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 學拳 回顧錄
1부
陳發科 선생의 출생
진식 태극권은 明代(명대) 洪武(홍무) 17년, 山洪洞(산홍동)에서 河南省(하남성) 溫縣(온현) 常陽村(상양촌)으로 이사한 陳卜(진복)이 시조이며, 이로부터 陳家溝(진가구)라 불렸다. 세상에 태극권법을 전파하게 된 것은 14대 長興公(장흥공)의 제자 楊露禪(양로선)이 북경 五府(오부)에서 태극권을 가르치게 될 때부터이며, 그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다. 진발과 선생의 字(자)는 福生(복생)이며, 진장흥의 증손이고, 陳延熙(진연희)의 세 번째 아들로, 17대 진식 태극권의 유명한 태극권법의 사부이다. 진발과 선생의 부인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자는 照旭(조욱)으로, 字는 曉初(효초)이며, 어릴 때 이름은 小龍(소용)이었다. 둘째 아들은 照奎(조규)로 어릴 때 이름이 太保(태보)였다. 딸의 이름은 豫俠(예협)이며, 史棟華(사동화)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모두 태극권을 전수할 능력이 있다.
진발과 선생이 북경으로 와서 태극권을 전수하게 된 동기
1928년 이전에, 선생의 조카 照丕(조비)는 약재업을 하고 있었는데, 물건을 가지고 북경으로 와서, 前門(전문) 밖의 맷돌공장 天匯(천회) 약방에 살았다. 그때 북경에는 이미 태극권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태극권을 배우는 사람들은 아무도 楊露禪(양로선)의 권법이 河南 陳家溝에서 배운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조비가 진씨의 후예이며, 이 권법을 잘 한다는 것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배웠다. 얼마 후 南京특별시 정부는 이런 명성을 듣고 높은 급료로 그를 초빙하였다.
진발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조비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비록 많았지만, 권법을 끝까지 다 배우지는 못했지. 그리고 남경에서 매주 200원의 높은 급료로 초빙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조비를 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었고, 중도에 그만두기도 아쉬워했지. 조비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보고, 남경으로 가는 것이나 북경에 남는 것이나 둘 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서 해결방법을 제시하며 말했지. ‘나의 권법은 셋째 삼촌에게서 배운 것인데, 내 삼촌의 권법은 나보다 백배나 잘 합니다. 우리 삼촌을 북경으로 모셔 권법을 전수하게 하고, 나는 남경으로 가서 취직하면 쌍방이 모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를 북경으로 정중히 초빙했지”
“나는 1928년에 북경에 왔어. 처음 왔을 때는 학생 劉子誠(유자성), 子元(자원)의 집에 살면서 그들에게 陳式(진식) 1. 2路(로)와 單刀(단도), 雙刀(쌍도)를 가르쳤지. 그들 집은 棗林大院(조림대원)에 있었는데, 月秋(월추), 月華(월화)라는 여자아이도 따라 배웠는데 잘했어”
(나는 예전에 이 두 자매가 함께 공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머리를 양가닥으로 작게 묶고는 자색으로 된 편한 옷을 입었는데, 단련하는 것이 모두 그렇게 부드럽고 가벼우며 날쌜 수가 없었다. 베틀 북이 드나들 듯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앞에서 뛰어오르면, 몸에 착 달라붙은 긴 줄(채찍)은 옆으로 뛰어올랐다. 跌?(질차)는 한번 뛰어오르면 만여 장의 길이가 되고, 장딴지가 땅에 붙기도 하여 실로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1956년에 다시 북경에 가서 자성을 만났는데, 그는 반신불수를 앓고 나서 막 나은 상태였고, 자원은 더 이상 수련을 하고 있지 않았다. 더욱 애석한 일은 두 딸이 모두 선홍열에 전염되어 둘 다 죽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경 무술계에서 비교적 유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진발과 선생에게 배웠다. 이들 중에는 許禹生(허우생)의 명성이 두터웠다. 李劍華(이검화, 동북대학 코치로 팔괘에 있어 최고의 솜씨를 지녔다), 劉慕三(유모삼, 강서 무석 사람으로, 북경 전보국 임보무 주임으로, 오식 태극권을 하였다), 劉睿瞻(유예첨, 의사)과 沈家禎(침가정, 1936년 《陳式太極拳(진식태극권)》을 저술하여 유명해졌다)이 있었다. 그 후 30년 간 수제자는 천 수백여명에 이르며 나는 1930년부터 문하생이 되어 태극권을 배운 사람중의 하나였다. 나는 실제로 문하생 중에서 가장 재목이 못되는 사람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2부
내가 병 때문에 태극권을 배우게 된 과정
- 운이 좋아 훌륭한 사부를 만나다 -
나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고 몸이 많이 쇠약하여 17세에는 병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20세에 결혼한 이후 병의 원인이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옛 습관을 힘써 고치기 위해 매일 새벽, 밖에 나가 2시간씩 산보하였다. 북경의 先農壇(선농단), 天壇(천단), 濟南大明胡(제남대명호), 躍突泉(약돌천)은 모두 내가 자주 가던 곳이었다. 이때부터는 병색이 점차 없어지고 몸이 조금씩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절기나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이 될 때면, 추위와 더위가 갑자기 변해서 몸이 적응하지를 못했다. 1929년 겨울, 갑자기 冬瘟(겨울에 유행하는 급성 전염병)에 감염되어 석 달을 누워 있다가 1930년이 되어서야 병이 나았다. 이웃에 사는 周懷民(주회민, 이름은 仁(인)이며, 무석 사람으로 북경전보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산수화를 잘 그렸다. 지금은 민혁감찰위원이다)이 북쪽에 사는 또 다른 이웃인 劉慕三(유모삼) 선생을 소개해 주어 그에게서 吳式(오식) 태극권을 배웠다. 몇 달 후 北京小實褓(북경소실보)에서 유명한 武生(중국 전통극의 남자무사)인 楊小樓(양소루)가 진가구의 진발과 태극권 사부에게 태극권을 배운 후 몸이 건강해져서 다시 연극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통해 一原(일원) 선생에게 부탁하여 陳사부께 유모삼의 집에 모셔서 태극권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시 유모삼에게 태극권을 배웠던 전보국 직원 30여명이 모두 와서 배웠는데 나도 이때부터 진발과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내가 오식 태극권을 처음 배울 때, 劉사부는 “이 태극권을 배우려면 동작이 완만해야 하고, 훈련할 때는 더욱 천천히 해야 기술이 더 좋다”고 하였다. 즉 실력이 좋아질수록 훈련하는 것도 느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陳사부가 처음 劉가에 와서 인사를 하고 진식 태극권 1로 2로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1시간 이상의 시간을 마련하여 유명한 사부의 권법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1로 2로를 끝낸 시간이 겨우 10여분에 그쳤다. 2로는 훌쩍 뛰어오르기도 하고 매우 재빨랐으며, 震脚(진각)은 그 소리가 지붕의 기와를 진동시키기도 하였다. 陳사부는 공연이 끝난 후 잠시 앉았다가 바로 가셨다. 우리는 의견이 분분해졌다. 어떤 사람은 “투로가 이렇게 빠르니, ‘운동은 실을 뽑는 것처럼 천천히 해야한다(運動如抽絲, 운동여추사)’의 원칙에 따르면 실을 뽑다가 실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진각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는 고양이가 가는 것처럼 한다(邁步如猫行, 매보여묘행)’는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劉사부가 이때 말했다. “동작이 비록 빠르기는 하나 둥글고, 비록 힘을 내기는 하나 느슨하네. 우리는 이왕 그를 모셨으니 그에게 배워야 하네. 권법을 다 배우면, 또 추수를 가르쳐달라고 해야지. 만약 나보다 강하다면 계속해서 2로를 배워야겠네.” 이때서야 ‘배우자’는 결정을 내렸다.
