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6강 -2(2009.10.05)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입화불소)하며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沈浮(생사해리침부)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儞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라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유유도류)의, 그게 그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 그게 뭐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임제스님은 바로바로 드러내보여요. 오직 그와 같은 당당한 삶의 주체는 오직 여러분들의 目前(목전) 또 現今(현금), 지금, 지금 목전에서 聽法底人(청법저인), 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겁니다. 내가 가끔 말씀드리죠. 지금 말을 듣고 있거나 말을 하고 있거나 하는 이 들을 줄 아는 그 사실, 그 능력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여. 비구도 아니고 비구니도 아니여. 아무런 그런 조건이 필요치가 않아. 그런 조건을 초월해 있어.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을 초월해, 승속을 초월해 있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만히 우리가 사유해보면은 入火不燒(입화불소), 불에 들어가도 그 사실은 타지 않는다는 거. 이게 지금 뭐 비구로서 듣는 것도 아니여. 비구니로서 듣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참 신기한 존재에요. 듣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무슨 조건으로 듣고 있어요? 아무 조건없이 본래로 생긴 그 모습 그대로 활발발한 그 당체야. 그 자리야.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한번 그려봐요. 얼른 삭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은 그런 무엇이 있다고 하면은, 남자에도 해당 안되고 여자에도 해당 안되면서 그러면서 내가 지금 이런 능력을 가졌다, 그럼 그건 불에 들어가도 안 탈거 아니야.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까 그거는. 그런 조건으로 듣는 게 아니니까 지금. 이게요 우리가 흔히 뭐 마음이니 불성이니 자성이니 법성이니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게 어떻게 하더라도 쉽게 우리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사량으로라도 짐작이 되어져야 그게 자기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이제 이해할 수 있는 한도까지 설명을 드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사실은요 절대 이건 그 무엇도 아니야. 어떤 조건도 아니야. 듣는다는 이 사실. 그러면 무슨 조건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니까 그러면 불하고 아무 관계 없는 거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入水不溺(입수불익)이야, 물에 들어가도 젖지를 않는다. 안 그렇겠어요? 물이라고 하는 조건도 아니고 불이라고 하는 조건도 아니니까 이거는.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삼도지옥에 들어가되, 如遊園觀(여유원관)이여, 저기 놀이공원에서 노는 거와 같애. 예를 들어서 잘못 법에 걸려 가지고 형무소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아무 죄 없이 형무소에 들어갔든지 죄가 있어서 들어갔든지 간에. 몸은 수갑에 채워져서 형무소에 철장문 안에 갇혀 있지마는 그 당체는, 그것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거야, 마음대로 돌아다녀.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전혀 그게 철장문 속에 갇혀지는 것도 아니고 수갑에 채워지는 것도 아니여. 수갑으로 채울 수 없는 거요. 철장속에 가둘 수가 없는 존재라, 그것은. 그러니까 삼도지옥에 들어가더라도 마치 놀이동산에 노는 거와 같애.