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대전 수필부문 당선작
목요일은 너무 멀다 / 김은아
남편은 목요일이면 가끔 먼 데를 본다. 문득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이를 오래 지켜본 사람만 알아챌 수 있는, 아주 짧은 부재. 시어머니 기일 밤, 그이가 술잔을 앞에 두고 처음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아직도 플랫폼을 달리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의 밤길 곁으로, 늘 기차가 지나갔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이면, 소년은 부산진역을 스쳐 걸었다. 비릿한 네온 조명이 깜박이는 골목을 지나,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 시절, 소년에게 요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월요일이든 토요일이든 똑같이 학교에 갔고, 어두운 골목을 걸어 돌아왔다. 엄마가 있는 한, 모든 날은 고르게 안전했다.
엄마가 쓰러진 것은 추석을 앞둔 동네 방앗간에서였다. 일손을 거들다 갑작스레 바닥에 주저앉았고, 며칠 뒤 엄마 안에 깊은 병이 자리 잡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부터 소년의 풍경이 달라졌다.
어느 새벽, 엄마는 두 아들의 손을 끌고 부산역으로 갔다.
"서울대공원 가자, 엄마 손 잡고."
통일호가 흔들리며 북상했다. 엄마는 놀이기구를 타지 않았다. 아이들이 뛰노는 동안 연신 사진을 찍었다. 꽃 앞에서, 놀이기구 앞에서, 아들들이 웃을 때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소년은 몰랐다. 엄마가 남기려 한 것이 사진이 아니라 아들들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나들이 후 엄마는 입원했다. 소년은 교실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에는 늘 병실의 하얀 천장이 떠올랐다.
대학입시가 가까워 오던 겨울, 소년은 아버지와 대전행 통일호에 올랐다. 아버지는 말없이 사이다 한 병과 삶은 계란 두 알을 건넸다. 그 투박한 손길 속에 아버지의 모든 마음이 들어 있었다.
대학생이 된 소년은 목요일까지 수업을 마치면 곧장 대전역으로 향했다. 밤기차에 올라, 고단한 몸을 창가에 기댔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엄마 곁을 지키고, 월요일 새벽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일주일 중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사흘이 전부였다. 나머지 나흘, 소년의 몸은 대전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부산에 가 있었다
같은 학번 친구들은 주말이면 축제에 가고, 캠퍼스에서 기타를 쳤다. 소년은 목요일 밤마다 혼자 플랫폼에 섰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좌석. 창밖의 가로수가 연둣빛을 틔웠다가 짙어지고, 붉어졌다가 앙상해졌다. 계절은 돌아오는데 엄마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을 곁에서 보내고 떠나는 월요일 새벽이면 가슴이 무너졌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가 조금 나아 보였다는 안도와, 다음 목요일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더 작아져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흘 내내 소년을 따라다녔다.
봄날 병실. 창밖으로 벚꽃이 지고 있었다. 소년은 여느 때처럼 사흘을 곁에서 보내고 떠나는 아침, 엄마의 손을 감쌌다. 한때 방앗간에서 일손을 돕던 손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엄마, 다음 주 목요일 밤에 금방 올게요."
방금까지 곁에 있던 아들이 떠나는 순간이었다. 소년이 줄 수 있는 시간은 사흘이 전부였다. 나머지 나흘을 견디는 것은 소년의 몫이 아니라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대답 대신 아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목요일은 너무 멀다, 아들아."
함께한 사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기다려야 할 나흘은 영원처럼 느려지는 것. 사랑하는 사이에서, 곁에 있는 시간은 늘 모자라고 떨어져 있는 시간은 늘 남아돈다는 것. 엄마는 그것을 한마디에 담았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소년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엄마는 조용히, 먼 기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년은 다시 기차에 올랐다. 구순이 된 아버지를 뵈러 부산으로 가는 길. 서울역 플랫폼에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기억 저편에서 초록빛 통일호가 달려오는 듯했다.
창밖으로 개나리꽃이 흐드러졌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남편이 왜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 늘 일찍 도착하는지. 왜 내가 아프면 안절부절못하는지. 그이에게는 끝내 가지 못한 목요일이 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한 발이라도 먼저 닿으려 한다.
