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다성(茶聖) 육우의 품수(品水)와 천하제일천 (2) | ||||||||||||||||||||||||||||||||||||
| 옥으로 만든 즙과 같이 순후한 맛 '일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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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천하제일천은 지난 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우신(張又新)이 《전다수기(煎茶水記)》에서 극찬한 중령천(中泠泉)으로서 일명 남령천(南泠泉 혹은 南零泉)이라고 한다. 중령천은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금산(金山)의 서쪽에 위치한 석탄산(石彈山) 아래에서 발원한다. 이곳은 양장강 밑바닥의 지하수가 솟아올라 석회암의 틈새를 따라 흐르는 샘물로서 양자강에서 유일무이하게 샘물이 솟는 천안(泉眼)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천안(泉眼)’이란 샘물이 솟아나는 구멍을 ‘샘물의 눈’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에 샘물이 강 가운데에 있을 때, 장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다가 석해산(石解山)과 골산(鶻山)에 막히어 물의 흐름이 세 굽이를 돌아 흐르게 되었는데 세 굽이를 돌아 흐른다 하여 북령(北泠), 중령(中泠), 남령(南泠)의 ‘삼령(三泠)’으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령(泠)’은 “물이 굽이쳐 흐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삼령의 강 밑바닥에서 모두 샘물이 솟아 올랐다. 그 가운데 중령에서 샘물이 가장 많이 솟는다하여 ‘중령천(中泠泉)’으로 통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중령천(中泠泉)을 가리켜 ‘남령천(南零泉)’ 또는 ‘남령수(南泠水)’라 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남령천(南零泉)’와 ‘남령수(南泠水)’는 모두 ‘영(零)’자를 령(泠)자로 바꾸거나 령(泠)자를 영(零)자로 바꾸어 써서 ‘남령천(南泠泉)’ 또는 ‘남령수(南零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 샘은 이미 당대에 그 명성을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당대(唐代)의 유명한 품다가(品茶家) 유백추(劉伯芻)는 전국 각지의 수질을 품평하고는 차와 잘 어울리는 물을 7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양자강의 남령수(南泠水)를 제일 등이라 평가・감정하였다. 이후, 중령천은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다성 육우(陸羽)도 유백추(劉伯芻)보다 앞서 중령천(中泠泉)을 가리켜 천하제일천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이후 무수히 많은 역대의 문인학사 및 고관대작들이 모두 중령천(中泠泉) 명성을 듣고 흠모하여 직접 이곳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한다. 송나라 때의《태평광기(太平廣記)》에 보면 당나라 때의 재상 이덕유(李德裕)는 사람을 시켜 금산의 중령천을 길어오도록 차를 다려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원나라에 항거해 싸웠던 중국의 민족영웅인 남송 때의 명장 문천상(文天祥)은 1276년 원나라 군사와의 담판에서 인질이 되었다가 진강 부근에서 간신히 탈출한 후 중령천의 샘물을 마시고는 그 물맛에 감동하여 즉석에서 시를 짓고 중령천(中泠泉)을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외에도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 남송의 애국시인 육방옹(陸放翁:陸游) 등도 중령천을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옛날엔 이 샘물을 긷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금산지(金山志):金山의 역사를 기록한 地方志》에 의하면,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길러야했는데, 자시(子時:밤11시~밤1시)와 오시(午時:낮11시~오후1시)에만 가능했다. 물을 길을 때도 특수한 용기만을 사용하였다. 중령천은 파도가 높고 거센 양자강의 강 깊숙한 소용돌이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동질(銅質)의 구슬과 덮개가 달린 동질의 호로병을 일정한 길이의 밧줄에 묶어서 강 한복판에 가라앉게 한 뒤 샘물이 솟는 굴(구멍)에 이르면 밧줄을 흔들어서 덮개를 연 다음 중령천의 샘물을 길었다. 