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신춘문예대전 소설 부문 당선작
만호 씨 힘을 빼요/고만송
“민 대장이……추락사했다!”
최우식 선배의 침통한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내 자일 파트너였던 민 대장이 죽었다는 것이다. 암벽 등반을 하다 보면 자잘한 추락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부러졌다는 것도 아니고, 사망했다는 말이 아침 인사처럼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서요?”
“정확한 건 나도 몰라, 지금, 병원이라며 구조대장한테 연락을 받았다! ”
“알겠습니다. 저도 바로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병원이 어딘가요?”
“확인해서 문자 보낼게.”
나와 며칠 전까지 등반했던 사람이, 나도 모르게 등반을 하다 죽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쉽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생각에 랩을 씌운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민 대장을 만난 건 명퇴한 다음이었다. 직장은 내가 쓸모가 없어지자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였고, 랜덤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직장에 대한 억울함, 분노, 배신으로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다 명퇴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살기 위해 탈출구라고 찾은 것이 아침 등산이었다. 집에만 있으니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다. 이러다 정말로 극단적인 생각을 할 것 같아서 개중에 가장 손쉬워 보이는 등산을 시작했다. 직장 다닐 때는 은행원들끼리 도봉산이나 북한산에 단합대회 가는 것도 큰 숙제처럼 생각했었다. 더구나 익스트림 스포츠라 할 수 있는 암벽 등반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생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퇴직 후 두려웠던 것은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것이었다. 습관이란 무서웠다. 출근할 곳도, 연락할 사람도, 연락해 오는 사람도,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뜬 눈으로 점령군처럼 다가오는 여명을 매일 숨죽이며 목격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곤욕이었다. 여명은 내 무기력함을 하나하나 들춰내려는 듯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듯 무자비하게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즉흥적으로 창업하기엔 자신도 없었다. 퇴직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함부로 창업하지 말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었다. 강사는 나이가 들수록 꿈을 하나씩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말하면서 잘 노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틀린 말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는 밥만 먹고 있을 수는 없어 이런저런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는데, 어쩌다 연락이 오는 곳은 보험 영업직이거나 기획부동산 상담직이었다. 아는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지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오라는 것이었다. 은행원일 때는 박차고 나가면 제2, 제3금융권에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것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많은 것을 포기한다고 했음에도 미련이 남는 것은 집과 직장밖에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고, 산속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는, 그곳에서 쉬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종일 아내와 함께 있다 보니 별것 아닌 것-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밥을 먹는 문제, 양말 벗어서 빨래통에 넣는 문제, TV 채널 선택권 문제까지 뭐 하나 트집 잡지 않는 것-으로 작은 말다툼이 큰 말다툼으로 번졌다. 결혼 생활 동안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모두 문제라는 사실에 새삼 나도 놀랐다. 집 안에서 숨만 쉬어도 숨이 꽉꽉 막혀왔다. 아내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속에 자잘한 살기를 숨겨서 내 가슴을 후벼팠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퇴직금과 저축해 놓은 재산으로 어려움이 없을 텐데도 나는 뭔지 모를 불안으로 나 자신을 괴롭혔다. 퇴직하면 아내와 여생을 여유롭게 즐기면서 노년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내와의 대화는 물과 기름 사이에 비닐이라도 씌워놓은 것처럼 겉돌았다. 싸움 끝에 따로 방을 구할까 고민하다 숲속에 작은 텐트와 간단한 접이용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필요할 때마다 가서 쉬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편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만의 공간, 일명‘아지트’ 위쪽에서 “출발”, “완료”라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몇 시간째 그 소리가 들렸다. 할 일도 없고 궁금도 하여 소리가 나는 곳으로 올라가 보니 단체복을 입은 산악회 회원들이 바위 위에 자일을 걸어 놓고 한 사람씩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회전 놀이’를 하는 침팬지가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니 침팬지의 ‘회전 놀이’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놀이는 단순해 보였다. 벨트(하네스)에 자일을 연결하여 떨어지지 않게 한 다음 “출발”을 외치고 등반자가 절벽을 올라가면 다른 한 사람이 줄을 당겨주어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바위에 다 오른 등반자가 “완료”를 외치면 자일을 잡고 있던 사람이‘완료’라고 외친 사람을 출발지점으로 다시 내려주었다. 가느다란 줄 하나로 급경사를 오르는 모습이 위험해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릴이 있어 보였고, 무엇보다 내 몸이 반응하는 것 같아 신기했다. 힘들게 오르는 등반자를 보자 내 가슴이 뛰었고, 피가 뜨거워지고, 이상한 열정이 내 몸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산악회 회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도 한번 해 보면 안 됩니까?”
