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박민혁
나로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우리의
오래전 일화 같은 것을 듣다가
그랬나 그랬을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충분히 그랬을 법한 이야기를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네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삶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너는
조금 찡그린 채 조용히 웃고 나는
네 침묵에 화음을 맞추듯
조용히 귀 기울인다
어쩌면 이 세계는
신이 그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쓰는 바람에
플롯이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어울리지 않게 슬픔이 기승이다
돌아 돌아 다시 완연한 봄인데
다 좋은데 슬퍼지지는 말자
오래전 한 슬픔을
어쩌면 내가 지어준 슬픔을
떠나온 네가 말하자
살금살금 다가오던 것들이 잠시 정지했다가
그대로 물러난다
연분홍 꽃잎들이 한칸 한칸
공중을 디디며 내려오는 것을 본다
—계간 《가히》 2025 겨울호
박민혁 / 2017년 《현대시》 등단.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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