배우기 시작할 때 내가 陳사부에게 가르침을 청한 첫 번째 질문은 “동작이 도대체 빨라야 합니까? 아니면 느려야 합니까?”이다. 사부께서 대답하셨다. “처음 배울 때는 느려야 자세가 정확하지. 익숙해지면 교묘한 기술이 나오는 법이지. 오래지 않아 자연히 빨라지고 안정적이 되지. 맞붙어 싸울 때는 상대에 따라 빠르고 느림이 다르지. 천천히 훈련하는 것은 권법을 배우는 방법이지, 목적이 아니야. 그러나 동작이 느리면 하체가 단련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좋은 점도 있기는 하지.” 이때부터 나는 안심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권법을 배웠던 방법은 참고할 만하다.
내가 권법을 배웠던 방법은, 우선 보고 나중에 훈련하는 것이었다. 같이 배우던 30여명은 전부 북경 전보국 직원이었으며, 나만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배우고 출근하게 하고는 나는 항상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배웠다. 이렇게 며칠을 보니, 본 것이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직접 배울 때는 마음속에서 비교적 분명해지는 느낌이었으며, 동작도 자연히 순조로웠다. 내 사부는 권법을 가르칠 때 나에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배우더라도 그는 항상 한사람씩 가르쳤다. 만약 20명이 배운다면, 모두는 각각 평균 5번 시범을 하니까 100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속에 먼저 각인이 되면 배울 때는 당연히 쉽게 되는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또 순서를 나누어 자세히 보았다. 처음에는 손의 모양을, 다음에는 발의 모양을, 그 다음에는 눈을, 그리고는 전체적인 배합방법과 시간을 보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전체 동작의 시간과 방향을 기억했다. 그러나 전체 훈련량은 많지 않았지만(하루에 두 번씩만 훈련했다), 자세를 혼자 훈련하는 것은 적지 않았다. 이 방법은 : 다 배운 자세를 하나하나씩 사부님께 시범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면, 사부님은 싫다고 하지 않으시고 다 해주셨다. 나의 동작과 사부님의 시범이 조금이라도 비슷하지 않으면, 100여 번을 반복하고 반드시 비슷해진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나는 1930년부터 1944년까지 15년간을 사부님께 권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1956년까지 사부님을 13년 동안 떠나 있었다. 사부님의 권법과 심지어는 시범을 보이시던 표정은 모두 내 머리속에서 영화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산동 TV방송국에 내방한 동지에게 말했다. “나는 몸이 약해서 태극권을 배웠는데, 게을러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게으르지 않아 지금까지도 금방 본 것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1956년 나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陳사부님을 찾아뵙고 추수를 하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내가 1, 2로를 하시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권법은 틀리지 않았고 솜씨도 많이 좋아졌군” 내가 권법을 배웠던 방법을 얘기했으니 이제 사부님의 훈련방법을 말하겠다.
3부
- 기예는 힘든 훈련을 통해 완성된다.
