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방 여행 / 김은주

작성자김아인|작성시간26.06.07|조회수24 목록 댓글 4

옷방 여행 / 김은주

 

 

이사를 했다. 내 짐의 거의 대부분은 옷이다. 무슨 영화배우도 아니고 이삿짐을 싸는 분들이 다들 놀란다. 내색들은 안 하지만 나를 무척 사치스럽게 보는 느낌이다. 물론 남들보다 옷이 조금 더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실상 들여다보면 대부분 오래되었거나, 몇 년 동안 꽁꽁 쟁여놓은 것들이 많아 실제 입는 옷들은 얼마 안 된다.

이사 간 집에서도 옷들은 한 사람 몫으로 방을 배정받았다. 행거에 빼곡히 걸어 놓고 나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많은 옷들과 행거가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장마 피해도 아니고 눈사태도 아니고 순식간에 발생한 옷 사태, 순간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에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행거 봉들과 옷들이, 서로 얽혀있어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도 쉽지가 않았다. 마루에 계신 엄마께 살려 달라고 소리쳐 겨우 걷어내고 나올 수 있었다.

며칠 후 단단한 각오로 옷 방에 들어섰다. 오늘은 기필코 최하 10년 이상 된 것들을 무조건 처단하리라! 그러나 그런 호언장담은 원단이 아까워서, 비싼 옷이라서, 왠지 더 입을 것 같아서… 이런저런 미련이 줄 줄 줄… 달리면서 서서히 뒤끝을 흐리게 되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결국 바닥에 버려진 것들은 몇 벌 되지가 않았다. 또다시 허탕 친 것이다.

옷 앞에서 이렇게 심오한(?) 번민에 빠져있는 나를 바라보자 오래 묵은 옷들을 쌓아두다 버티지 못한 행거가 무너진 것처럼 내 맘속에 버리지 않고 담아놓은 미련과 기억, 슬픔과 아쉬움 속에 내가 파묻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지나온 것들이, 쌓아둔 옷들이 지겨워졌다. 무슨 미련이 이렇게 많아서, 뭘 그리 기억할 것이 많아서 이것들을 다 끌고 다닐까.

행거를 비우고 싶어졌다. 즉시 실행에 옮겼다. 하나씩 하나씩 행거로부터 미련들이 떨어져 나갔다.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행거를 비우고 나면 내 마음도 비워질 것 같은 느낌에 신이 나서 쑥쑥 집어내었다. 그러나 행거는 좀처럼 한가해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한 놈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별거하던 날 아빠를 졸라 35만 원을 받아서 산 코트였다. 상처의 증표 같은 코트에 집착해서였을까 입지도 않으면서 15년을 끼고 있었던 옷, 주저하지 않고 바로 옷걸이를 낚아챘다.

그 순간 어이없는 옷 사태가 또 발생되었다. 다 비우면 가볍기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던 행거가 또 무너지다니… 황당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문제는 균형이었다. 일직선으로 설치했어야 할 행거를 삐뚤빼뚤 설치되었지만 나름 균형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 옷들을 건사해 주었고, 행거는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을 맞추고 있었던 코트를 빼버리자 행거는 균형을 잃은 것이다.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중심이었다.

힘겨운 아픔들, 고통, 기억만 없어지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지만 결국 그런 것들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인가… 뒤통수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데 나는 어이없이 옷 속에 파묻혀 삶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좀 고상하게 득도하면 좋을 텐데…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지금도 옷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이젠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따뜻하다.

졸업식 날 입었던 아쉬움의 옷, 첫사랑 남자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입었던 설레임의 옷, 사랑하는 동생을 마지막 떠나보내던 날 입었던 슬픔의 옷, 그러나 힘들었던 아픔도, 지나간 추억도, 행복했던 순간도 다 함께 가야만 한다는 걸 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옷 방에 앉아 여행을 떠나본다. 러브스토리의 주제곡이 울려 퍼지기도 하고, 학창 시절 입었던 옷을 입고 현진영의 토기춤도 춰본다. 잔잔한 마음으로 방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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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하늘바라기 | 작성시간 26.06.07 버려야 비워지는 것을 깨달아 지는 날이 오것죠...저도 참 옛것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동감이 가는..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7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비슷하게 살지 않나 싶습니다.
  • 작성자김보라 | 작성시간 26.06.07 입지 못하는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만 남는군요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입지 않으면서도 버리기가 아까워서 옷장에 방치하는 옷이 정말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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