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서두 / 김 주 련

작성자김아인|작성시간26.06.22|조회수20 목록 댓글 4

수필의 서두 / 김 주 련

 

 

수필의 서두는 떡잎이다.

이른 봄 땅을 비집고 솟아 나오는 떡잎을 보면 벌써 그 풀의 뿌리가 어떤 것이며, 다음에 피어날 그 풀의 잎새와 꽃의 향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서두 한 두 줄을 읽으면 이미 그 수필의 품격(品格)과 향취며 빛깔을 안개속의 풍경처럼 아련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서두는 갈림길이다.

나그네의 발길이 갈림길에 닿으면 조금은 흔들리는 망설임이 있다. 길은 저마다 이르는 종착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필의 서두도 그렇다. 같은 주제에 같은 소재로 수필을 쓰는데도, 그 서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수필은 전혀 판이한 맛을 지니게 된다.

 

그 풍기는 여운이며 짜임새의 때깔이며, 전편에 흐르는 결이 달라진다. 참 묘한 일이다. 수필에 감도는 분위기도, 그 수필이 불러일으키는 감동도, 서두에서 은밀히 연유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편의 수필이 한 점의 자기(瓷器)라면, 반죽된 흙을 물레위에 얹어놓고 모양을 빗는 첫 손질이 수필의 서두라고 할 것이다.

 

수필의 서두는 느낀 바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옮겨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그 바탕에는 지창(紙窓)에 서리는 은은한 달그림자나, 묵화의 여백(餘白)에서 조용히 번져오는 여운(餘韻) 같은 것이 깔려 있으면 더욱 좋겠다.

 

수필의 서두를 비단에 수(繡)를 놓듯이 꾸미고 가꾸면 그 수필은 천박하여 볼품이 없으며, 보고 느낀 것을 두서없이 되 뇌이면, 격조(格調)가 떨어져 여향(餘香)을 남기지 못한다.

 

서두에 옛이야기며 남의 말을 늘어놓으면, 글 쓰는 이의 모습을 더듬을 길이 없어서 그 수필은 빛바랜 그림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수필의 서두에 장황한 설명이나 서론을 깔아두면, 그것은 하나의 논설문은 될지 몰라도 이미 수필은 아니다.

 

수필은 자신의 언어(言語)로 자신의 모습을 아련히 비추는 자기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 까. 가랑잎이 강물위에 떠가듯이 삶의 강기슭을 흘러가다보면, 사람은 저마다 나름대로 희비(喜悲)의 여울목을 지나오기도 하고, 부침(浮沈)의 강변을 스쳐 가기도 한다. 이 덧없는 여로(旅路)에서 무심히 흘리고 지나온 자그마한 사연(事緣)이나 감동이 잠 안 오는 밤, 문득 가슴이 설레도록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주옥같은 느낌을 담담하게 글로 옮겨서 종이위에 담아든 것이 수필이라면, 그 서두가 어찌 부질없는 헛소리나 남의 말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인가.

 

수필의 서두는 아픔의 흔적이다.

나는 수필을 쓸 때 그 서두에서 출산의 진통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진통의 시원은, 명 수필(名隨筆)을 써야겠다는 허황된 욕망에서부터 오기 시작한다. 이 욕망의 불길이 일기 시작하면, 어느덧 마음의 영토에는 큰 이변이 일어난다. 정서의 강물은 말라버리고, 유현(幽玄)한 계곡이며 청아(淸雅)한 하늘이며 수목처럼 무성하던 언어들은 간곳없이 사라진다.

 

나는 불모의 황무지를 방황하다 가까스로 구원의 유역(流域)에 이른다. 욕심은 사심이요, 사심 속에는 진실이 없으며, 진실이 없는 곳에 글이 있을 수 없다. 마침내 어리석은 욕심을 몰아내고나면 마음은 다시 평온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이번에는 꾀가 발동한다. 어떻게 하면 서두를 멋있게 꾸며 볼 것인가. 이런 궁리 저런 생각으로 수필의 서두를 손으로 조립(組立)해 본다. 허나 안타깝게도 조립된 서두 뒤에는 공감이 가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설사 글이 나온다 하더라도, 거기엔 진실이 없기 때문에 수필이 지니는 소박한 정(情)을 느낄 수 없으며, 맥(脈)이 통하지 않아 은은하게 흐르는 사색(思索)의 무늬를 찾아볼 수가 없다.

 

훌쩍 털고 일어나 뜨락에 내려선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정원수 곁을 서성거려본다. 자신의 그림자에 감도는 적막함을 보고, 삶은 어쩔 수 없는 혼자임을 느낀다. 고독감은 순수의 감정이라 할까. 어느덧 빈 마음속에는 밤이슬이 내리고 은하수가 흐른다. 다시 원고지 앞에 원점으로 돌아와 앉는다. 좌선(坐禪)의 자세로 쓰고자하는 수필의 제재(題材) 속으로 서서히 잠겨본다.

 

이름 있는 목장(木匠)은 흔한 장롱 한 발을 만드는데도, 재목을 3년 이상이나 재워뒀다가 마지막 한 달은 그 재목을 방안에 들여놓고 잠자리를 같이 한다고 했다. 수필을 쓰는데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 까.

 

관조(觀照)의 세계에서 번져오는 희열이 마침내 나를 자연(自然)으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제 강가를 날아다니는 한 마리 물새이기도 하고, 강변에 던져진 한 개 조약돌이 되기도 한다. 가슴속에선 강물이 출렁이고 문틈사이로 강물소리가 졸졸졸 들려온다. 방안에는 가득히 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저만큼 놓여진 난초(蘭草)잎 언저리엔 강마을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러할 때 나는 드디어 한 편의 수필의 서두를 얻는다.

 

나의 경우, 수필의 서두는 언제나 관조 끝에 얻어진 상(想)의 조각(彫刻)이다. 그리고 그 상의 조각을 얻기까지에는 늘 아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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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하늘바라기 | 작성시간 26.06.22 new 무슨 글이든 고된 작업이죠..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new 세상에 고되지 않고 얻는 것은 없는 듯요.
  • 작성자김보라 | 작성시간 26.06.22 new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 진실한 수필이 아닌가 싶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new 네... 체험과 사유가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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