“안전 장비 없이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것을 먼저 배워야 등반을 안전하게 할 수 있어요. 장비 없이 암벽을 오르다가는 추락하여 팔이나 다리 등이 부러질 수도 있고, 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카페에 가입하게 되면 기초부터 배울 수 있고, 안전하게 등반을 할 수 있습니다. 초보 프로그램이 있으니 카페에 등록하세요.”
미리 질문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등반자는 내게 일사천리로 카페 가입을 권했다. 나는 그들이 가르쳐준 카페에 가입하고 암벽화, 하강기, 퀵도르, 그리그리, 헬멧, 초크, 하네스, 자일 등을 차례로 구매했고, 그들이 연습하는 날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내 성격상 두드리고, 검토하고, 의심하고,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일을 진행했을 법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반백 년을 살아오면서 취미라고 하면 집에서 야구나, 당구, 축구 정도 시청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내가 등산도 아니고, 암벽을 하는 모습에 아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산악회 회원들은 주말에만 모여서 운동을 했다. 그들이 없는 평일에는 1인용 등강기를 설치하여 암벽 연습을 했다. 보기엔 쉬워 보여도 막상 암벽에 오르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나를 암벽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암벽 등반에 목표가 생기자 저절로 삶에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암벽 등반은 거칠게 말해서 목숨을 걸고 하는 겁니다.”
산악회 회원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암벽 등반의 위험을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내게는 더 큰 자극제가 되었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운 좋게 제1금융권에 입사하여 행원으로 30여 년을 근무한 것이 전부였다.
혼자 연습할 때는 경사도가 낮은 곳에서 연습을 했다. 슬랩 운동은 만질만질한 바위를 오직 암벽화만 싣고 오르는 운동으로 추락 시 찰과상은 각오해야 했다. 바위에 튀어나온 모래 한 알을 의지해서 서야 하고, 작은 틈으로 난 암벽 틈으로 중심을 잡아야 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막막함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강렬해 처음에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함이 매력이면서도 희열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바위에 열성을 보이자 산악회 회원들은 뜻밖에도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회원 간의 친목 도모에 해가 된다는 이유였지만, 겁 없이 설쳐대는 내 무모함이 그들에겐 시한폭탄처럼 보였을 것이다. 산악회에서 등반 시 사망은 바로 산악회 해체와 연결되었다. 암벽 세계도 나름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세계인데, 나처럼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은 기피했다. 나 또한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산악회 카페를 탈퇴했다. 카페를 탈퇴한 후에도 평소처럼 김밥이나 떡, 막걸리를 챙겨서 나만의 ‘아지트’로 출근했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목적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암벽 등반을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사이도 좋아졌다. 산에 가는 내게 아내는 김밥을 싸 주기도 하고, 다양한 과일을 락앤락에 정성껏 담아주었다.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는 오전 중에는 둘레길 워킹으로 몸을 풀고, 오후에는 암벽 등반으로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바위에 매달려 있다 하산했다.
2
함께 명퇴한 동료 가운데 몇 명은 사업을 시작하여 망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더러는 암에 걸려 고생한다는 말도 들려왔다. 퇴직은 사회적인 사망선고란 말이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큼 적확한 표현도 없는 것 같았다. 퇴직 후 죽는 것이 잉여 로 사는 것보다는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명퇴한 선배 행원들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 일처럼 공감도 되었지만, ‘미친놈, 이 좋은 세상…왜 죽어!’라고 욕했지만,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민 대장이 ‘산에 갑시다’ 한마디에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
“포기하면 오를 수 있지만, 집착하면 오를 수 없는 것이 바위입니다.”
