 눈부신 하늘이 까맣게 가려질 지경이였다. 지형이 험한 서포진앞에 대군을 끌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호제란이 데운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유난히 술이 썼다. 잔을 바닥으로 집어던진 호제란이 말고삐를 돌렸다. 호제란의 흑요석같은 눈동자에 숲을 헤치며 몰려오는 요괴군이 보였다.
그래, 어서와라.
손끝이 경련했다. 희열일까. 아니면 공포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호제란이 한손에 꽉 쥐고 있던 요멸도를 들어올렸다. 눈부신 태양을 한몸에 받는 요멸도가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노랗게 타오르는 요멸도의 손잡이 부근에는 차율란의 핏빛 요주가 끼워져 있었다. 호제란이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요멸도의 기운이 짜릿했다. 여기다가 저 하시겐이라는 요괴의 요주를 끼워넣었더라면 어땠을까. 온몸의 세포가 전율했을까. 아쉽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호제란이 검을 고쳐잡았다. 이검으로 오늘 그 요괴의 목을 반드시 베어버리겠다.
우거진 나무숲을 거칠게 헤집고 오는 요괴족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가까워졌다. 쿠오오, 용의 울음같은 굉음이 히라시야 산맥을 뒤흔들었다. 큰 나무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거구의 요괴들에 의해 오래된 나무들이 초목처럼 무너졌다. 눈부신 하늘엔 까마귀 떼와 조류형 요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수가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찬란한 태양이 다 가려질 정도였다. 호제란의 가늘어진 눈이 요괴군의 중심에 있는 하시겐을 노려보고 있었다. 딴에는 태양을 조금이나마 피하겠다고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멀리서 봐도 그가 누군지 확연히 알수 있었다. 거대한 이무기처럼 생긴 요괴하며 고목보다 훨씬 큰 몸집의 요괴들이 그를 둘러싸며 방패처럼 보호하고 있었다. 하시겐의 옆에 바짝 붙어있는 긴유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역시 최강의 요괴족이였다. 비록 태양의 날이라 할지라도 기압이 엄청났다. 검을 쥐고 있는 호제란의 손안에 땀이 찼다. 크크큭, 호제란이 뒤틀리게 웃으면서 두손으로 요멸도를 꽉 쥐었다. 팔뚝이며 손에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너의 피를 이 손에서 마지막으로 묻히겠다. 요괴. 같이 한번 지옥을 뒹굴어보자.
"으아아아아아악!"
하이얀제국의 병사들이 발악같은 기합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요괴족을 향해 개처럼 달려들었다. 대륙의 영광을 위해서 이자리에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창을 내리꽂는 병사들을 향해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요괴족이 달려들었다. 창을 들고 거머리같이 생긴 요괴를 찌르던 제국의 병사들의 목덜미가 물어뜯겼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뜨거운 햇볕에 요괴들의 끈끈한 점액이 흐르는 피부가 타들어가는것 같이 푸시식, 김이 났다. 호랑이처럼 생겼지만 꼬리가 다섯개인 요괴가 하이얀제국의 병사 한명을 앞발로 깔아뭉개 날카로운 송곳니로 목을 뜯어냈다.
요괴족이 우세하던 상황이였다. 갑자기 고막이 터질것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더 많은 하이얀제국의 병사들이 밀려들어왔다. 맹독이 발라진 화살이 비오듯 날라왔다. 한 거미형 요괴의 목에 이십개의 화살이 동시에 타다닥, 꽂혔다. 몸이 둔해져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한 요괴들이 속수무책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쳐낸 긴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긴유의 얼굴에는 이미 인간들의 피가 흠뻑 적셔져 있었다. 힘이 들었다 .목이 말랐다. 마른 침을 삼킨 긴유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눈앞으로 달려드는 병사 넷을 요검으로 날려버렸다. 인해같이 밀려드는 하이얀제국의 병사들 사이를 물고기처럼 헤집고 다니면서 긴유가 애타게 릴케장군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말에서 몸을 날린 호제란이 허공으로 높이 튀어올라 거구의 요괴를 반으로 가르며 땅으로 착지했다. 튀겨져 나온 요괴의 비릿한 피가 비처럼 호제란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질척한 피에 발이 잠기는 그곳엔 끔찍한 비명과 표효소리가 가득했다. 피가 시야를 가려 막무가내로 창과 검을 휘둘러대는 그곳은 말그대로 아비규환이였다. 지옥의 악귀처럼 요괴들의 목을 가차없이 날려버리는 호제란은 강했다. 개처럼 다리를 물어뜯으려는 요괴의 목을 단숨에 날려버린 호제란이 허억, 허억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집요하게 하시겐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저 멀리서 개처럼 달려드는 제국의 병사를 상대하고 있는 하시겐의 후드가 피가 흠뻑 젖어있었다. 후드 끝자락을 타고 비릿한 핏물이 뚝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유려하게 검을 돌리면서 하이얀제국의 병사의 목을 쳐낸 하시겐이 호제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에 젖은 후드가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호제란이 으르렁거렸다.