어쩌면 사랑이란 상대의 시간 속으로 가장 빨리 달려가는 일이고, 상실이란 아무리 달려가도 닿지 못하는 요일이 생겨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목요일이면, 남편의 눈이 잠시 멈추는 그곳.
나는 그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다
아버지의 겨울물 / 조영성
아버지는 겨울이면 산으로 향했다.
삼각산 자락, 도선사로 오르는 길은 유난히 비어 있었다. 잎을 떨군 나무들은 서로의 몸을 비틀어 얽은 채 앙상하게 서 있었고, 바람은 그 사이를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어붙은 흙이 부서지며 짧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겨울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남겼다.
아버지는 그 길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홀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내려온 고향, 끝내 돌아가지 못한 산하가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침묵은 더 깊어졌다. 겨울의 산은 모든 것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숨길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홀어머니와 형제를 늘 고향 산하에 두고 내려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형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다 담기지 않았고, 그 마음이 가장 아픈 날이면 어김없이 도선사로 향했다. 그곳은 부모 또한 젊은 시절 자주 찾았던 사찰이었다. 겨울의 도선사는 풍요로운 신록과는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록은 사라지고, 새 한 마리조차 숨을 수 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숲을 가득 메웠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무들은 서로의 몸을 긁으며 낮게 울었고, 그 울음은 오래된 상처처럼 공간에 남았다.
계곡에 닿으면 아버지는 늘 멈춰 섰다.
그리고 말없이 장갑을 벗었다.
얇게 언 얼음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먼저 들리는 것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라 뼈가 부러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이었다. 얼음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졌고, 그 틈으로 드러난 물은 소리 없이 흐르면서도 이상하게 더 차갑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 물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움은 감각이 아니라 충격으로 먼저 다가왔다. 피부를 스치는 것이 아니라, 손등의 신경을 한 번에 끊어내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통증이 몰려오다가 곧 사라졌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각 자체가 삭제된 것처럼 무너졌다. 손가락 끝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멀어졌고, 몇 초 뒤에는 차갑다는 인식조차 남지 않았다.
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 흐름은 손목을 넘어 팔 안쪽으로, 뼛속 깊은 곳을 더듬듯 파고들었다.
아버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고, 숨은 끊어졌다 이어졌다. 그러나 얼굴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마치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지나가는 자리를 지켜보는 사람처럼.
나는 그 옆에 서 있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묻지 못했다. 다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물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남아 있으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흔여덟에 나를 얻었다. 늦게 얻은 막내를 두고 “설익은 농사라도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늘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었지만, 그 말은 끝내 도착하지 못한 미래였다.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이북5도 실향민이라는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 길게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더 오래 일했고, 더 적게 말했다.
열여덟의 새벽, 철도길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버지는 내 옆에 조용히 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대학까지는 걱정하지 마라.”
그 말은 오래 남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떠났고, 남은 것은 말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현실적인 어려움보다 먼저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너졌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더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눈으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쓰고, 반복해서 마음속에 남겨라. 체화되게 해라.”
그 말은 계곡물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주 오래된 물길처럼.
만학으로 다시 시작한 공부는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다. 지도교수님은 이미 은퇴했고, 학과의 얼굴도 모두 바뀌어 있었다. 교실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만 가득했다. 나는 그 안에서 늦게 들어온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해는 느렸고, 기억은 쉽게 빠져나갔다. 시간은 늘 모자랐고, 나는 그 속도를 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더는 써 내려갈 수 없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손이 멈췄고, 머리도 멈췄다. 그때 계곡이 떠올랐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 감각이 사라지던 손, 그리고 그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던 아버지의 침묵.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한 줄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이 반복되었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몸은 무너졌지만, 멈추지 않는다는 것만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긴긴밤을 울어 새우지 않는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새벽 독서실, 전쟁 이후 한 선배가 남겼다는 그 말은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를 설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처음으로 ‘버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으려는 방식이었다.
결국 나는 10년 걸린다는 만학의 길을 4년 만에 끝냈다. 성적우수자로 총장 앞에 섰던 날, 감격은 단순한 성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물속에서 손을 빼지 않던 시간의 연장이었다.
지금도 가끔 겨울 물에 손을 담근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몇 초가 지나면 본능적으로 손을 빼게 된다.