陳사부는 항상 “무술을 배우는 것은 학문을 배우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다. 학문을 배우려면 총명하고 기억력도 좋아야 자유자재로 문장을 운용하고 써낼 수 있다. 무술을 배우려면 정확히 배워야 할뿐만 아니라 훈련도 익숙할 때까지 해야 한다. 끊임없이 훈련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생기게 되고 적에 따라 변할 수 있게 되어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된다.“
陳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형이 청년이었을 때, 전염병이 유행하여 둘 다 죽었어. 나는 우리 아버지가 60이 넘어서야 태어났지. 어려서는 부모의 편애 때문에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여 배 안에 적병이 생겨서 한번 아프면 침대를 뒹굴 만큼이나 아팠지. 무술을 익히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몸도 약하고 게을렀으며, 부모님도 엄격하게 다그치지도 않으셨지. 그래서 14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무술을 하는 데 무슨 실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지. 그때 우리 아버지는 袁世凱(원세개)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을 가르치게 되어서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지. 아버지 일가의 친척형은 나를 데리고 자주 들에 나가 일했지. 밤에는 항상 친척 아저씨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었는데, 아저씨들이 나를 가르키며 말했지. ‘저 집은 자자손손 기예에 정통했었는데, 이 아이는 14살이 되도록 이렇게 아프기만 하니 이 아이 대에서도 기예를 이룰 수 있겠어?’ 그때 나는 비록 어렸지만 이 말을 듣자 정말 부끄러웠지. 그래서 속으로 절대로 내 대에서 권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지. 우리 사촌형이 기예가 훌륭하니까 형을 따라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훈련하니 내 실력이 조금 늘면 형도 느니 어떻게 형을 따라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매일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았지. 3일 후 새벽에 일어나 밭에 가는데 형이 갑자기 밭에서 쓸 공구를 잊고 갖고 오지 않았다며 나에게 빨리 뛰어가 갖고 오라며 말했지. ‘내가 천천히 가면서 기다리고 있을께’ 그래서 나는 뛰어서 집으로 가서 공구를 가지고 형을 따라 잡았다. 일을 다 끝내고 집에 와서 밥을 먹는데 속으로 ‘네가 빨리 뛰면,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너를 기다릴께’란 말이 생각났어. 훈련과 연관시켜 내가 만약 몇 배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형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거야. 이때 몰래 결심하고 형에게는 알리지 않았지. 매일 밥을 먹고 형이 쉴 때 나는 연습을 했고 밤에도 일어나 연습을 했다. 매일 적으면 60번, 많으면 100번을 연습했어. 3년여가 지나 내가 17살이 됐을 때 배 안에 있던 적병이 모두 없어졌으며 몸도 건장해졌지. 나는 먼저 삼촌들에게 가서 추수하는 방법을 묻고 형에게 추수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지. 형이 웃으며 말했지 ‘우리집 형제와 조카들이 모두 나의 권법을 맛봤었는데 너는 어리고 몸이 약하여 차마 널 때리지 못했지. 지금은 네 몸이 건장해져서 막을 수 없게 됐으니 자 내 주먹 맛 좀 봐라!’ 우리는 바로 겨루기 시작했지. 형은 나를 넘어뜨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형이 나 때문에 3번이나 넘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형은 화가 나서 친척들에게 말했지. ‘이 권법에는 비결이 있어요. 우리는 훈련할 수 없었어요. 보세요. 예전에는 걷지도 못했는데 나보다 강해졌잖아요.’ 사실 이 삼 년간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었지. 어디서 어떤 비결이 나왔을까? 다만, 3년간 배웠던 규칙을 살펴보면 열심히 연습한 것뿐이었다.”
陳사부님이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내 권법이 많이 좋아진 것을 보셨지.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기쁜 모습으로 마당에 서서 아들과 조카들을 전부 불러 모으셨지. 그때 아버지는 이미 80이 넘으셨는데, 면으로 된 솜 두루마기와 마고자를 입고서 두 손은 소매 속에 넣고 계셨어.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공격해 보라고 하셨어. 그런데 손을 대자마자 아버지가 약간 몸을 틀기만 해도 우리들은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지.”
陳사부님이 말씀하셨다. “나 같은 사람의 실력은 아버지에게 못 미쳤지. 그렇게 조그만 동작에서도 효과를 낼 수 있으니, 내 기예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알았지.”
그러나 사부님이 북경에 오신 후, 나는 사부님이 허우생, 이검화 등과 같이 권법을 연구하는 걸 본적이 있다. 사부님도 몸을 한번 움직이면 발산이 되어 사부님의 기예 역시 정묘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은 여전히 “훈련”이란 글자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顧留馨(고유형)은 “陳사부가 북경에 오신지 수십 년간 매일 30번씩 훈련하셨지”라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에게 직접 말은 듣지 못했지만, 사부님이 방안에 앉아서 조금 있으면 방안에 깔린 벽돌바닥이 갈라졌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사부님은 하는 일없이 앉아 계실 때에도 항상 손을 교차하여 선회하셨는데, 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이것이 무슨 기예를 훈련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이것이 바로 纏法(전법)기예를 익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4부
- 차근차근 잘 하면 실력이 정밀해진다.
우리 사부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권법을 배우려면 세심하게 해야 되고, 훈련할 수 있게 되면 조금씩 발전해야 한다. 노력, 노력, 노력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어. 나처럼 노력하면 그 성과도 나와 같을 것이야. 만약 노력을 나보다 많이 한다면 성과도 당연히 나보다 나을 것이야. 이 학문은 운에 맡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지.” 또 말씀하셨다. “기예가 뛰어난 명문가의 자손들은 모두 우선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조건은 있지만 계승권은 없지. 이것은 유형적인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지. 물론 자손은 당연한 계승자들이지. 누군가 와서 배운다면 그들 배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게 한스럽지. 그들에게 빨리 가르쳐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지. 권법을 가르치는 것은 훌륭한 안내자가 되는 것에 불과해. 길은 아무래도 자기가 직접 가야하니까. 걸음걸이가 빠르고 느리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어. 다만 방향이 정확한 지는 전부 길 안내자의 몫이지.”
우리 사부님을 권법을 가르치실 때, 스승님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어떻게 권법을 익히는 것에 성공했는지 말씀하셨고, 또 다른 사람의 타고난 능력과 훈련 방법을 말씀하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타고난 능력에는 비록 총명함과 바보의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아. 조금 총명한 사람은 처음 배울 때 받아들이는 게 당연히 조금 빠르지만, 총명함 때문에 일을 쉽게 생각해서 노력을 많이 하려 하지 않지. 바보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지. 첫째, 바보이지만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총명한 척 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은 고칠 약이 없지. 둘째,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여 자비감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 뭐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배워도 잘 배우지 않고, 아예 배우지 않는 사람이지. 셋째,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지가 있는 사람이지. 속으로 ”똑 같은 사람인데, 왜 남들은 잘 배울 수 있고, 나만 못 한단 말인가? 나는 배우기만 한다면, 잘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이런 바보의 학습 방법은 바로 ”남이 한 번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을 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는 것이지. 즉 古書에서도 학문하는 사람의 순서를 博學(박학), 審問(심문), 愼思(심사), 明辯(명변)이라 했지. 그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실“이지.