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 아귀축생에 들어가더라도 그 보를 받지를 않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어째서 그와 같으냐. 무엇을 인연해서 이와 같으냐.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싫어할 수 없는 법, 싫어함이 없는 법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선악이 떠난 법이다 떠난 도리다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초월한 존재다. 남녀도 초월해 있고 승속도 초월해 있고 동서도 초월해 있고 일체가 다 초월해있어. 그래서 생사까지도 초월해 있는 그 자리다.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할 거 같으면은 生死海裏浮沈 (생사해리부침)하리니, 생사의 바다 속에서 가라앉았다 떴다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은 그 이름이고 범부라고 하는 것도 그 이름이에요. 범부도 성인도 아니여.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인데 거기에 우리가 이름을 지어놓고 거기서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하는 그런 마음이 생긴 거죠. 그럼 그런 말을 쫓아다니다 보면은 이게 끊임없이 생멸에 놀아나고 있는 거죠.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거지. 生死海裏(생사해리)에 浮沈(부침)하리니, 煩惱(번뇌)는 由心故有(유심고유)니라, 번뇌는 그러한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있다. 마치 우리 마음이 그 어떤 범부니 성인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거기에 우리가 끄달리지 아니하는 것은 그야말로 동요가 없다는 뜻이고 그런데 자꾸 쫓아가고 거기에 부침하는 거죠.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것은 이것은 그야말로 생멸심이라. 예컨대 기차를 타고 막 이렇게 달리면은요 저 건물도 달리고 막 산도 달려요. 요지부동하고 있는 그 가만히 있는 아파트도 달리고 산까지 막 달리는 거요. KTX 타고 막 가봐요. 나는 가만히 있지마는 차가 달리니까 내가 타고 있는 차가 달리니까 가만히 있는 산도 달리는 거야. 휙휙 지나간다고요. 마치 내 마음이 생멸심이니까 좋다 나쁘다 성인이다 범부다 중생이다 뭐 부처다 하는 그런 어떤 차별현상 그것도 사실은 말로 지어놓은 것에 불과한데 말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한 거요 사실은. 그런데 그 말에 우리가 팔려가지고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고 하는 것이야, 이것은 끊임없는 생멸심이라. 그래서 이제 생멸심으로서는 어떤 것을 봐도 전부가 생멸이야. 전부 생멸이야. 내가 달리면서 산천을 보면 산천이 그냥 휙휙 달리듯이 내가 動하지 아니하면 내가 움직이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건 불생멸의 경지를 말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불생불멸 불생불멸 끊임없이 아침 저녁으로 외우지마는 그게 어떻게 되서 불생불멸인가, 세상사 현상은 전부 생멸인데, 일체가 생멸인데. 호흡 호흡하고 호흡부터가 생멸이고 밤낮이 생멸이고 순간순간 생멸이고 찰라찰라 생멸인데 따지고 보면은. 뭐 길게 일생을 살다가 뭐 죽고 살고 하는 거 그거 놔두고도 순간순간 생멸인데 그런데 불교는 끊임없이 불생멸을 이야기한다 말야, 불생멸을. 그 불생멸의 세계가 과연 가능한가. 전체가 생멸인데 어째서 불생멸을 그렇게 많이 말하고. 그게 아마 가능하기에 그렇게 많이 말했겠지. 그게 어째서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멸심으로 모든 것을 보니까 전부 생멸하는 거야. 빨리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가니까 서 있는 것 까지도 달리는 것처럼 보이듯이 우리 한 생각이 말하자면은 생멸을 초월했을 때 일체 생멸이던 것도 이 꽃도 영원한 존재야. 꽃도 영원한 존재라. 가벼운 휴지 한장을 불에 태워도 금방 타고 사라지지마는 그 역시 영원한 존재로 보이는 거죠. 저 구름 가만히 쳐다보면 금방 1분이 안 가서 변해버리잖아요. 잠깐 쳐다보고 있는 3, 4초 사이에 구름의 모양이 변하지. 그래도 그 역시 불생멸인 거야. 우리는 생멸심으로 보니까 그게 생멸하지 불생멸심으로 보면은 그런 허망한 뜬구름도 불생멸인 거야. 그런데 그거 종이 한장 차이인데 그 어떤 경계를 뚫고 들어가지 못해 놓으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생멸의 세계에서 살다 보니까 생멸 밖에 모르는 거야. 