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 름 밤 의 꿈 - 0 1 -
조용한 분위기를 넘어서 고요한 분위기의 한 병실. 민기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공허한 눈빛으로 TV를 보고 있던 할머니는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민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씨익 웃어보였다.
"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 왔네. "
" 할머니! 괜찮으신거야? "
" 그럼, 멀쩡하지. 연락하지 말라니까 결국 했나보네. 밥 먹었어? "
" 세그릇씩 먹고 다니니까 걱정하지마. 할머니는 드셨어? "
" 수희가 꼭 먹어야 된다길래 먹었어. "
" 아, 수희는? "
" 몰라. 바쁘겠지, 뭐. 의사인데.... "
야윈 할머니의 손을 잡던 민기는 수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머니 혼자 계실 것이
걱정돼 괜히 병실 문 쪽만 흘낏 흘낏 쳐다봤다.
잠시 요 근처만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한 민기는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 할머니, 나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올게. "
" 그래, 그래. 어여 갔다 와. "
" 금방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
" 걱정하지 말라니까. "
민기의 걱정이 심하자 오히려 할머니가 민기를 안심시켰지만 민기는 불안한지
몇 번이나 할머니를 확인했고, 병실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지영과 부딪혔다.
" 아고고!!! "
" 누구야? "
" 아이고, 우리 지숙이 왔네. "
" 지숙이...? "
" 아, 할매! 이제는 지영이라니까요! "
할머니에게 투정부리듯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는 지영을 보던 민기는 지숙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다가 8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졸졸 따라다녔던 아이였음을 기억해냈다.
" 이지숙! "
" 아, 진짜! 지영이라니까.......민기오빠? "
" 야, 오랜만이다. 많이 컸네, 이자식. "
오랜만에 만난 지영이 반갑기도 하고 고등학생처럼 보일 정도로 자란 것이 신기했다.
지영은 오랜만에 만난 민기가 어색하게 낯설은지 시선을 자꾸 피했다.
" 여긴 왠일이야? "
" 원래 자주 와요. 근데 오빠는 무슨 일로.... "
" ....그냥. 할머니 보고 싶어서. 그럼 우리 할머니 좀 봐줘. 난 잠깐 갈 데가 있어서. 부탁한다. "
지영이 반갑기도 했지만 어서 빨리 수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지영에게 할머니를
부탁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원 로비에 사무실까지 찾아가 봤지만 수희가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하고 걱정이 될 쯤 당직실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수희를 발견했다.
" 아휴, 얘는 왜 이런데에서 자. "
입맛까지 다시며 꿀잠을 자고 있는 수희를 보던 민기는 아기같은 모습에
피식 웃어버렸고, 인기척 때문인지 뒤척이던 수희는 좁은 침대 탓에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 으앗! "
" 그러게 이렇게 좁은 데서 자니까 그렇지. "
" 아...왔어? "
" 일어나. 꼬리뼈 박살 난거 아냐? "
" 자주 이래서 아마 괜찮을거다. 침대나 하나 사주고 그런 말 하던가. "
" 가난한 음악쟁이한테 뭘 바래? "
" 할머니는 뵙고 왔어? "
" 응, 혼자 계실까봐 걱정했는데 지숙이가 왔더라고. 원래 자주 온다며? "
홍기의 물음에 수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영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할머니를 챙겨주고 보살핀 것이 지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민기는 꼬맹이로만 보던
지영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수희와 민기는 차트를 챙겨 할머니의 병실로 다시 향했고,
병실 앞에 멈춰 섰을 땐 안에서 지영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제 민기 오빠도 여기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
" 왜,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 "
" 에이, 할머니 생각해서 그러는 거죠. 아무리 제가 챙겨드려도 민기오빠 보고 싶으시면서. "
지영의 투정에 밖에서 듣고 있던 수희는 팔꿈치로 민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민기는 인상을 찌푸렸고, 수희는 살짝 웃었다.
" 좋겠다? 반기는 사람이 많아서? "
" 비꼬냐? 얼른 들어가자. "
쑥스러웠는지 민기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병실 문을 열었고, 할머니 옆에 앉아
재잘대며 사과를 깎던 지영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일어서다 손가락을 살짝 베였다.