陳사부는 사람들에게 보수적이지 말라고 했다. “보수적이지 마라. 잘 가르치지도, 잘 배우지도 못했는데 왜 보수적인가?” 그래서 학생들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을 해야 했고, 동작의 작용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또 시범 동작을 수십 차례 하여도 싫어하지 않았다. 당시에 북경에서 태극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끝까지 다 가르친 다음에 推手를 가르쳤는데, 이는 推手에서 힘을 듣고 심지어 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제로 몸을 활동시키는 데는 남음이 있는데, 어떻게 힘을 이해해야만 연구할 수 있는가? 우리 사부님은 1路를 다 가르친 다음에도 반년이상 연습을 해야만 2路를 가르치셨으니 推手는 아직 가르치실 때가 아니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推手는 대항하는데 초보적인 기술이니 태극권을 배울 때 어떤 동작이 쓰다듬고, 죄고, 누르는 것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해. 어떻게 운용하고 어떻게 변하는지는 권법에 들인 노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지. 동료들끼리 推手를 연구하면 각자는 지는 게 두렵다는 생각과 또 이기는 생각을 하게 되지. 지는 것이 두려우면 상대방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티게 되는 것이지. 상대방은 그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면 중심을 잃지 않지. 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힘을 가하지. 비록 싸우지는 않는다 해도 이기는 것이지. 네가 힘을 쓰면 상대도 힘을 쓰게 되니 결과적으로 당연히 쌍방은 버티는 습관을 길러야돼. 태극의 잃지도 않고 버티지도 않는 원칙을 위반하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지” (눈앞에서 太極 推手 경기가 진행되어 거의 쌍방이 모두 서로 버티면 힘이 센 사람이 이긴다. 어찌 태극권의 기교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부님이 가끔 기분이 좋으시면, 권법을 가르치실 때 한 式을 선택하여 그 동작에 어떤 작용이 있는지를 설명해주셨다. 만일 六卦四閉(육괘사폐)를 가르치시게 되면 제3 동작은 左?法이라고 하시면서, 먼저 왼손으로 상대방의 공격해오는 왼팔을 감고, 오른 팔로 상대방의 왼쪽 팔꿈치 관절 옆을 눌러 힘을 가하면, 다음에 이어서 몸을 왼쪽으로 돌려, 왼쪽 다리로 힘을 누르고, 왼쪽 다리는 편하게 하면, 이때 왼손은 오른손이 되게 하고 같은 방향으로 돌려 허리에 붙이고 안쪽으로 감는다.: 오른손이 앞에 나오는 손이면, 어깨를 풀고 팔꿈치를 눌러, 아래로 누르고 밖으로 구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감아서 左?과 합치면, 왼손은 引進法(인진법)이 되고 오른손은 外撥法(외발법)이 되어 상대방은 들어오고 싶게 만들고 또 상대방의 행동을 허사로 만들게 된다. 사부님은 말씀과 함께 시범을 보이신 다음에 학생들에게 내게 한번 해 보라고 하고는 규율에 맞지 않는 곳을 지적해 주시면서 또 시범을 보이셨다. 학생들이 분명하게 ?法을 알고 행할 수 있게 되면 그는 먼저 피동적 입장이 되었다가 바로 주동적으로 힘을 변환하면서, 학생들에게 기회나 힘을 얻을 때 또 背勢로 변화시키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마음대로 변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를 통해서 지도를 받게 됐는데, 하나를 가르치시면 반드시 하나를 알아야 했다.(陳照奎는 왼손을 변환시켜 거꾸로 감쌌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누르지 않았으며, 왼쪽으로 높이 올렸다. 또 두 손은 서로 한팔이나 넓게 떨어져 있었다. 沈家禎은 그의 저서 《陳式太極권》에서 “거꾸로 감싸서 만지는 것(逆纏爲?)”은 陳사부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56년 나는 다시 북경으로 와서 선생님께 나의 권법을 교정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권법은 동작 하나라도 비어서는 안되고 모든 것이 손의 八法에 부합되어야 하지.”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동작을 따라하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연습하는데 4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陳?(진흠) 선생께서 말씀하신 “기예가 정밀해진다”는 말이 정말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애석한 것은 권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한번 배우면 스스로 그만두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히 중학교 이상의 과정은 없는 것과 같다.
5부
정묘한 기예
陳사부님은 “배우는 데에는 끝이 없고, 기예 역시 끝이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濟南(제남)의 나이 드신 권법가인 延崇仁(연숭인, 廣饒(광요) 사람으로, 올해 92세이며, 江燕 靑?(강연 청추)와 소림 纏絲(전사)이다.)도 “전통적인 套路 방법은 모두 좋은 것이지. 그러나 상대를 보고 사용하고, 상대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노사의 심리는 완전히 변증법적인 철학에 부합되는 것으로 謙和(謙和, 겸허하고 온화함)가 근본이 된 것이다.