그래도 언젠가 우리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외우니까 언젠가 그 불생불멸, 생멸을 초월한, 그래서 생사를 초월한 그 자리, 그 세계, 그 경지가 아마 가슴에 와 닿을 날이 있을 거에요 분명히. 그 한 생각 돌이킨 사람들은 그것을 분명히 체험했고 그 속에서 살았고, 살았고 라는 과거사를 내가 쓰는 것도 생멸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표현하는 거여. 살았다 살고 있다 이런 말도 해당이 안되는 거죠 사실은.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이 말은 그런 진리의 세계, 도의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이 부족하죠. 無心(무심)하면 煩惱何拘(번뇌하구)리오, 무심하면. 번뇌는 전부 마음을 말미암은고로 있는데 만약에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구속하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수고로이 분별에서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자연히 도를 얻는 것이 수유지간에 될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는 분별하고 取相, 상을 취하는데 그것을 분별해서 상을 취하지 않기가 너무 어렵죠. 그거만 안한다면 뭐 현재 이 자리에서 그냥 다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儞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그대들이 傍家(방가), 옆집으로, 자기 자신을 놔두고,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놔두고 波波地學得(파파지학득)이라, 아주 바쁘게 바쁘게 배워서 얻을려고 한다면은 三祇劫中(삼지겁중)에, 삼아승지겁 가운데서도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삼아승지겁이 뭐여? 삼천 아승지겁이 지나면서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허망,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 이런 허망한 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 傍家(방가), 이게 중요한 거죠. 나 말고 나 이외의 다른 옆집, 뭐 경전이 됐든지 그 외 어떤 현상이 됐든지 간에 나 아닌 다른, 내 라고 하는 주체성을 두고 달리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공부할려고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결국 삼아승지겁 동안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생사로 돌아가고 만다.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무사해서, 叢林中(총림중)을 向(향)해 가지고서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 선상 위에, 상각두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는 선상 위에 앉아서 공부하니까 선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세상을 지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총림에 들어가가지고 떠억 앉아서 무심하게 좌선하고 있는 모양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참 바른 소견을 드러내는 입장에 있어서는 아주 뛰어난 가르침이죠. 14-14 主(주)와 客(객)이 만나다 道流(도류)야 如諸方有學人來(여제방유학인래)하야 主客相見了(주객상견요)하고 便有一句子語(변유일구자어)하야 辨前頭善知識(변전두선지식)이라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피학인염출개기권어로)하야 向善知識口角頭攛過(향선지식구각두찬과)하야 看爾識不識(간이식불신)이어든 儞若識得是境(이약식득시경)이면 把得(파득)하야 便抛向坑子裏(변포향갱자리) 하나니라. 學人(학인)이 便即尋常然後(변득심상연후)에 便索善知識語(변색선지식어)하나니 依前奪之(의전탈지)하면 學人云(학인운), 上智哉(상지재)라 是大善知識(시대선지식)이여하리니 即云(즉운) 爾大不識好惡(이대불식호오)로다하고 如善知識(여선지식)이 把出箇境塊子(파출개경과자)하야 向學人面前弄(향학인면전농)하면 前人辨得(전인변득)하야 下下作主(하하작주)하야 不受境惑(불수경혹)이라 善知識(선지식)이 便即現半身(변즉현반신)에 學人便喝(학인변할)한데 善知識(선지식)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우입일체차별어로중파박)하면 學人云(학인운),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老禿奴(노독노)여하야 善知識(선지식)이 歎曰(탄왈), 眞正道流(진정도류) 로다하니라 그 다음에 이제 ‘主(주)와 客(객)이 만나다’ 그랬어요. 