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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깊이는 누린 것보다

작성자Lion King|작성시간26.06.21|조회수1 목록 댓글 0


1. "사람의 깊이는 누린 것보다 감당한 것에서 드러난다." 좋은 말을 페이스북에서 읽었다. 사람의 깊이는 편하게 누린 것보다, 삶의 무게를 어떻게 견디고 감당 했는 가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누린 것으로 화려해질 수는 있지만, 깊어지는 것은 대개 감당한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기쁨은 삶을 빛나게 하지만, 책임과 인내는 사람의 속을 단단하게 만든다.

쉽게 얻은 것은 겉을 채우지만, 어렵게 담당한 것은 마음의 결을 만든다.

그래서 깊은 사람은 많은 것을 누린 사람이 아니라, 무거운 시간을 지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이 말을 페친 강성구는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Depth is shown in what one bears. 영어 depth는 겉으로 보이는 높이나 크기가 아니라, 사람 안에 쌓인 깊이와 성숙을 뜻한다.

shown은 숨겨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다는 뜻이고, bears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무게를 견디고 감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사는 것은 단순히 참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다.
책임과 삶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는 거다. '감당 한다'는 말이 견딘다는 말보다 더 와 닿는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소환된다.

연꽃이 진흙을 필요로 하듯이, 행복은 고통을 필요로 한다.
연꽃에게 진흙은 '십자가'이다. 우리도 살다 보면 각자의 '십자가'를 갖는다.
이 '십자가'의 본질은 무겁다.
정호승 시인은 이 '십자가'를 등에 지지 말고, 가슴으로 품으라고 말한다.

그 말은 상실의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라는 말이다.
"관계가 힘들면 사랑을 선택하라"는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는 각자가 만든 빵을 싸 가지고,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한다.

그 때 그 빵은 고통과 사랑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인생의 긴 여행 길의 두 날개는 고통과 사랑이다.
정호승 시인이 강의 때마다 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바스타제인'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 이다.
구체적으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갈 때 이 동사를 쓴다.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에서 송봉모 신부님은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안고 가는 것은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물론 지고 가든, 안고 가든 짐은 짐이다.

그런 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바스타제인'의 느낌으로 어깨나 등으로 짊어졌던 짐들을 풀어 그것들을 품 안에 안는 자세로 바꾸어 보는 거다.
짐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자꾸만 점점 더 굽어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늙어가기보다는, 그 짐, 화나게 하는 것, 지치게 하는 것들을 눈 맞추고 자장가를 부르며 마음으로 아기를 안 듯 살포시 안아 보는 거다.

어쩌면 그 길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일 것이다.

사람의 진짜 깊이는 편하게 누린 순간보다, 책임과 고난을 감당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주어진 일들은 나 자신을 더 깊게 만드는 몫으로 받아들이고 삽자가를 가슴에 품고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마음과 물질이 아닌 영혼 깊이 모두를 비워내다 못해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 짐이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 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것'은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그리고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두 가지만 주소서'/박노해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 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 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2. 모든 변화는 늘 실망과 반발에서 일어난다.
김용남을 추천하면서, 뉴 이재명계의 욕심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전리품을 얻었다고, 자신이 다 차지하려는 것은 반드시 반작용이 일어난다.

하늘은 쉽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하늘의 맷돌은 그렇다.

장자는 "각득기의(各得基宜, 모든 존재가 각기 고유의 마땅한 길을 가지고 있다)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고 했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일 수 있다. 장자의 기본 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天倪, 자연의 작용)"라 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하늘의 맷돌(天硏)", "하늘의 균형대(天鈞)"이라고도 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는 거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 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각득기의"는 그대로 비출 뿐인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비추는 거울의 주관이나 가치가 상대에게 가해지지 않는 마음일 경우 우리는 대상과의 편견 없는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충고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거다.
상대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고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도록 다만 용기를 주는 거다.

3. 노자는 <<도덕경>> 제73장에서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은 넓어서, 성기 기는 하나 새지 않는다)"를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아 것은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늘이 모르는 죄가 있는 듯하지만, 벌 주기에 적당한 때를 선택할 뿐이다.

사실 무도하고 비극적 상황이라는 것이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억울하다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아야 소용없다.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기왕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이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어떤 새로운 기쁨을 위한 청소로 여기는 편이 오히려 상황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될 수 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
사람의 손길은 피할 수 있어도 신의 손길은 피할 수 없다.
하늘의 섭리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갈지 않는 것이 없다.”

평생 역사를 연구해서 얻은 교훈으로 찰스 비어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꼽았다.
하늘의 맷돌은 멸망시킬 자에게 권력을 줘 날뛰게 한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한다. 하늘은 오만한 사람을 파멸시키려고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에 중독되게 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기적인 생각과 권세욕, 욕망과 교만에 날뛰면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하늘의 맷돌은 더디게 돌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간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도는 것 같아도 반드시 미세한 부분까지 분쇄 시킨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지만,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는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거다.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두움이 깊을 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
우리는 당장 전개되는 현상에 교만해지거나 혹은 의문을 품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늘의 섭리가 있으니 겸손히 그 뜻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개인의 인생이나 기업, 권력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리고 꿀벌은 꿀을 도둑질해서 꽃을 피운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빼내는 것 같아도 그 꽃을 수정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한다.

하지만 꿀을 빼앗아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세상에는 꿀벌과 같은 강도들이 많다. 강탈자, 악인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날강도들이 설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합력해 선을 이루는 하늘의 계획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결국 하늘이 주관하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다.

문제는 이 모두가 인간의 눈에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은 사람이 보기에 난해하다.
그래서 신의 섭리는 없거나 침묵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섭리는 때로 묘하게 작용한다. A라는 죄에 대해 B라는 죄목으로 응징하기도 한다. 작가 이병주의 깨달음이다.
필화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경험한 그는 그것이 섭리였다고 말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한 대목이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다.

꼭 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인간인데 적용할 법조문이 없을 때 섭리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격언 그대로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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