우리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어느 해에, 紅槍會(홍창회, 중국 중부 및 북부 지방에서 일어난 백련교 계통의 농민 무장 자위조직)가 溫縣(온현)을 포위하자 현 정부에서는 나에게 성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해왔지. 그때 현에는 무사가 한명 있었는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나와서 기예를 겨루려고 했지. 나는 마침 응접실의 八仙?(팔선탁)의 왼쪽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려고, 왼손으로는 수연통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紙煤(지매, 물담배를 필 때 불씨로 사용하는 것)을 들고 있었어. 그가 방 밖에서 들어와서는 오른쪽 주먹을 내면서 소리치면서 ”이것을 당신은 받을수 있겠소?“라고 했지. 나는 일어서서 맞이하려고 반쯤 일어났는데 주먹이 벌써 가슴에 다달아 있었지. 나는 오른 손으로 그 오른 손목을 잡고 앞으로 약간 밀쳤는데, 그는 이미 문밖으로 뛰어올라 있었지. 그는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가 이부자리를 개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지.” 나는 이 말을 듣고 우리 사부가 분명히 이런 실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빠르게 상대방을 날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오른손만으로 적을 맞이했어도 실제로 사용한 것은 金剛搗?(금강도대) 제1동작이며, 원이 축소되면, 纏法이 가속되는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62년 내가 병이 낳고 난 후 한 학생이 오른쪽 주먹으로 공격해왔는데, 막 속도를 내어 이르려 할 때,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른 손바닥을 들어 그것을 맞았다. 막 상대방의 왼팔 바깥쪽에 접촉했을 때, 그는 바로 멀리 날아갔는데, 이것도 이 방법이다)
劉慕三선생은 1路를 막 다 배우자, 단독으로 陳사부에게 推手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우리는 모두 劉사부는 吳式 태극권을 이미 10년을 해왔고 무술에 있어서도 북경무술계에서 찬양을 받고 있었으므로 陳사부와 서로 겨루어도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겨루기 시작하자 劉사부의 步法(보법)이 먼저 흩어지면서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잡힌 것 같았으며, 또한 조심하지 않아 관절의 인대에 타박상을 입어 한 달 넘게 아팠었다. 陳사부는 나중에 말씀하셨다. “내가 부주의했어. 劉사부도 조금은 힘을 버텼지.(아마 좀 긴장한 탓일 것이다.) 내가 감은 것은 약간 빡빡하고 빨라서 실수하게 된 거야” 이때부터 우리는 정말 감히 陳사부에게 推手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 陳사부가 웃으며 말했다. “힘을 풀어서 원을 돌리기만 하면 마음대로 변할 수 있지. 내가 너희들과 주의해서 연습하면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을 거야.” (나는 師弟 馮志强(풍지강)에게서 “사부님과 推手하면, 종종 놀라서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를 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1956년 내가 사부님과 推手를 3개월 넘게 연구했는데, 비록 한번 내면 바로 나가기는 했어도 그런 현상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도 내가 근본적으로 힘이 없어서 반대로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許禹生은 淸대 귀족의 후예이다. 당시에는 주변에 무사들이 매우 많았다. 허우생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였고, 기예 훈련도 괜찮았다. 民國 이후 허우생은 북경체육학교의 교장이 되어서 명망이 높았다. 陳사부와 태극권을 배웠는데, 陳사부는 그와 비슷한 나이였고 또 명성도 있었기 때문에 반은 스승, 반은 친구처럼 기예를 전수해 주었다. 어느 날 허우생은 왼손 拿之法을 깨고, 오른쪽 주먹으로 힘을 써서 맹렬히 때려 왼쪽 팔을 굽게 만들었다. 왼손으로 대적할 수 있게 되자 즉시 오른쪽 주먹으로 상대방의 아래턱을 공격했다. 陳사부는 장난을 치며 시험하였다. 허우생이 부스려고 하자 사부는 오른쪽 손가락에 힘을 가했다. 허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사부의 무술은 나보다 백배나 높으며, 武德(무덕)도 나를 감복시켰지. 처음 대적했을 때, 사부는 나의 명에를 생각해서 친구로 대해주었지. 지금 북경 무림계는 널리 초청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부로 섬기고 있는데 나도 그러고 싶소.” 陳사부 역시 허우생의 무공을 칭찬하였다.
어느 해, 허우생은 북경무술도전시합을 주최하여 陳사부를 심판으로 초빙하려 하였다. 陳사부는 사양하며, “陳式 무술만 할 줄 알지 다른 무술은 모르니 심판으로는 부족하며, 당신의 명성에 해를 입히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허우생은 그래서 사부를 대회의 고문으로 초빙하여 일이 생기면 그와 상담하였다. 그때 대회 시간은 모두들 15분으로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사부는 “15분은 너무 길어서 체력을 다해야 승부를 낼 수 있을 거요. 하물며 하루에 경기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인데, 한시간에 겨우 4팀 8명밖에 경기할 수 없으니, 며칠이 지나야 경기를 끝낼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 사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사부는 “삼분이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李劍華는 “삼분으로 충분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부는 “이것은 모두의 뜻과 맞는 것이요. 만약 내 뜻에 따라 한다면, 말로만 하나, 둘, 셋을 말하거나 심지어 하나까지만 말해도 승부는 결정이 나지. 이것이 바로 무예라오”라고 말했다. 이검화는 노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과연 두 손으로 힘을 주어 사부의 오른 팔을 누르니(이때 사부는 오른팔을 가슴앞에 놓고 있었다.) 사부는 약간 몸을 돌려 바로 오른 팔꿈치를 내며 체중이 200근이 나가는 이검화를 수 척이나 내보내고, 방안에 걸린 허우생의 사진이 땅에 떨어져 모두는 크게 웃었다. 이검화도 웃으며 “믿겠어요, 믿겠어요! 그러나 내 혼을 빼놓지는 마세요”라고 말했다. 사부도 웃으며 “뭐가 겁나는가?”라고 물었다. 李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시려구요?”라고 말했다. 사부는 “어디 아픈가”라고 물었다. 검화는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사부님의 오른쪽 팔꿈치에 막 옷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날아갔어. 李가 땅에 떨어졌을 때, 등은 벽에 끌렸었는데, 예복 마고자에 석회가 묻어 털어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알고 보니 힘이 세고 또 빨라서 석회가 천의 무늬속으로 들어가 솔로 털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는 찬복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기묘한 기술에 탄복하였다.