같은 공간에 있는것만으로도 이가 갈리고 피가 들끓었다. 호제란이 하시겐을 향해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는건 무엇이든지 당장에 베어버렸다. 그것이 혐오스러운 요괴족이건 자신이 이끄는 하이얀제국의 병사든 상관이 없었다.
조류형 요괴들이 뜨거운 햇볕을 못이기고 차운 기운이 올라오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몸을 낮춘 그들을 놓치지 않고 단검으로 목을 베어버리던 하이얀제국의 장수 눈에 뒤쪽에서부터 요괴족을 무참히 베어버리고 달려드는 톤트국의 병사들이 보였다.
"혐오스런 요괴들을 죄다 쓸어버려라!"
한미충시 장군의 새된 목소리가 피비린내나는 전장터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어마어마한 양의 병사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날카로운 화살들이 집중적으로 하시겐을 향해 내리꽂혔다. 전혀 예상치못한 상황에 경악하고 있던 소루가 급하게 몸을 기울이면서 하강해 하시겐의 앞을 가로막았다. 타다닥, 수백개의 화살이 소루의 날개에 꽂혔다. 몇개는 살점을 뚫고 나갔다. 맹수의 표효같이 울부짖은 소루가 궁수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수십병의 병사들의 소루의 갈고리처럼 생긴 날카로운 발톱에 목이 끊겼다. 소루가 숨통이 끊어진 궁수들과 바닥에 추락했다.
허공에서 하시겐과 호제란의 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하, 멋진 전투이지 않느냐. 니놈의 무덤이 되기에 말이다!"
호제란이 악을 쓰면서 무지한 힘으로 하시겐의 칼을 쳐냈다. 의외로 쉽게 하시겐이 떨어져 갔다. 균형을 잃은 하시겐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뒷굼치를 세웠다.
"너와 난 공존할수 없다."
"……."
"너와 나 둘중에 반드시 한명은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난다. 왠줄 아느냐?"
공격적으로 달려든 호제란의 요멸도를 간신히 막아낸 하시겐이 그대로 몸을 돌려 호제란의 등을 노렸다. 급하게 허리를 숙인 호제란이 몸을 틀면서 하시겐의 검을 막아냈다.
"히제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노에 눈이 멀어 사납게 울부짖은 호제란의 눈이 혈관이 터져 충혈됐다. 요멸도를 쥔 팔을 등뒤로 길게 뺐다가 하시겐을 향해 뻗으며 날렵하게 달려드는 호제란을 막아내는 하시겐의 턱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흐윽, 우흐흑, 흐흐흑, 으욱, 흑."
험난한 히라시야 산맥을 넘어가는 히제의 마차안에 서럽게 흐느끼는 곡소리가 새어나왔다. 참으려 참으려 애를 쓰다 끝끝내 터져나오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서글펐다. 덜컹거리는 마차뒤를 바삐 쫓아가는 보병들이 수근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라시야 산맥 중턱을 넘어가면서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서글픈 곡소리에 율겐이 말고삐를 쥔 손을 뒤로 쭉 뺐다. 급제동이 걸린 말이 앞발을 들어올리며 울더니, 곧 멈춰섰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율겐이 마차앞에 멈춰섰다.
"공주님, 무슨일있으십니까."
"우흑, 흐흐윽, 흑."