손끝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묻는다.
아버지는 왜 그 물속에 손을 넣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 끝에는 하나의 감각만 남는다.
흐르면서도 사라지지 않으려 했던 삶의 온도.
장승무덤 / 허춘자
장승은 처음에 나무였다. 산비탈에 뿌리를 박고 수십 년을 홀로 서 있던 나무, 봄이면 땅속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려 잎끝까지 밀어 보내고, 가을이면 물든 색을 아낌없이 내려놓던 나무였다. 나무는 말이 없다. 바람이 달려와 흔들어도 흔들릴 뿐 소리 내어 맞서지 않고, 눈이 온몸을 짓눌러도 휘어질 뿐 꺾임을 끝내 뿌리치지 않는다. 그 긴 침묵 속에서 나무는 무언가를 쌓아 갔다. 나무는 장승이 되기 전, 나이테라는 이름의 내력을, 옹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속으로만 삭혀 굳어진 세월의 밀도를 오래 스스로 갈았다. 존재는 쓰임을 얻기 전에 먼저 깊어지는 법이다.
어느 날 장승조각가 장인의 손이 나무에 닿는다. 오랜 세월 나무를 읽어 온 손, 나이테의 결을 손끝으로 헤아리고 옹이의 아픔을 손바닥 전체로 받아 낸 손이다. 손끝에는 수십 년 나무와 나눈 대화가 굳은살이 되어 박혔다. 장인은 나무가 스스로 말을 꺼낼 때까지 오래, 깊이 바라본다. 나무도 그 눈길을 느끼는지 조용히 몸을 세운다. 장승은 장인의 손이 닿는 순간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네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손은 묻는다. 나무는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천천히 열기 시작한다. 만남이란 상대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을 알아봐 주는 일이다.
끌이 살 안으로 파고들고 자귀가 몸을 열면 나무는 깎인다. 나무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가지의 기억이 조각조각 흩어지고, 나무이던 시절의 윤곽이 하나씩 내려앉는다. 깎인다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다. 장승은 깎일수록 더 선명해진다. 나무 속 깊은 데서 다른 형태가 천천히 떠오른다. 사람의 이마가 열리고, 사람의 턱이 드러나고, 오래 잠들어 있던 얼굴이 마침내 세상 쪽으로 고개를 든다. 모든 창조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장인은 다만 그것을 알아보고 불러낸 사람이었을 뿐 장승은 이미 그 나무 속에 있었다. 형태를 버린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더 깊은 본질로 건너가는 일이었다.
나무는 식물이다. 뿌리로 먹고 잎으로 숨 쉬며 한 자리에 박혀 사는 존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나무가 타고난 길이었다. 장승은 경계 위에 서서 범주를 넘어선다. 느끼고, 몸을 움직이고, 바라보는 존재의 기운이 식물의 몸 안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뿌리로만 세상을 알던 것이 눈을 뜨고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경계가 스러지는 일이다. 식물과 동물,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가 장승 한 몸 안에서 허물어진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 장승은 범주를 넘어선 자리에 홀로 서 있다.
장승의 얼굴은 무섭다. 왕방울 눈이 번뜩이고 주먹코가 당당하게 앞을 향하고, 이를 드러낸 입술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채 이를 악물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보자마자 뒤로 물러서고 어른들도 첫눈에 움찔한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그 험상궂음 속에서 다른 것이 말을 걸어온다. 험한 얼굴로 서 있다는 것은 사나운 것들을 대신 받아 서겠다는 뜻이다.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날마다 막아 서겠다는 다짐이다. 세상의 모든 거칠고 어두운 것들을 향해 나 먼저 맞서겠다고 이를 악문 얼굴, 그것이 장승의 표정이다. 장승의 얼굴은 위협이 아니라 방패다.
장승은 얼굴을 얻는 순간 인격이 된다. 인격이란 온화한 표정이 아니라 감당하겠다는 결의 그 자체다. 장승은 얼굴을 얻는 순간 무거운 것들을 함께 얻었다.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두 어깨를 눌렀고,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야 한다는 사명이 두 눈을 크게 뜨게 했고, 어떤 악도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소명이 두 발을 땅에 박게 했다. 나무였을 때는 자기 한 몸이 살아남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격이 된 뒤로는 자기보다 큰 것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된다. 자신을 초과하는 무언가를 향해 날마다 스스로를 열어 놓는 것, 그것이 인격이 자라나는 자리다.