" 아앗. "
" 어머! 괜찮아? 어디 봐봐. "
" 아,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
지영은 급하게 자신의 짐을 챙겨 병실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민기의 손에 잡혀
끌려오듯 민기의 옆에 섰다.
" 어딜가? 할머니 보러 온 거 아니야? "
" 이제 오빠 있으니까 전 없어도 되잖아요.. "
" 누가 그래? 나는 어차피 잘 챙겨드리지도 못하니까 니가 좀 도와줘. "
" ......네? "
수희가 이것저것 체크를 하는 사이에 민기는 지영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왔다. 주머니를 뒤져 나온
동전을 꺼내 커피를 뽑으려는데.
" 저, 저는 핫초코요... "
" 완전 꼬맹이 입맛이구만. "
" 꼬맹이라뇨! "
" 여전하네, 이지숙이. "
" 이지영이라구요. "
민기는 뽑은 핫초코를 지영에게 건네며 못 들은 척 먼저 앞서서 걸었고, 지영은 뜨거운 핫초코를
호호 불며 민기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잘 지냈어? "
" 뭐, 그럭저럭요. 오빠는요? "
" 나도 뭐....야, 근데 너 왜 아까부터 존댓말이야? 어색하게. "
" 아니...뭐....그냥.... "
" 편하게 해. 옛날에는 옷 홀랑 벗고 물놀이도 했으면서. 내외하냐? "
" 무, 무슨!! 그런 적 없거든요?! "
민기의 장난에 지영의 얼굴은 터질 것 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지영의 반응이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민기는 피식 웃어버렸고, 지영은 괜히 혼자 투덜댔다.
" 지숙아, 고맙다. 수희가 네 칭찬 많이 하더라. "
" ....수희 언니가요? "
" 응, 나 대신 할머니 다 챙겨드리고 했다고. 좀 본받으라고 하더라고. "
" 나한테는 친할머니나 다름 없었는데요, 뭘. "
" 아저씨는...잘 지내시고? "
" 여전하죠. 요즘은 대답도 해줘요. 다른 대답하는 게 흠이지만. "
지영의 씁쓸한 웃음에 민기는 위로하듯이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기의 손길에
닿자마자 지영은 목을 움츠렸고, 흡사 거북이처럼 보였다.
" 어...언제 올라가요? "
" 당분간은 여기 있을거야. 앞으로 바빠질 거 같아서 당분간 할머니랑 있으려고. "
" 아직도...음악 해요? "
" 어떻게 알았어? "
" 할머니가 매일 자랑하시던데요? "
" 할머니도 참... 하지말라고 말릴 땐 언제고. "
민기의 말에 지영은 사실은 아니라고 민기의 자랑을 입에 달고 사신다며 펄펄 뛰며
할머니를 두둔했다. 그러자 민기는 피식 웃더니.
" 그냥 농담한건데? 나보다 니가 더 손녀같다. "
" ....어쨌든 할머니는 오빠 엄청 자랑스러워 하신다구요. "
" 알았어. "
잠시 정적이 흘렀고, 지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듯 민기를 흘낏 흘낏 쳐다봤다.
그런 지영의 시선이 느껴진 민기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지영과 눈을 마주쳤고,
지영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 뭐야. 귀신 보듯이 놀래?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얼른 해 봐. "
" 어, 없어요. "
" 어허, 지금 안 물어보면 이제 물어봐도 대답 안해준다? "
민기의 으름장에 지영은 민기의 눈치를 살피더니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너무 작은 목소리가
듣지 못한 민기가 지영의 앞으로 귀를 가져다 대자 지영의 얼굴이 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 왜, 왜 가까이 와요! "
" 하나도 안 들리니까 그렇지! 좀 크게 말해봐. "
" 어디서 잘 거냐구요! 할머니도 병원에 있으니까 계속 병원에 있을거에요? "
" 아무래도 그렇겠지? "
민기의 말에 지영은 입을 꾹 다물더니 병실 침대를 불편하고, 씻는 것도 불편하고
그러다 병 난다는 둥 궁시렁 거렸다. 지영의 투정을 듣던 민기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턱을 괴고 작게 읊조렸다.
" 수희네 집에서 좀 재워달라고 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