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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 당선작

작성자김아인|작성시간26.06.13|조회수22 목록 댓글 2

2026년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 당선작

 

꽃심 / 이현숙

 

 

누가 저들을 깨웠는가, 누런 흙을 헤치고 요란한 발소리로 솟아나라고. 단단한 땅을 열어젖히는 소리에 지나는 바람마저 비켜 간다. 먼지 같은 싹 하나, 천지에 흔하디흔한 풀, 없어도 그만이지만 기어이 틈을 비집고 자리 잡는다.

 

바람에 실려 내려앉든, 새 부리에 물려오든, 다 불시착한 자리다. 씨앗은 눅진한 흙냄새를 맡으며 찬찬히 몸을 말아 쥔다. 깊은 어둠 속에서 물의 기척을 더듬는다. 밤낮없이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 깊이 발을 뻗는다. 여린 것이 뿌리를 내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경이로움은 줄기로 이어진다.

 

물길을 찾은 뿌리는 허공을 향해 키를 밀어 올린다. 흙의 숨결을 더듬으며 젖은 어둠을 끌어안고 높이를 늘린다. 뿌리는 햇살을 욕심내지 않는다. 오늘은 한 줌이면 충분하다는 듯 공기 한 모금, 내일을 버틸 만큼의 양분을 천천히 몸에 들인다. 줄기를 밀어 올리는 힘은 하늘을 향한 마음에서 나온다.

 

막 틔운 잎이 숨을 들이켜도록 뿌리와 줄기는 온 힘을 모은다. 줄기가 자신을 깎으며 내어주는 마음을 잎맥마다 새긴다. 미물의 발자국을 새기고 새들의 울음을 얹는다. 멀리서 물소리가 스며들고 곁을 지나는 사람들의 두런거림과 정겨움을 함께 담는다. 잎을 펼치는 힘은 줄기에서 나온다.

 

부드러운 바람엔 살랑거리며 리듬을 탄다. 거센 바람엔 발끝을 꾹꾹 누르며 버틴다.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만들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고 휘어질 줄 알아야 한다. 바람의 결을 느끼고 세기를 가늠하며 몸을 낮출 때와 다시 일어설 때를 스스로 알아챈다. 살아가려면 버거운 날도 숱하기에 흔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줄기 끝에 받침을 펼치고 나면, 몸은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달리하는 사춘기를 겪는다. 받침 위에 멍울이 차츰 부풀어 오르고 달거리가 시작된다. 부끄러워 숨기고 싶던 봉우리는 불그레한 꽃잎을 살며시 열어젖힌다. 가지마다 꽃이 만개하면 바야흐로 절정이다. 이 순간을 위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밀어 올리고 받침을 펼친 것이다.

 

향에 취한 것이 어찌 사람뿐이랴, 바람은 어린싹으로 돋아나던 날부터 맺어온 정을 잊지 않고 오가며 세상 소식을 전한다. 늘 길목을 지키며 반겨주는 꽃을 위해 너울너울 춤을 추듯 향을 퍼뜨린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향은 잔잔히 번지고 십 리 밖에서 향기를 좇는 벌나비는 그 길을 따라 모여든다.

 

살다 보면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날이 많다. 비바람이 한꺼번에 몰아치거나, 햇빛이 정수리를 달굴 만큼 뜨거워 주저앉고 싶은 날도 이어진다. 버티다가 힘에 부치면 그만 꺾여버리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궂은 날도 결국 지나간다는 걸 깨달을 즈음, 어떤 시련에도 활짝 웃는 힘이 생긴다.

 

단풍은 다시 피는 꽃이라 했던가, 은은한 금빛으로 물드는 자신이 오히려 흡족하다. 어떠한 시련도 속으로 삭이며 내일을 준비하는 작은 존재이지만, 그 마지막 정열은 볼수록 경이롭다.

 

이 세상에 불시착한 뒤, 싹 틔우려 흙을 비집으며 몸살을 앓은 날, 줄기를 밀어 올리며 성장통에 밤잠을 설친 날, 생살이 찢어질 듯한 아픔 속에서도 잎을 내밀며 버틴 날, 허공에 삶의 터를 닦느라 버둥거린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고 쓰러졌다면 오늘 내가 없다. 돌아보면, 지난한 시간을 견딘 힘은 무엇이라도 피워보려는 꽃심이었다.

 

고운 바람 부는 날, 줄기는 온몸을 흔들며 자신을 비운다. 씨방을 활짝 열어젖혀 씨앗을 세상 속으로 흩어 보낸다. 어디에 닿든 뿌리내릴 거라는 믿음을 담아 씨앗을 가볍게 털어낸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보낼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새 부리와 바람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나는 오래 붙잡은 마음들을 씨앗 털 듯 바람결과 강물에 흘려보낸다.

 

아득한 기억과 추억 속에만 머무는 관계를, 더는 부르지 않아도 될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미련을 훌훌 털어낸다.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내 안에 숨도 제 리듬을 찾는다. 비운다는 건 잃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내가 덜 흔들리는 쪽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늘 잘해야 한다는 마음과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워왔다. 꽉 채우려다 보니 내려놓는 법을 몰랐다. 이제는 잘 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쪽으로 기울여본다. 비워낸 자리에 느긋함을 들앉힌다. 그곳으로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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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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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보라 | 작성시간 26.06.13 잘 감상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4 네~ 김 시인님도 좋은 시 많이 지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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