장승은 마을 입구에 선다. 사람 사는 온기와 알 수 없는 바깥의 냉기가 맞닿는 자리, 그 경계에 장승은 두 발을 깊이 박는다. 바람은 그 사이를 쉼 없이 드나들지만 장승은 흔들리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장승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따뜻한 방 안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이불을 나눠 덮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장승 없이는 마을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는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을 가려내고, 반겨야 할 것과 막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그 자리를 장승은 혼자 지킨다. 외로운 자리다. 그러나 장승은 그 외로움을 등에 지고 날마다 그 자리에 다시 선다. 장승은 외로운 문지기의 숙명을 두 눈 부릅뜨고 받아들인다.
마을 사람들이 손을 모으고 장승 앞에 선다. 아이의 병이 낫기를, 먼 길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를, 가을 곡식이 넉넉하기를. 기도 소리가 새벽 공기를 타고 장승의 몸 안으로 스며든다. 장승은 그 간절함을 온몸으로 받아 어디론가 전한다. 사람의 말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그 기도를 실어 나른다. 자기 소원은 없다. 나무였을 때도 제 안에 기쁨과 슬픔을 쌓아 두기만 했고, 장승이 된 뒤에도 타인의 간절함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만 산다. 장승의 몸은 비워져 있기에 가득 채울 수 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앞에 선 모든 이들을 위해, 장승은 오늘도 빈다. 장승은 자기 소원 없이 모든 이의 간절함을 받아 전한다.
사람들이 손을 모으는 순간, 장승은 신이 된다.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도로 올려 세운 신이다. 수많은 기도가 쌓이고 수많은 눈물이 마르고 수많은 새벽이 장승의 몸을 씻고 지나는 동안, 나무였던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 거듭난다. 그러나 장승은 그 신격을 자랑하지 않는다. 비바람이 색을 빼앗아 가고 이끼가 얼굴 위로 기어올라도, 장승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제 일을 한다. 위대함은 거창하지 않다.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두 발을 땅에 박고 서 있는 것, 그것임을 장승은 온몸으로 가르쳐 준다.
장승에게도 수명이 있다. 비가 살을 두드리고 햇볕이 색을 빼앗고 서리가 몸속으로 파고들다 보면 어느 해 겨울, 장승은 쓰러지기 시작한다. 눈이 흐려지고 코가 무너지고 신격을 입었던 얼굴이 조금씩 지워지며 다시 나무로, 나무 너머의 흙으로 천천히 내려앉는다. 마을 사람들은 낡은 장승을 거두어 장승무덤에 묻는다. 장승무덤. 신을 묻는 무덤.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쓸쓸한가.
그러나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승의 몸이 흙과 섞이면 흙이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흙 위에서 이듬해 봄 새 나무가 고개를 든다. 나무였던 것이 장승이 되고, 장승이었던 것이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나무를 불러 세운다. 존재는 끝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다. 그 모든 형태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이어졌으며, 장승무덤은 그 문장의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숨표였다.
푸른 숨결에 잠기다 / 김도이
업무에 지친 어느 오후,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울컥, 가슴이 일렁였다. 어린 시절, 나의 여름은 언제나 하늘빛으로 시작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봉창 문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던 그 투명한 푸르름. 너무 맑아서 되레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오던 서늘한 빛깔 속으로 나는 맥없이 빨려 들어가곤 했다. 마치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고, 나의 어린 영혼은 그 부름에 기꺼이 온몸을 적셨다.
그 시절 나는 숨조차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매일 아침을 깨우던 가슴의 떨림, 쿵쾅거리던 심장의 고동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리라. 뭉게구름이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하늘 아래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은 깊고 투명한 물빛으로 말없이 나를 껴안았고, 나는 그 품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한 점 깃털이었다.