이 단락은 보통 학인과 선지식 사이에 만나서 어떤 그 법을 주고 받고 법거량을 해서 거기서 뭐 인가를 받는다든지 참 되지도 않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딱 던진다든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은 거기에서 뭐 맞다, 틀리다, 또 다른 어떤 반응을 보인다든지 하는 거, 그런 어떤 현상들을 여기서 이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뭐 시민 선방 같은데서도 그렇게 이제 법거량을 하는 자리가 요즘 많이 있나봐요. 어떤 사람들은 그거 뭐 한갖 말장난에 불과하다, 참선하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야기를 가만히 어떻게 하더냐 하고 들은대로 본대고 다 이야기해보라 하니까 정말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참 많이 오고 가더라고요. 불교의 기본 상식도 없는 보통 보살들이나 뭐 거사들이 참선 좋다 하니까 그저 뭐 절에 일주일에 한번 내지 한 달에 한번쯤 이렇게 드나들면서 얻은 그런 상식 가지고, 그것도 일견 정도의 상식 가지고 선방에 앉아 가지고, 선방에서 몇 시간 앉아 가지고 아 벌써 법거량을 하는 거야. 법이야기를 하고 선문답을 주고 받는데 그래서 좀 묵은 신도가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정말 우습지도 않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내가 하도 호기심이 나가지고 자세히 한번 이야기해 보라 하니까 거기서 오고 간 이야기들을 이제 다 하더라고요. 道流(도류)야 如諸方有學人來(여제방유학인래)하야, 제방에서 학인들이 있어서 온다 이말이여. 主客(주객)이 相見了(상견요)하고, 주인과 객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하지요. 그럼 便有一句子語(변유일구자어)하야, 곧 거기서 예를 들어서 무착 문희 선사가 오대산 찾아갔을 때 어떤 노인을 처음에 만났지 않습니까. 노인과의 대화가 그대로 선문답이 되고 불교의 깊은 진리를 나타내는 그런 이야기가 돼죠. 우리는 도반들 모처럼 해제하고 만나면 어느 선방에 있었냐, 어느 선방에 있었다. 대중은 몇이냐, 대중은 몇이다. 거긴 보시를 얼마 주더냐, 허허허허… 이야기 순서가 대개 그렇게 돼 있죠. 그런데 어록을 보면은, 그 어느 지방에 예를 들어서 갑이라고 하는 사찰의 선방에서 지냈다, 을이라고 하는 사찰의 선방에서 지낸 사람을 만났다, 그럼 갑이라고 하는 사찰의 불법은 어떠냐? 이렇게 묻는 거요. 그 절의 불법이 어떻더냐? 이걸 묻는 거라. 불법도 가풍 따라서 다 다를 게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면 많이 다르거든, 가풍이 다르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것을 물으면은 거기서 법거량이 오고 가기가 아주 좋은 거지. 해제비 얼마 받았냐 하는 것 보다는 그 절의 불법은 어떻더냐, 불법이 어떻더냐, 甲이라고 하는 사찰의 불법은 어떻더냐. 아주 참 법에 늘 관심이 있는 그런 표현도 되고 거기서 자기의 소견을 피력할 그런 기회도 되고 좋죠. 그래 便有一句子語(변유일구자어)라고 하는 것이 예를 들어서 뭐 남방 불법은 어떻습니까? 북방 불법은 어떻습니까?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자리죠. 그 래서 辨前頭善知識(변전두선지식)이라, 앞에 있는 선지식을 가려낸다 이 말입니다. 말 한마디 딱 하는 걸 보고 앞에 있는 선지식의 수준을 가려낸다. 그래서 學人(학인)이 拈出箇機權語路(염출개기권어로)하야, 학인이 機權語路(기권어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법이 담겨있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뭣이냐’ 라고 한다든지 ‘개가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한다든지 하는 그런 말을 딱 꺼내서 善知識(선지식)의 口角頭(구각두) 선지식의 입에서 뭔가 한마디 나오도록 해내는 거요. 선지식의 구각두라고 하는 것은 선지식 입에서 한마디 나오도록 선지식의 입을 향해서 攛過(찬과), 던진다 이말입니다. 뭐 입에다 던지겠어요? 하지만 입에서 뭔가 한마디 표현이 있도록 하는 뜻에서 던진다. 그럴 거 같으면 看儞識不識(간이식불식),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看, 간파함을 입게 된다, 그 위에 입을 被 자, 입게 되거든. 