퇴직 후 한동안 재취업을 위해 무진 애썼다. 취업을 시도할수록 무모한 용기는 절망으로, 대상 없는 분노는 무기력증으로 나타났다. 취업을 포기했을 때 격렬했던 욕망과 갈등이 일시에 풀렸다. 포기하니까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희망 고문으로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벽 등반은 내겐 신천지나 마찬가지였다. 등반 연습을 하는 동안 무릎이 돌에 찍히고 손톱이 까뒤집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추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이 두렵지 않았다. 집에 와 목욕할 때 바위에 할퀴고 살이 파인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아픔이 너무나 상쾌하고 짜릿했다. 피부에 난 상처가 내겐 기쁨이고, 삶의 흔적이자 살아 있는 징표였다.
나는 매일 소나무에 등강기를 설치하고, 암벽화와 초크, 하네스를 갖춰 입고 연습했다. 연습할 때마다 암벽 등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운동하기 전 정신 집중을 위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잡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순간이 극도로 긴장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나는 아직 15m 높이의 암벽을 4m 이상 오르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안달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드는지 몰랐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고,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은 같은 데도 막상 해 보면 진퇴양난의 상태를 만드는 데 바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바위가 밀어낼수록 더욱더 오르고 싶은 오기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모르게 생겼고, 조금 오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내가 연습하는 암벽은 15m 암벽이었다. 15m 높이의 우뚝 솟은 바위는 내 실력으로 보면 오를 수 없는 암벽임에는 분명했다.
담배를 피우고 암벽 연습을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바위를 오르기 위해 씨름했지만, 4m 지점에서 여전히 옴짝달싹 못 했다. 4m 지점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크럭스(crux) 구간이었다. 4m 지점만 지나면 손에 잡을 수 있는 홀드가 있을 것만 같고, 그 이후부터는 쑥쑥 오를 것만 같았다. 4m 지점에 올라서면 발 자리, 홀드 자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기름을 발라 놓은 듯 바위는 만질만질했고, 눈 딱 감고 발에 힘주어 일어나는 순간 추락했다.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바위는 힘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발로 오르는 것입니다. 균형을 잡고 발 자리를 잘 보세요.”
민 대장이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뭡니까?”
알몸으로 일광욕을 즐기다 들킨 사람처럼 내 말이 의외로 거칠게 나왔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길 잃은 등산객인 줄 알고 와 보았소! 허허”
“여긴, 내 공간입니다. 나가요, 어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도립공원이 내 공간이라니.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무안함과 당혹감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허세를 부렸다.
“갑니다, 가. 혹시 요기할 것이 있으면 나눠 먹읍시다. 허허.”
나는 바위에서 내려와 배낭에서 간식 통을 꺼내 통째로 그에게 던지다시피 건넸다. 그를 내 구역에서 밀어낸 다음 곰곰이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곳이 나만의 공간일 수는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반갑기도 했지만, 순간적으로 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야박하게 대하지 말 걸 생각하고 있을 때 민 대장이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나 혼자 먹기에는 많은 것 같소. 함께 합시다.”
찬찬히 다시 보니 얼마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면도와 이발을 말끔히 하여 깔끔했다. 70이 넘어 보였던 얼굴은 60대 중반으로 보였고, 날카롭던 눈빛도 어딘지 순박해 보였으며, 무엇보다 누구를 해코지할 만큼 불온해 보이지 않았다.
카페 산악회 회원들의 말에 의하면 민 대장은 장애를 가졌지만, 부상자를 구조할 정도로 힘이 장사라고 했다. 본의 아니게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는 김밥을 나는 떡을 먹었다. 그는 김밥을 먹은 후 무슨 약인지 모를 알약을 먹었고, 나와 그는 행동식으로 가져온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일부러 본 것은 아니었소. 다친 등산객인가 하고 와 본 것이오. 암벽 오르는 것을 보니 여유가 없어 보여요. 여유가 없으면 바위에 오를 수 없어요. 천천히 여유를 가져야 바위가 손을 내밀어요. 허허허”
숨기고 싶었던 것을 모두 보여준 것 같았다. 창피도 하고, 반박하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재미로 하는 것뿐, 오르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다. 그냥 시간 보내기 위해 하는 겁니다. 뭘, 알고 말하세요.”
