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족 / 박상주
하루를 둘둘 말아 녹여 놓고
네모난 창문 커튼 사이로
둥근 달빛 스며들어
굳어진 마음 비춘다
하루밤 사이
흐르는 물처럼 모든 것 지나가면
새로운 힘 하나
가슴속 깊이 차오르고
새벽 닭 울음소리에도
생기가 넘친다
꽃밭에 모인 마음들은
아름다운 웃음 피워내고
풀벌레 소리
둥근 쟁반 위에 둘러앉아
한잔 술로 풀어내는 시간
높은 곳 낮은 곳
함께 어우러져 흐르고
입가에는 언제나
웃음꽃 피어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둥우리
세상을 견디게 하는 곳
그곳에서
오늘도 힘찬 에너지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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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박상주
터진 보쌈도 아닌데
자꾸만 새어 나가는 일들
정점을 지나간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굳고 단단한 마음으로
붙들어 보려 다짐하지만
어설프게 움켜쥔 세월인가
기침 한 번 하고 나니
화장실 불빛만 환하게 켜져 있다
아름다운 추억일랑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꼭꼭 눌러 담아 둔다
삭은 자루 틈으로
모래알 새어 나가듯
흩어져 버리지 않으려고
타버린 마음은 굳어
수십 년 세월이 지나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잊었다 싶은 순간에도
문득 튀어나와
꺼진 아랫목을 다시 뒤척이게 한다
첫사랑 맺었던 날들은
휘몰아친 세월 저 아래 남아
마지막 가는 날까지
무심코 꺼내어
그 아름답던 한순간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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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날씨 박상주
뺑덕어미 심술 같은 바람에
동네가 하루 종일 어수선하다
향긋한 아카시아꽃 내음은
골목 사이사이 스며드는데
한적한 오후
갑자기 터지는 천둥 한 소리
가슴 움켜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둠이 내려앉자
사이다 같은 빗줄기 쏟아지고
메말랐던 가슴엔
냇물 하나 풀려 흐른다
겹겹이 내려앉은 먼지
한순간 씻겨 나가고
세찬 바람은
막혀 있던 절벽 틈까지
시원하게 열어젖힌다
폰 속에 흐르는 비구름과 밝은 태양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계절의 얼굴을 넘겨본다
천지신명만 알던 천기마저
이제는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고
비 갠 하늘 따라
봄날도 천천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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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지막 여권
아내와 함께 여권을 새로 만들기 위해 사진관을 찾았다.
남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만드는 여권인데,
마음은 들뜨기보다 오히려 귀찮은 생각이 먼저 앞선다.
나이 탓일까.
젊은 시절 처음 여권을 만들던 날은 참으로 설레었다.
외국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꿈을 꾸는 듯했고,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왠지 모르게 자랑스럽고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해외여행은 형님뻘 되시는 분들과 함께한 중국 장가계 여행이었다.
회갑여행인데 인원이 부족하다며 함께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17년 전의 장가계는 지금처럼 관광지가 잘 갖추어지지 않아 불편한 점도 많았다.
11월 중순의 숙소는 밤이 되자 난방마저 꺼버려 얼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장가계의 절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천문산 거대한 바위산 한가운데 뚫린 커다란 구멍,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이 만들어졌을까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비행기가 지나갔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깊은 산골짜기를 막아 만든 보봉호수에서 배를 타고 절경을 바라보던 기억도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영월군청에서 여권을 신청했다.
“10년짜리로 하실까요?
장수가 많은 걸로 하실까요?”
“적당히 얇은 걸로 해 주세요.
이제는 힘이 들어 외국여행도 많이 못 갈 것 같습니다.”
10년 뒤면 나는 여든다섯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 싶어 아내와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말했다.
“크루즈 여행은 괜찮아요.
배 안에서 쉬엄쉬엄 즐기면 되니까 힘들지 않을 거예요.”
그때 함께 여행 가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크루즈 여행은 한 번 가면 또 가게 된다더라.”
“왜 또 가는데?”
“편하고 좋으니까 다들 또 간다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듯했다.
나이가 들수록 걷는 여행은 점점 힘겨워진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 즐거움보다 고행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크루즈 여행은 조금 다를 것 같다.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 가는 여행,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행.
9월 여행 날짜는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마음 한구석이 다시 부풀어 오른다.
잠시 저숲속에서 쉬어 가세요