대답은 없고 서글픈 곡소리만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율겐이 마차문을 확 잡아당겼다. 율겐의 커진 눈이 경직됐다. 마차안엔 얼굴이 벌겋게 퉁퉁 부은 치소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는 하시겐의 갑옷이 들어있던 허름한 보따리 대신 히제의 고운 비단 옷을 품에 꼬옥 끌어안고 서럽게 오열하는 치소가. 율겐과 눈이 마주친 치소가 터져나오는 비통을 참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했다.
`넌 나의 친구였다. 치소야, 너무 슬퍼하지마라.'
긴유의 요주(妖珠)가 이상했다. 이른 아침,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 긴유의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차율란이 날 보자고 한것이 맞느냐."
우파마를 조용히 뒤따르던 하시겐이 발걸음을 멈추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특유의 걸렁걸렁한 팔자걸음으로 앞서걷던 우파마가 잠시 멈짓하더니, 이내 엉킨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속없이 웃었다.
"암요. 소인이."
능글맞게 말을 이어가던 우파마가 잠시 멈짓했다. 치밀어오르는 슬픔에 우파마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 뜨끈해졌다. 이를 악 물던 우파마가 마른 침을 삼키면서 다시 실실 웃었다.
`우파마.'
"어찌 대장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하하. 분명 차율란님께서 요괴족의 사활이 걸린 아주 중요한 일로 대장님을 긴히 뵙자……."
`나는 같이 죽고 싶은 인간이 생겼다.'
귓가에 희미하게 번지는 긴유의 차분한 목소리에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나와 우파마가 다시 잽싸게 두툼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파마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우파마가 어색하게 뒷목을 긁었다.
"……."
하시겐의 비취색을 닮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시겐님을 잘 부탁한다."
"하. 셨습……우흑, 흑. 니다. 하하, 하, 흐흐윽."
`그동안 고마웠다…….'
"허억, 허어억. 우흑."
고개를 숙인 우파마가 갑자기 대성통곡했다. 아무리 참으려도 애를 써도 참을수 없는 슬픔에 속이 터졌다. 입을 크게 벌린채 우파마가 오열했다. 비통하고 비통했다. 우파마의 우락부락한 어깨가 아이마냥 들썩거렸다. 굵은 눈물방울이 우파마의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우파마가 손등으로 눈물을 연신 훔치면서 크게 통곡했다. 하시겐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기 힘들었다. 하시겐이 걸음을 빨리해 앞선 우파마의 어깨를 잡고 뒤로 돌렸다. 날카로운 요검으로 울고 있는 우파마의 목을 겨눈 하시겐의 다부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파마. 모두 사실대로 말해라."
#30.
"뭐하자는거냐."
템킨의 서늘한 눈동자가 겁도 없이 자신을 막아선 릴케장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채 200여명도 되지 않는 군사를 이끌고 이, 템킨이 이끄는 2만의 곤루족을 막서다니. 북쪽 최고의 전사인 곤루족을 말이다. 템킨이 등에 꽂혀있던 쌍검을 뽑아들었다. 칼집을 쓸고 나오는 금속소리가 뼛속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검을 움켜쥐고 있는 릴케장군의 손에 땀이 찼다.
릴케장군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친버린의 표정이 비장했다. 처음엔 릴케장군의 어이없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었다. 하지만, 친버린은 릴케대장군이 있는 하이얀제국이 좋았던것 같았다. 언제나 옳곧고 강직했던, 누구보다 하이얀제국을 사랑했던 자신의 직속상관. 위대한 역사의 한줄이 될수 없다해도 괜찮을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릴케장군과 함께라면.
"반역이냐."
싸늘한 템킨의 음성과 함께 곤루족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하이얀제국의 병사를 향해 달려들듯 으르렁거리는 곤루족의 전사들은 위협적이였다.
"아닙니다."
릴케장군의 관자놀이를 타고 미지근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릴케장군이 검을 고쳐잡았다.
"그렇다면 비켜라."
"그럴수…… 없습니다."
잘들어라. 요괴. 딱한번만.
"……."
"그렇다면 죽이고 가는수밖에."