“그러니까 더 여유를 가지고 올라야지요.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야 발이 터지지 않아요.”
이 사람이 산악회원들이 말하는 슬랩의 달인인가 의심되었다. 바위 위에서 허둥대지 않고 바로 치고 오르지 않으면 추락하기 일쑤다. 그 때문에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올라가야만 한다. 최대한 천천히 오르라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추락하지 않으려고 서두르는 겁니다.” 나도 오기가 생겨 쏘아붙였다.
“……아?… 네…….”
그는 내 말에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가져온 막걸리 한 병을 그와 함께 다 비우고, 비상용 양주까지 배낭에서 꺼내 마셨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그날은 사람이 그리웠나 싶었다. 술기운이 오르면서 통제할 수 없는 객기가 발동하면서 민 대장이 슬랩의 귀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는 암벽 등반을 할 몸이 아니었다. 암벽 등반은 힘도 중요하지만, 중력 때문에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때문에 장애의 몸으로 암벽을 오른다는 것은 일반인보다 두세 배는 어려운 일이다.
“암벽 등반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암벽을 한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럭저럭 하나 보니, 이 나이가 됐지요.”
그는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짧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바위에서 추락해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암벽 등반은 그만큼 위험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경계심이 풀리면서 조금은 그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았다.
“젊었을 때는 한 달에 암벽화 한 켤레가 부족했어요.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바위만 어른거리더군요. 허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전 실력만큼은 못하더라도 저 바위는 오를 수 있겠지요?”
그를 시험해보고 싶은 음흉한 마음이 나를 꼬드겼다.
“저 바위는 암벽 등반하기엔 적당한 바위가 아닙니다. 바위라고 다 암벽 등반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저 바위는 석회암이 많아서 잘 부서져요. 이런 곳에서 연습하면 위험합니다. 사고 날 수 있습니다.”
“겁나세요? 연습해보니 바위가 부서지긴 해도 위험하지는 않았어요.”
“허허”
“저는 4m 정도 올라봤습니다. 15m 정상까지 오르면, 매일 점심을 대접하지요. 어떻습니까, 해 보시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름 합리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어쩌면 은행원이란 직업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무엇인가에 내기를 한 기억이 없었다. 은행 업무를 하다 보면 10원짜리 하나 때문에 퇴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10원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숫자를 맞춰야 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전산처리를 해서 착오가 있으면 금방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일일이 수기로 매입 매출 전표를 작성했기 때문에 오류를 찾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생 은행원으로 살아온 내가 명확하지 않은 것에 내기를 걸고, 더군다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것은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꼭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는 아집과 함께 그도 못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일반인도 오르기 힘든 곳을 장애가 있는 그가 올라간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부채질했다. 그가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볼까요? 빌레이(안전 확보)는 봐주세요.”
“당연히 빌레이는 봐 드리죠.”
암벽 등반은 선등자와 후등자가 자일을 연결하여 오르는 운동이다. 선등자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으로 먼저 암벽을 오르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반면 후등자는 선등자가 바위에 오르기 시작하면 올라간 만큼 줄을 주어 선등자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는 것으로 빌레이가 중요하다. 선등자는 전적으로 빌레이를 믿고 바위에 오르는 것이다. 후등자는 선등자가 낸 길을 오르기 때문에 선등자보다는 위험이 덜하지만, 실력이 못 따라주면 굉장히 고생하며 올라야 한다. 그래서 선등자는 후등자가 힘들어하면 텐션을 잡아 주고 그것도 안 되면 인위적으로 후등자의 자일을 힘껏 당겨 올려주기도 한다.
