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의 시간/오서윤

작성자김아인|작성시간26.06.21|조회수41 목록 댓글 4

가죽의 시간/오서윤

  

장롱을 열면 박제된 한 마리 짐승이 있다

내장을 다 훑어내고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짐승

거친 숨소리와 야성을 잃은

그러나 우직한 천성은

가장 부드러운 안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바깥에서 한 번도 안쪽을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지금 장롱의 내장이 되어 맨몸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윤기가 흐르던 겉면의 시간들이 멈춰진 어느 순간

가죽은 살가워지고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가

구석으로 몰리고야 순하게 길들여져 있다

트고 갈라진 살결마다 눅눅한 온기

박제의 냄새가 배어나온다

반듯한 정장과 꽃무늬 원피스

습한 날을 빨아들이는 하마의 기세에 눌려

푹 꺼진 어깨가 가늘게 떨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차가운 날씨에 맞서고 싶은

야성이 꿈틀대는 한 마리 짐승이다

껍질 속 말랑한 안쪽엔

몇 마리의 집승이 으르렁거리며 산다

           ㅡ월간 《모던포엠》2026년 4월호

 

 

 

오서윤 / 1958년 대구 출생.  2013년 《평화신문》,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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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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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당쇠 | 작성시간 26.06.21 언제 읽어도 석박지 맛이 나는 깔끔하면서도
    꽉찬 시를 여기서 또 만납니다.
    친 오누이 못잖은 오작가님 이름을 보고서
    지나칠 수 없어서 몇자 남깁니다.
    고맙습니다 아인마님 ~~^^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1 네~ 감사합니다. 저도 이 시가 너무 매력적으로 읽히더군요.
  • 작성자김보라 | 작성시간 26.06.21 야성의 성품 인 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아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1 멋진 작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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