템킨의 싸늘한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공격적인 쌍검이 릴케장군에게 날라들었다. 허공에서 유려하게 회전한 쌍검을 힘겹게 막아낸 릴케장군의 뒤로 하이얀제국의 노련한 병사들이 곤루족의 용맹한 전사들을 향해 개처럼 달려들었다. 야생 동물처럼 날뛰는 곤루족을 막아내는 친버린이 힘에 부쳐 뒤로 밀려났다. 아무리 베어버리고 베어버려도 끝이 없었다. 엄청난 수의 전사들이 시체를 밟고 또 밟으면서 앞으로 밀려들었다. 허리를 숙여 정수리위에서 겹쳐지는 템킨의 쌍검을 힘겹게 피한 릴케장군의 머리카락 끝에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앉은상태 그대로 몸을 돌린 릴케장군이 창을 들고 달려드는 곤루족의 다리를 베어버리곤 내리꽂히는 템킨의 검을 피했다. 하아, 하아. 거친숨을 몰아쉬는 릴케장군이 입안에 고인 비릿한 핏물을 뱉어났다. 빠르고 강한 템킨의 검에 팔이 베이고 온몸이 터져나가도 상관없었다.
나는 아직도 이 마음이 뭔지 모른다. 할수만 있다면 너의 다리를 끊어서라도 전장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전장에 나오지 못해서 나와 마주치지 못하게.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나의 진심. 한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이 감정을 오늘, 딱 한번만.
친버린이 미친듯이 칼을 휘둘렀다. 장정의 곤루족 수십명이 잘려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하이얀제국의 소수군사는 곤루족의 대군을 이길수 없었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하이얀제국의 병사들 속에서 릴케장군이 고군분투했다. 마치 템킨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쌍검이 릴케장군의 목을 아찔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에 릴케장군이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틈이 놓치지 않고 개처럼 달려드는 곤루족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은 릴케장군이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검을 뽑았다. 푸시식, 터져나온 피가 릴케장군의 얼굴을 적셨다.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나라도, 제국도 모두 잊어버리고 드러낼테니, 너의 손을 잡을테니,
지친 릴케장군의 뒤를 노리고 뛰어드는 곤루족을 베어버린 친버린의 눈동자와 릴케장군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순간이였다. 템킨의 쌍검이 친버린의 목을 날려버렸다. 릴케장군의 눈이 경직됐다가 이내 곧 무섭게 일그러졌다. 템킨을 향해 죽을듯이 달려드는 릴케장군을 막아낸 템킨이 검을 앞으로 뻗자, 릴케장군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동그랗게 대열된 수십개의 창이 일제히 릴케장군을 향해 꽂혔다.
살아라. 요괴. 부디 살아남아서 더이상은 추악한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가라.
"대장님! 안됩니다! 안됩니다! 그 녀석의 희생을 헛되이 하실 생각이십니까!"
말리려 드는 우파마의 말따윈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틀어쥐고 있는것처럼 폐가 타들어갔다. 죽을것 같았다. 미칠것 같았다. 요동치기 심장이 터질것 같았다. 발밑을 지탱해주고 있던 땅이 어둠속으로 무너지는것 같이 아찔했다.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눈가가 저릿저릿했다. 우파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시겐이 히라시야 산맥을 향해 뛰쳐나갔다. 통곡하는 우파마를 등지고 빛의 속도로 숲속을 헤쳐나가는 하시겐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시겐의 비취색 눈동자가 서글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밖으로 터져나오려고 하는 비통에 하시겐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거친 속력에 하시겐의 거친 짙은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대장님!"
처음 내게 몸이 차다며 천을 목에 둘러주었던 인간. 내게 검을 휘둘렀던 인간. 나를 죽이겠다던 건방진 인간. 하얗고 작은 얼굴. 선하고 큰 눈동자. 붉은 입술. 나를 보며 울던 여자. 한없이 나약하고 작은 존재.
요검을 꽉 움켜쥔 하시겐의 눈동자가 견딜수없이 치밀어오르는 고통에 일렁였다. 하시겐의 볼을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물줄기는 분명 처음 보는 눈물이였다.
수백년을 사는 시간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만큼 공허하고 허무했던 시간이였다.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태어나고 죽는것을 옆에서 지켜봤었다. 생성과 소멸. 무한한 반복. 뼛속까지 시린 그런 시간속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엔 죽음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내가 있었다. 그런 공허한 시간의 연속이였다. 누군가에 마음을 주는것이 무의미했다. 두려웠다. 고독한 영겁의 시간속의 나였다. 그런 내게 다가온 너였다. 어느순간에 니가 내 눈앞에 서 있었고, 어느 순간에 내 마음안에 니가 있었다.