그는 내 하네스를 착용하고, 초크를 허리에 차고 바위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그만의 의식 같았다. 워낙 위험한 운동이기 때문에 등반자 중에는 자기 나름의 의식행위를 많이 했다. 그는 내가 빌레이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한 후 ‘출발’을 외치고 암벽에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수없이 추락했던 암벽을 민 대장은 머뭇거림이 없이 온사이트로 가뿐히 올랐다. 너무 손쉽게 오르는 모습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 대장은 암벽에 오르자 먹이 사냥을 위해 살금살금 기어가는 한 마리 고양이처럼 침착해 보였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바위를 오르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는 것은 과장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만큼 그는 고양이처럼 사뿐히 바위를 올랐다. 등반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바위에서 내려왔을 때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석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심에서였다.
3.
택시에서 내려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후 구조대장을 먼저 찾았다. 장례식장 상황판을 살펴보니, 아직 빈소가 차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 보니 구조대장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구조대장은 오히려 내게 책임을 묻는 말투였다. 자일 파트너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는 뜻일 것이다. 구조대장이 북한산 구조대장이 될 수 있도록 힘써준 사람이 민 대장이라고 들었다. 민 대장이 구조대장에게 등반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산악구조 대원들에게도 시간 날 때마다 등반 교육을 해주었다고 들었다.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지금까지 산에서 의형제처럼 지내왔다고 최 선배가 말해주어 알았다. 나 또한 민 대장의 소개로 구조대장과 최 선배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여러 번 등반도 했다. 그렇게 민 대장, 나, 구조대장, 최 선배는 암벽이라는 인연으로 만남을 이어왔다. 내가 제일 늦게 합류한 셈이다.
최 선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금 그런 말 해서 뭐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앞으로 일을 의논하자. 우선 구조대장은 민 대장님 연고자를 찾아봐 줘. 연락할 가족이 있는지. 그리고 만호 넌, 암벽산악회 회장들에게 부고를 알려. 민 대장님이 사망했다고 하면 올 사람은 올 거야. 나는 장례 절차를 알아볼 테니. 슬픔은 나중에 표하기로 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던 최 선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분위기로 보아 이미 한바탕 곡을 했는지, 눈알이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구조대장이 준 산악회별 이름과 전화번호 리스트를 핸드폰에 입력한 후 한꺼번에 부고 문자를 발송했다.
나와 구조대장과 최 선배가 다시 모인 시각은 저녁 10시가 넘어서였다. 영정도 없는 예비 빈소에서 최 선배가 조촐하게 술상을 마련해 왔다. 최 선배는 앞으로 의논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며, 구조대장과 내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다시피 말했다.
“삼일장으로 하고, 문상객이 얼마나 올지 몰라서 가장 작은 8호실을 빈소로 했다. 음식은 기본만 주문했어. 병원 측에서 문상객 인원수에 따라 추가할 수 있다니까 내일 상황 봐 가며 조정하자고. 장례비는 내가 부담할게. 대장님 보내는데,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못 보내드릴 것 같아. 그러니까 괜히 왈가왈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상주는 우리 셋이서 맡아야 할 것 같다. 다른 의견들 있으면 말해 봐.”
“장례비용은 셋이서 분담하자.” 구조대장이 말했다.
“나도 많이 생각해서 한 것이니 서운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경비 문제는 여기서 매듭을 지었으면 좋겠다. 만호 너도!”
최 선배의 표정이 완고해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참, 만호야! 영정 사진 주문해 놨다. 하늘길 개척 후에 찍은 등반 사진을 사용했다.”
영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보다는 마음 한구석이 그대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에게서 삶을 보는 눈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배웠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서 나는 내 우물 안의 삶을 돌아보았고, 당당히 살아갈 힘을 그에게서 받았다. 그것은 내 삶에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최 선배가 구조대장에게 사고 경위를 물었다.
“구조대 말에 의하면 선인봉 하늘길에서 프로솔로 등반 중 추락했다고 하더라고…….”
“대장님이 개척한 하늘길 말이야? 프리솔로로? 그게 말이 돼?”
“구조대원들 말로는 하늘길 3피치에 떨어졌다고 하더군…….”
하늘길은 암벽 등반 난이도 5.9부터 5.11a까지 슬랩, 레이백, 크랙, 페이스 등 중급 이상의 코스지만 민 대장에겐 릿지화 싣고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그가 암벽 등반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개척한 길이었다.