그렇죠 뭐 말 한마디, 법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은 해제하고 모처럼 만나면은 말 몇 마디 이렇게 주고 받아 보면은 그 사람의 관심사라든지 도에 대한 어떤 안목이라든지 수준을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대들이 若識得是境(약식득시경)하면은, 그대가 만약에 이 경계, 학인이 시험하는 말을 是境(시경)이라 그래요, 이 경계를 알게 될 거 같으면은 그 말을 잡아가지고, 把得(파득), 그 말을 잡아가지고서 곧 던져버린다. 便抛向坑子裏(변포향갱자리), 변포, 갱자리, 구덩이 속을 향해서 던져버린다, 부정해 버린다 이 말이여. 그럴 거 같으면 學人(학인)이 便即尋常然後(변즉심상연후)에, 곧 심상한 연후에, 그대로 본래대로 없었던 것처럼 한 그런 연후에. 便索善知識語(변색선지식어)하나니, 다시 이제 선지식의 말을 찾나니. 依前奪之(의전탈지)하면, 그러면 또 뭐라고 대답이 오면은 그대로 또 부정해버리는 거야. 奪之(탈지)라고 하는 말은 부정한다, 빼앗아버린다 하니까 부정해 버린다 그런 뜻입니다. 그전과 같이 부정해 버릴 것 같으면은. 學人(학인)이 말하기를, 上智哉(상지재)라, 어 지혜가 훌륭하십니다. 大善知識(대선지식)이다 큰선지식입니다 훌륭한 지혜의 훌륭한 대선지식이십니다 라고 하리니 即云(즉운) 곧 말하기를 爾大不識好惡(이대불식호오)로다, 이건 너무나 그것은 너무나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함이로다. 되지도 않는 선문답을 주고 받는 일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如善知識(여선지식)이, 저 선지식이. 箇境塊子(개경괴자), 말하자면 경계덩어리를 把出(파출), 잡아내서, 경계 덩어리, 이건 이제 한 마디 어떤 말입니다. 잡아내서 學人(학인)을 向(향)해서 앞에다 학인 面前(면전)에다 던져서 희롱(弄)을 할 거 같으면은. 獅子(사자)는 咬人(교인)하고 韓盧(한로)는 逐塊(축괴)라 그런 말이 있죠. 말 한 마디 탁 이렇게 던지면은 그 말의 저의가 있는데 그 저의를 이제 간파하질 못하고 말을 쫓아가는 거죠. 그럼 이제 똥개는 흙더미를 쫓아가고 사자는 사람을 문다. 그 말의 저의를 아는 사람을 사자라 그러고 말하자면 말 끝을 쫓아가는 사람을 똥개라고 한다. 한로축괴라 그런 말을 쓰죠. 경괴자라고 하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경괴라고 하는 건 상대가 내놓은 말의 덩어리, 경계 덩어리, 그건 이미 경계가 되니까. 그래서 그 학인 면전을 향해서 희롱하게 될 거 같으면은 前人辨得(전인변득)하야 앞에 있는 사람이 곧 가려내서 下下作主(하하작주)라, 낱낱이 일일이 그 주제를 지어가지고서 不受境惑(불수경혹)이라 하나도 끄달리지 않고 경계의 미혹을 받지 아니함이라. 善知識(선지식)이 便即現半身(변즉현반신)에, 곧 반신을 나타내.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반신만 조금 보이면 그러면 學人便喝(학인변할)이야, 덥석 문다 이거죠. 변할하되. 善知識(선지식)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우입일체차별어로중파박)하면, 선지식이 또 일체 차별의 어로 가운데, 말에다가 여러 가지 차별된 그런 말을 들어가서 두드리고 건드린다 이 말이여. 두드리고 건드릴 것 같으면은. 學人(학인)이 말하기를,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너무 말이 복잡하고 기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이거지. 아무 것도 모르는군 하고 학인이 그렇게 말하는 거여. 그러면서 老禿奴(노독노)여, 이 늙은 머리 깎은 종이여 라고 해서. 그럼 이제 알지도 못하는 善知識(선지식)은 歎曰(탄왈), 眞正道流(진정도류)로다, 야 이거 참 훌륭한 도류구나 이렇게 또 탄식하는, 이런 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그런 한 무리들이 있다 이거지. 지금 뭐 시민 선방에서 그저 일년 된 참선분들을 앉혀놓고 법거량을 하는 그런 현상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죠. 이런 현상들이 많이 벌어져요 사실 예나 지금이나 많이 벌어집니다. 