사부님이 말씀하였다. “힘과 기교는 당연히 함께 결합되어야 좋지, 그러나 힘은 기초이고 기교는 권법이야. 당연히 누군가 갑자기 힘을 이용해 나를 습격할 때는 힘으로 힘을 대항하여 중심을 동요시키지 않아야 하고 권법을 변화시켜 응대해야하지. 그러나 무예가 깊을 때는 힘으로 힘을 대하지 않아도 되지. 힘이 들어오면 한번 대하고는 바로 바꿔 상대의 힘이 앞으로 들어오면 약하게 하거나 반대 방향으로 뒤에서 높이 올렸다가 넘어뜨려야지. 나는 검화의 힘에 대항한 것은 끌어들인 후 나중에 발산한 것이지. 마치 강철이 기계를 만들 때 필수적인 주요 원료인 것처럼 말야. 강철로 엔진, 부품을 만들고 또 규격에 맞춘 후에 설치해야 조종할 수 있지. 권법을 배우는 것은 권법의 각각의 동작을 모르면, 기계, 바퀴가 중요하지만 정밀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나는 예전에 이런 것을 본적이 있다. 검화가 내 체중이 200근이나 되니 상대방은 나를 어쩔 수 없을 거야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부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너를 들 수 없다고?” 하면서 한손을 李의 목부분에 놓고 다른 손은 李의 다리를 잡아 그를 들어 올렸다. 팔에서 나온 것은 바로 힘과 기교가 합쳐진 것이다. 200근이 나가는 사람을 들어올리다니 정말 힘이 남보다 뛰어난지 판단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와서는 자신은 民國大學(사립)에서 長사부를 그 학교에 초빙하여 권법 전수를 부탁하려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陳사부는 이 학교는 몇 달간 少林권법의 사부를 초빙했는데, 원래는 짐을 지고 거리를 다니며 기름에 튀긴 돼지고기 완자를 팔던 상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陳사부는 “내가 가려면 조건이 있는데요, 내가 간다고 해서 그 선생님을 사직시켜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학교에 가서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陳사부는 이 학교의 초청을 받아 큰 접견실로 가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淸대 모 王府의 대전이었던 곳으로 건물이 매우 높고 컸으며, 바닥에는 2평방미터의 네모난 벽돌이 깔려져 있었다. 陳사부와 책임자가 만났는데, 앞의 말을 거듭 말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권법을 보여주었다. 雙擺蓮(쌍파련)을 하고 跌?를 보여주고, 震脚동작을 할 때 뜻밖에도 한번 진동하더니 결국은 2,3촌 두께나 되는 벽돌이 깨져서 그 조각이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의 얼굴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 사람은 통증을 느낀 것은 물론 벽돌이 마치 수류탄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무술 시연이 끝난 후 이 학교에서는 무술 교사를 두 명을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震사부는 자신은 가르쳤던 경험이 없다며 취업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부는 나에게 “조심하지 않아서 남의 벽돌을 깨버렸군”이라고 하였다. 내가 “震脚은 어떻게 그런 힘이 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사부님은 “이것은 震脚을 할 때 주의에 있던 3, 5백근의 힘이 발에 집중되기 때문인데, 그러나 또 때에 맞게 신속히 결합해야만 비로소 그렇게 되는 거지.”라고 하셨다. 이 일이 있은 지 수년후, 나는 비로소 사부님이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런 인상을 남겨 가르치지 않으려 하셨고 또한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 북경의 西城에는 새로 南北大街(남북대가)가 열렸는데, 도로 너비가 10 미터였다. 어느 날 사부와 다른 동창생과 나 이렇게 셋이서 동쪽 인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광견병에 걸린 개가 먼저 길 동쪽에 있는 여자를 물어 상처를 입히고 또 길 서쪽으로 달려가서 인력거 손잡이에 앉아 있던 인력거꾼을 물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봤을 대 그 개는 또 길 동쪽으로 달려 우리 사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부는 당황하지 않고 위로 오른 손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 발을 날려 개의 아래턱을 찼는데 2,30근의 무게가 나가는 큰 개는 결국 발에 차여 길 위로 날아가더니 소리를 내며, 입에 피를 가득 물고 떨어져 죽었다. 사부가 오른발로 찰 때 왼손을 뒤로 들면서 뒤에 있던 나무에 부딪혀서 손가락에 찰과상을 입어 피를 흘렸다. 이때 까닭 없이 놀란 뒤라 사부는 “흉악한 개는 보통 뛰어 올라 사람의 턱을 물려고 하지. 그러나 물린 사람들은 대부분 다리에 상처가 나지. 이것은 바로 사람이 뒤로 물러서면서 개가 허공에서 떨어져 다리를 물었기 때문이야. 나는 개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오른손을 올렸는데, 개는 당연히 눈을 위를 향해 보면서 턱을 노출하게 되지. 그래서 나는 턱을 바로 찰 수 있었던 거지.” 방법을 비록 이와 같았지만 그러나 한발로 2,30근이 나가는 개를 3丈보다 멀리 차다니, 힘이 빠르고 세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陳사부는 溫縣에서 성 수비에 협조했었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때 성을 공격해온 紅槍會 회원을 죽이고 토비 2병을 사로잡아 손을 묶고 생포해왔다. 1956년 이 온현에서 북경에 온 어떤 사람은 이 일을 알고 있었는데도 陳사부가 계속 이 말을 하여 정말 귀찮을 정도였다. 사실 사회를 위해서 흉악한 개를 제거하는 것은 功德(공덕)이며 정부도 이를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64년 9월 顧留馨(고유형) 동지는 濟南에서 거행된 무술공연대회에 참가했는데 나와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상해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淸泉池 목욕탕에서 그가 陳사부에게 推手를 배울 때의 일을 말했다. 陳사부의 두 손이 걸렸을 때, 시험삼아 힘을 주어 눌렀는데 사부의 조그만 팔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하더니, 한 순간에 맞아서 멀리 나가떨어졌는데 아주 신기했다고 하였다.
나는 권법을 배운지 50여 년이 되어 무림의 많은 명수들과 교제를 맺었지만 우리 사부의 이와 같은 정묘한 실력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부는 예전에 북경에서 선물용 은제 방패를 받았는데, 그것에 “太極一人(태극 1인자)”라 씌여져 있었다. 이런 표현은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부
고상한 품격
陳사부는 성격이 성실하고 진지하며 어머니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노모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중풍이어서 몸은 뚱뚱한데도 몸이 약해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부는 밤낮으로 병상에서 시중을 들면서 삼 년간 편안히 자지도 못했다. 눈이 붉어진 이후 병이 되어서 계속 낫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연회가 있으면, 사부는 술을 겨우 한 잔만 마셨다. 스스로 예전에는 배갈 5근을 마셔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느 날 작은삼촌이랑 함께 술을 마셨는데 술을 한 항아리나 마셔서 사부는 3일이 되어서야 깨었고 작은삼촌은 취해서 죽은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어머니가 술을 끊으라고 하자 친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셔도 조그만 잔으로 한 잔만 마시며 어머니 말씀을 수십 년간 따랐다.