“왜 하늘길에 가셨을까? 만호 너, 아는 거 없냐?”
“모르겠습니다.”
프리솔로 등반은 말로만 들었지, 나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민 대장이 프리솔로로 등반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민 대장은 프리솔로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무척 혐오했다. 그런 민 대장이 프리솔로로 하늘길에 올랐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으로 보아 추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민 대장 손가락 악력은 작은 모래를 잡고 온몸을 지탱할 정도로 대단했지!”
최 선배의 말을 구조대장이 받았다. 죽은 사람 앞에 두고 괜한 추측을 경계하기 위해 최 선배가 일부러 화제들 돌리는 것 같았다.
“대장님은 암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어. 완등할 때까지 몇 달이고 연습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지. 암벽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난이도를 추구했지만, 대장님은 난이도를 추구하지 않았어. 그냥 암벽을 운동이라고 하면서 즐겼지.”
구조대장은 새삼 최 선배에게 물었다.
“암벽 등반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최고의 등반가 허길수, 전수완도 대장님한테 암벽 기술을 배웠잖아! 대장님은 어디서 암벽 등반을 배운 거야?”
“그 얘기를 하려면 얘기가 좀 길어. 내가 불광동에서 문방구를 하던 때였어. 문방구를 팔려고 내놓았더니, 사겠다고 온 사람이 민 대장이었어. 민 대장한테 문방구를 팔고 나서 아쉬움이 남아 몇 번 가 보았는데, 갈 때마다 문방구 문이 닫혀 있는 거야. 문을 닫아 두는 이유를 물었더니, 등반하지 않으면 온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다고 하더라고.”
최 선배는 목이 타는지 상기된 얼굴로 소주 한 잔을 입속에 던지듯 털어 넣었다. 그리곤 마저 말했다.
“그러다가 민 대장님이 인수봉 빌라길에서 크게 다쳐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지. 그 후유증으로 약을 드시기 시작했어. 재활한다고 아예 도봉산 선인봉과 북한산 인수봉으로 거처를 옮긴 거지.”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최 선배와 민 대장은 30여 년 전 매도자와 매수자로 만났던 것을 추억했다. 구조대장은 민 대장에게 암벽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고, 민 대장이 세상일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최 선배와 구조대장과의 만남도 민 대장이 다리가 되어 주었다. 구조대장과 내가 기억하는 민 대장은 결은 비슷했지만 모두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민 대장은 암벽 등반을 스포츠처럼 생각했지만, 구조대장과 최 선배는 민 대장의 암벽 등반은 신앙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4.
“암벽 등반은 몸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도록 하는 겁니다. 바위 위에서는 생각이 많으면 안 됩니다. 무아지경이어야 해요.”
암벽 등반을 하면서 민 대장한테 자주 들었던 말이다. 등반을 가르치는 사람 대부분은 강압적이면서 권위적이었다.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사망하기 때문이었다. 암벽 등반을 하면서 민 대장은 후등자에게 발자리가 그곳이니 그곳을 밟아라, 손자리는 어디이니 어느 홀드를 잡아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오르든 못 오르든 후등자가 하는 대로 그냥 바라봤다. 오죽하면 그가 가학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암벽을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후등자가 해결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발을 옮기기 전 어떻게 오를지 먼저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에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발을 잘못 디뎠어도, 잘못된 발을 믿고 과감히 일어나라고 강조했다. 민 대장은 바위에서 당황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당황하면, 당장 무섭고 두려워서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아무것이나 붙잡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추락의 원인이고 사고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등반도 인생과 닮아서 갈팡질팡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퇴직 후 마음속으로 명퇴를 강요한 임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수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민 대장은 그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마음의 화부터 다스리세요. 마음의 화는 내 몸을 공격합니다. 암벽 등반은 철저히 버림의 운동입니다.”
