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힘/이지엽
1. 색종이
초등학교 지날 때는 마음들도 빨주노초
재잘재잘 울긋불긋 꽃술 벙그는 아침처럼
환하게 웃고 싶어집니다 기분이 막 좋아집니다
2. 켄트지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날 튀어나오는
멸공 때려 부수자 빳빳한 성깔의 말
검사를 받고 나서는 딱지 접어 팍팍 치던
3. 백상지
그대를 대하는 말 늘 미안하기만 합니다
맨맛하다 빤하다 덧없다 할 말 없다
도무지 붙임성 없는 콱 지르고 돌아앉은
4. 갱지
아트지가 부르주아면 갱지는 프롤레타리아
쉽게 펴서 휘갈기고 구기고 버립니다
힘없이 나풀거려도 닦는 데는 그만인
5. 화선지
먹물 한껏 빨아들여 깊은 이내 거느리죠
그윽하고 고즈넉한 남도 들녘 낮은 산들
반을 다 비우고서도 우주가 넉넉합니다
—시 전문 계간 《유심》 2026 봄호
이지엽 / 1958년 전남 해남 출생. 1982년 《한국문학》,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씨앗의 힘』, 시조집 『사각형에 대하여』 등을 냈다. 계간 《열린시학》《시조시학》《한국동시조》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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