그 하늘을 지붕 삼아 우리는 날마다 모험의 지도를 그렸다. 친구들과 논두렁을 지나 산길을 오를 때면 세상은 오직 우리만을 위해 설계된 거대한 놀이공원이었다. 푸른 벼가 초록의 파도를 일으키는 논을 지나면 거친 산자락이 시작되었고, 그곳엔 머루 열매들이 잊힌 기억처럼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달콤하고 시큼한 즙을 입가에 묻힌 채 우리는 개울 물소리를 이정표 삼아 걸었다.
물소리가 깊어지는 윗구시밭골엔 어김없이 커다란 둠벙이 우리를 기다렸다. 너럭바위에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큰둠벙으로 풍덩, 풍덩 몸을 던지던 순간의 해방감이란! 차가운 물살이 발목을 간질이고, 수면 위로 흩어지는 윤슬이 별빛처럼 일렁이던 찰나들. 우리는 게처럼 옆으로 헤엄치다 숨을 참고 깊은 적막 속으로 잠수했다. 물속은 서늘한 청보랏빛이었고, 물 밖의 바위는 한낮의 해를 삼킨 듯 뜨거웠다. 그 극렬한 온도 차가 주는 쾌감에 취해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물과 바위를 오갔다.
“한 번 더!” 미정이의 외침과 함께 다시 다이빙! 까르르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돌아왔다. 그 웃음 속엔 내일의 걱정도, 어제의 후회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지금이라는 찬란한 순간만이 파문처럼 번져나갈 뿐이었다.
시퍼렇게 질린 입술은 이제 달아오른 바위로 돌아갈 시간이라는 신호였다. 바위 위에 배를 깔고 누우면 대지의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졌다. 누군가 주변의 이끼를 살살 문질러 손톱 위에 올렸다. 햇살 아래 바스락거리며 마른 이끼가 붉은 흔적을 남기면, 손톱 끝엔 작고 붉은 채송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보잘것없는 치장에도 우리는 천하를 얻은 듯 신이 났다.
놀이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덧 서쪽 하늘이 발그레한 수줍음을 띠었다. 허기가 발걸음을 재촉할 무렵 도착한 집 마당에는 드럼통 위 가마솥이 김을 뿜고 있었다. 솥 안에는 감재와 북감재가 포슬포슬하게 익어가고, 불쏘시개를 삼킨 장작불은 거친 숨결처럼 일렁였다.
우리는 바구니를 둘러앉아 뜨거운 감재를 이리저리 굴렸다. 델 듯한 열기에 손가락을 귓불에 갖다 대면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조금씩 식어 손끝에 내려앉을 때까지, 우리는 그 구수한 기다림을 즐겼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너른 마당에 펼쳐진 덕석은 우주로 향하는 창이었다. 나란히 다닥다닥 누워 바라본 하늘에는 은하수가 터진 둑에서 흘러나온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둠은 깊을수록 포근했고, 별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은근히 유혹했다. 우리는 그 밤의 바다를 유영하며 통통 별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그렇게 별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서야 긴 여름밤의 하루를 마무리지었다.
그 시절, 시간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하루하루가 영겁처럼 느껴졌고, 이 푸른 여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 같았다. 하늘의 푸르름도, 개울의 차가움도, 별들의 반짝임도 모두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온몸을 채웠던 그 전율은 설렘과 뒤섞여 젊은 날을 투명하게 물들였고, 이제 그것은 희미한 떨림으로 기억 속에서만 일렁인다. 여름은 다시 오지 않았고, 어른의 시간에는 다른 계절이 찾아왔다. 많은 일이 지나갔고, 그 모든 떨림은 이제 고요한 별자리처럼 제 자리에 흩어졌다. 남은 그리움만이 빛의 기둥이 되어 솟구친다.
지금도 문득, 무심히 덮쳐오는 비릿한 풀 내음이나 서늘한 바람의 숨결에 가슴 한 켠이 물결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푸르게 번진 기억의 실타래를 따라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하늘이 너무 투명해 눈물이 날 것 같던 그 시절로. 큰둠벙의 물보라 속에 몸을 던지고, 쏟아지는 별빛을 주워 담던 그 단편의 여름으로.
그때의 나는 하늘의 작은 조각이었고, 물결의 일부였다. 비록 시간은 나를 멀리 데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그 푸른 숨결 속에 잠겨 영원히 그 여름을 유영하는 꿈을 꾼다.