암벽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암벽이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암벽과 한 몸이 되라고 했다. 그것이 암벽을 잘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막상 바위에 올라서면 그런 말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 당장 무섭고 살고 싶은 욕망에 발자리 아닌 곳을 밟고, 홀드가 아닌 곳을 잡는 악수(惡手)를 뒀다. 내 인생도 그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벗어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몇 번 이직과 몇 번의 창업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차고 명퇴시킨 은행에 분노했다. 내 잘못이 아닌 사회가 나를 버렸다고만 생각했다.
“바위와 대결하려 하면 바위는 등반자를 패대기칩니다. 바위를 나와 똑같은 생명체로 바라볼 때, 암벽 등반은 안식처가 되지요. 목적을 가지고 암벽 등반을 하지 마세요.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하세요.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젊었을 때는 그런 말이 개똥철학이라고 생각하고 우습게 들었을 텐데, 명퇴 후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후벼팠다.
얼마 전 민 대장과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났다.
- 내 삶이 약간은 수고스러웠지만,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세상에 절대적인 자유는 없는 것 같아요.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 다친 클라이머는 재활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요. 사고 전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원상태가 됩니다. 그런 분들은 재활이 목표기 때문에 자살은 상상도 하지 않지요. 아무런 걱정 없는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만.
- 아! 그렇군요?
- 의외로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이해되나요?
민 대장은 한참을 아무 말 없다가 다시 말했다.
- 이젠, 암벽 등반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요.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집착이 생기면 바위가 내 칩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살고 싶은 생각이 더 들어요. 자꾸 두려움도 많아지고요. 두려움이 많아진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등반할수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암벽 등반이 잘 되었다. 그런데 암벽 실력이 늘면서 이상하게 추락으로 상처를 입을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장님, 선등을 서면 두렵지 않으세요? 저는 선등하는 사람들은 두려움도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요.
- 선등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겁쟁이들이 많습니다. 암벽에서 떨어질까 봐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겁니다. 선등을 서 본 사람들은 후등을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후등을 하면 다음에 선등을 서지 못합니다. 왠지 아세요?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후등이 안전하다는 것을 선등자가 왜 모르겠습니까? 추락을 감수하면서 선등을 하려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나름의 생존전략입니다.
5.
민 대장의 빈소에는 문상객이 줄을 이었다. 각 산악회 회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8호실이 좁아, 비어 있던 5호실까지 잠시 사용해야 했다. 산악회 회원들이 나누던 이야기 중에서 처음 듣는 것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하늘길의 이름이 천국의 길이라고 했다.
“원래 이름은 천국의 길이었어. 민 대장이 하늘길을 개척했을 때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구름 속에 ‘길’이 생기더라는 거야. 그것을 보고 마치 천국의 길처럼 보였다는 거야. 그래서 표지판에 천국의 길이라고 표기하려고 했는데, 산악인들이 천국의 길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종교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죽음이 연상된다며 하늘길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하늘길이 되었다더군!”
“아, 그 얘기. 나도 들어본 것 같아.”
“하늘길 정상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다‘길’을 보았다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한데, 나는 아직 못 봤어. 산악인들 말로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보여준다고 하더군!”
산악회 회원들은 암벽 등반의 야인으로 살다간 민 대장의 괴짜 같은 행동과 등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고 있었다. 많은 산악인이 추모하기 위해 찾아와 주었고, 함께 아파하고 슬픔을 나눴다.
나는 최 선배의 지시로 병원 측과 장례비용을 정산했다. 부조금은 장례비를 정산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 최 선배가 부담하기로 했던 병원비는 들어온 부조금으로 대신했고, 나머지는 북한산 산악구조대에 후원금으로 보냈다. 산악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민 대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온 여러 산악회 회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는 한 줌 재가 되었다.
민 대장의 죽음은 내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직은 그가 던진 질문에 답을 내지 못했다. 다만 그가 ‘만호 씨 힘을 빼세요. 그게 중요해요’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다.
민 대장이 사망한 지 49일째 되던 날, 최 선배와 구조대장과 함께 추모 등반을 갔다.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구조대장이 선등을 섰고, 최 선배가 둘째, 내가 말 번으로 올라갔다. 하늘길을 오르면서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민 대장과 처음 올랐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