죽지마라. 절대로 죽지만 마라.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제발 죽지만 마라. 죽지만, 죽지만 말란 말이다!
아직 말하지 못했다. 아무도 담아본적없는 이 시린 가슴에 누구보다 뜨거운 너를 담았다고. 아무도 그리워해본적 없는 이 가슴에 너라는 인간을 담았다고.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터져라 뛰어대는 이 심장 가득 너라는 여자를 품었다고.
묘도린의 은사가 긴유에게 달려드는 톤트국 병사의 목을 휘감아 뒤로 강하게 끌었다. 목이 졸린 병사가 켁켁 거리면서 피를 토해냈다. 묘도린이 뒤로 손을 잽싸게 홱 빼자, 병사의 목이 허공에서 날라갔다. 피가 분수같이 튀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묘도린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하이얀제국의 병사를 묘도린이 다른손에 쥐고 있던 차율란의 요검으로 베어버렸다. 묘도린의 눈이 히제를 향해 달려드는 호제란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자신이 호제란에게 주는 최고의 형벌이였다. 차율란의 검으로 직접 목을 베어버리는 대신 미치도록 지독히 사랑하는 여자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는것. 그것이 죄를 지은 호제란에게 주는 복수였다.
`하시겐을 살리고 호제란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시겐의 갑옷을 입은 히제가 호제란의 칼을 피하면서 몸을 뒤로 뺐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턱없이 큰 갑옷을 입은 히제의 움직임이 둔했다. 갑옷속에 두툼한 천이 겹겹히 채워넣어져 있었다. 호제란이 몸을 재빨리 틀면서 히제의 목을 놀렸다. 호제란의 검을 힘겹게 막아내는 히제의 손엔 하시겐의 옷자락이 감겨져 있었다.
사랑에 목이 말라 미쳐버린 가여운 호제란이 지금,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그가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왜 죽음의 순간이 무섭지 않겠는가. 무서웠다.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무서웠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림자 요괴를 통해 모든 계획을 알게된 묘도린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때, 주저없이 그 손을 잡았다.
사랑하는 하시겐을 살리고 호제란과 함께 죽기로. 이번만은 내 생애 딱 한번만은 그를 기다려주기로. 그와 함께 해주기로. 태어나면서부터 외로웠던 이 사람. 죽는순간엔 함께 해주기로.
이곳에서 이번엔 당신을 기다릴께요. 이곳에서 마지막을 당신과 함께 할께요.
맹수의 날카로운 송곳니같은 요멸도가 아슬아슬하게 히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육에 미쳐버린 호제란의 날렵하게 몸을 돌려 히제의 팔을 베어버렸다. 히제가 입술을 악 물었다. 비릿한 피가 입안에 맴돌았다. 반면에 호제란은 살점이 베이는 서늘한 느낌이 칼을 타고 손끝까지 고스란히 전해서 희열에 몸을 떨었다. 온몸의 세포가 요동쳤다. 피가 들끓었다. 비틀거리는 히제를 노려보는 호제란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 잡은 사냥감이였다. 최후의 일격을 위해 호제란이 요멸도를 고쳐잡았다. 요주가 더해진 요멸도는 더욱 강하고 예리했으며 마치 수족처럼 가볍고 자유로웠다.
하시겐. 당신을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후드에 가려져 살짝 드러난 히제의 턱끝을 타고 소리없이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쾌락에 몸을 떨며 자신을 노려보는 호제란을 눈앞에 둔 히제의 머리속에서 아련한 하시겐과의 모든것이 스쳐지나갔다. 우부나루 전투에서 맞대었던 강렬한 검의 느낌. 시리도록 아름답던 달빛의 그의 얼굴도. 눈물이 날만큼 차가웠던 그의 손끝도. 그의 모든것이.
그와 함께한 찰나의 순간이 영원과 같았다. 스친 눈빛한번에도 강렬했던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할것 같았다. 내 생애 가장 강렬하고 눈부시게 빛났던 그 순간들. 꿈같이 아름답고 강했던 요괴, 하시겐. 당신이라는 존재. 이 가슴에 깊이 새길 너.