이건 이제 크게 유의할 부분은 아니고 이런 예들도 있다고 해서 임제스님께서 한번 아마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14-15 野狐精魅(야호정매) 如諸方善知識(여제방선지식)은 不辨邪正(불변사정)하야 學人(학인)이 來問菩提涅槃三身境智(내문보리열반삼신경지)하면 瞎老師(할노사)가 便與他解説(변여타해설)타가 被他學人罵着(피타학인매착)하고 便把棒打他言無禮度(변파봉타타언무례도)하나니 自是爾善知識無眼(자시이선지식무안)이라 不得嗔他(부득진타)로다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即指東劃西(즉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며 好燈籠露柱(호등롱로주)하나니 儞看(이간)하라 眉毛有幾莖(미모유기경)고 這箇具機縁(자개구기연)에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便即心狂(변증심광)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總是野狐精魅魍魎(총시야호정매망양)이니 被他好學人(피타호학인)의 嗌嗌微笑(익익미소)하야 言瞎老禿奴(언할노독노)여 惑亂他天下人(혹난타천하인)이로다 그 다음 野狐精魅(야호정매)라 如諸方善知識(여제방선지식)은 不辨邪正(불변사정)하야, 邪와 正을 가려내지 못해서, 學人(학인)이 來問(래문) 菩提(보리)가 뭡니까? 涅槃(열반)이 뭡니까? 三身(삼신)이 뭡니까? 境智(경지)가 뭡니까? 경지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계를 분별해내는 그런 지혜이기 때문에 그래서 보리, 열반, 삼신, 경지, 이런 것을 만약에 학인이 와서 묻는다면. 瞎老師(할노사)가, 눈 먼 선지식이 便與他解説(변여타해설)타가, 곧 보리는 이런 거야, 보리심은 이런 거야 하고 뭐 사전적인 해석이라든지 경전 해석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이제 해주는 거죠. 그러다가 被他學人罵着(피타학인매착)하고, 되지도 않게 그런 소리 내가 듣자고 하는 거요? 한다든지 뭐 할!을 한번 학인이 하는 것을 당하게 된다든지 그런 것을 입고는 便把棒打他言無禮度(변파봉타타언무예도)라 하나니 곧 이제 몽둥이를 잡고 그 사람을 때리면서 말하기를 無禮度(무예도)라 예의도 없는 놈이라고 노신에 대고 그게 꾸짖는 소리라고 하면서 예의도 없는 놈이라고 그렇게 말하나니 自是爾善知識無眼(자시이선지식무안)이라, 스스로 그대 선지식이 안목이 없음이라. 不得嗔他(부득진타)로다, 사실 학인이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선지식이 안목이 없는 도류다. 그 사람을 향해서 화낼 일이 아니다 말여.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일반 좋고 나쁜 것을 옳고 그른 것을 알지도 못하는, 정법을 알지 못하는 그런 머리깎은 종, 중을 두고 하는 소리죠. 머리 깎은 종이 있어서, 即指東劃西(즉지동획서), 이리 가리키고 저리 가리키고 동을 긋고 서를 가리킨다 서를 긋는다. 이건 이제 호청호우, 맑은 날이 좋다 비오는 날이 좋다, 이건 경전이나 무슨 온갖 교리, 저 구사, 유식 같은데서 아주 복잡하게 펼쳐져 있는 그런 이론들입니다. 그걸 이제 이 임제스님이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어요. 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며 好燈籠露柱(호등용로주), 무슨 주인이 좋다 객이 좋다, 理가 좋다 事가 좋다 등용은 예를 들어서 理 라면은 노주는 事가 되고, 理事가 어떻느니 뭐 그런 거 아주 잡다하게 늘어놓는 거죠. 하나니 儞看(이간), 그대들은 잘 보아라. 眉毛有幾莖(미모유기경)고, 그렇게 해가지고 눈썹이 몇줄기나 남아 있느냐.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된 불법은 아니다. 말 복잡한 그런 교리, 사실은 그게 전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거거든요. 참 불교 교리같이 복잡한 게 없어요. 그거 공부 안 해버리면 아무 일이 없는데, 공부하기로 들어가놓으면 구사가 어떻고 유식이 어떻고 뭐 번뇌도 수천종이 되고 뭐 얼마나 복잡합니까 교리가. 그러다보면 꼭 그게 실제로 있는 것처럼 여겨져버려요. 그리고 그게 무슨 꼭 정설인가 하면 꼭 정설도 아니야. 그러면 그거 쫓아가다보면 언제 그거… 세월 다 가버리지. 여기는 이제 眉毛有幾莖(미모유기경)고, 눈썹이 몇 줄기나 남아 있느냐 이런 말인데 삿된 법을 설하게 되면 눈썹이 빠진다는 그런 속설이 있어요. 나도 삿된 법을 많이 설해서 그런가 눈썹이 많이 빠졌어. (대중 웃음.) 중간에 이제 미?이라고 해서 우직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눈썹이 연했다 이런 소리라네 또. 눈썹이 연결됐다. 그래서 옛날에 내가 여기 이 눈썹이 거의 연결되다시피 했어. 그런데 세월이 가다 보니까 자꾸 중앙이 빠져가지고 텅 비어버려. 처음엔 손가락 하나 딱 댈 정도로 이게 있더라, 그 다음 두 개 대도 모자라 지금은 세 개쯤 되야 차질 정도로 그렇게 중간 눈썹이 없어지대 이상하게. 삿된 법을 많이 설했나, 아니면 미련을 떠나서 그런가. 내 생각에 미련을 좀 덜 떨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거죠. 이거 옛날 유교에 있는 말입니다. 미모유기경, 눈썹이 몇 줄기가 남아 있느냐. 