나에게 그리움은 언제나 그날의 물빛을 닮은, 시리도록 푸른색이다.
수필부문 심사평
2026년 《글로벌경제신문》시니어신춘문예에 공모한 수필 작품은 (450)편이었다. 문학에서 수필 장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사고의 프리즘을 통해 문학적으로 표현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전적인 의미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삶이나 경험 등을 자유롭게 쓴 산문 형식의 글이라 표할 수 있겠다. 수필의 간결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수필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착상한 다양한 삶의 표현들과 경험의 서술 과정 등의 구체화는 쉽지 않다. 작품속에 문학이 지닌 허구를 떠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적극성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 체험 등에 관한 창조적인 형상화의 표현이다.
이런 방식을 포함하여 작가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서론, 본론, 결론의 전개 과정 등이 자연스럽고,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정독을 몇 번을 하고 이런 범주에 드는 작품으로 30여 편이 선정되었다. 이중에서 최종 10여 편을 뽑아 놓고 고심했다. 최종 심사 결과 김은아「목요일은 너무 멀다」, 허춘자「장승무덤」, 조영성「아버지의 겨울물」, 김도이「푸른 숨결에 잠기다」, 이현숙「꽃심」 5편의 수필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목요일은 너무 멀다」는 수필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문학적인 표현으로 감동을 주었다. 배우자의 가난한 소년시절의 슬픈 자화상 등을 소설적인 표현의 기법과 은유 등을 함유한 문학적인 서정으로 아름답게 승화했다. 결혼 전에 세상 떠나신 시어머니의 죽음을 시간과 계절의 변화 등을 마치 단편소설의 절정 부분처럼 표현한 절창이다. 슬프지만 정결한 문학적인 미학의 정수에 닿게 한다. 기성세대 향수를 자극하는 어머니와 자녀들의 보편적인 삶의 정서를 소중한 가치로 빛나게 한 수필이다.
「장승무덤」은 장승이 나무였던 시기부터 장승으로 만들어지고,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의 과정 등을 간결하고 치밀하게 표현한 수필이다. 나무에서 장승으로 선택, 장인과의 만남, 장승의 얼굴 제작, 마을 입구에서 신의 역할을 다하고 장승무덤이 되는 과정에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장승무덤」을 읽다보면“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게 된다. 인생의 생로병사를 함축하고 있는 의미 있는 수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겨울」은 실향민이었던 필자 아버지의 삶과 추억 등의 편린들이 제목에 그대로 녹아 있는 수필이다. 어느 겨울날 서울 북한산의 도선사 근처 계곡에서 아버지와의 추억과 기억 등은 필자의 삶에 지표가 되어주었다. 사람은 죽는 존재이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가난했지만 필자를 격려하며 위로했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인연 등을 은혜롭게 기억하고 추모하는 필자의 글쓰기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숭고하다.
「푸른 숨결에 잠기다」는 필자의 어린시절 농촌에서 살았던 때의 어느 여름날의 맑고 아름답던 장면 등을 떠올리는 수필이다. 유년의 친구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정다웠던가?
세월이 흘러 친구들은 사라지고 현실속에서 어느 유년의 푸르른 날 친구들을 그리워하면서 농촌의 여름 서정을 담은 표현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맑고 순수했던 유년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려고 정진하는 모습 등이 감동을 준다. 수필을 쓰는 행위가 과거의 추억의 편린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자기 정화를 할 수 있음을 이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꽃심」은 씨앗이 흙과 물을 통해 발아하는 장면 등을 섬세하면서도 간결하게 담아낸 탐구의 수필이다. 흙의 숨결과 함께 뿌리가 햇살을 욕심내지 않고 공기 한 모금의 양분을 자신의 몸에 담아내는 장면 등의 표현 등이 인상적이다. 필자는 수필 제목「꽃심」을 통해서 인간의 모순 된 삶을 성찰하려 한다. 때로 삶을 비운다는 건 잃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자신이 흔들리는 쪽으로 옮겨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씨앗을 세상 속으로 날려 보내는 것은 그것은 어디에 닿든 뿌리내릴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긍정의 미학을 통한 자기 성찰의 노력이 돋보이는 수필이다.
김경식 심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