陳사부는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는 도리는 충실이 우선이고, 처세하는 방법은 謙和가 우선이다. 충실하지 않으면 신용이 없고, 겸허하지 않으면 진보하지 않으며, 온화하지 않으면 친구가 없다. 그러나 謙和는 충실하지만 진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사부는 그때까지 태극 내가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물은 겉과 안의 구별이 있지. 가령 태극 내가의 권법을 3일 배워, 겉은 비슷하지는 않은데도 내가라고 자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부는 한가할 때면 다른 사람을 평했는데 항상 장점을 치켜세우며 단점을 비평하지는 않았다. 만약 우리가 공원에서 태극권을 훈련하는 사람을 보고 나서 돌아와 사부에게 물으면 사부의 대답은 대략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잘한다”이고 둘째는 “실력있다”이다. 우리가 훈련하는 사람의 모습이 영 아니라고 보았다면 사부의 대답은 “보고 이해하지 못했구나”였다. 얼마 후 사부의 평가를 생각해보니 소위 잘한다는 것은 套路와 실력 모두 좋다든 것을 말하며, 실력있다라는 것은 套路는 별로이지만 훈련을 이미 1년 이상 했다는 것이다. 套路와 실력 어느 하나도 없는 사람은 “보고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평을 하고 절대로 그 사람이 잘못 배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사부는 어디서나 남들의 명예나 이익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 예를 들어 북경 《小實報(소실보)》에서 100세의 노인인 王矯守(왕교수)는 楊露禪(양로선)에게서 직접 권법을 전수받은 제자로 화평문 안의 呂祖廟(여조묘)에서 권법을 전수하고 있다고 선전하자 일시에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이때 같이 권법을 배우던 李鶴年(이학년)은 나이도 젊고 참견하기를 좋아하여 楊露禪(양로선) 제자의 실력이 어떤지 가서 보았다. 소문에 의하면 王은 이 묘에서 방 세칸을 빌려 자신은 침대에 앉아 陳씨의 신위에 있는 모습을 모방하고, 그 조카가 대신하여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이학년은 돌아와 웃으며 모두에게 “관속에 들어있는 사람 같습디다.(북경 사람들은 늙고 힘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웃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감히 그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부가 “그를 왜 찾아갔지?”라고 물었다. 실은 삼년 전, 사부와 나는 허우생의 집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명함을 건넸는데 그 명함에는 붓으로 “王矯守”라는 세 글자가 씌여져 있었으며, 무술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를 바로 맞아들여 찾아온 이유를 물으니 王은 스스로 楊가에서 태극권을 배웠다고 소개하며, 지금은 늙어서 직업이 없어 입에 풀칠하기도 힘이 들기 때문에, 허교장에게 체육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태극권을 보여달라고 했고, 그는 반 정도 하자 숨이 차 버렸다. 그래서 허가 “무술은 본래 잘 하시는군요. 그러나 학교에는 일정한 편제규칙이 있어서 아무리 교장이라 해도 마음대로 인원을 충원할 수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볼 수밖에 없군요.”라고 하며 당장의 생활을 위해 그에게 10元을 주었다. 나와 陳사부도 각각 5元씩을 주었다. 그때 그는 나이가 60이 넘었다고 했다. 3년 후 갑자기 100세가 되었으니 이는 100세가 되지 않으면 楊露禪의 제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집의 탁자 위에는 “先師露禪公之位(선사로선공지위)”라고 씌여진 황색 종이가 있어서 이 스승에게서 권법을 배웠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구 사회에서는 허위로 일을 꾸미는 일이 심심치않게 발생했는데 신 사회에서도 80여세의 무술가를 100세라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폭로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로써 우리 나라의 충실하고 온후한 풍조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수년 전에 나는 王矯守의 권법교본 어록을 베껴 쓰는 사람을 본적이 있다. “샅(두 다리사이)을 내려앉는 힘을 크게 하려면 모양을 내야한다.” 이것은 陳?(진흠)선생이 말하는 尾骨長强穴(미궁장강혈)이 뒤로 약간 뒤집히는 형식과 꼭 맞는 것인데, 이는 王矯守가 정말 楊가로부터 전해지지 않는 비밀을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부는 나에게 예전에 許가에서 王矯守를 만났던 일을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서, 생계를 도모하는 길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지극히 어질고 후덕한 성품에 속한다 하겠다.
沈三선생은 당시 ??(솔교)의 제1 명수였다. 어느 날 陳사부와 무술대회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두 노인은 서로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沈이 “나는 태극권은 부드러움이 주를 이룬다고 들었습니다. 무술대회에서는 제비뽑기로 상대를 뽑으니, 태극권을 연습한 사람이 ??를 하는 상대를 뽑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陳사부는 “나는 당연히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대응한 경험이 없습니다. 두 군대가 서로 싸우는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에게 무슨 권법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沈이 웃으며, “우리 연구해 보는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陳사부는 “저는 비록 ??를 모르지만 ??의 기예를 보는 걸 좋아합니다. ??에서는 종종 손으로 상대의 소매를 붙잡았다가 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팔을 앞으로 뻗어서 沈에게 잡으라고 하였다. 이때 나와 동료들은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 두 분이 묘기를 연구하고 있으니 우리 눈은 복이 있으며 여기서 몇 수를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두 분을 부르니, 두 노인은 손을 잡고 웃으며 가셨다. 이틀 후 우리는 陳사부의 집에 있었는데, 沈이 갑자기 선물을 들고 찾아오니 사부는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누셨다. 沈은 “그날 여러모로 양해를 많이 입었습니다.”라고 하자 사부가 웃으며 “무슨 말씀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옆에서 이 말을 듣다가 언제 두 노인이 또 연구를 하셨나보다 생각하였다. 정말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沈은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것을 보고 “陳사부가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 않으셨소?”라고 물으니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沈은 다리를 치면서 탄식하며 “당신들 사부는 정말 훌륭하시군요. 특히 품덕이 더욱 훌륭하십니다. 당신들은 사부님께 더 열심히 배우셔야 합니다. 전문가는 팔을 한번 뻗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압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을 뻗는다는 것은 바로 쌍방이 접촉하는 손입니다. 내가 당신들 사부의 손을 잡았을 때, 힘을 빌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바로 陳사부의 실력이 어떤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셨다. 잠시 얘기를 나누시다가 沈은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셨다. 沈이 가신 후 한 동료가 “기왕 그렇게 되신 건데, 사부님은 왜 그를 넘어뜨리지 않으셨죠?‘라고 경솔하게 말했다. 