"죽어라. 하시겐!"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기합소리와 함께 호제란이 매서운 칼날을 내리꽂았다. 피로 얼룩진 히라시야 산맥에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터져나왔다. 눈이 멀정도로 강렬한 빛이 온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새하얀 빛이 세상을 삼켰다.
"…… 눈부신 빛이 세상을 덮었지……."
"그래서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요? 모두 죽었어요? 네? 네?"
얘기를 듣는 내내 입을 벌리고 있던 아이가 노인쪽으로 몸을 더욱 바짝 붙이면서 재촉했다. 짙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아이의 표정이며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참을수 없는 호기심에 흠뻑 젖어있을게 틀림없었다. 긴 애기를 하는 동안 숨을 죽이며 흥미진진해 하는 아이와 달리,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늙은 노인의 얼굴은 씁쓸하게 젖어갔다. 자신의 해진 누더기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를 향해 노인이 힘없이 웃었다.
"글쎄…… 그 이후로는 아무도 모른단다."
"예?"
노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한껏 들려진 아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걸 지켜보는 노인이 다시 힘없이 웃었다. 세월에 겹겹히 쳐진 입가에 아련한 씁쓸함이 걸렸다.
"바로 이곳이 예전에 히라시야 산맥이였단다."
"정말요? 여기 세얀시장이요?"
푹 숙이고 있던 아이의 고개가 단번에 번쩍 올라왔다. 아이의 작은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아이의 조그만한 손가락이 평평한 바닥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무지 상상하기도 믿기도 힘들겠지만 사실이였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입을 크게 벌리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야기속의 험준한 히라시야 산맥이라고 하기엔 지대가 너무 낮고 평탄했다.
"그날의 엄청난 폭발이 모든것을 바꿔놨지. 정말 눈부시게 거대한 빛이였단다. 세상을 덮은 그 폭발이 모든것을 바꿔놨단다."
다시금 아련한 추억에 젖어드는 노인의 눈이 공허하게 얽혀들었다. 그때의 기억에 잠기는 그의 표정은 뭐라고 설명할수 없는 세월을 담고 있었다. 그때의 강렬한 전쟁. 목숨바쳐 사랑하고 미워했던 그들.
"모든것이 사라졌지. 히라시야 산맥을 끼고 있던 하이얀제국도 흔적없이 사라졌지. 인변의 톤트국도 사라졌단다. 누가 살아남았을지, 누가 죽었을지.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혹은 요괴족이 있다면 그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느릿하게 말을 늘어놓는 노인의 가슴한켠이 시큰거렸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였다. 지울수없는 과거밖에 되지 못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노인의 가슴한켠에 흉터로 자리잡아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때 모든것이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자신은 지금쯤 어디에 있었을까. 가족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지는 않았을까. 운이 좋았다면 하이얀제국의 왕이 됬을수도. 아니, 그전에 호제란의 손에 죽었을까. 어쨌든 지금처럼 이렇게 씁쓸하게 남은 여생을 길거리를 떠돌며 살지는 않았을것이다. 자신도 가끔 궁금할때가 있었다. 과연 그 호제란이 죽었을지. 그 강했던 요괴족이 다 죽어버렸을지. 하지만 알수 없었다.
아무도 끝을 알수 없는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
"하란아."
여리고 가는 목소리가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노인에게서 뭔가 그 이야기에 대한 파편을 더 얻어내고 싶어하던 아이가 움찔하더니 곧 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해맑게 소리쳤다.
"엄마!"
노인이 고개를 돌려 주름진 눈을 가늘게 떴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가는선의 여자는 두터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수 없었다. 그저 어깨 옆으로 살짝 흘러나온 옅은 갈색머리카락만이 바람에 춤을 쳤다. 노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할아버지. 전 왠지 그들이 다 살았을것 같아요."
익살맞은 아이의 맑은 목소리에 노인이 다시 고개를 돌린 사이 어느새 아이가 제 엄마의 품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아이의 후드가 바람에 뒤로 넘어갔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아래 아이의 아름답고 신비한 초록빛 머리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가늘어졌던 건세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서로를 겨눈 칼끝을 타고 흐르는 우리의 전쟁같은 사랑. 요괴의 숲.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