너무 되도 않는 잡다한 교리에 그렇게 헤매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표현을 임제스님이 쓰신 거에요. 這箇具機縁(자개구기연)에, 이런 이들이 這箇(자개)가 機縁(기연)을 갖추매, 어떤 까닭 이유를. 어떤 기연, 이건 말하자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까닭 그런 근거 이런 것을 갖추매. 그런데도 學人(학인)이 不會(불회)하고, 학인이 알지를 못하고 便即心狂(변증심광)하야, 곧 마음이 돌아가지고서 돌아버린다. 이와 같은 류는(如是之流(여시지류)) 總是野狐精魅魍魎(총시야호정매망양)이니,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여우 귀신이며 도깨비다 이 말이여. 다 여우 귀신이고 또 도깨비다. 그러니까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 못된다 이겁니다. 아주 그 저기 지동획서 호청호우 호등용노주.. 그러니까 뭐 불교 이론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타 신앙하는 이들은 미타 신앙 이것만이 최고다 그러고 또 미륵 신앙 하는 사람은 미륵 신앙 이것만이 최고다 그러고. 구사, 유식을 모르고 무슨 불교를 한다고 하냐고 해대고 그쪽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또 그렇게 자기 아집에 젖어 있거든요. 또 남방 불교하고 온 사람은 하~ 이 북방 불교 이거는 선불교, 대승불교 이거는 불교도 아니다 말이여, 그거 중간에 이상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걸 가지고 불교라고 하냐고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그렇게 비난을 하지 않습니까. 남방에 가 가지고, 물론 한국에서 가 가지고 말도 서툰데다가 그 말 배워야지 공부해야지 얼마나 고생고생 했겠습니까. 날씨는 덥지. 한국에 있을 때는 그거 십분의 일도 공부 안 했거든. 십분의 일도 그렇게 노력 안 하다가 공연히 거기 가 가지고 남방 불교, 소승 불교 배우면서 열 배, 백 배 고생하고 공부한 거야 그거. 안 그래요? 일단 영어 알아야지. 영어로서 그 사람들 말 공부하거든요. 우리 말로 직접 태국 말 공부하는 게 없어요. 우리 말로 직접 미얀마 말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영어를 거쳐서 공부하는 거야 또 이게 이중으로. 날씨는 덥지, 음식 안 맞지. 얼마나 힘들여서 공부했어요. 사실 우리 나라에서 공부한 거보다 거의 백 배 더 어렵게 공부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와 놓으니까 거기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있겠어요? 애착이 말도 못하는 거요. 고생해서 공부했으니까 그건 이해해요. 그래 놓으니까 여기 본래 한국불교는 제대로 공부 안 한 상태에서 건너가가지고 거기가서 애쓰고 공부해서 와 놓으니까 그게 전 재산이야 그냥. 자기의 정말 피요 땀이요 자기 살이야 그냥 그대로가. 그래서 그것만이 진짜 불교라고 그냥 입에 거품을 물고 그냥 선전해대잖아요. 그 내용 보면 몇 푼어치 안되는 건데 사실은. 우리 북방 불교에서는 아함부 들쳐보지도 안해 아함부 경전. 그거 너무 차원낮은 경전이라고. 대승 불교 누가 설했든지 간에 누가 설했든지 간에 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그대로 답습을 해 가지고 그것을 좀더 부연 설명, 시대에 맞게 그 사회 사정에 맞게 잘 재구성을 해서 표현한 그런 대승경전에 맛들여 놓으면은 그거 아무 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전부 어떻게 보면은 자기 아집에 그렇게 젖어 있으면은 野狐精魅(야호정매)요 魍魎(망양)이라. 被他好學人(피타호학인)의 嗌嗌微笑(익익미소)하야, 저 학인들의, 좋은, 훌륭한 학인들의, 킬킬거리고 웃는 게 嗌嗌(익익)이라. 그러한 걸 입어서 言瞎老禿奴(언할노독노)여, 이 눈멀고 늙은 머리깎은 종이여. 惑亂他天下人(혹난타천하인)이로다, 천하 사람들을 惑亂(혹난),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는 도다 라고 그렇게 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제 무슨 보리니 열반이니 삼신이니 경지니 거기서부터 출발을 했죠. 그래가지고 지동획서하고 호청호우하고 호등용노주하고 뭐 불교 안에 잡다한 어떤 그 교리의 세계, 그것을 이렇게… 또 거기에 참고로 공부하고 말면 괜찮은데 거기 너무 젖어있고 빠져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표현들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잠깐 쉬었다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