사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어두운 얼굴을 하시며 그에게 ”그를 넘어뜨린다고? 왜 그래야지?“라고 물으셨다. 이 동료는 사부님이 화가 나신 것을 보고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사부는 또 성난 목소리로 그에게 ”말해보거라. 말해봐. 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서 사람을 넘어뜨리고 싶니?“라고 물으셨다. 이 동료는 이때서야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부님은 ”그래, 너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근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 있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서는 안돼는 일이지“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부님은 또 차근차근 잘 타이르면서 우리들을 가르치셨다. ”사람이 명성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지, 그리고 당연히 어디서든지 다른 사람의 명예를 보호해 주어야해“ 그때 나는 사부의 너그러움에 깊히 탄복하였다. 그후 또 沈의 품덕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청년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두 노인의 품덕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후에 두 노인은 서로 왕래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일과 李劍華와의 시합, 민국대학에서 震脚으로 벽돌을 깬 일 등은 중국신문의 기자 馮大彪가 《武林》이라는 잡지에 칼럼으로 발표하였다. 1982년 7월, 나는 상해에서 陳小旺과 만났다. 小旺은 “沈의 아들 紹三은 이것에 불만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나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며, 나는 沈의 실사구시적인 능력과 다른 사람의 장점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에 탄복하고 있다. 陳사부는 우리를 훈계하실 때, “이 한번의 시합으로, 沈의 감각 역시 매우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네. 만약 정말로 대적했더라면 승부는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야”라고 하셨다. 정말 두 노인은 서로 탄복했던 것이다. 두 노인의 武德은 우리들이 배워야할 본보기이며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7부
깊고 넓은 사부님의 은혜
나는 1930년부터 劉慕三선생이 지도하던 북경전보국 30여명의 동료들을 따라 陳
사부에게서 태극권을 배웠다. 사부에 대한 보답은 몇 년전 매달 2원의 학비를 낸 것뿐이다. 77사변이후, 劉는 太原(태원)으로 전근을 갔고 다른 사람들도 각각 전근을 가서 이 태극권법 클럽은 모두 흩어졌다. 나는 그때부터 사부님께 보수를 조금도 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내 감정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셔서 어떤 때는 우리집에 2,3개월을 묵기도 하셨고, 매일 새벽이면 내 처의 창문 앞에 오셔서 “靜蘭(정란), 일어나서 태극권 연습하자”며 외치시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북경에 침입해 온 이후 나는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밥을 굶기도 했는데, 자식 6을 데리고 사부의 집에 가서 좁쌀 죽을 배불리 먹기도 하였다. 우리 둘 사이의 정은 부자지간보다 더해서 밥이 있으면 같이 먹는 것은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였다. 陳사부는 항상 나에게 “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서 楊小樓(양소루)가 가장 총명하지. 권법의 이론을 한번 말하면 바로 이해하고, 권법책도 한번 보면 다 알지. 그러나 그의 나이가 좀 많아서 철저하게 배울 수 는 없지. 너와 小龍(照旭의 아명)은 머리와 몸이 모두 바보이니까 계속 깊이 파고들 수 있지.”라고 하셨다. 또 “너는 3년만 잘 연습하면, 남들이 10년 훈련하는 것과 같을 거야”라고도 하였다. 말씀을 친절하게 하시고 나에게 큰 희망을 품게 해주셔서 사부님의 기예를 계승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권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처음 삼년 간은, 몸이 허약하여 震脚이나 發拳 모두 부드러웠으며, 뛰어오르지도 못했다. 사부님은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약한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빨리 익히기를 바라면서도 어려워하는 것을 격려하시며 꾸짖지 않으셨다. 권법을 배운 지 삼 년 후, 내 몸이 조금 건강해진 것을 보시고, 진지하게 放足架式(방족가식)을 가르치셨는데, 각 식의 진도는 다리와 배가 땅에 붙어야 다음으로 넘어가셨다. 또 “一套의 권법을 다 연마하려면, 시종일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샅의 힘을 아래로 낮춰야 하고, 두 다리에 의지해서 허리의 회전에 따라 허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매일 훈련을 많이 하라고 독촉하셨다. 사부가 그렇게 엄격하고 어려운 실전에서 출발하셔서 엄한 사부가 되신 것과 마찬가지로, 손의 八法을 어떻게 온 몸과 결합시키는지에 대해 귀찮아하지도 않으시고 하나 하나 설명해 주셨다. 나는 사부님과 대응하기 위해서 1934년부터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하였다. 처음에는 式 5개도 다 훈련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매일 12번을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이 항상 말씀하시던 “쇠뿔도 단 김에 빼야 성공한다”는 말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이것은 정말 사실이다. 아쉽게도 이렇게 훈련한 것은 1년여 밖에 안되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니 낙담하게 되어 더 이상 이렇게 훈련할 수 없었다. 결국 1944년 생활이 곤란하여 눈물을 훔치며 사부님을 떠나 남쪽으로 와서 濟南에서 살게 되었다. 1956년에 다시 북경으로 가서 사부님께 나의 式子를 바로잡아달라고 부탁드렸다. 13년을 떨어져 있다가 스승과 제자가 다시 만나니, 마치 천애를 떠돌던 자식이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는 것처럼, 喜悲(희비)의 감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나에게 推手를 가르쳐주셨는데, 처음부터 式에 따라 동작을 설명해주시고 시험用法(실험용법)을 설명해주시고 또 그 해법을 가르쳐 주셨다. 내 마음은 확 트여 마치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4개월을 지냈다. 나중에는 집에 부인이 기거할 방도 없고 어린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사부님과 헤어졌다. 뜻하지 않게도 사부님은 결국 1957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사부님의 희망을 이루지 못한 것이 부끄러우며, 영원히 재목이 되지 못한 늙은 학생이 되고 말아 양심의 가책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약주전자처럼 약한 학생에서 이미 팔순을 넘겼으며, 태극권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사람이 이제 이 태극권의 오묘함에 대해 그 기초를 조금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사부님이 주신 것이다. 사부님의 은혜는 영원히 마음에 새기며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전해주신 것을 陳씨 후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국내외의 陳式태극권법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공개하여 사부님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다.
洪均生
198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