이렇게 강 밑바닥에서 길은 샘물이 과연 진짜 중령천의 샘물이었을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전(銅錢)류의 금속화폐를 물을 가득 채운 잔속에 넣었을 때 물이 잔 입구 위로 2 내지 3센티미터까지 올라도 밖으로 넘치지 말아야 진짜 중령천 샘물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중국 민간에는 “영배불일(盈杯不溢: 잔은 차도 넘치지 않는다.)”이란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지하수가 강 밑바닥의 석회암층의 무수한 틈새를 따라 구멍으로 흘러나오면서 진흙이 여과되고, 여러 종류의 광물질이 용해됨으로써 그 표면장력이 증대된 것이라 한다. 이렇듯, 중령천은 거대한 강 한복판에서 발원한 까닭으로 일 년 내내 수온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아울러 여러 종류의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샘물은 비취(翡翠)처럼 녹색을 띠며 짙을 땐 마치 경장(琼漿:옥으로 만든 즙, 美酒)같아 그 순후함을 가히 알만하다. 이 샘물로 차를 달이면 맑은 향기와 시원하며 감미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러서 근 백 년 동안 양자강 강변은 사토가 퇴적되어 모래톱이 높아짐에 따라 금산과 중령천은 곧 육지와 서로 연결되게 되었다. 중령천이 강안(江岸)으로 올라오게 된지 얼마동안 그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청나라 동치(同治) 8년(1869년)에 이르러 후보도(候补道)、설서상(薛书常) 등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현재 중령천의 천안(泉眼)은 사방 주위엔 섬돌로 쌓아 만든 난간이 방형의 연못을 에워싸고 있다. 아울러 그 정면 돌 난간에는 청말(淸末) 장원 진강지부(鎭江知府)였던 왕인감(王仁堪)이 제자(題字)하여 써놓은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이란 글씨가 중령천의 명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힘차게 써져 있다. 돌난간에 기대어 샘의 연못을 내려다보면 마치 하나의 명경(明鏡)과도 같아서 은하수 흐르는 달밤이면 더할 나위 없이 흥취(興趣) 있는 감상이 될 것이다. 연못의 남쪽에는 또 정자(亭子)가 하나 서 있어 이름 하여 ‘감정(鑑亭)’ 이라 하는데, “물과 샘을 거울삼아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정자 가운데는 유람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석조로 된 탁자가 놓여있으며 바람 또한 상쾌하여 그 운치가 그윽하다. 연못의 북쪽에는 이층의 누각이 있으며 위, 아래층 모두 다실(茶室)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 또한 경치가 그윽하여 유람객들이 차를 마시며 전원의 멋을 음미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누각 아래층 맞은편 벽 좌측에는 심병성(沈秉成)이 쓴 ‘중령천(中泠泉)’이란 글씨가, 우측에는 설서상(薛书常)이 쓴 ‘중령천’이란 글씨가 각각 석각(石刻)되어있다. 샘과 연못 주위는 숲이 무성하고 풍경이 수려하여 그윽하니 아름다운 것이 마치 별천지에 있는 느낌이 든다. 현재, 중령천은 진강시 서북쪽에 위치한 금산(金山)공원 내에 있으며, 금산 공원 안에는 동진(東晋)시대의 고찰인 금산사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천하제일천인 중령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거대한 탑영호(塔影湖)와 백화주(百花洲), 경천원(镜天园) 등의 풍경구가 어우러져 있으며, 금산공원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금산사를 우측으로 돌아서면, 청나라 강희황제와 건륭황제가 강남 순찰시에 배를 접안(接岸)하고 내렸던 어마두(御碼頭)가 있다. [‘어(御)’는 옛날 황제 또는 황제와 관련된 물건이나 행동을 나타내는 뜻이고, ‘마두(碼頭)’란 중국어로 항구란 뜻으로 중국어로는 마터우(ma tou)라고 읽는다. 금산은 원래 장강의 작은 섬이었으며, 그 모습이 마치 “장강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부용꽃 같다.”라고 찬사를 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탑영호 서쪽 호수가에는 부용루(芙蓉樓)라는 거대한 이층 누각이 웅장하게 서서 중령 앞뒤로 ‘탑영호’와 ‘중령천’을 내려다보고 있다.] -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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